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6화 소외자 (3)
마그누스 은행 – 가르간트 지부.
세계 회의에 대륙 3대 은행 대표로 참석한 웬델 마그누스는 아노니움 은행장과 다이나 은행장과 함께 밀실 회동을 했다.
아침 내내 숙면해 조금이나마 피로를 해소한 웬델이 자리에 앉았다.
다이나 은행장이 물었다.
“세계 회의는 어땠나.”
“나 같은 평범한 인간 따위가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네. 초월자들의 힘이 아니었다면 도중 정신을 잃었겠지. 후.”
“고생했군.”
아노니움 은행장이 지팡이에 양손을 올린 채 그를 격려했다.
“그래서 결론은 내릴 수 있었나?”
“……내릴 수밖에 없었지.”
웬델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얼마 전, 창립자께서 ‘황금의 죄인이 에온의 품에서 깨어났다’고 말씀하신 것을 모두 기억하고 있을 걸세.”
“물론 기억하네.”
“허허헛.”
아노니움 은행장이 껄껄 웃었다.
“아무리 내가 늙었어도 기억력은 아직 쇠퇴하지 않았네. 혼란이 깊어질수록 창립자께서 두려워하신 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
“오늘부로 혼란은 더욱 가중될 걸세.”
웬델이 세계 회의에서 보고 들은 모든 정보를 두 은행장에게 공유했다.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던 터라 진실의 서약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걸 몰라도 행동의 근거가 될 정보는 차고 넘쳤다.
“우리가 은행장으로서 마지막 준비를 갖춰야 할 때가 온 것이지.”
“아, 마침내.”
3대 은행의 창립자.
죽음의 죄인.
고물상, 레지날프.
은행이 대륙의 재계를 휘어잡게 된 건 창립자의 결과물.
3대 은행장은 수백 년 전부터 창립자가 부여한 의무를 대대로 이행하고 있다. 그게 무엇에 대한 대비인지 알지도 못한 채로.
아노니움 은행장이 천천히 고개를 들며 눈을 감았다.
“나의 대에서 ‘황금 비고’를 개방할 순간이 올 줄이야…… 감개가 무량하군.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소원이었는데.”
다이나 은행장이 입꼬리를 올렸다.
“고생한 보람이 있었어. 그래도 아직 개방한 건 아니니 빨리 죽지 말게. 늘그막에 비명횡사하는 경우가 허다하니 건강 잘 챙기고.”
“아무렴 마지막 의무가 코앞에 있는데 허무하게 죽을까. 설령 죽어도 어떻게 해서든 살아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게.”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은행장들에게서 불안의 빛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사명의 끝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
“전 대륙에 자금을 분산해 유치해 놓았으니 이제 사들이기만 하면 되네. 시장이 괴리를 느낄 수 있지만 추적은 불가능할 걸세.”
“충분하고도 넘치는 돈이 있다면 웬만한 것은 다 할 수 있지.”
“하하하, 그게 자본의 힘이 아니겠나.”
마그누스 은행장, 웬델 마그누스가 힘차게 몸을 일으켰다. 다른 두 은행장도 기립해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자, 그럼 업무 보러 가세.”
* * *
세계 회의가 폐회한 직후 모험가 본부 길드장과 흑해는 불굴의 이닉토르 등의 호위를 받으며 모험가 길드 본부로 복귀했다.
다른 흑요 등급 모험가들은 멋대로 흩어졌다.
모험가의 본질이 그렇다.
그들은 최소한의 의무만 이행하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냥꾼들이었다.
“…….”
흑요 등급 모험가───현시대에서 가장 많은 토벌 의뢰를 완수한 ‘완벽한 모험가’가 나무 밑동에 몸을 기대고 있다.
절벽 아래로 펼쳐진 자연과 저 멀리 있는 거대 도시의 정경이 퍽 장관이었다.
“세계 회의가 끝날 무렵에 로니아 왕국의 보좌관 한 명의 귀신에 씌어 신성에게 죽었다고 들었소. 두 번째 하인이 그렇게 대놓고 움직이다니. 역시 불길한 예감은 틀리기를 바라는 건 무의미한 것 같구려.”
완벽한 모험가가 뒤통수를 나무에 갖다 댔다.
“아직 말도 안 했는데, 그 이야기는 어디서 들은 겁니까?”
“여기저기 눈과 귀가 있으니.”
죽음의 죄인, 레지날프가 뒷짐을 진 채 숲속에서 걸어 나왔다. 나무 옆에 선 그가 완벽한 모험가와 함께 세상을 응시했다.
“한 명의 모험가로서 세계 회의의 결과는 마음에 들었소?”
“모험가의 입장이라…… 나쁘지는 않습니다. 특히 마경의 괴수들을 토벌하는 건 모험가들의 꿈이기도 하니까. 모험가 길드 본부에선 곧 마경 탐사에 대한 회의에 들어간다더군요.”
“토벌 전문 집단다운 처세군. 그나저나 처음에 마경 정벌이 부결되자 자리를 박차고 나온 모험가가 있다고 들었는데.”
“아.”
완벽한 모험가가 피식 웃었다.
“마경 정벌이 재발의되고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니 곧장 자리를 뜨더군요. 감정이 상당히 고양된 듯 보였습니다. 가장 과묵한 사내인데.”
마의 공포.
모험가 길드 본부장과 흑해 이외에는 아무도 그 이름을 모른다. 갑옷 안에 어떤 외모가 있는지도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
그나마 초월자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막강한 무력을 가진 것과 마경을 단신으로 돌아다닌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이다.
나름대로 모험가 경력을 쌓다 보면 마의 공포에 관심이 가기 마련이지만, 완벽한 모험가는 호기심에 선을 그었다.
그런 거에 시간을 낭비하라고 붙어 있는 목숨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임져!!!!!!!!!!
두근.
완벽한 모험가가 갑옷에 한 손을 올렸다. 가슴 정중앙에 박힌 고대 아티팩트의 기운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아직도 통곡이 심하오?”
“괜찮습니다. 제가 짊어진 죄니까요.”
“머지않아 청산할 날이 올 거요. 우리가 바라 마지않던, 그리고 애써 오지 않기를 원했던…….”
정적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신성은 직접 보니 어땠소?”
“왜 초대 네크로맨서께서 그 초월자를 조력자로 결정했는지 알겠습니다. 확실히 신성보다 더 나은 적임자는 세계 회의에 없었습니다.”
“그럴 줄 알았소. 곧 죄인의 신분으로 마주하게 될 테니, 과거의 기억을 잘 정리해 오시오. 설명이 지루해지지 않도록 말이오.”
“노력해 보겠습니다.”
완벽한 모험가가 화제를 전환했다.
“그보다 이데라트 연맹국에서 용검, 마그라스의 소재가 히아레마르 내해에 나타날 거라고 하더군요. 거기서 레논 버나드가 웬 예언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혹시 짚이는 부분이 있습니까?”
“그 예언을 썼다던 바아렌 모루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은 있지만, 용검에 관한 건 금시초문이오. 이데라트 연맹이 그런 걸 갖고 있었다는 것도 내 정보망에는 잡힌 적이 없었소.”
“정황상 주검의 영광이 꾸민 짓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한데 일련의 흐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다른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더군.”
완벽한 모험가가 시선을 높였다.
“어떤……?”
“모종의 세력이 주검의 영광에게 조력하고 있을 최악의 가능성.”
그렇지 않고서야 루아스 교국조차 모르는 장소에 있는 옛 왕의 신체들을, 주검의 영광이 신속하게 모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우연에 행운이 겹친 게 아니라면 말이다.
문득 섬뜩했다.
루아스교와 죄인들이 알지 못하는 정보를 갖고 있고, 그 주검의 영광의 배경을 자처하고 있다면…… 얼마나 강대한 세력일까.
게다가 그들에 관한 작은 소문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 수백 년 동안 대륙에서 활동해 온 레지날프의 마음에 자꾸만 걸렸다.
“물론 아직은 가능성에 불과하오. 부디 기우이길 바라야지. 일단 이쪽은 내가 좀 더 알아볼 테니 크게 신경 쓰지 마시오. 어쨌든.”
레지날프가 말을 이었다.
“안데스 님을 뵙고 오는 길이오. 형용할 수 없는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으니 황금의 죄인도 서서히 기억을 되찾을 거라고 말씀하셨소. 실제로 주검의 영광의 행동도 과격해지기도 했고.”
“……고통스럽겠군요.”
“황금의 죄인이 각오한 결정이오. 그런 격통쯤은 능히 견디겠지. 우리는 평소처럼 재회만 기다리면 될 것이오.”
눈이 내린다.
체온에 금방 녹아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자그마한 얼음 결정이 피부에 내려앉았다. 하지만 레지날프의 몸은 이미 식은 지 오래였다.
“과연 우리가 결국에 막을 수 있을 것 같소? 옛 왕의 부활을?”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말하자면.”
완벽한 모험가의 손가락이 단단한 대지를 파고 들어갔다. 8세기 전의 지옥도가 기억을 타고 눈앞에 펼쳐졌다.
시체의 산 위에 군림한 절대자가 거대한 검을 든 그 공포가.
“옛 왕이…… 아칸드 형님이 영원히 사라진다는 건, 상상할 수 없습니다. 아직은.”
완벽한 모험가───망국의 죄인, 카스티안 리니게아 타인 크세리온 2황자는 여전히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 *
“이렇게 여러 사람이 오실 줄은 몰라서 준비가 미, 미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기, 음료는…….”
“마시고 오는 길이다. 신경 쓰지 말도록.”
베르덴과 틸버가 자그마한 테이블을 중앙에 두고 마주 앉았다. 알파는 보란 듯이 테이블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집에 꽤 어수선했다.
골렘이나 마법적 기술을 연구한 흔적이 곳곳에서 보였는데, 틸버에게는 매번 정리정돈하며 연구하는 습관은 없는 듯했다.
아무튼.
그 외에는 딱히 앉을 자리가 없었기에, 프레임을 키운 베타의 등 위에 아드리안과 이자벨라가 나란히 걸터앉았다.
참고로 문은 어찌저찌 고쳤다.
“오, 와아아…….”
틸버가 돌돌 뭉친 이불을 끌어안은 채로 알파와 베타를 번갈아 관찰했다. 불안해하면서도 욕망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다.
과연 펠디안느의 말마따나 골렘 기술에 미쳐 있는 모습이었다.
‘순수하군. 게다가 겉모습과 달리 마법적인 경지 자체는 높은 편이고.’
틸버의 내면을 통찰한 판단이었다.
베르덴이 말했다.
“너는 누구지?”
“예? 아! 소,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틸버 스팬기어라고 합──”
“이름만이 아니라 네가 어떤 사람인지 묻고 있는 거다. 누군지 알아야 알파가 너를 제자로 삼을지 말지 결정할 수 있으니까.”
[심사 준비 완료.]
팟!
알파가 면접관처럼 외눈을 빛냈다.
사실 그래도 위압감이 느껴지긴커녕 귀엽기만 할 뿐이었지만 오늘 이곳의 주인공은 베르덴이 아니라 알파였다.
알파를 제외한 베르덴 일행은 즐거운 마음으로 심사를 지켜봤다.
[자기소개. 시작.]
“아, 저, 그러, 그러니까.”
틸버가 허둥지둥댔다. 막상 타인을 앞에 둔 걸 새삼 인지하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이불이라도 덮고 숨고 싶었다.
그래도 애써 입을 열었다.
그동안 소문으로만 듣던 두 인공 골렘을 드디어 만났으니까. 적어도 오늘은 지식욕이 그의 정신병을 이겨 냈다.
틸버는 5위계 중위 마법사였다.
틸버도 마법사였다.
“저는 틸버 스팬기어, 라고 하며.”
틸버가 조금 더 용기를 냈다.
“보다시피 왜, 왜소증을 앓고 있습니다.”
* * *
틸버 스팬기어의 삶은 태어나 성장기를 지나며 기구해졌다. 아무리 먹어도 몸은 정상적으로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극히 드물게 이런 저신장증이란 기형을 갖고 있는 사람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허용된 루아스교의 기적으로는 감히 어찌할 수 없는 불치병.
마법의 시대가 시작되기 전에 왜소증을 앓은 사람들의 말로는 대개 비슷했다.
광대, 혹은 특이한 노예.
보통 그들의 외견은,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에 우스꽝스럽고 혐오스러웠다. 몇 살짜리 아이처럼 작은 성인이라니?
현대에 이르러 노예제가 세계적으로 폐지되면서 그런 분위기는 다소 사라졌지만, 여전히 혐오와 기피, 조롱의 대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특히 풍족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난 난쟁이 인간은 골칫거리에 불과했다.
아버지에게 허구한 날 맞고.
어머니에게 멸시받고.
끝내 밥만 축낸다면서 한참 어린 나이에 길가에 버려져 세상의 모진 시선과 괴롭힘을 홀로 견뎌야만 했던 가련한 인생.
그것이 틸버의 먼 과거였다.
“그래도 우연히 저를 구해 주신 종군 마법사께서, 도, 도와주신 덕분에 마법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이네요.”
[스승님?]
“그분은 재능이 아까워서 마법의 기초만 쌓도록 해 준 거니 스승님이라고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제게 있어서 스승님입니다. 덕분에 십 대부터 마법계에서 화, 활동할 수 있었죠. 그때 처음으로 골렘에 관한 지식을 접했고, 돈이 좀 모이면서 나름대로 독자적인 연구를 시도했습니다. 이 이력이 페, 펠디안느가 저를 아티슨 마탑에 영입한 계기가 되었고요.”
틸버가 작은 손가락을 서로 부딪치며 마법계에서 무엇을 했는지 설명했다.
필시 혹독한 마법계에서 부당한 일들을 당했을 터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대인기피증이 저렇게까지 심해지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그는 불우한 과거를 최소화하고, 오직 자신의 경력만을 중점으로 이야기꽃을 열정적으로 피웠다.
비록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는 못했지만, 자기 자신의 기억에 잠기자 말투에서 조금씩 어눌함이 사라졌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는 기형을 가졌으나 어떤 종군 마법사의 선의로 마법의 재능을 개화한 작은 마법사…… 인상적이군.’
마법사가 얼마나 배타적인지 몸소 체험한 적이 있는 베르덴에게 틸버의 내력은 인간적으로 마음이 끌리는 경향이 없잖아 있었다.
펠디안느가 어째서 그렇게 신경을 써 주고 있는지 나름의 이해가 될 정도로.
“이게 저, 틸버 스팬기어입니다.”
틸버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베르덴과 알파를 포함한 모두가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헉. 저도 모르게 불안 증세가 도진 틸버가 몸을 확 움츠렸다.
“죄, 죄송합니다. 혹여 실수라도 할까 봐 미리 며,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정리한 건데, 제 말이 너무 쓸데없이 길어져서…….”
[질문.]
알파가 한쪽 손을 들었다.
[꿈이 뭐임?]
“꿈이요……?”
[꿈.]
틸버가 손을 꼼지락거렸다.
“꿈, 꿈, 잠시만요, 제 꿈은.”
틸버가 의자에서 뛰어내리고는 바닥에 널린 종이 뭉치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직접 세세하게 그린 듯한 자료들을 가져와 알파 앞에 나열했다.
“제, 제가 구상한 골렘입니다. 언젠가 이런 걸 제작해 보고 싶습니다.”
자료 안에는 가르간트의 빌딩에 육박하는 초거대 골렘이 담겨 있었다. 베타의 최대 프레임보다 두 배 이상은 되는 크기였다.
알파가 다시 물었다.
[제작하면?]
“제작해서…….”
틸버가 창피한 듯 베르덴을 슬쩍 보고는 뒤에 있는 자료를 보였다. 그건 벨디른 공화국에 관련된 세계 신문의 일부분이었다.
유골룡을 토벌한, 당시 초월자가 아니었던 베르덴의 모습이 눈동자에 반사됐다.
“언젠가, 저도 드래곤을 잡고 싶습니다.”
아무리 허무맹랑하고 무모한 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일지라도 포기하는 건 마법사로서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니다.
심지어 불가능을 가능케 한 위대한 마법사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베르덴 님처럼요.”
신성(新星).
마법계의 다른 많은 이들처럼 틸버에게 베르덴은 별이었고 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