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4화 아르카디옴의 끝 (2)
{주도자(主導者)가 될 각오가 있어야만 가장 앞서 나갈 수 있는 법이지.}
화면은 일순간 난장판이 된 지적 충돌을 비추고 있다. 비명을 지르던 셸브론은 눈치껏 무대로 내려가 기물들을 정리했다.
아르카디옴 집사의 의무였다.
지적 충돌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선 베르덴 기물이 유난히 돋보였다. 사방이 엉망이었지만 그것은 일절 흔들림이 없었다.
{주인공을 맞이해야겠군. 여흥도 더하고.}
호스트가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테아렐은 세 번째 게임의 결과가 어떻든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연관된 복선은 여럿이었다.
───{이번 아르카디옴의 ‘끝’에 도달한 지식인에게는 초월자의 영혼을 선사하겠다. 원한다면 이 내가 직접 요리하도록 하지.}
지식의 만찬회를 개최하는 호스트의 연설.
───{오로지 지식을 추구함에 있어서 완벽한 규칙은 의미가 없다. 규칙에 보이지 않는 허점이 있어야만 새로운 것을 볼 수 있으니.}
모험극에서 탈라칸의 어록 등…….
호스트는 세 가지 게임에서 살아남아 혼자 남은 지식인이 승자라고 하지 않았다. 아르카디옴의 끝에 도달한 자를 주인공으로 삼겠다는 암시만 모두에게 각인시켰을 뿐이다.
처음부터 지식의 만찬회를 둘러싼 규칙 자체가 허점이었다.
게임은 만찬회의 중점이 아니었다.
두 번째 게임에서 탈락했든.
세 번째 게임을 포기했든.
세 번째 게임에 참가했든.
세 번째 게임에서 승리했든 패배했든.
아직도 남은 지식인 중에서 호스트를, 정확히는 ‘호스트의 본체’를 찾아내는 자가 아르카디옴의 끝에 도달하는 거니까.
테아렐이 묻는다.
“그렇게 다 갖고 노니까 재밌어?”
{내 뜻은 계기에 불과하다. 시작은 의도적이어도 과정과 결과는 예측할 수 없으니. 난 언제나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가능성으로 감히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지식을 염원한다.}
“이상에 집착하긴. 초월자도 아니면서.”
{꿈은 삶과 진화의 동력이지.}
호스트가 당장이라도 떠날 것처럼 뒷짐을 졌다. 남들에게 내보이는 인간형의 모습은 분체이자 그의 단말이었다.
{내 본체를 찾을 생각은 없나?}
“관심 없어. 드라벤의 영혼을 얻어 봤자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애셔에게 주자니 나보단 애셔가 더 승산이 높으니까.”
{그렇다면 열아홉 번째 귀빈, 테린. 너는 세 번째 게임을 포기했기에 이번 아르카디옴에서는 더는 날 만나지 못할 것이다.}
호스트가 살짝 고개를 틀었다.
{하급 질문권을 사용할 기회는 지금밖에 없는데, 사용할 텐가?}
중급 질문권을 통해서 ‘저항의 씨앗’과 ‘사도의 대적자’에 대해 들었다. 테아렐은 현재 하급 질문권 1개를 갖고 있다.
“음.”
뭘 질문해야 할까. 하급이니 그리 대단한 정보는 얻지 못할 텐데…… 짧게 고민한 테아렐은 개인적인 호기심을 내뱉었다.
“탈라칸이 말하길, 호스트는 네 번째로 총명한 자라던데. 그 위로 총명한 자는 누구야?”
{누가 총명한가. 오랜만에 듣는 질문이군. 내게 있어 총명이란…… 나보다 더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는 자격을 의미하지.}
호스트가 흔쾌히 답변했다.
{첫 번째로 총명한 자는 ‘올다르크’고, 두 번째로 총명한 자는 ‘당신’. 그리고.}
기다란 손가락이 차례대로 접힌다.
정확히 세 개까지.
{세 번째로 총명한 자는 ‘베르덴’이다.}
* * *
초월자가 그러하듯이 운명의 사도에게도 권역이 있었다.
이슈르는 신으로서 침묵의 사막을 장악했다.
옛 왕은 죽음의 영역을 다스렸다.
인간계 최초의 왕은 세계의 틈새를 관리했다.
호스트의 지배 영역은 아르카디옴…… 그러나 그 의미를 확장하면 규모는 압도적이다. 호스트는 넓은 바다를 지배하는 사도일 것이다.
대륙을 위해서 초월을 상실하면서까지 언데드로 부활한 초대 네크로맨서───안데스 네크라일은 침묵의 사막에서 옛 왕의 봉인처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었다.
───[나와 성녀는 여섯 개의 파편을 이 대륙 전체에 퍼뜨리기로 결단했네. 그리고 가장 강력한 봉인을 가하기로 했지.]
───[망각이란 봉인을.]
───[물론 바다도 고려했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해에 던져 버린다면 초월자라고 할지라도 찾지 못할 테니까. 실제로 신체 조각 중 하나를 바다 한가운데에 던지기도 했었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신체 조각이 보관된 목함이 인근 해안가에서 발견되더군. 몇 번이고 같은 실험을 해 봤지만 결과는 같았네. 신체 조각은 항상 대륙으로 돌아왔어.]
바다가 옛 왕을 거부했다.
어째서인가.
운명의 사도니까.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해도 호스트는 사도다. 같은 사도인 옛 왕을 영원히 심해에 봉인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놈은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서 지식의 만찬회를 마무리 지으려고 할까.’
베르덴이 생각하는 호스트는 분신 따위가 아니라 본체였다. 그림자밖에 보지 못했지만 호스트는 몸은 단순히 크다는 범주를 아득히 넘어 규모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호스트에게 가장 안전한 곳.
호스트에게 가장 안정적인 장소.
호스트와 가장 어울리는 공간.
심해(深海).
호스트는 필시 바다의 최심층부에 있으리라.
즉…….
[지식의 경계.]
[지식의 매립지에 있을 것 같습니다.]
베르덴의 생각이 닿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파와 베타도 답을 도출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듯 검붉은 마력을 뿜어 댔다.
콰아아아앙!
아르카디옴의 벽면이 연이어 몇 차례나 파괴되면서 바닷물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저택에서 흘러나오는 빛과 심연의 어둠이 맞닿는 경계.
동시에 마도 <무한>을 개방했다. 해류의 사나운 흐름을 조작해 저항을 없애고, 공간 자체에 마법진을 새겨 넣었다.
저택의 뒤편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르카디옴을 혼자 힘으로 찾아온 테아렐과 만난 그 장소였다. 그곳에 자리한 절벽 아래가 바로 지식의 매립지다.
모든 지식을 상실하고도 지식을 추구하여, 다시 지식인이 되고자 하는 지식의 망령들이 득실거리는 어두운 땅.
그리고.
절벽의 끄트머리에 귀빈들과 많은 하객이 석재로 만들어진 기둥에 묶여 있었다. 게임에서 지식을 전부 상실한 지식인들이었다.
공포, 체념, 분노…….
그들은 곧 자아를 잃고 지식의 망령으로 떨어질 것이다. 과한 지식욕의 대가였다. 그 선택은 호스트의 여흥거리였다.
마침 저택의 여러 창문과 문에서 여러 존재감이 부글부글 끓더니, 지식욕에 절여진 얼굴이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호스트께서 저들의 처형을 우리가 집행하라고 하셨다!!!”
“끝까지 남아 있기를 잘했어!”
“무료 지식! 지식!!!”
“귀빈만은 내 것일세!!”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세 번째 게임을 관람하던 지식인들.
이렇게 빨리 나온 걸 보아 호스트가 출입문까지 만들어 준 모양이었다.
“안 돼, 안 돼……! 아아아아아아아아악!”
“호스트시여, 자비를!!”
“내 지식!!!!!!!!!!”
꽈드드드득! 지익──콰즙!
살점이 이빨에 단단히 걸려 뜯어 먹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만찬회에 걸맞은 고상한 요리 과정조차도 없었다. 죽이는 것이 아니다. 섭식으로 지식을 빼앗을 뿐이었다.
산 채로 잡아먹는다는 원시적인 식사의 광경이 지식의 경계에서 이루어졌다.
‘역겹기 짝이 없다.’
찰나에 쓸어버리고 싶지만 아르카디옴의 규칙이 물리적인 살생을 금하고 있다. 무엇이 더 우선인지 잊지 마라.
드라벤 르마르크를 블러디아에게 넘겨서는 절대 아니 된다.
그때였다.
저택의 장식용으로 쓸 법한 검이 기둥에 매달린 지식인을 참살했다. 또, 식사를 하는 하객의 머리까지 절단했다.
“……뭐.”
두 번째 게임에서 엘프를 지휘했다가 베르덴에게 역공당했던 아홉 번째 귀빈, 모르텔란이 입가에 피를 잔뜩 묻힌 채 얼어붙었다.
“루자크…… 자네, 제정신인가? 아르카디옴에서 살생을 저지르다니……!! 호스트의 규칙을 위반하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나?!”
“아르카디옴의 규칙 따위는 갖다 버리시오. 나는 비로소 나를 찾았소.”
열여섯 번째 귀빈, 루자크 팔테인이 검을 곧게 세웠다. 그 경건한 모습은 모험극에서 보여 주었던 비정의 기사와 똑같았다.
모르텔란이 미처 물러나기도 전에 칼날이 그의 미간을 관통했다.
“끄어…….”
“더 이상 놀아나지 말고 존엄을 지키시오. 우리의 영혼은 장난감이 아니니!”
규칙을 위반한 지식인의 말로를 알고 있음에도 루자크는 망설이지 않았다.
생전 하드라스 대주교에게 입은 은혜를 회상한 그의 눈빛은, 태고의 모험극에서 희생을 자처했던 그때처럼 선명했다.
“필연이 있다면 다시 만나겠지.”
루자크는 지식의 매립지로 향하는 베르덴과 눈을 마주쳤다. 경악하면서도 그에 맞서려는 탐욕스러운 지식인들을 앞에 둔 루자크는 호쾌하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잘 가시오, 별이여.”
스스로 선택을 내린 루자크가 함성과 함께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경계선 너머로 사라진다. 그곳보다 깊은 지식의 매립지에 들어온 베르덴 일행은 저택을 완전히 벗어났다.
[루자크. 생존?]
“지식의 망령이 될 가능성이 높겠지. 호스트의 억압을 보란 듯이 거절했으니.”
베르덴이 바닥에 도달했다.
“그래도, 다시 만날 거라는 기분이 드는군.”
광대한 구덩이를 채운 새까만 존재들이 베르덴을 인식했다. 지식의 망령…… 이들도 지식인이며, 또한 영혼이다.
아아아……?
베르덴을 인식한 망령들이 곧 움찔거리더니 뒤로 물러났다. 파멸 때문이었다. 파멸에 노출되면 영멸할 수도 있다고 직감한 것이다.
베타가 마력의 빛을 조사했다.
[중심에 틈새가 있습니다.]
사방을 가릴 정도로 바글거리던 망령들이 길을 트자, 더욱 깊은 공간으로 이어진 거대한 지하 통로가 나타났다.
어둡다.
주변에 감도는 음산한 기운.
심해 속의 심해, 그리고 그 심해…… 아래에 뭐가 있을지 예상할 수 없다. 베르덴은 미지를 향해 기꺼이 뛰어들었다.
심연이 베르덴을 이끌었다.
터어어어어엉!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블러디아가 심해 속 심해로 나왔다. 베르덴이 설치한 마법진들이 반응했다.
막대한 중력이 그녀의 신체를 짓눌러서 밑으로 떨어뜨렸다.
[하찮은.]
순수한 근력을 견디지 못하고 찢어진 마법진이 마력으로 화한다.
쿵, 쿠웅…… 쿵!
블러디아가 과하게 비틀거린다. 그녀의 육신과 부딪친 저택의 벽과 대지가 무너진다. 폴리모프의 태반 이상이 해제됐다.
제한해 둔 존재감이 증폭했다.
아직은 인간형이었으나, 날개와 발톱을 비롯한 드래곤의 특징이 더욱 강해지고 거대해지며 거구의 용인이 되었다.
쩍.
해류가 다섯 갈래로 갈라졌다.
블러디아의 발톱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회피한 데우스의 은폐가 풀렸다.
“규칙을 위반할 생각인가.”
[하인의 영혼이고 뭐고…… 아무래도 좋다.]
블러디아의 본성이 이성을 압도했다. 드래곤은 인내하는 존재가 아니다. 피식자를 인내하게 만드는 생명의 정점이다.
[찢어발겨 주마.]
블러디아가 두 번 땅을 박차자 수백 미터 반경의 심해의 지축이 조금 가라앉았다.
거센 해류에도 전혀 속도가 줄지 않는 움직임에 강한 소용돌이가 일었고, 그녀의 포효가 공간 이동을 저해했다.
파앗, 파앗, 파앗.
자리에서 벗어난 데우스가 소환진과 역소환진을 거듭하며 이동했다. 공간 상태에 구애받지 않는 그의 고유 전이 마법이었다.
베르덴을 이어 지식의 매립지에 도착한 데우스가 무저해(無底海)에 입성했다.
콰과과과과과!
블러디아는 통로 입구 주변을 부수면서 암흑으로 몸을 던졌다.
이렇게 사도, 저항자, 파괴자가 다시 한곳으로 모이려 한다.
사실상 규칙이 억압하지 않는 구역으로.
아아……?
지식의 망령들은 난데없이 보금자리를 엉망으로 만든 혼란에 멀뚱멀뚱 서 있었다. 테아렐은 그 빈틈을 파고들었다.
‘드라벤의 영혼에 관심은 없지만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순 없지.’
테아렐도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녀가 사라진 지 수십 초도 지나지 않아서 다른 인물이 지하 통로 앞에 섰다.
“호호호, 이렇게 됐으니 끝까지 지켜보는 것이 마땅하겠지요.”
네 번째 귀빈───펠디안느 피어시아 레이트도 훌쩍 심연으로 향했다.
아아……?
지식이 없어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망령들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내 호스트의 거처로 이어지는 입구를 몸으로 덮었다.
* * *
심연을 지나…….
베르덴은 어둠 너머에서 빛을 보았다. 머지않아 빛이 온몸을 휘감자, 전신을 덮고 있던 바다 특유의 압력이 자취를 감추었다.
탁.
베르덴의 발이 새로운 지역을 디뎠다.
[바다. 없음.]
[지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대륙은 아니라고 추측됩니다. 대기의 산소 농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습니다.]
부글거리는 화산, 갈라진 땅, 정글, 숲, 번개 치는 하늘…… 잡다한 지형이 한데 모인 이곳은 베르덴에게 색다른 충격을 선사했다.
지평선 바깥까지 땅이 존재할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넓은 땅이었다.
‘여기에 호스트가 있다는 건가.’
파충류로 보이는, 서로 다른 생김새의 거대한 생물들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지상을 거닌다. 어딘지 드래곤을 닮아 있다.
알파와 베타는 물론이거니와 베르덴은 처음 보는 이형종이었다.
‘뭐랄까. 마치 장난감 상자 같군.’
종류와 관계없이 기호대로 잡다한 것들을 넣은 상자, 그게 호스트가 꾸몄을 이 세계에 대한 베르덴의 첫인상이었다.
어쨌든.
“바로 탐색을 시작하지.”
[확인.]
베르덴이 [인테리스]를 소환하고는 눈을 감았다. 고도의 집중력에 마력회로가 반응한다. 곧 뻗어 나간 마력이 널리 확산했다.
<마력 감지>
베르덴의 무한한 마력이 작은 땅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