1196화 개편 (2)
네르가.
펜드렌 호수 위 사문에 돌입한 흑해의 토벌군단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베르덴의 정념으로 탄생한 신앙적 존재이며.
8위계 초위 마법 <대저주: 의식>으로 구축되었기에 마법계 초월자의 특성까지 지닌 마법적 존재.
저해(詛害)의 거인.
저주의 사도.
이 외에도 전쟁에서 모습을 드러낸 후로 ‘흉참한 괴이’, ‘척안의 재액’이라고도 불리고 있는 그는 지금 에스티리아 왕국에 와 있었다.
암흑가 로아프라.
한때 베르덴이 제패했던 에스티리아 왕국의 어두운 일면에 말이다.
달그락…….
네르가가 신기한 듯이 세련된 문양이 가미된 은빛 수저와 포크를 어루만졌다.
베르덴의 기억을 물려받은 터라 대륙 공용어처럼 기본적인 상식은 갖고 있지만,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고개를 돌리자 암흑가의 정경이 펼쳐져 있었다.
빈테르트의 주인이자 암흑가의 왕이 거하는, 지하 호수로 둘러싸인 잿빛 왕성에서는 그 로아프라 특유의 영원한 밤거리가 훤히 보였다.
“대파를 중심으로 우려낸 채소 육수에 민물 가재를 얹은 계란 수프입니다.”
[…….]
특수전에 전문화된 에온의 마법사단 – 침묵의 안위 소속의 마법사가 간단한 설명과 함께 요리를 테이블에 차례대로 올렸다.
그가 다음 요리들을 준비하러 물러가고, 네르가가 녹진한 수프를 응시했다.
베르덴이 말했다.
“섭식으로 영양분을 보충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섭취가 가능하다고 해서 준비해 봤다. 주검의 영광이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느긋하게 즐겨라.”
[알겠, 습니다. 아버지.]
“종류야 많으니 취향껏.”
네르가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수프를 관찰했다. 그러곤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수저로 툭툭 건드리다가 가득 퍼 올렸다.
네르가가 다른 손으로 하관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주욱 그었다.
꾸드드득…….
오직 외눈밖에 없는 얼굴의 아랫부분이 갈라지면서 입이 생겨났다. 치아가 솟아났고, 혀가 형성됐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기겁할 광경.
텁.
네르가가 계란 수프를 음미했다. 몇 분 내내 혀를 굴리고 나서야 목 뒤로 넘겼고, 다음에는 민물 가재와 수프를 같이 입에 넣었다.
베르덴이 물었다.
“맛은 어떻지?”
[마음에. 듭. 니다. 특히 가재의. 살점을 잘근잘근. 씹어먹는 것. 운명을 따르는. 버러지들을. 토막 내어. 해체한다고 생각하니. 즐겁. 습니다.]
“……식감이 있는 걸 좋아하는구나.”
베르덴이 통신 장치를 켰다.
“고기류로 준비해라. 육즙이 풍부하되 살은 무르지 않게, 그리고 많이.”
[명을 받듭니다, 폐하!]
최고급으로 분류되는 여러 부위의 스테이크들이 곧 차려졌다.
[……!!]
네르가는 고기를 한 입 크게 베어 물더니 접시들을 깔끔하게 비웠다. 스테이크 중앙을 찍은 다음 입을 쩍 벌리는 모습.
무시무시하긴 했다.
솔직히 말해서 거인이 소인을 통째로 잡아먹는 것 같달까…… 뭐, 아무튼 예상대로 입에 맞았는지 만족한 기색이었다.
“이번 전쟁으로 수습할 게 많아 아직 어수선하지만 에온은 어떻지? 다들 잘 대해 주나?”
[아버지. 에 대한 충성심이 제법이. 더군요. 운명의 더러운. 느낌이. 전혀 없는. 청정. 지대…… 부상자가. 많아. 아직. 위상. 들과는.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지만. 곁에. 둘. 만한. 자들인. 것 같습니다.]
“저마다 개성이 있으니 심심하지는 않을 거다.”
둘은 늦은 점심을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네르가는 사도──즉 베르덴의 이해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네르가는 베르덴이 살면서 품은 증오에서 비롯된 존재이기에.
‘녀석에게는 금지된 지식들을 공유할 수 있다.’
알파와 베타, 다음에는 네르가.
물론 해당자들을 전부 모아놓고 이야기하는 편이 효율적이긴 하나, 베르덴은 굳이 여러 번 같은 정보를 되풀이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여유롭게, 또 느긋하게.
효율은 중시해야 하나, 전부가 될 수 없다. 관계는 시간과 밀도의 결과, 베르덴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모두’였다.
운명과 영혼.
[영혼이…… 운명의. 재료……?! 아아. 역. 시. 역시! 운명을 추종하. 는. 것들은. 폐기 처분해야! 아니 아예 존재. 자체를……!! 지워 버려야……!!!!]
악마.
[과연…… 아버지. 의. 신자들. 운명에. 저항하다가. 비틀린. 영혼들. 버려진 자들…… 아버지. 그럼. 모든 존재의 영혼을 뒤틀어. 악마종으로 변질시키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와 함께. 악마를 적대하는. 루아스교도. 밀어 버리시죠.]
금기의 개정.
[‘당신’을 믿지. 마소서. 선의마저도 사악한 계략일 겁니다. 버러지들을. 다스. 리는 자는. 결국. 버러지일. 뿐입니다. 운명에서 태어난 악마를. 원치 않은 자식을 버린 어미이기도 합니다.]
초대 마도왕과의 만남.
[올다르크에게도. 신뢰. 를 주지 마소서. 창조물인. 알파와 베타를 버린. 자입니다. 그러니. 본인도. 버림. 받아야 옳습니다.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변방 어디에 고아원. 을. 만들어 ‘당신’도. 올다르크도 같이. 유기해 버리시죠.]
……과연 저주의 사도라고 해야 할까.
네르가의 과격한 발언은 경악과 헛웃음을 자아낼 정도였다. 부정적인 사념체. 베르덴 자신이 악의로 가득했다면 이런 모습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식사가 끝나고 후식을 내왔다.
네르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진한 코코아와 고급 초콜릿 제과를 골랐다.
의외로 아이샤와 입맛이 비슷한 듯했다.
[그런데 아버지. 저. 와. 이렇게. 식사를 함께하신 연유가. 무엇. 입니까? 정보. 전달은. 대전당. 에서. 해도. 되었을. 텐데.]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는 데 별 이유가 필요하진 않지.”
[……가족!]
네르가가 커다란 외눈을 번뜩였다.
베르덴이 말했다.
“현 대전당은 여러모로 북적거리니, 이렇게 단둘이 얘기하려면 외식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내게도 이런 시간이 필요했고.”
외식!
“나도 사도 일가의 장남을 대하는 건 처음이니.”
장남!!
엘로리스는 두 신의 사도를 겸하고 있어 베르덴의 순수한 사도로는 네르가가 으뜸인 셈이다. 단, 사도 일가라는 수식이 붙긴 했다.
알파가 종종 베르덴을 아빠라고 부르기도 했기에, 순서를 따지자면 알파가 먼저였다.
‘나를 그렇게 생각해 주시다니……!!!’
네르가가 조건부 장남이든 뭐든 상관없이 상체를 굽히며 머리를 감쌌다.
기분 좋은 충격이었다.
아버지에게 원치 않은 자식일지도 몰라서 고아원에 버려질지도 모른다고 지레 겁을 먹었던 과거의 자신을 저주하고 싶었다.
“그하룬은 당분간 휴식을 취한다고 하니 네게 맞는 무구는 다음에 문의해 보마. 탄생 기념이라고 하기엔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종전 선언 전까지는 완성할 수 있을 거다. 물론 먼저 그하룬의 기준을 충족시켜야 하는데 너라면 문제없겠지.”
네르가를 위한 무구.
탄생 기념.
‘즉…… 생일 선물!!!!’
네르가는 개념으로 알고 있던 자식의 생일에 대해 상기했다.
그건 업무를 마친 아버지가 퇴근하며 사 온 선물과 닭튀김 같은 걸 가족과 함께 즐기며 자식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물론 현재 사회적으로 생일을 챙기지 않는 가정이 태반 이상이기는 하지만 이상적인 가족 안에는 언제나 생일이 있는 법이었다.
‘아버지를 힘들게 하는 하찮은 운명들을 증오하고 저주해 짓이기고 싶다. 그들의 머리를 참해 아버지께 진상하고 싶다. 나는 아버지의 나약한 부분을 채우는 존재. 아버지를 울리는 모든 요소를 선별해 증오하여 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
네르가의 환희는 증오로 이어졌다. 그렇게 기쁨을 갈무리한 그가 차분하게 자세를 정돈하고는 공손하게 예를 갖추었다.
[실망. 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아버지.]
“널 믿으마.”
베르덴은 쾌락 없는 책임과 같이 결혼도 하지 않고 아버지가 된 게 어떤 기분인지 느끼며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마침 하인들이 도착했군.”
* * *
주검의 영광의 두 번째 하인─────루네시카 안테르노아의 영혼 조각 중 하나가 깃든 소녀 ‘루시’는 낯선 긴장감에 휩싸였다.
뒷골목에서 불한당들에게 매질을 당하고 움직이지 못한 채 아사했을 때도.
죽었다가 루네시카의 영혼 덕분에 부활하고 도시를 떠났을 때도.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도.
고대 제국의 숨겨진 의식장에서 강대한 언데드들을 부활시켰을 때도.
언데드들을 이끌고 크세리온 제국의 언데드 군단과 조우해 처음 전쟁을 벌였을 때도…….
매번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지금은 본질적으로 뭔가 달랐다. 서대륙에서 처음으로 다른 대륙인 동대륙으로 넘어왔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주인님, 여기에 뭔가 있어요.’
로아프라의 잿빛 성채에 입성한 루시는 본능적으로 생소한 영혼의 존재감을 느꼈다.
주검의 영광의 다른 흑마법사들은 그녀처럼 영혼을 감지하지 못했지만 식은땀을 흘리거나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루네시카의 다른 영혼 조각 중 하나가 깃든 시체가 말했다.
“맞아, 여기에 괴물이 있거든.”
“괴물이요?”
“우리의 왕이기도 해.”
루네시카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주검의 왕.”
발소리가 들려왔다.
쿵!
성채 지하의 문이 열렸다. 루네시카의 영혼 조각이 깃든 두 시체가 먼저 무릎을 꿇었고, 다른 이들도 곧장 예를 갖추었다.
“위대한 죽음이시여!”
“새로운 주검의 왕을 뵙나이다!”
그들의 가히 절규에 가까운 찬양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피부가 저릿할 정도였다.
루시도 반사적으로 굴종하면서 조심스럽게 시선을 높였다. 주검의 왕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녀는 이내 잿빛의 사내를 보았다.
‘어?’
루시가 타고난 영혼 감지 능력이 산산조각 났다가 다시 붙었다. 거대한 산맥에 짓눌렸다가 다시 태어난 것만 같았다.
뒤늦게 심신이 전율했다.
루시는 난생처음으로 굶어 죽는 것만큼이나 무서운 사람이 있다는 걸 이제 깨달았다. 영혼의 체급 자체가 차원이 달랐다.
‘벌레…… 우리는 벌레.’
루시의 자아 인식이 극단적으로 추락했다.
평소라면 루네시카가 어서 정신 차리라고 했겠지만 오늘만은 예외였다. 초월자인 그녀조차도 베르덴에게 압도당하고 있었으므로.
‘저 영혼은 뭐야.’
루네시카는 본체에게 스며든 영혼 조각으로 반역을 일으켜 아칸드의 팔을 빼앗긴 했지만, 직후 죽어 버려 결전을 직접 보진 못했다.
옛 왕을 처단하는 과정에서 절대자의 격을 각성한 베르덴을 알지 못했다.
‘전쟁을 통해 연단된…….’
다시 한번 인정할 수밖에 없다.
드라벤이 옳았다.
베르덴이야말로 우리의 왕이다.
“고개를 들라.”
루네시카를 따라 크세리온 제국을 배신한 주검의 영광이 일제히 머리를 들었다. 백골의 비올라라든가, 노사라든가. 과거 베르덴에게 죽었던 이들은 베르덴을 보는 것조차 힘겨워했다.
베르덴이 말했다.
“지성의 존엄을 훼손하지 마라. 자유를 제한하지 마라. 책임을 인식하라.”
“…….”
“너희는 내가 주창하는 3계명 중 그 무엇도 지키지 않았다. 옛 왕을 부활시키기 위해, 그리고 옛 왕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 지난 800년간 너희는 이 대륙의 해악이었다. 스스로 존립할 가치를 버렸다. 지금 역시도.”
옛 왕의 힘으로 부활한 하인들은 침묵했다.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불멸의 세상을 이룬다고 했던 옛 왕의 말은 거짓이었다.
루네시카가 그렇게 말했다.
루네시카를 믿지 않은 흑마법사들은 전부 죽었기에 모두가 그를 사실이라 믿었고, 실제로 옛 왕의 기만은 사실이었다.
“그러다가 현재에 이르러 너희는 루네시카와 함께 진실을 좇아 크세리온 제국에 반기를 들었다. 옛 왕이 먼저 배신했으니. 그 결과 너희로 인해 본래 죽었어야 할 인명을 구할 수 있었지만…… 그것으로 속죄했다고 감히 생각하지는 않을 터.”
“히, 히익.”
“너희는 속죄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속죄할 마음도 없었지. 너희의 반역은 참회가 아니라, 옛 왕이 약속을 어긴 것에서 비롯됐으니.”
베르덴의 건틀릿에 머리가 잡힌 비올라는 숨이 턱 막혔다.
그녀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마력회로를 폐하거나, 죽거나.”
“…….”
“그것이 에온에서 계명 위반자를 처단하는 규칙이다.”
모든 위계를 잃고 마법사에서 범인으로 전락하여 목숨이라도 부지하거나…… 죽음의 심판을 받아 명을 내주거나.
죽음의 양자택일이었다.
루네시카의 영혼 조각이 깃든 시체들이 일어나서 앞으로 걸어 나왔다.
“초월자로서 이상을 잃을 수 없지. 난 초월자로서 죽을게.”
“유언은.”
“영혼이 고통받지 않는 세계…….”
루네시카가 눈을 감았다.
“부디 당신의 이상에 우리의 길 또한 있기를.”
그녀는 전쟁이 끝나면 죽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야 당연했다. 베르덴이 주검의 영광의 창설자 중 하나인 그녀를 살려 둘 리 만무했으니까.
천국이 없는 세계에서 드라벤과 재회할 수 있을지 생각하며 루네시카는 처분을 기다렸다.
그때였다.
“말은 끝까지 듣도록.”
“……뭐?”
“주검의 영광을 도와 아칸드의 부활을 꾀한 인류의 배신자들을 기억할 거다.”
베르덴은 전쟁이 마무리되면 주검의 영광을 계명 위반으로 처벌하려고 했지만, 운명과 영혼의 관계에 대해 인지하고 생각이 바뀌었다.
‘이들의 죽음조차 운명의 먹이가 된다.’
운명의 추종자라면 고민도 하지 않고 없앴겠지만, 주검의 영광은 베르덴의 선택에 따라서 새로운 전력이 될 수 있다.
되레 세간에 숨어 있는 운명의 추종자를 사냥하는 진정한 반역자로 말이다.
“인류의 배신자로 칭하지만 그들의 진정한 정체는 운명의 추종자. 놈들은 인간뿐만이 아니라 수인, 엘프, 드워프 등에서 암약하고 있고, 아칸드는 그중 운명을 숭배하는 제6사도였다.”
“……!!”
“너희를 기만하고 조종해 뜻대로 삶을 유도한 것이 그들이다. 그러니…… 세 번째 선택지를 주마.”
베르덴의 존재감이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운명의 추종자들과 대적하여 속죄하라. 속죄하여 폐물(廢物)이자 인형으로 전락해 버린 너희의 죽음에 가치를 부여해라. 그리고, 생사의 끝에서 새로운 질서를 맞이해라.”
하인들이 왕을 보았다.
“내가 완성할 불멸의 세상을.”
주검의 영광이 추구해 왔던 진정한 불멸의 세상은 영혼이 고통받지 않는 세상. 베르덴의 이상과 완전히 겹쳐 있었다.
모든 영혼은 한낱 재료.
모든 영혼은 이미 버려진 것.
그렇기에 영혼의 해방은 베르덴이 마땅히 관장해야 할 영역이었다.
“선택해라. 어떻게 죽겠는가.”
“폐하의 적들과 함께 영육을 불살라 비로소 가치 있게 죽겠나이다!”
대륙에 피울음 역병을 퍼뜨린 만연의 랑데르크가 머리를 조아렸다.
벨디른 공화국에서 아드리안과 베르덴에게 죽었던 케실루스도, 비올라도, 노사도, 그리고 현재와 과거의 하인들도 세 번째 선택지를 골랐다.
루네시카는 멍하니 그런 베르덴을 바라보다가 이내 부복했다. 옛 왕과 달랐다. 그는 분명히 그녀와 똑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명하십시오, 폐하.”
“주검의 영광은 앞으로 ‘심판관’으로서 에온의 이면(裏面)을 맡는다. 그를 지휘하는 것은 나의 사도──네르가.”
네르가가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빛조차 반사하지 않는 심연의 육신 위 거대한 척안이 그들을 직시했다.
루네시카가 눈을 부릅떴다. 괴물. 저건 흑마법으로 이뤄진 괴이 그 자체다.
“대심판관, 네르가. 네게 전권을 부여한다.”
[예. 아버지.]
네르가가 눈웃음을 지었다.
[운명을. 단죄하겠나이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엄청난 악의였다.
‘주인님, 저 무서워요.’
루시는 어쩌면 뒷골목의 범죄 조직과는 비교조차도 되지 않는 악의 조직에 들어온 걸지도 모른다고 내심 생각했다.
* * *
주검의 영광을 에온의 심판관으로 전직시킨 다음 베르덴은 다음 사도를 찾았다.
희생의 사도 – 카인.
베르덴도 해 보지 못한 부활을 경험한 그의 벽안이 명멸했다.
“이렇게 다시 뵙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선배.”
카인이 기도하듯 예를 갖췄다.
“아니, 이제는 선배보다 주(主)님이라고 부르는 편이 좋을까요.”
신과 사도는 서로 이야기할 게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