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7화 개편 (3)
주님…….
빛의 교인이 여신 루아스를 부르는 존칭 중 하나가 베르덴을 향했지만, 그는 위엄을 보이지 않고 가볍게 어깨만 으쓱거렸다.
“정확히 구분하자면 신으로 승격한 게 아닌 나에게 신격이 더해진 것뿐이다. 본질은 다르지 않아. 그러니 나를 다르게 대하지 마라.”
“그럼 언제나처럼 선배라고 부르겠습니다, 베르덴 선배. 네르가처럼 아버지는 좀 그래서요.”
카인은 기도를 거두고는 검집에 팔을 얹었다. 그는 목에는 [새벽의 별빛]을, 허리에는 마검 [크레티마]와 [새벽의 검]을 차고 있었다.
“쌍검?”
“기왕 제게 신성력이 더해진 김에 전법을 다양하게 확장하려고 합니다. 또, 기적은 [새벽의 검]에, 마도는 [크레티마]에 적합해서 하나만 지니기에는 아쉽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스터처럼 유연하게 말이군.”
“고작 검 한 개냐 두 개냐로 그분에 전혀 비할 수는 없지만, 유동적으로 상황에 임한다는 점에서 비슷하긴 합니다. 물론 동급 이상의 적을 상대로는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회귀하겠지만요.”
베르덴은 사도가 돼 경지의 변화가 일어난 카인을 통찰했다.
숱한 경험을 거듭한 사내.
소사이어티 섬에서 처음 만나고, 베르덴과 대련을 했을 때의 미숙한 젊은 고위 마도사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카인.”
“네, 선배.”
“네가 살아서 다행이다.”
베르덴은 카인이 사도로 부활할 거라고 전혀 알지 못했다.
엘로리스는 필시 고대 사도의 직감으로 그렇게 될 거라고 느끼고 전쟁 이전에 샛별의 신기를 카인에게 준 것이겠지만…….
카인의 비보를 들었을 때의 충격을 기억한다.
아마도 베르덴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일 것이다. 공허를 다시 채우는 방법을 알지 못하므로.
애초에 마음에 생겨난 공백을 메우는 해답 따위는 없을 터였다.
“감사합니다. 솔직히 지금도 죽음이 두렵긴 하나, 좋은 계기였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제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요.”
카인은 다시 같은 상황이 와도 유니아를 위해 몸을 던질 것이었다.
“희생은 자처하는 것. 그렇지 않습니까, 선배.”
“……많이 컸군.”
“원래 나이는 비슷했습니다.”
베르덴은 웃음을 터뜨리며 카인의 머리를 거칠게 쓸었다. 사도는 곧 신의 일부. 카인은 베르덴으로부터 희생의 개념을 부여받았다.
그때 카인이 말했다.
“주검의 영광을 거두었다고 들었습니다. 선배라면 악인들을 계명의 원칙대로 처리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처분을 달리한 이유가 있습니까?”
“계명 위반자는 모든 힘을 상실하거나 죽는 것으로 갈무리된다. 결과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아. 다만 유예되었을 뿐이다.”
“유예……?”
베르덴은 네르가에게 그랬던 것처럼 금기에 대해서 공유했다. 영혼이 재료라는 진실 등에 카인의 안색이 굳었다가 곧 생각을 정리한 끝에 짧게 여러 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즉결 처분하는 대신 운명의 추종자를 상대할 새로운 전력으로 삼은 겁니까. 그리고 훗날엔 미뤄둔 징벌을 받기에 유예…… 그런데 결국에 심판이 예정되어 있다면 주검의 영광이 최선을 다할 동기가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주검의 영광은 불멸의 세상을 완성하려는 특수한 조직이다.”
베르덴이 팔짱을 꼈다.
“특히 하인들은 드라벤과 루네시카의 이상을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지. 물론 하인들 아래의 흑마법사 개개인 중에는 권력, 부, 탐욕 등 사사로운 목적에 더 무게를 두는 자들이 적지 않았겠지만, 이번 전쟁으로 사실상 전부 걸러졌다.”
세계 연합의 승리가 굳혀지기 한참 전…….
주검의 영광은 둘로 분열됐다.
루네시카를 따라 진정한 불멸의 세계를 이룩하려는 하인파와, 하인들을 거부하고 불멸의 세계의 형태가 어떻든 간에 승리와 승리의 열매를 위해서 옛 왕에게 충성을 바친 제국파.
제국파는 옛 왕의 명령에 따라 국제 사회의 내부를 초토화하던 중 전부 숙청당했으니, 남은 것은 기존의 이상을 꿈꾸는 하인파뿐이었다.
“현 주검의 영광은 자신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무력하게 쓰러질지언정 불멸의 세계의 초석이 되길 원하지. 그래서 나는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만약 살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그럼 마법을 포기하면 된다. 기존의 계명대로.”
그저 살고 싶다면 마법적 위계를 버리고 범인으로 살아가면 되고.
힘을 포기할 수 없다면 죽으면 된다.
그리고.
주검의 영광의 일원으로 스스로 가치 있는 죽음을 바란다면 운명에 맞서면 된다.
카인이 눈을 크게 떴다.
“스스로 바라는 죽음…… 자처하는 희생.”
“그 희생으로 계명의 집행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 대신 주검의 영광은 그토록 꿈꿔 왔던 신세계를 목도할 것이다.”
베르덴이 단언했다.
“내가 그리하리라.”
카인은 그 형언할 수 없는 위압감에 소리 없이 숨을 삼켰다.
탁.
베르덴이 카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카인, 너에게는 ‘집행자’의 전권을 부여하마.”
“명칭을 보니…… 기존 계명 집행 부대의 상급 기관 같은 겁니까?”
“그래, 앞으로 집행 기관은 진정으로 에온의 주력 중 하나가 될 거다.”
그가 첨언했다.
“계명에 예외는 없다.”
“……물론입니다, 선배.”
카인이 진중하게 대답했다.
“천명(天命)을 다하겠습니다.”
* * *
네르가에 이어 카인과도 개인 면담을 마쳤다. 다음 순서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현시점에서 그의 사도는 세 명뿐이었으므로.
새벽의 사도 – 엘로리스.
그녀는 푸른 산맥의 신전에서 베르덴과 대면했다. 마그누스 은행의 레드 와인과 최고급 치즈를 곁들여서 말이다.
“역시 미래가 좋긴 하네요. 음식 수준이 옛날과는 차원이 다른 게.”
“차이가 그렇게 심한가?”
“제 입맛이 고급스러움과는 멀기는 합니다. 샛별의 종교가 몰락하고 도망자의 삶을 살다 보니, 벌레마저도 맛있게 먹을 수 있어야 했거든요.”
엘로리스는 어딜 가도 미(美)로 찬양받을 만했지만 그 내면은 억척스럽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강인한 여성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샛별의 잔당을 이끌고 달의 종교를 신앙하는 일국의 수도를 멸망시켰으니……괜히 악마 군단장 하드라스의 생전 아내가 아니었다.
“본의 아니게 고맙다는 말이 늦었군.”
“카인의 부활은 신앙에 따랐을 뿐입니다. 저 또한 당신의 사도니까요.”
“샛별의 사도이기도 하고.”
“다른 신앙자들에게는 마치 양다리를 걸친 것처럼 보이겠지만, 샛별과 잿빛의 신성력은 서로 반발하지 않으니 저는 떳떳합니다.”
엘로리스는 손을 펼쳐 두 개의 신성력이 어우러진 빛을 발현했다. 동일하지 않으나, 교집합을 중심으로 조화를 이룬 광채였다.
그녀가 치즈의 풍미를 와인으로 씻어 내며 신성력을 거두었다.
“이렇게 개인적인 자리를 마련하신 걸 보니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신 듯하군요. 좋습니다. 마침 저도 신께 질문이 있었던 참입니다.”
“먼저 듣겠다.”
“시타델을 물들인 잿빛의 신위(神威)는, 제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신의 권능과 비교해도 순수한 격 자체가 달랐습니다. 만약…… 이 세상에 신 중 신이 있다면 바로 그런 것일 테지요.”
엘로리스는 그때 베르덴이 걷고 있는 신도(神道)를 보았다. 그것이야말로 신의 광기가 형상을 이룬 신의 꿈이리라.
베르덴이 물었다.
“그 격에 대해 궁금한 건가.”
“아니요. 스스로 자유를 버리고 이상을 좇는 신이 무엇인지 더 들어도 의미는 없습니다. 저는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요. 제가 알고 싶은 것은 베르덴 님의 현재 신격입니다.”
엘로리스가 그를 직시했다.
“베르덴 님은 더 이상 미숙한 신이 아닙니다. 당장 신격을 해방한 순간 모든 신앙자의 위치를 알 수 있을 테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
“한데 베르덴 님께선 신격을 자각하게 해 준 최초의 신앙자를 찾으려 하지 않으시는군요. 저는 그 연유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조각가 호세.
아내는 악마 숭배자로 처형당하고, 자식은 병으로 잃은 가장, 누구도 미워하기 싫어 푸른 산맥에서 홀로 자신을 미워하는 사내.
초월자로 각성한 베르덴을 신으로 모시고, 끝내는 진정으로 베르덴을 신으로 만들어 이 신전을 조각한 최초의 신앙자.
베르덴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시타델에서 신체(神體)를 드러내자 모든 신앙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호세만큼은 생명 반응을 감지할 수 있었을 뿐, 전혀 그 위치를 특정할 수 없더군.”
“어디에 있는지만 파악할 수 없다…….”
“혹시 이유를 알고 있나?”
“음…….”
엘로리스는 이마를 짚으며 골몰히 생각에 잠기더니 나지막이 대답했다.
“어쩌면, 원치 않는 걸지도 모릅니다.”
“그 말은……호세가 일부러 내게서 종적을 감추고 있다는 뜻인가?”
“의도인지 무의식인지 알 수 없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그렇습니다. 저로서는 그 외의 해석은 떠오르지 않는군요. 다시 말해──”
엘로리스가 신전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베르덴 님께선 모르는 편이 이롭다. 그게 호세가 처한 상황일 거예요.”
* * *
탐식의 조정서.
글러트니의 본거지는 광활했으나, 실질적인 인원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곳에서는 적적한 발소리 외에는 정적이 일상이었다.
다만 최근 들어 탐식이 조정소 가장 깊은 곳은 다소 복작거리는 편이었으니.
꺄르르…….
‘태아’의 파동과 같은 웃음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려 퍼졌다.
소름이 확 돋았다.
언제 들어도 익숙해질 수 없는 소리였다.
‘후우.’
그러나 호세는 마음을 가다듬고 목소리에 신성력을 담아 가르침을 이어갔다. 신인류의 선교사! 그게 지금 그의 역할이기 때문이었다.
“본디 신앙이란 개념은 부족함을 보완하는 믿음의 형태입니다. 그래서 신앙자가 먼저고, 신의 탄생이 그 이후지만…… 그게 신의 전부는 아닐 겁니다. 태생부터 신인 존재가 있을 테지요. 증거는 없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아무튼 그런 이유로 완벽한 존재에게는 신이 필요 없습니다. 보완될 것이 없기에 신앙심이 깃들 여지가 없는 것이죠. 이론적으로 내외의 완벽은 이상과 같아 실현될 수 없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무신론자는 적지 않습니다. 굳이 신앙으로 보완하지 않더라도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으니까요. 그것이 사회이고 관계란 겁니다.”
…….
“저는……말씀드렸다시피 모든 걸 잃고 무력하게 사회를 떠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푸른 산맥을 찾은 신을 대접하게 되고 눈보라로 가득한 하늘이 개벽되는 광경을 보았죠. 허허, 당신께도 그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군요.”
꺄르르르…….
하루에 한 번씩 이렇게 호세 스스로 고찰한 지식을 전파하니 ‘태아’가 어떤 대화에 크게 반응하는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사람의 이야기.
신인류의 ‘태아’는 지식보다는 누군가의 인생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그 삶이 불행이든 행복이든, 비극이든 희극이든 말이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태아’가 아쉬워하는 기색을 드러냈지만 호세는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어쩔 수 없었다.
분량을 조절해야 했으므로.
‘더 가르칠 것이 없으면 거래는 끝나고, 그들이 내 편의를 봐줄 이유가 사라진다.’
글러트니의 지배자들이 그에게 요구한 것은 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모든 지식을 신인류의 ‘태아’에게 가르치는 것.
그 대가로 하에넬, 레나르, 페이의 안전은 더욱 공고해졌고, 호세는 국제 신문을 통해 바깥 소식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호세가 과거 신학자였다면 아낌없이 선교했겠지만,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조각가였다. 지금은 이단 신앙자이긴 하나, 신앙적 지식의 총량이 당연히 부족할 수밖에 없는 노릇.
오늘 교육의 2할에서 3할 가량은 지난번에 했던 말을 형태만 바꿔 반복했다. 머지않아 밑천이 떨어질 날이 올 터였다.
‘발리온이 예상보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서인지 키르에의 기분이 좋지 않다…… 최근에는 국제 신문도 거의 주지 않았고. 가르침을 끝내기 전에 어서 탈출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호세가 한숨을 내쉬었다.
‘탈출해야 하는데……어찌 주저하는가.’
모두를 데리고 나가야 하는데 미련이 호세의 발을 붙들었다.
그렇다.
그는 ‘태아’의 탄생이 보고 싶었다. 선교를 해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그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호세의 진심이었다.
‘물론 도망칠 방도가 아직 없기도 하지만.’
호세는 심란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키르에가 앞에 있었다.
“허억!”
깜짝 놀라서 주저앉은 호세를 일별하고 키르에가 걸음을 옮겼다.
“옛 왕에 의한 제2차 초월자 전쟁은 세계 연합의 승리로 끝났어요.”
“아…… 그렇소. 역시, 역시 세계 연합이……!”
호세는 자신의 신께서 통솔하신 연합체가 죽음의 왕을 물리쳤다는 소식에 환희했다. 하지만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키르에가 말을 이었다.
“덕분에 발리온이 목적을 이룰 수 있었죠.”
“무슨…….”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어딘가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비명인가?
자세히 들어보니 발리온의 목소리인 것 같았다.
호세가 일어섰다.
“대체 무슨 일이오.”
“……이제 ‘태아’를 완성할 겁니다.”
키르에 본인조차 발리온이 왜 저러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발리온이 건넨 ‘세 개의 피’를 새로운 미래에 투여하는 것.
옛 왕의 피, 베르덴의 피…… 다른 하나의 피는 뭔지 모르겠지만, 발리온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 전부를 이식하라고 필사적으로 말했다.
“가르침은 당분간 미루도록 하죠. 이만 나가시길.”
“…….”
호세는 문 앞에 가만히 서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도, 지켜봐도 되겠소?”
“…….”
“그 아이의 탄생을…….”
키르에는 노려보듯이 호세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러곤 다시 ‘태아’를 보았다.
“방해하면 죽이겠습니다.”
“……고맙소.”
그렇게 호세가 구경하는 가운데 키르에가 걸음을 멈췄다. ‘태아’의 심장박동 소리에 키르에의 심장도 공명하는 것 같았다.
꺄르르르르르르…….
‘태아’는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다는 듯 가장 큰 웃음을 터뜨렸다. 호세의 울대가 꿀렁거렸다. 키르에가 호흡을 가라앉혔다.
‘신인류의 ‘태아’는 언제 양막(羊膜)을 찢고 나와도 상관없을 정도로 완성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탄생을 늦춘 것은 완벽을 위함…….’
다른 건 몰라도 신인류로 추정되는 베르덴의 피가 손에 들어왔으니.
더는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베르덴의 피는 마지막이라고 했지.’
발리온이 비명을 지르듯 속삭였던 순서를 떠올리며 키르에가 첫 번째 마개를 열었다.
짙고 생소한 혈향이 코끝을 스쳤다.
“마지막 이식을…… 시작하죠.”
먼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혈액이 ‘태아’에게 떨어졌다.
스륵…….
빛의 피가 스며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