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8화 정해진 수순 (5)
아칸드는 묵시록의 권속들이 경험한 모든 정보를 공유받는다.
‘그렇게 되었는가.’
기근의 묵시록은 베르덴에게 파멸당했다.
정복(역병)의 묵시록은 아드리안에게 패배했다.
전쟁의 묵시록은 벤디에 카에나르에게 참수됐다.
죽음의 묵시록은 폐쇄되는 사문에 갇혀 버린 탓에 대륙에서 사라졌고, 그로 인해 연결이 단절돼 존립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개의치 않는다.
처음부터 그들은 탄생과 동시에 죽음이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권속의 역할은 끝났으니 이제 사도로서 소임을 다할 때다.
‘베르덴, 네가 과연 그 몸으로 직접 위대한 전쟁의 대미를 장식할 수 있을지──’
아칸드가 용검을 수직으로 세웠다.
‘시타델에서 기다리겠다.’
여제의 사나운 기예, 성녀의 고고한 기적, 광명의 대재해의 강렬한 마도, 아드리안의 섬전 같은 검기가 들이닥치고.
현대 병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계수의 엘프가 마력을 집중한다.
아칸드는 당연하다는 듯이 단신으로 연합의 공세를 돌파했다. 최후의 저항자가 피의 여제를 통해 무엇을 준비했든 아무래도 좋다.
‘모든 것은 정해진 대로.’
여섯 번째 사도의 강림을 기점으로 운명은 재건될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아칸드는 진정으로 궁극적인 승리를 추구할 뿐이다.
* * *
태초를 통틀어 두 번째로 뜨거운 화염이, 열이 닿는 모든 걸 잿더미로 무너뜨린다.
본래의 색을 잃어버리고 붉은 기가 감도는 잿빛의 비가 아지랑이에 뒤섞여 흩날리니 개념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마저 왜곡된다.
한 번의 숨결에 대지가 녹아내리고.
두 번의 언어에 하늘이 붉게 물들며.
세 번의 숨결에 바다가 끓어오른다.
약자의 존립을 불허하는 진홍의 악몽이 푸른 땅을 뒤덮었다.
생명이 연소했다.
인근 수십 킬로미터 내에 살아 있는 지성체는 단 한 명뿐이었다. 그를 제외한 자연물은 본질이 타들어 가서 존재 자체를 상실했다.
드워프가 살아가는 화산 지대의 험지를 방불케 하는 끔찍하고도 황홀한 풍경이었다.
그 밖의 범위는 간접적인 영향을 받아 열대 기후로 변모했다.
사룡과의 일전에서 마렌 왕국 전역이 독과 사기로 물들었듯이, 포르메네 자유국은 지도를 다시 제작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들끓는구나.]
적룡 사르칸드라가 포악한 웃음소리를 내며 바닥을 짚었다. 치이이이익! 붉은 비늘을 타고 초고열을 품은 용혈이 한순간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피가 떨어진 것만으로도 지면이 부글거리며 빠르고 깊게 함몰되었다.
거대한 날갯죽지부터 등허리까지 가로지른 섭리의 뒤틀림…….
인과를 조작하는 마법에 피격된 그녀의 한쪽 눈이 일시적으로 감겼다. 고룡의 저항력을 이렇게 손상시킬 수 있는 존재는 억만 년을 살아간다고 해도 조우하기는 쉽지 않다.
[잔혹, 비정, 무자비.]
데우스 위덴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원초적인 희열로 가득했다.
[역시 현대의 저항자들은 과거에 운명전을 치렀던 저항자들과 비교도 안 돼. 좋은 마음가짐이다. 마음에 든다. 지극히 만족스러워. 그래, 상대가 선을 넘었으니 자신 또한 선을 넘는 게 마땅하지 않겠느냐. ‘당신’과 같은 길을 걸을 수 없었다며 패자의 변명을 지껄이는 게 아니라!]
쿠우웅!
사르칸드라가 발톱을 굽혀 움켜쥔 자유국의 국토가 열압을 견디지 못하고 일그러졌다.
[승자가 모든 선택을 결정하는 이치야말로 폭력의 진정한 가치이니!]
“시끄럽다.”
[유희는───그만.]
사르칸드라가 뭔가에 구속당한 듯이 몸을 비틀더니 이내 억압을 뿌리쳤다. 눈으로 식별되지 않는 사슬이, 그 목줄이 박살 났다.
[둘 중 하나는 회진(灰塵)에 이르리라.]
용언이 개시됐다.
사르칸드라가 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자 지각에서 무수한 용암 기둥이 분출했다.
오래전 호스트와 충돌하면서 서대륙 한편에 화산 지대를 빚어낸 화염의 개념이 중앙 대륙 지형 일부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역시 타고난 본성을 억제하지 못하는군.’
데우스 위덴은 차분히 숨을 내쉬었다. 그의 호흡은 구성 물질의 분자 구조를 변형시킬 정도의 불기운에도 미지근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르칸드라를 상대하는 과정에서 팔뚝에는 용아에 씹힌 흔적이, 우측 옆구리와 정강이에는 용조에 걸려 찢어진 상처가 선명했다.
보다시피 출혈은 멈췄지만 특유의 작열감은 그치지 않고 고통의 정도를 끊임없이 올렸다.
‘상정한 대로.’
사르칸드라를 상대하는 데 있어서 안일한 마음가짐 따위는 갖고 오지 않았다.
철저하게 예측했다.
부상 수준과 출혈량까지도 정확히 계산 범위 내에 있었다.
운명전은 아직 재개되지 않았다.
초대 마도왕의 오랜 공작으로 인하여 운명의 사도 전부는 당장 활동할 수 없다. 무엇보다 그건 ‘당신’도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둘은 서로를 잘 알았기에 웬만한 수로는 그 의지를 뿌리뽑을 수 없음을 인지하고 있었으므로.
순환을 위한 마침표…… 그를 위한 눈치 싸움.
유리함과 불리함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결국 끝장을 보고 각자 이상을 실현시키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건 피차일반이다.
옛 왕과 사막의 신과는 달리 사르칸드라는 운명을 재건하는 사도가 아니다. 잃어서는 안 되는, 본격적인 운명전을 위한 최고 전력.
그래서 지금은 나설 때가 아니나, 드래곤은 본인의 욕망에 충실한 종족이며 사르칸드라의 충동심은 한 번 타오르면 제어가 불가능하다.
하여 첫 번째 사도───빛───은 사르칸드라의 활동 한도에 따로 제약을 걸었지만, 직전 몸부림으로 그 통제가 깨져 버렸다.
‘국제 사회는 비로소 적룡을 목도했고, 그 존재감을 경험했다. 또한 사르칸드라는 스스로 첫 번째 사도의 권능을 파괴한 대가로, 사도로서 운명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데우스가 오른손의 엄지, 검지, 중지로 푸른 마력을 조작했다.
‘퇴장시킬 적기다.’
적룡은 운명의 사도이나 기생의 대악마와 마해에서 모종의 관계를 맺었다.
사르칸드라와 이페아카른.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냥 지켜볼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녀를 당장의 무대에서 끌어내리면 운명뿐만이 아니라 이페아카른의 음험한 계략에도 제동이 걸릴 터.
이 자리에서 사르칸드라를 제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그러려면 그 역시도 적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의 모든 행보에 크나큰 지장이 따른다.
고룡을 토벌할 때는 지금이 아니다.
그 역할 또한, 그가 아니다.
‘모든 수순은 정해져 있으니.’
순수한 화염으로 이루어진 붉은 운석들이 대기를 가열시키며, 가느다란 파공음과 더불어 불규칙적으로 지상에 작렬했다.
피융─────────콰과과과과과과광!
착탄 지점에서 솟은 불꽃의 파도가 몰아쳐 일대를 덮었다.
연옥(煉獄)이 데우스의 공간까지도 집어삼켰지만 이내 그 안에서 푸른 광채가 터져 나와 화염의 개념을 밀어냈다.
쿠오오오오오.
모든 신의 사도는, 신이 대표하는 개념을 권능으로 하사받는다.
권능은 하나가 될 수 있고, 둘이 될 수 있고, 셋이나 넷 이상은 될 수 있지만 숫자와 관계없이 사도의 급은 신에게 얼마나 가까운지로 결정된다.
<마법의 권능>
데우스 위덴은 마법의 절대자가 총애하는 제자이자 사도이며.
스스로 자유를 버리고 하나의 이상을 선택한 신의 부재를 대신해 저항 세력을 지휘하는 현대 ‘마법’계의 정점.
[그 형식은…….]
“운명의 주구에게 권능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지만, 이곳에서 무엇을 보았든, 너는 그 정보를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을 것이다.”
마력회로의 흐름 자체가 신체의 바깥에 투영되면서 소용돌이가 형성됐다. 사르칸드라의 화염까지 뒤얽혀 그 일부가 되었다.
지금은 ‘당신’의 눈조차 포르메네 자유국에는 닿지 않는다.
“한동안 돌아가지 못할 테니.”
데우스가 손끝을 비틀었다. 권능으로 강화된, 마도 <천리>의 기반이 되는 섭리의 개념을 더는 올라갈 수 없는 궁극으로 인도했다.
조작을 넘어선, 새로운 인과의 부여.
[이제 운명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구나. 이렇게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줄이야───!]
사르칸드라가 마법을 파훼하기 위해 로어Roar를 내뱉었지만, 권능을 발현한 시점에서 원인과 결과는 결정되었다.
정해진 수순이었다.
포르메네 자유국 전체가 전율함과 함께 그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은 모든 존재의 시야가 아주 일시적으로 암전했다.
* * *
베르덴은 본 역천의 마법진을 세 번째 형태로 새로 조율해 대마력을 창시했다.
에온의 마법사는 그야말로 베르덴을 ‘뿌리’로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베르덴은 초대 마도왕의 <아케인>에 완전히 적응한 탓에 대마력을 체화할 수 없었다.
초월자의 항상성은 신체의 급격한 변화를 단호히 거부했다.
무엇보다도 <아케인> 대신에 대마력을 사용한다고 해서 따로 얻을 수 있는 특별한 마법적 이점은 사실상 없었다.
베르덴이 자신이 아니라 에온을 위해 대마력이라는 마력 운용법을 설계했으니 당연하다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폭주하는 마도를, 체내에…… 가두었다. 그 흐름이 이어지는 이상…… 단시간 내에는 마도를 진정시키는 건 불가능, 하니.”
리비안트 공국 어딘가의 동굴.
에네트와 제니아가 입구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그 임시 공간에서 베르덴이 말을 이었다.
“그 흐름을 역으로 증폭시켜…… 과부하로 폭주를 정지시킬 거다.”
“신성.”
“항상성이 무너지겠지만…… 괜찮다. 모든 작용을 방해하는 마도도 찰나에 닫힐 테니…… 손상된 육체는, 엘릭서로 보완할 수 있다.”
베르덴이 눈을 감고 호흡을 골랐다.
“하지만 마도가 다시 폭주하면, 결국 원래 상태로 회귀하겠지. 그러니…… 내 마도가 잠시 닫힌 그 순간, 대마력으로 폭주를 상쇄한다…… 다만…… 나 혼자서는 모든 걸, 동시에 하긴 어렵다.”
항상성이 파괴되고, 그 충격에 마도가 강제로 닫힌 상태에서 정상적으로 마력회로를 활성화해 대마력을 일으키는 것은 사실상 도박이었다.
그건 어둠 속에서 양옆이 절벽인 외길을 걷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터였다.
베르덴이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경우라면 말이다.
“이정표를 부탁하마.”
온몸이 무너져도 마력을 발산할 수 있지만 육체가 따라주지 않아 그걸 원하는 방향으로 조작할 여력이 부족하니.
멜라드와 같은 대마력의 사용자가 곁에서 그 길을 끝까지 인도하는 것…… 베르덴은 이것을 의식이라고 표현했다.
베르덴으로부터 현재 상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그가 이 전쟁에서 얼마나 무리했는지 눈으로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멜라드가 입가를 움찔거리며 말을 고르다가 이내 입술을 떼었다.
“위험 부담과 불안정성이…… 너무 큽니다. 차라리 시간을 들여 안전하고 완전하게 회복을 도모하는 것이 어떨는지요.”
“멜라드, 시간이 없다는 걸 알 텐데.”
“시간은 있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나서지 않으면 사람들의 피해가 더 클 거라는 생각에 신성이 조급할 뿐이지요.”
그녀는 베르덴이 대답할 겨를을 주지 않았다.
“카인의 죽음은 신성의 탓이 아닙니다.”
“…….”
“신성이 모든 결과를 자신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건 자유지만, 책임지겠답시고 스스로를 죽이는 것은 되레 카인에 대한 모욕입니다. 그건 카인이 내린 결정이고, 카인이 선택한 희생이었어요. 카인은 멋대로 유니아를 살렸습니다. 신성이 결코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단 말입니다.”
멜라드가 그의 손을 쥐었다.
“신성이 바라는 힘에 의한 자유란 그런 게 아니지 않습니까…….”
올바른 충고였다.
힘에 의한 자유는 베르덴이라는 거대한 규칙 아래 이루어지는 자유다. 운명처럼 모든 존재를 억압하며 그 인과를 결정짓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위험을 자처하다간 언젠가 견디지 못할 순간이 오게 될 겁니다. 신성이 잘못되면 에온도 함께 무너질 겁니다. 그러니, 모두를 생각해서라도 의식을 재고해 주시지요, 부디 부탁드리겠습니다.”
“저 또한 멜라드 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폐하.”
“폐하의 영속이야말로 에온의 미래입니다.”
멜라드에 이어서 그녀와 동행한 에온의 마법사 두 명이 간곡히 부탁했다.
베르덴이 천천히 눈을 떴다.
“언제나……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도 원하지 않는 흐름도 함께 찾아왔다. 내가 상정하지 못한 변수…… 그게 항상 날 이끌었지.”
보헤미른 마탑에서 역천으로 육체를 재구성했을 때 베르덴은 복수도 중요했지만…… 그 근간에는 타고난 한계를 극복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마법들을 배우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거기에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변수들이 뼈와 살이 되어 지금의 베르덴을 만들었다.
“위험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앞에서 주저하고 발길을 돌려 아예 외면했다면 진즉에 다른 길을 걸었거나, 이곳에 닿기도 전에 이미 삶이 끝났을 테지.”
멜라드가 고통스러운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베르덴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정해진 건 없으니, 끝까지 나아가 결국 극복한다. 그게 내가 살아온 방식이다.”
“…….”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멜라드 일행이 끝까지 거부한다면 베르덴도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런데도 베르덴은 명령으로 강제하지 않았다.
어떤 선택을 내리든 그들이 결정한 자유를 존중할 것이다.
“신성, 나중에 그 고집스러운 머리 한 번만 때려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약속했습니다.”
멜라드가 자세를 고쳤다.
“저희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블랙 아워와 소사이어티를 창설한 멜라드 타스테인.
블랙 아워 출신의 마우펠.
소사이어티 출신의 시엘.
세 번째 역천의 마법진이 새겨진 세 사람은 각자 지정된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중심에 앉아있는 베르덴을 원으로 크게 둘러싼 구도였다.
“그럼…… 시작하지.”
베르덴은 체내 곳곳에 억눌러놓은 파멸의 마도에 집중했다. 그리고 억제력을 일시에 풀어헤치며 마력을 최대로 불어넣었다.
감당할 수 없는 압력에 마력회로의 수문(水門)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전신의 피가 역류했다.
푸확!
장기 일부가 자연적으로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에 놓였다. 완전한 소실이었다. 증폭됐던 검붉은 마력은 베르덴의 항상성을 부수는 것에 그쳐 주변 어디에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마력회로가 붕괴한 탓에 길을 잃어버린 마도가 곧 폐쇄되었다.
‘지금.’
베르덴은 여념이 없어 말할 수도, 신호를 보낼 수도 없었지만, 멜라드는 놀라운 집중력으로 정확한 기회를 포착했다.
<대마력>
멜라드를 기점으로 시작된 대마력의 흐름이 그를 에워쌌다.
꽈드드드득……!
베르덴은 토혈을 억누르기 위해 자기 목을 조르며 심장을 뛰게 했다.
가장 순수한 마력이 밖으로 흘러나와 힘과 방향이 유도됐다. 대마력이 베르덴에게서 탄생했기에 가능한 현상이었다.
‘대뇌, 소뇌, 심장, 폐, 간, 신장, 뇌하수체, 척수, 눈, 흉선, 혈관, 신경계, 골수, 피부───’
베르덴은 신체 장기를 하나하나 떠올리며 마력이 그쪽을 경유하도록 했다. 실패하면 다음의 순환에서 억지로 연결했다. 또다시 실패하면 그다음의 다음의 순환을 기다렸다.
전신에서 마력의 빛이 뿜어져 나와 동굴의 암흑을 밝혔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멈췄던 <파멸>이 폭주하여 대마력과 충돌했다.
──! ──! ──! ──! ──!
빛이 무겁게 발광했다.
푸른 광채가 어둠을 몰아내면 검붉은 광휘가 모든 빛을 앗아가길 반복했다. 멜라드, 마우펠, 시엘은 눈을 아예 감고 압박감에 전신이 떨리는 와중에도 마력에만 몰두했다.
그러다가 다시 빛이 밝았을 때 동굴 벽에 그림자가 떠올랐다. 어둠이 오고, 다시 빛이 찾아왔을 때 또 다른 그림자가 현현했다.
기도하는 ‘여인’.
외눈의 ‘거인’.
검을 든 ‘사내’.
모두가 알아채지 못한 사이 세 명의 그림자가 동굴 전체를 원으로 크게 감싸고 있었다.
이윽고 빛과 어둠이 네 번째로 교차하자 이번에도 그림자가 드리웠다. 정확히는 그림자를 가진 인물이 인지를 속이고 그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자력으로 여기까지 닿았는가+
초대 마도왕이 말했다.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