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mit Breaking Genius Mage Chapter Raws 1202

1202화 개편 (8)

신과 대악마의 기억이 서로 엇갈렸다.

내면 세계.
히안테.
세계의 틈새.
악마.
하드라스.
신.
가르간트에서 금기를 범한 대가로 전력이 제한된 두 번째 사도─인간계 최초의 왕─광신자 노인─아서 타렌폴드와의 전투.
그로 인한 세계의 틈새의 분단.
오직 악마만이 탄생하고 존재하는, 버려진 자들의 성지의 완성…….

녹시아스가 요약된 기억을 살펴보는 동안 베르덴은 운명전을 보았다.

* * *

베르덴이 만든 <기억 공유>는 당자가 가장 최근에 떠올린 기억부터 상대방에게 전해진다.
그리고, 각자의 기억은 반드시 쌍방에게 동시에 공유된다.

이 마법은 소꿉친구 로벨린에게 보헤미른 마탑의 비공식 실험, 베르덴 자신이 겪은 일들 그리고 복수의 사정에 대해 알려 주기 위한 목적으로 창조한 것이기에 적에게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베르덴은 보고 싶은 기억에 관한 키워드를 선제적으로 제시하고, 적이 무의식적으로 해당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 다음 마법을 시전.
그 대가로 베르덴은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는 가장 쓸데없는 기억을 내놓는다.

극히 비효율적이지만 안전하다.

상대의 기억을 강탈하는 대가로 그 뇌도 곤죽으로 만드는 암월 다히트의 <기억 전이>에 비해 인도적이고 존엄을 지켜 주는 마법이다.
베르덴은 기억을 빼앗는 행위도 지성체의 존엄성을 훼손한다고 규정했다.

파아앗.

베르덴에게서 <기억 공유>가 어떤 마법인지 들은 녹시아스는, 그 자리에서 신에게 가장 도움이 될 법한 기억 일부를 끄집어냈다.
그러고는 다른 금기에 저촉되지 않도록 개괄한 뒤 공유했다.

운명전(運命戰).

녹시아스가 겪었던 태초 이래 최대의 대륙 전쟁이 베르덴의 눈앞에 펼쳐졌다.

───이곳만은 반드시 사수한다! 우리가 무너지면 동쪽이 함락당한다!

───저항하라! 신에게 저항하라!

인간, 엘프, 드워프, 수인으로 이뤄진 수백만 명의 군단이 평원을 질주했다. 처음 보는 지형이긴 하지만, 말하는 걸로 보아 현재로 치면 대충 동대륙 어딘가를 무대로 한 전장인 듯했다.
인간종만이 아니라 악마, 마족, 거인 등의 존재들도 초대규모 진군을 함께했다.

───마침내 태초의 드래곤이 봉인됐다! 더 이상 용들은 연합하지 못하리라!

───양들이여, 다가올 운명에 순응하라!

───약속받은 미래를 위해!

그 반대편에서는 엘프를 제외한 인간종의 대군세가 마주 돌격해 왔다. 엄청난 숫자. 거인과 동일한 범주에 속해 있는 고대종들, 고대의 신들, 고문으로 사육한 아인종들을 전면에 내세운 형세였다.
저항이 아니라 다름 아닌 자의로 운명에 삶을 맡긴 자들의 함성이었다.

두 세력이 충돌하자 굉음이 터졌다.

순식간에 피의 무대가 완성됐다.

강대한 마족들이 이능을 발휘하자 고대종과 함께 수백 명이 즉사하며 지축이 흔들렸고, 신들이 권능을 발하자 수천 명이 소멸했다.

───[우리는 노예가 되지 않으리.]

───[미래를. 받들라. 커다란 노예여.]

거인들이 중상을 입든 치명상을 입든 무시하고는 거리를 좁혔다. 그런 동족의 희생 끝에 거인의 주먹이 뻗어 나가며 굽이쳤다.
멀리 있는 산맥이 폭발하듯 터졌고 그 경로에 있던 고대신이 즉사했다.

거인을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거인에게 잘못 걸리면 누구든 죽는다…… 태초의 드래곤이 했던 말이 절로 떠오르는 광경.

‘잿빛의 용이 봉인된 이후. 하드라스의 기억에서는 보지 못한 전장이다.’

세계의 틈새에 잠시 머물렀을 때 하드라스를 통해 운명전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으나 정보가 다소 충분하지 않았다.
악마 군단장이라고 해도 사도급의 전투에는 거의 나서지 못했으니까. 베르덴은 전쟁을 좌우할 수 있는 존재들의 실제 경지를 원했다.

그 순간 빛이 도래했다.

───어지럽고, 척박한 땅. 부산물의 무덤으로는 제격이군요, 녹시아스.

빛으로 완전히 뒤덮여 있어 역시 본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설령 보이지 않더라도 말투만으로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제1사도…….’

과거의 녹시아스가 말했다.

───[교활하고 간악한 빛, 승기를 잡았다 싶으니 그제야 밖으로 기어 나오는가.]

───저항자에게 승산은 본래 없었습니다. 우리가 대분기 이전부터 이번 전쟁을 준비하는 동안 당신들은 그저 흐름에 몸을 맡겨 왔을 뿐이니까요.

빛이 웃음소리를 내었다.

───이 전쟁이 원치 않게 중단되어 먼 훗날까지 이어져도 승리는 그분의 것입니다. 모든 경우의 수는 제 손에 있습니다.

───[여지를 두는 걸 보니 자신이 없나 보군.]

───올다르크에 대한 예우라고 해 두죠. 아, 물론 악마들은 여전히 어리니 작금의 미흡한 준비에 억울할 법도 하겠지만 어쩌겠습니까.

세상이 밝아졌다.

───그것이 운명이거늘.

───[그 입은 반드시 찢겠다.]

대지가 갈라지며 거인들을 다스리는 거신이 등장해 빛을 내리찍었고, 천상에서 쏟아지는 광채가 거신과 녹시아스를 덮쳤다.

제1사도의 음성이 나부끼자 기억이 흩어졌다.

익숙한 기류가 느껴졌다.

‘금기가 경고하는군.’

하드라스조차도 제1사도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게 없다고 했다. 금기로 둘러싸여 있다시피 해서 정보에 제약이 걸렸다는 게 그 이유.
‘당신’만큼이나 비밀스러운 존재가 빛을 중심으로 집결한 인류──제1사도였다.

잠시 후 다른 전장이 보였다.

───[이 배신자가!!]

───운명 이외에 대안은 없노라……!

군단의 대악마와 어둠의 대악마가 아서 타렌폴드와 부딪쳤다. 대악마의 권능과 최초의 왕의 절기에 주변 모든 생명이 끊어지며 파괴되었다.

지금 세 개의 대륙과는 달리 본래 하나였던 대륙이 깎여 나가기 시작했다.

두 번째 사도의 전력(全力).

베르덴은 놈에게서 경험하지 못한 힘을 기억으로 머릿속에 새겼다. ‘당신’에게 가려면 반드시 넘어야 할 존재이니, 충돌은 정해졌다.

이와 비교하면 제6사도 옛 왕과의 전쟁은 확실히 전초전에 불과했다.

하기야 당연할 것이다.

운명전에 임한 최상위 존재들은 현대보다 더 많고 우월했으니까.
하물며 그 전장에는 ‘당신’과 올다르크가 있었다.

기억이 빠르게 넘어갔다.

고대종들이 국가를 해체하는 기억.
패색이 짙어지자 배신자가 속출하는 기억.
거신이 쓰러지는 기억.
고룡들과 호스트가 격전을 벌이는 기억.
마족들이 참살당하는 기억.
대악마들이 패퇴하는 기억.
세계수가 타오르는 기억.
…….

저항 세력은 점차 쇠락했다.

이윽고 기억은 멀리 침묵의 사막이 보이는 전장에 초점을 맞췄다.
과거의 녹시아스를 따라서 베르덴의 시선도 덩달아 높아졌다. <기억 공유>로 볼 수 있는 기억은 당사자의 주관에 제한된다.

───스스로 자유를 버린 광기의 신격…… 이것이 그대가 숨겨 온 본력이었군.

───=당신은 저를 막을 수 없습니다, 올다르크=

베르덴은 인식할 수 없는 존재와 당시에는 신격을 얻지 않은 초대 마도왕이 서로를 노려보더니 동시에 손을 앞으로 뻗었다.

───결국 그대는 나를 이길 수 없다.

───=오만, 교만, 자만=

창조의 권능.
태초의 원소.

───=그래야 당신이죠=

갑작스럽게 빛이 교차했다고 느낀 순간 베르덴의 시야가 뒤집혔다. 녹시아스가 충격에 휩쓸렸다. 모든 것이 그러했다.
그들만이 아니라 운명의 사도들까지 여파에 몸을 가누지 못했다.

서로의 개념이 부딪친 것만으로도 대륙의 일부가 소멸했다.
사라진 공백을 바닷물이 흘러들어와 채웠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히아레마르 내해가 형성된 기원이었다.

‘이것이…… 완성된 절대자들의 진력.’

이를 마지막으로 베르덴 또한 기억에서 멀어졌다. 그때 초대 마도왕이 ‘당신’의 이름을 부른 것 같았는데 역시 식별할 수 없었다.

‘대체 ‘당신’은 누구일까.’

어째서 이름을 감추고 있는 걸까.
어째서 모습도 드러내지 않은 걸까.

마침내 악마의 기원과 운명의 금기를 파헤쳤어도, 베르덴은 ‘당신’이 고작 여성체라는 것 외에는 외견에 대한 정보가 전무했다.

목적은 모르지만, 대면한 적이 있는 초대 마도왕.

목적은 알지만, 여전히 베일에 싸인 ‘당신’.

‘이 모호함 하나하나가 승리를 위한 포석이겠지.’

분명하게 판단하지 못하게 하여 심력을 낭비시키는 것, 베르덴은 그 수법에 휘둘리지 않고 곧바로 생각을 끊어 버렸다.

마침내 <기억 공유>가 끝났다.

베르덴이 눈을 떴다.

* * *

[…….]

베르덴의 기억을 보고 온 녹시아스는 눈을 반쯤 뜬 채 가만히 있었다.
간혹 손가락만 굽혔다 펴는 게 전부였다.
여러모로 생각을 정리하는 모습.

베르덴은 차분히 기다려 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녹시아스가 <기억 공유> 전에 했던 베르덴의 물음에 대답했다.

[세계의 틈새와…… 대륙은 연결할 수 없습니다.]

부정(否定).

예상한 답이었다.

|결국 ‘당신’의 영역이기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신께서 고유 권능으로 분리했을지언정 그 공간 전체가 ‘당신’의 권역이라는 사실은 불변하기에…….]

어둠이 일렁였다.

[‘당신’을 무력화하거나, 세계의 틈새를 관리하는 두 번째 사도를 처단하지 않는 이상 신께서 바라시는 광경은 꿈꿀 수 없습니다.]

하드라스와의 재회가 미뤄진 셈이지만 녹시아스는 되레 웃었다.
충성스러운 군단장 하드라스의 생존 소식도 반갑기 그지없지만, 세계의 틈새의 분단이 극히 만족스러웠던 까닭이었다.

다섯 번째 세계에서 탈출한 영혼들은 악마가 되어 세계의 틈새에 도착하고, 세계의 틈새를 지나 대륙에 당도한다.

그래서 아서 타렌폴드, 그 배신자의 군대는 세계의 틈새에서 악착같이 올라온 악마를 고문하고 학살하여 다시 아래로 떨어뜨리는데…… 악마들의 성지가 생긴 이상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보았느냐, 올다르크. 그리고 ‘당신’. 우리도 이제 기댈 곳이 생겼다.’

악마들은 이제 세계의 틈새에서 안전하게 모여서 대륙으로 올라갈 길을 도모할 수 있다.
운명이 완성돼 세계가 영원한 순환에 갇히지 않는 한 악마는 끊임없이 생기니, 악마의 세력을 전례 없는 속도로 확장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도 신이 있단 말이다……!!!’

녹시아스는 당장이라도 방방 뛰고 싶은 그 욕구를 간신히 억눌렀다. 대악마니까. 다른 누구도 아니고 신 앞이니 체면을 지켜야 했다.

|외부에서 세계의 틈새로 흘러갔을 경우 바깥으로 나올 수 있나?|

[영혼이 아닌 이상 자력으로는 탈출할 수 없습니다. 다만 악마, 아마 최고위급의 악마와 계약하면 시도는 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최고위급 이상이라면?|

[시도에 그치지 않을 겁니다.]

말인즉슨 하드라스와 계약을 맺으면 일단 한 명은 돌아올 수 있다는 것.

‘내 마력을 가진 블루가 있으니 하드라스가 최대한 도와주려고 할 터.’

칼리아와 유리온.
둘 중 누가 먼저 나오게 될까.

‘유리온이 알아서 잘 판단하겠지.’

베르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성지와 대륙을 잇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세계의 틈새에 갇힌 이들이 빠져나올 방도는 있었으니 충분히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다.

|그나저나 너는 제1사도를 극히 경계하는군. 거의 ‘당신’만큼이나.|

운명전을 보여 준 저의가 무엇인가.

사도들과 절대자들의 위력을 드러내기 위함이기도 하겠으나, 그 기억 속에 비친 제1사도를 향한 적의는 유달리 짙었다.

[제1사도가 아니었다면 운명전이 그렇게 끝나지는 않았을 겁니다. 놈의 교활함과 음흉함은 ‘당신’에 준할 정도죠. ‘당신’이 잠들고 난 뒤 저항 세력의 잔당들을 멸절시킨 것도 놈입니다.]

제1사도는 감히 ‘당신’의 권위와 권한을 대행할 수 있는 존재. 녹시아스가 그토록 죽이고자 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그러니 우리의 신께서는 사도 중 제1사도를 가장 주의하소서. 우리의 신께서 운명을 무너뜨리기 전에도 놈은 방심하지 않았습니다.]

녹시아스가 진심으로 간언했다.

[‘당신’과 제1사도가 과거에서부터 포진한 수들은 저희조차 전부 알지 못합니다.]

함정이 도처에 깔려 있으니 어느 순간 허를 찔릴지 모른다. 모든 걸 의심해야 한다. 세상을 비추는 수많은 빛까지도 말이다.

|……|

베르덴이 갑자기 대화를 멈추고 이자벨라, 알파, 베타를 차례대로 보더니 다시금 녹시아스에게 고개를 향했다.

|제1사도의 정보를 은폐하는 금기는 ‘당신’과 언뜻 비슷해 보이나, 다르군|

녹시아스가 희열을 느끼며 웃었다.

[역시 우리의 신…….]

운명의 금기를 비롯한 ‘당신’의 금기를 파악하려고 했을 때 생각으로 답을 찾는 것마저도 금기 위반으로 취급되었다.
이와 달리 제1사도와 관련된 답을 궁리했으나 어떤 기류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게 답이 아닐지도 모르나, 베르덴의 직감을 믿었다.

‘나 혼자서 머릿속으로만 제1사도에 대해 파헤치면 제재는 없다.’

녹시아스는 제1사도를 보여주고 언급하여 무엇을 에둘러 전달하려는지 이해했다.

다시 말해…….

‘과연 성가시기 짝이 없군.’

베르덴은 제1사도의 능력 중 하나를 깨달았다.

* * *

하드라스의 계약 제안에 유리온은 별다른 고민도 없이 즉답했다.

“칼리아, 네가 계약하면 되겠군.”
“폐, 폐하?”
“나도 당장이라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기는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다. 악마와 계약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니까.”

하이랜디아의 국왕으로 복귀하는 순간 루아스교와 대립해야 한다.
유리온은 삼정의 추기경 중 하나가 추종자라는 걸 알고 있으며, 그 또한 유리온이 이를 인지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대립은 필연이다.

그 피 튀기는 과정에서 유리온이 악마 계약자라는 게 어떤 식으로든 드러나면 끝장이었다.
과장이 아니라 하이랜디아 자체가 아예 멸망할지도 몰랐다.

칼리아가 반박했다.

“그럼 당분간 은둔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냥 쥐새끼처럼 숨어 지내라고? 미안한데 절대 안 돼. 내가 진짜 살면서 이렇게 뒤통수가 아픈 적은 처음이거든.”

유리온이 차갑게 웃었다.

“난 나가자마자 추기경 목부터 딸 거다.”
“…….”
“그러니까 네가 나가. 말리고 싶으면.”

아무래도 그레고르반 추기경의 배신은 유리온의 역린을 건드린 듯했다. 초월자의 광기에 칼리아가 숨을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드라스 님, 혹시 블루와 드레드미어도 나갈 수 있습니까?”

[악마와 계약하려면 계약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할 지성이 있어야 한다…… 이 둘은 충분한 자격을 갖춘 듯하지만…… 계약으로 얻은 악마의 능력을 온전히 쓸 수 있느냐는…… 별개의 이야기지.]

악마의 힘은 이해력이 필수다. 그래서 아인종이나 이형종은 계약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타고난 본능에 충실하니까.
그보다 이해력이 떨어지는 짐승들은 말로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중심이 있다면 다르지…….]

“중심이요?”

[네가 저 둘의 주체가 되어…… 계약의 모든 책임을 맡는 것…… 대부분의 악마는 부담이 돼 존재가 붕괴될 위험이 크지만…… 나는 다르다…….]

하드라스가 늙은 손을 내밀었다.

[계약…… 하겠는가……?]

“…….”

칼리아는 블루와 드레드미어에게 의중을 물었다.

반짝!
히히힝.

녀석들은 언어를 구사할 수 없었지만 동의한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다른 정령과 말은 감히 엄두조차도 못 낼 터였지만, 계약 개념이 뭔지 이해할 정도로 명석한 녀석들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계약하겠습니다.”

[좋다…… 계약서를 작성하지…….]

하드라스는 어둠으로 빚어낸 계약서를 토대로 서로 의견을 조율해 내용을 채웠다.
늙은 악마, 인간 여자, 정령, 말이 머리를 한데 모아 논의하는 과정이 뭐랄까. 비현실적으로 터무니없기도 했고,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악마의 참모습이 이렇다니. 세상은 넓군.’

솔직히 악의로 치면 인간도 악마 못지않다. 이종족 전쟁이 왜 일어났는데. 한데 루아스교는 어째서 그리 악마를 경멸하며 근절하려고 하는 걸까.

유리온은 여러 의문을 품으면서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드러누웠다.

…….
…….
…….

그가 한참이 지나 다시 상체를 일으켰다.

“아니, 대체 언제 끝나?”

그냥 서로 계약을 맺겠다고 하면 깔끔하게 끝나는 거 아니었나? 왜 이렇게 계약이 본격적이야? 뭔 대형 상회주와 서로 사활을 걸고 무역 협정을 맺는 것도 아니고.

[세 명분을 하나의 계약서에 담아야 하나까 오래 걸릴 수밖에. 책임이 필요한 행위에는 그에 걸맞은 세밀한 절차가 필요한 법.]

[꺄르르르.]

옆에서 소악마들과 놀아 주던 불타는 거대 악마가 근엄하게 말했다.

[약관은 면밀해야 한다.]

대체 악마란 뭘까…….

* * *

이제 와서 유념하고 사건을 돌이켜 보면 제1사도로 추측되는 흔적은 있었다.
과거에서 생겨나 현재에 이르러 운명 측에 유리한 상황을 조성시킨 요소를 생각하면 나름대로 답이 하나 나왔다.
심지어 그것은 운명의 수레바퀴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도 했다.

베르덴은 단정했다.

|미래 개시(開示)|

제1사도의 능력 중 하나는 예언의 실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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