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mit Breaking Genius Mage Chapter Raws 1060

1060화 신전 (2)

군단장 하드라스를 비롯한 악마들.
인간계 최초의 왕.

그들과 조우하고 세계의 틈새에서 나온 베르덴은 주인 없는 땅으로 돌아왔다.
직후 유니아와 이자벨라에게 한 사람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조각가, 호세.

병든 아들을 치료하려다가 아내는 악마숭배자로 몰려 처형당하고, 아들은 끝끝내 병사하고 만 비운의 남편이자 아버지.

그럼에도 세상을 저주하지 않고 본인의 탓이라 여기며 사회에서 벗어나 홀로 푸른 산맥에서 고독한 삶을 택한 야인(野人).

떠나간 아내와 아들이 구원받기를 바라며 아내를 죽인 루아스교에 기도한 가련한 신앙자.

그리고.

초월자로 각성한 베르덴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하늘을 개벽하는 광경을 목도하고…… 현재에 이르러 순수한 믿음으로 베르덴에게 신격을 부여한 최초의 베르덴 신자(信者).

툭.

베르덴은 로벨린을 데리고 석주(石柱)의 계단에 올라 신전에 당도했다. 섬세하게 조각된 신전 기둥을 가볍게 짚었다.

‘내가 세계의 틈새에 있는 동안 호세는 동굴에서 이걸 만들고 있었던 건가.’

베르덴은 호세의 행적을 알지 못한다. 뭐가 진정 계기가 되어서 베르덴을 신(神)으로 숭배했는지 아는 바가 없다.
다만 신전에 깃든 믿음이 순결하고 진실되었다는 걸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데 신성력이 왜 이제야 신전에 반응한 거지?’

베르덴은 신성력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향했다. 신전의 마당 중앙에 자리한 커다란 베르덴의 조각상이 보였다.

참으로 기이하고, 신기했다.

신전이 지어질 때쯤에는 신격을 자각하기 전이라 조각상은 당연히 초월자 베르덴의 모습이어야 정상일 텐데…… 보다시피 악마의 신이 된 현재의 베르덴을 반영하고 있었다.
신기(神器)로 변화한 [아인베르]와 [인테리스]도 고스란히 재현된 형태.

영감이라도 발휘한 걸까.

그러다가 문득 조각상에서 자연스러운 이질감이 눈에 띄었다.

‘얼굴의 조각 방식이 다르군.’

주의를 기울이니, 바로 그곳만 다른 조각 기술이 쓰인 듯했다. 조력자가 있었나?
이자벨라가 살펴보니 오두막엔 호세를 제외하고 여인, 소녀, 소년, 약 세 명이 더 머무르고 있었던 것 같다던데.

조각상의 머리에 옅은 물기가 남아 있다.

천천히 시선을 높였다.

어둠으로 덮인 저 높은 천장에 물방울이 맺혀 있던 흔적을 발견했다. 설마…… 위쪽에서 떨어진 이슬이 계속해서 조각상에 부딪쳐 얼굴을 베르덴의 형태로 깎아 내기라도 했단 말인가?

믿기지 않지만 직감이 긍정했다.

‘그렇다면…….’

정황을 정리했다.

호세는 베르덴이 초월의 경지에 도달했던 설산 동굴을 신역(神域)으로 삼아 단신으로 그의 신전을 건축했으며.
모종의 이유로 조각상의 얼굴만을 남겨 두고 푸른 산맥을 떠났고.
자연 현상이 호세를 대신하여 천천히 조각상을 깎아 ‘방금’ 신전을 완성했다.

그래서 베르덴이 지금 이 순간에 신전의 존재를 인지한 것이다.

‘뭐라, 형용하기 어렵군.’

내면에서 맥동하는 신성력.

악마들을 신자로 받아들였을 때와는 다른 감동이 샘솟았다. 신만이 알 수 있는 기분이었다. 이야말로 숭배의 표상이었다.
신전은 겉보기에는 조용하고 벽화나 조각 이외엔 아무것도 없어 보였지만, 그 존재 자체가 베르덴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었다.

신성력의 강화.
신격의 상승.
신으로서의 성장.

───신의 초입에 다다르면 신성력을 이용해 고유의 권능을 발현할 수 있어요. 신으로 성장하면 신앙자의 기도를 들을 수 있고, 존재를 느낄 수 있으며, 권능을 하사할 수 있죠.

내면세계에서 아이샤, 시간의 개념인 히안테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또한, 그 뜻을 이해했다.
베르덴을 위한 최초의 신전은 신적인 감각을 한 단계 격상시켰다.

‘오두막을 떠난 호세가 대륙 어디에 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하지만.

‘호세는 살아 있다.’

신앙자의 존재감이, 믿음의 온기가 신성력으로 전해진다. 호세뿐만이 아니었다. 베르덴이 파악하지 못한 그의 신앙자가 대륙에 더 있었다.
누군지도 알 수 없고, 아직 그들의 기도도 미약한 잡음으로 들려 명확히 인식할 수 없지만 존재감만은 명확했다.

베르덴은 신전 한가운데에서 여운에 잠겼다.

신전의 암흑과 적막에 동화되다시피 하다가 문득 불꽃을 보았다.
익숙하면서도 따스한 화염.

“물어보고 싶은 게 많겠지?”

로벨린은 정교한 조각상에서 어렵게 눈을 떼고 베르덴을 올려다봤다. 붉은색과 대비되는 푸른색의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지.”
“그런데 왜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거냐.”
“때가 되면 네가 말해 줄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
“그게 전부는 아닐 텐데.”

로벨린은 폐부를 찔린 것 같았다. 하나, 로벨린은 슬픔마저 분노로 승화하는 성격의 소유자.
베르덴이 직접 물어봤기에 위축되며 물러서지 않았다.

“난, 그럴 자격 없어.”
“다시 말하지만 너는 발로크의 비공식 실험을 알 방법이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게 면죄부는 아니지. 무엇보다 그게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야.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 나는 네게 도움이 하나도 안 돼.”
“객관까지 따져야 하나?”
“그게 현실이니까.”

로벨린은 서로의 위치를 잊고 가족이자 친구로서 말했다.

“현 보헤미른 마탑이 그나마 건재한 건 순전히 네 덕분이야. 네가 나를 배려했으니까. 보헤미른 마탑의 임시 마탑주가 돼 에온을 도와 달라고 네가 말했지만, 동력원조차 없는 보헤미른 마탑 따위는 필요 없잖아. 그게 없어도 압도적으로 강해서.”
“그 차이가 문제였군.”
“맞아, 너에 비해 나는 너무 약해. 내가 혹시라도 죽을까 봐 네가 신경 써 주는 게 느껴져. 내가 없으면 너는 시간을 더 유의미하게 쓸 수 있을 텐데. 지금 이 순간조차도 말이야.”
“로벨린.”
“어린애 같은 투정이지? 알아.”

그녀가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아니까, 솔직히 말하는 거고.”

마도 <화형>

감정에 직결되어 발현되는 불길이 설산 동굴의 어둠을 밀어냈다. 그와 동시에 로벨린의 피부 위로 붉은 직류(直流)들이 떠올랐다.
5위계 하위 마도사의 경지로 넘볼 수 없는 고열이 아지랑이를 만들어 냈다.

베르덴의 마법적 이해력이 반사적으로 로벨린의 변화를 해석했다.

“……마도 위계 돌파?”

암월 다히트 웨스로엘의 꿈을 꾼 마법사는 위계 돌파의 연산식을 터득했으며, 그중에서 극소수만이 마도의 한계를 넘볼 수 있게 됐다.

일순간 닿지 않는 힘을 끌어오는 것.

실제로 유니아는 이것을 비장의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 다만, 그 반동은 단순한 위계 돌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컸다.

그런데.

‘더없이 자연스럽다.’

로벨린은 아무렇지 않게 한계 바깥에 있는 마도 위계를 유지하고 있다. 전신에 문신처럼 새겨진 붉은 회로는 하나의 체계에 가까웠다.

“이건 서대륙에서 언데드를 토벌하다가…… 아니, 그간의 고찰이 결과로 이어져 깨달은 나의 마법 체계, ‘엠버(Ember)’. 너와의 간격을 아주 조금이나마, 빠르게 좁힐 수 있는 나의, 방식.”

로벨린이 약간 괴로운 듯 온몸을 비틀더니 이내 열기가 전신에 스며들었다. 마력이 요동쳤다. 막혀 있던 혈을 뚫기라도 하는 것처럼 5위계 하위를 넘어 5위계 중위에 안착했다.

베르덴 앞에서 의도적으로 멈추어 둔 위계 상승을 이룩한 것이다.

순수 경지는 5위계 중위.
위계 돌파를 유지하는 중엔 마도는 6위계 하위에 준했다.

“……어때?”
“대단해, 경악스러울 정도로.”

베르덴은 진심이라는 듯 한 손으로 입가를 쓸며 로벨린을 자세히 통찰했다.
자신만의 마법 체계를 깨달았다니.

‘이게 자연적으로 가능한 건가?’

일반적인 마도사였다면 무리겠지만, 로벨린은 특이 형질 보유자다. 붉은 화염은 감정에 영향을 받아 거세게 타오른다.
그리고, 특이 형질은 마도와 관련이 깊은 개념.

로벨린이 고유 마법 체계를 저절로 터득한 것을 불가능하다고 할 수 없다.
하물며 눈앞에 실물까지 있으니.
단언할 수 있다.
이 엠버라는 마법 체계는 로벨린의 특별한 형질 자체를 근원으로 두고 있다. 오직 그녀만이 운용할 수 있는 무기인 셈이다.

“부담은?”
“피로감 말고 마력 소모량과 심장 박동 횟수가 증가하는 정도? 전에 실험해 보니 과열되면 탈력감이 심한데, 무리하지 않으면 큰 부담은 없어. 내게는 꽤 편리해. 한계 너머에 오래 머물수록 경지가 상승하는 속도도 비약적으로 빨라지니까.”

그 베르덴이 감탄하는 모습에 로벨린의 입가가 움찔거렸다.

“아무튼.”

로벨린이 마도를 닫았다.
엠버의 효과로 잔열처럼 남은 불꽃이 촛불처럼 일렁였다.

“나는 강해지고 싶어. 알아? 자기 자신이 짐처럼 느껴지는 기분, 진짜 최악이라는 거. 그래서 나름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려고.”
“…….”
“그러니 전수해 줘, 너의 대마력을.”

베르덴의 발목을 붙잡기 싫지만 로벨린은 자신의 처지를 이해했다.
괜히 입 닫고 속으로 삭이며 베르덴과의 관계를 갉아먹을 바에 민폐를 끼쳐서라도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어떻게든 뒤쫓아서.

이것이 로벨린의 사랑 방식이었다.

“그런데 전수 방법이 뭐야? 마도 축제에서 보니 쌍둥이들한테서 문신 같은 게 빛나는 것 같던데. 그게 매개체야?”
“그래, 내 고유 마법진을 몸에 새기면 된다. 부위 상관없이.”
“그래? 그럼…….”

등을 돌린 로벨린이 붉은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들어 올렸다.
하얀 목덜미가 드러났다.

“목 뒤에도 가능해?”
“아프지는 않을 거다.”

막 완성된 대마력을 시범적으로 체득하는 데는 유니아와 카인이 가장 적합했다.
둘의 변화를 해석한 베르덴은 이후부터 대마력을 터득한 마법사의 체화 단계를 유의미하게 앞당길 수 있게 됐다.

베르덴은 대마력에 대해 설명하면서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화아아아악.

세 번째 형의 역천의 마법진이 베르덴의 마력을 통해 로벨린에게 각인된다. 목 뒤에서 확산한 마력의 줄기에 그녀의 몸 속 마력회로가 외부로 드러났고, 곧 자취를 감추었다.

대마력은 성공적으로 이식됐다.

로벨린의 고유 마법 체계와 서로 반발하는 일도 없었다.

“……신기한 기분이네.”

마력의 밀도를 높이는 대마력 1단계를 경험해 본 그녀가 목덜미를 문질렀다. 붉은 머리카락에 가려진 마법진은 피부에 동화되었다.

그렇게 대마력의 전수를 마치고 둘은 잠시나마 신전을 탐사했다.

신전 내부에 펼쳐진 장대한 벽화.

하늘이 개벽하는 순간과 베르덴이 여러 사람에게 숭배받는 모습이 생생히 표현되어 있었다.

“베르덴.”
“음.”
“그러니까, 그, 신이라도 된 거야? 막, 그 루아스 여신 같은?”
“뭐, 그런 셈이지.”

소꿉친구가 초월자라는 것도 비현실적이지만, 이제는 신이라니?

말한들 누가 믿겠나.

로벨린도 물론 실감은 안 났다. 상대가 베르덴이 아니었다면 신전을 보든 말든 간에 그냥 헛소리라고 치부했을 터였다.

“흐흠, 흠.”

로벨린은 헛기침으로 순간 막힌 목을 풀었다.

“그럼 하나가 있고, 둘이 있으면, 셋도 있을 수 있는 거니까…… 혹시 다른 신도 있어?”
“먼 옛날에는 신이 많았지. 얼마 전에 그 일부를 손에 넣었는데, 보여 줄까?”

베르덴은 [레인디아]를 기동해 아르카디옴의 두 번째 게임, 태고의 모험에서 획득한 악신의 잔재를 소환했다.
샛별의 종교가 가공한 종교 느낌이 나는 은빛의 금속 기둥이 로벨린의 눈에 반사됐다.

“이 안에 악신의 잔재가 봉인되어 있다.”
“악신……? 힉.”

꾸드드득.
꾸드득.

내부에서 질척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악신의 신경 다발이 틈새를 비집고 슬쩍 나왔다. 베르덴을 향해 꿈틀거리다가, 로벨린에게 촉수 끝을 향하고는 빠르게 기둥 안으로 돌아갔다.

베르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낯을 가리기라도 하는 건가?
겁먹었을 리는 없고.

굉장히 적나라한 외형의 촉수를 목격한 로벨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게 악신의 잔재? 아니, 이 징그러운 걸 어디에 써?”
“글쎄, 아직 실험해 본 적도 없어서. 피를 매개로 반응하는데, 혹시 모르니 제대로 준비하고 확인해 볼 생각이다. 여기서는 무리지.”

베르덴은 금속 기둥을 다시 보관했다.

로벨린은 망막에 새겨진 촉수 모양을 잊어버리려는 듯 벽화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슬쩍 벽화 속 베르덴을 톡톡 건드리며 물었다.

“근데 있잖아…… 보통 이야기 같은 거 보면 신은 각자의 수식어 같은 게 있잖아? 루아스 여신이 빛의 신인 것처럼. 너도 그런 게 있는 거야?”
“물론 있지.”
“진짜? 무슨 신인데?”

베르덴이라면 마법의 신일까?
아니지.
초대 마도왕이 마법의 신이라고 여겨지고 있으니 다른 신일지도 몰랐다. 그러면 마력의 신일까? 설마 초월자의 신?

뭐가 됐든 선한 신이 틀림없으리라.

“악마.”
“오, 악마구나.”

로벨린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감탄하다가 당장에 고개를 돌렸다.

“뭐요?????”

종종 빛의 교회에 기부도 하는 평범한 루아스교 신자, 로벨린.
악마 숭배의 길이 열렸다.

* * *

글러트니의 본거지───탐식의 조정소에서의 생활도 익숙해진 호세는, 오늘 출입이 절대로 금지된 영역에 발을 디뎠다.

“긴장할 것 없어요, 호세. 당신을 산 채로 해부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글러트니의 이인자인 키르에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앞서 걸었다.
날마다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눠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무서운 사람이었다. 잔인하되, 스스로 숭고하다고 믿는 신념형 존재.

섭식의 방식으로 신인류를 창조한다고 했던가.

호세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렵고 복잡한 사상이었다. 그 비틀린 신념을 떠올리기만 해도 식은땀에 젖을 것 같았다.

“여기예요.”
“큽…….”

키르에가 생체 인식으로 문을 열자 너무도 짙은 피냄새가 진동했다. 주춤한 호세가 이내 용기를 갖고 안으로 들어섰다.

주변은 어두웠다.
조명은 중심만을 비추었다.

호세의 눈이 점점 커지다가 발걸음이 멈출 때쯤 입을 열었다.

“저…… 저 생명은, 도대체……?”
“발리온이 창조하고 있는 신인류의 씨앗.”

키르에가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우리의 ‘태아(胎兒)’예요.”

그녀의 손길이 연분홍빛 살점의 막으로 이루어진 알을 가리켰다. 안쪽에는 아직 형태가 완성되지 않은 원시 생명체의 그림자가 비쳤다.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아이보다 미약한 심장 박동이 규칙적으로 공간을 두드렸다. 묘한 울림. 호세는 생명 그 자체의 태동에 몸을 떨었다.
삼켜질 것만 같다.
그래도 곧바로 당혹감을 추스르고 키르에에게 물었다.

“당신들에게 무척 소중한 존재 같은데…… 제게 이 아이를 보여 준 저의가 무엇이오?”
“그 대답이 이유예요.”
“네?”
“대부분의 구인류는 태아를 보자마자 괴물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이것, 저것, 그것. 하지만 당신은 아이라고 칭했죠. 괴물이 아니라 아이라고 봤으니까. 작은 차이 같아도, 평범한 구인류 따위는 감히 좁힐 수 없는 간극이에요.”

키르에가 빈 의자에 앉았다.

“호세, 전 당신이 태아의 선생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어요.”
“선생…… 이라니. 태아에게 무엇을 가르친다는 말이오? 아직 머리가 형성되지도 않아 들을 수도 없을 텐데.”
“그러니 신인류죠. 구인류의 상식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그녀가 앉을 것을 권유했다.

“우리가 여태껏 토론한 주제 가운데 신과 관련된 내용이 많았잖아요? 그중 ‘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모든 지식을 태아에게 들려주셨으면 해요.”
“그거야 당신이 해도…….”
“단.”

대각선에 자리한 호세를 보면서 키르에가 양손을 모아 무릎에 얹었다.

“신성력을 담아서.”

키르에는 어떻게 하면 신인류의 태아가 신성력을 지닐 수 있을지, 또 어떻게 하면 태아 스스로 신이 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내놓은 답은 먼저 신성력에 ‘적응’시키는 것.

루아스교와는 질적으로 다른 신성력은 곧 새로운 신앙의 단서이니. 이론적으로 태아가 신성력을 얻을 확률은 100%에 수렴했다.

신체적 부담?

신인류의 태아는 발리온이 초월자 인형을 포함한 특별한 생체 조직들을 집대성한 결정체다. 게다가 발라드의 정자와 키르에의 난자가 태아의 기반이 되었다.
물론 아직 베르덴의 생체 조직 등이 없어 육체의 성장을 미루고 있지만, 그 저항력은 이미 유기체의 틀을 벗어났으니.

“신성력이라니? 그랬다간 연약한 아이는 크게 다칠 거요.”
“후후, 자신의 힘을 과신하시네요.”

설령 호세가 수작을 부려도 태아의 알에 흠집도 낼 수 없다.

“대답할 수는 없어도, 태아는 당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거예요. 또 기억할 거고요. 제가 느끼는 즐거움을 태아도 느꼈으면 좋겠어요. 태교가 그렇게 중요하다면서요?”

키르에의 의도가 뭔지 모르는 호세는 대답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글러트니의 관계자가 아닌 이상 그녀의 생각을 이해하긴 어려웠다.

“물론 대가는 지불할게요. 당신이 보호하는 페이, 레나르, 하에넬의 안전은 이미 저희가 보장했으니 다른 걸 드리죠.”
“…….”
“바깥의 소식, 궁금하지 않아요?”

호세는 이곳에 갇혀 있기에 대륙에 무슨 얘기가 오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언어적 표현 대신에 표정으로 망설임을 보였다.

“곧 2차 초월자 전쟁이 발발할 거예요.”
“초, 초월자 전쟁?”
“무려 800년 만에 부활한 옛 왕에 맞서 전 세계가 연대한다고 해요. 정황상 현대의 세계 연합이 창설될 가능성도 아주 높다고 보고 있죠.”

초월자 전쟁이라면 신께서도 참전하리라, 라고 확신한 호세는 눈을 감고 작게 신음하다가 소리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해 보긴 하겠소. 단, 아이가 조금이라도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즉각 중지할 거요.”

키르에는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다.

참으로 희극이었다.

구인류가 글러트니를, 그것도 신인류의 씨앗을 진심으로 걱정하다니? 신인류가 완성된 순간 모든 구인류는 멸종할 텐데.
구인류로 인해 성장한 신인류가 구인류를 없애는 인과라…….

‘역시 즐거워.’

키르에는 제 주제도 모르고 인정(人情)을 베푸는 호세가 인간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구인류에 대한 최대한의 찬사였다.

“교육이 끝날 때마다 최신 국제 신문을 하나씩 드릴게요. 구두로만 전하는 건 아무래도 신뢰성이 떨어지니까요. 그렇죠?”

키르에가 몸을 일으켰다.

호세도 덩달아 자리에서 기립했다.

“교육은 내일부터 시작할게요.”
“알겠소.”
“기념으로 오늘은 특식을 드릴게요. 초창기 아카데미에선 학부모가 교수들에게 촌지라는 걸 줬던 거 알아요? 그런 느낌이죠.”

대충 맞장구치며 연구실을 나가다가 호세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살점으로 이루어진 알.

조명에 비친 내부 생명체의 실루엣이 아까보다 선명해졌다. 물고기와 엇비슷한 그림자가 천천히 좌우로 몸을 흔들었다.

마치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것처럼…….

꿀꺽.

호세는 불가해한 공포를 느끼면서도 이내 각오를 다졌다.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면 직접 몸으로 부딪치리.

내일부터 그는 신인류의 선교사였다.

* * *

긴급 정상 회의가 끝난 새벽.

와장창!

에스티리아 왕국의 왕실 비행정 안쪽에서 작은 소란이 발생했다.
무릎 꿇은 여왕 실리스가 오들오들 떨었다.

“아, 이 정도로 재밌을 줄은 몰랐지!!!”

사차원 연구를 잠시 중단하고 실리스의 정신계로 정상 회의에서 있었던 일들을 확인한 이그나시아가 짜증을 부렸다.
그것만으로도 실리스를 호위하는 주변 병력들이 모조리 환상에 빠져들었다.

“이런 일이 있었으면 당장 날 불러냈어야지!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니??”
“스승님께서 방해하지 말라고…….”
“융통성 없어!”

베르덴과 성녀의 충돌.
아드리안과 성자의 격돌.
세계 연합.

이그나시아가 너무 아깝다는 듯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만약 자신이 회의장에 있었다면 갈등을 더 키울 수 있었을 텐데!
베르덴과 성녀가 살벌한 전투를 벌이고, 수왕과 섭리자가 논쟁 끝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시나리오의 영감이 떠올랐는데!!

이미 정상 회의는 막이 내려 쓰지도 못하고 즉시 폐기됐다.

‘악마에 너무 몰두하는 바람에……!’

이그나시아는 대악마의 존재를 인지하며 얻은 환희 따위 이미 잊어버렸다. 이곳에는 쾌락을 놓친 쾌락주의자만 남았을 뿐이다.

“안 되겠다. 나중에 작업하려고 했는데 지금부터 밑밥을 깔아 둬야겠어.”
“스, 스승님?”
“못 참아.”
“대체 무슨 짓을 하시려는지 모르겠지만 전쟁이 코앞이에요……! 자중, 자중하세요!”

실리스가 성자라도 된 것처럼 용감하고 다급하게 말렸지만, 애석하게도 눈이 돌아간 이그나시아는 베르덴이 와도 말릴 수 없었다.

“내가 더 재밌게 해 줄게.”

* * *

다음 날, 이른 아침.

가르간트의 국제 신문사가 미친 듯이 최신 신문을 쏟아 냈다.

[고대 크세리온 제국의 부활.]

[제2차 초월자 전쟁의 전운.]

[세계 vs 죽음]

[언데드에 맞서는 인간, 드워프, 수인, 엘프의 세계 연합 발족!]

[역사적인 노르드발트 요새의 훼손? 북부 왕의 눈물.]

[모험가 총동원령 발동.]

[정상 회의장에 등장한 유골룡. 그 정체는 초대 네크로맨서. 제1차 초월자 전쟁에서 세계를 구해낸 전설의 귀환.]

[초월자들이 당신을 부르고 있다.]

[8위계의 거인들.]

[세계 연합장 – 에온의 베르덴 폐하.]

[토벌군단 가동.]

[전시 태세 전환.]

[대피난령.]

…….

정상 회의에 관련된 많은 내용이 기사화되어 전 대륙에 뿌려졌다. 최근의 소문과 소식을 총망라하여 정리한 신문이라 만인의 이목이 집중되었고, 신문은 찍어 낼 때마다 매진되었다.

그런데 신문 마지막 장에는 앞선 기사와는 전혀 다른 주제가 실려 있었다.

[악마 숭배자는 처형되어야만 했나?]

루아스교가 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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