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9화 급진전 (5)
아르카디옴의 주인이 행차하자 셸브론이 벌벌 떨기 시작했다.
“호스트시여. 이, 이것은…….”
{쉿.}
호스트가 평범한 인간보다 두 배 이상 기다랗고 가느다란 검지를 폈다. 셸브론의 입이 강제로 닫히며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바싹 굳었다.
{오랜 시간 동안 주빈은 존재하지 않는 계급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여기 네 번째 주빈이 나타났으니 아르카디옴의 지식인이자 귀빈으로선 지적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베르덴이 마력을 거두자 루자크가 당장 일어나선 옆으로 비켜 섰다. 호스트가 걸음을 옮겨 루자크가 방금까지 앉아 있던 자리를 차지했다.
{그것이 탐구심이지.}
베르덴이 호스트를 마주 바라봤다.
“무슨 상황인지 알고 있었군.”
호스트의 눈동자는 흰자와 검은자의 구분 없이 그저 새하얬다.
{내가 모르는 건 거의 없다.}
“그런데도 방치한 이유는?”
{안다고 해서 행동할 이유는 없으니. 책임을 지는 이는 결국 주체이며 본인이다. 운명의 실마저 빠르게 끊어지고 있는 지금은 더욱이. 다만 너희를 초대한 자로서 상황을 정리할 의무는 있지.}
호스트가 다리를 꼬으며 양손을 모았다.
{나는 주빈의 일행이 도착하면 아르카디옴으로 안내하라고‘만’ 했다. 그래서 이름을 알려 주지 않은 것이고. 그걸 인지하고 있음에도 [그링 아르카넘]을 자극해 통로 개방 시간을 앞당긴 이유. 이에 변명할 시간을 주겠다.}
셸브론의 입이 열렸다.
“저는……!!”
“변명하지 않겠소. 그저 내 탐구심을 우선했을 뿐이니까.”
루자크가 변론의 기회를 버렸다. 자연스럽게 한낱 집사 중 한 명에 불과한 셸브론의 기회도 함께 사라졌다.
{책임은 어떻게 지겠나.}
“귀빈의 면책권을 쓰겠소.”
{불가.}
호스트의 다소 얇은 문어 머리에 달린 촉수가 꿈틀거렸다.
{면책권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지적 경계’를 감당하도록.}
“……주빈을 먼저 만나 본 죗값이 이리도 무거울 줄이야. 과연 아르카디옴이 탄생한 이래 가장 존귀한 네 명 중 한 명다운 대우로구려.”
루자크가 복도로 향했다.
“감당하고 돌아오겠소.”
“루자크 경, 저는!!”
지적 경계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멀어져 가는 루자크의 뒷모습은 마치 죽음을 각오하기라고 한 듯 결연했다.
그런 와중에도 루자크는 셸브론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베타가 물었다.
[그게 끝입니까?]
{그렇지 않다. 이는 주빈에게 실례를 범한 대가일 뿐이지. 너희들을 위한 배상은 루자크의 처벌 이후에 집행될 것이다. 루자크의 재산으로.}
호스트가 약간 고개를 틀었다.
{셸브론, 너는 어떻게 주빈에게 보상하겠는가.}
셸브론이 무릎 꿇었다.
“호스트시여! 부디 처지를 헤아려 주십시오! 저는 루자크 경의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아르카디옴의 집사로서 귀빈을 받드는 것이 제 의무기에……!”
{애초에 그 점을 참작하지 않았다면 너는 이미 ‘지식의 매립지’로 전락했다.}
셸브론이 얼어붙었다.
호스트가 베르덴을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이렇듯 주빈은 생소한 위치에 있다. 지식으로는 알고 있어도 습관적으로 귀빈 이상으로 생각하지 못하지. 하찮은 지성의 한계랄까.}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아르카디옴의 27번째 집사, 셸브론. 주빈이 기다리고 있으니, 네 처우는 잠시 보류하겠다.}
“호스트시여─”
어느샌가 셸브론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셸브론이 있던 자리엔 따개비 부스러기만 남아 있었다.
{다른 귀빈과 하객들도 애셔 너에게, 너희들에게 흥미를 품고 있다. 루자크처럼 지식인을 자처하며 위험을 감수할 자도 더러 있지. 진정한 아르카디옴이 시작되면 심심하진 않을 거다.}
“그 지식인에는 너도 포함될 텐데.”
{말했을 텐데. 너는 진미로서도, 참가자로서도 부족함이 없다고. 물론 아직은 어디까지나 손님으로 예우할 것이다. 그러니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도 좋다.}
의의로 쉽게 질문할 시간이 생겼다.
‘당연히 주제는 이곳 아르카디옴으로 한정되어 있겠지만.’
베르덴도 아르카디옴의 게임, 그리고 빛이 닿지 않는 심해 속 저택 등 궁금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호스트의 권유를 거절하지 않았다.
알파도 마찬가지였다.
[질문.]
알파가 호스트를 가리켰다.
[문어 머리. 진짜?]
{…….}
호스트는 잠시 침묵하다가 한숨을 내쉬듯 촉수를 살짝 움직였다.
{올다르크의 창조물 아니랄까 봐 실례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군.}
* * *
호스트는 알파와 베타의 근원을 한눈에 정확히 꿰뚫어 봤다. 게다가 운명의 실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다.
모르는 게 거의 없다는 그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초대 마도왕과 안면이 있나?”
{그가 훗날 최후의 저항자라 일컬어지기 전에도 있었다. 종류는 다를지언정 피차 자기 자신의 지식을 추구했으니.}
다시 말해 ‘당신’이 운명을 만들기도 전부터 초대 마도왕과 인연이 있었다는 뜻.
호스트는 대체 어느 시대의 존재일까.
그리고.
‘예상대로라면 호스트는 물결치는 바다, 운명의 사도 중 한 명이다. 결국 초대 마도왕과 적대 관계일 텐데…… 왜 적의가 없는 거지?’
사막의 신이 된 이슈르처럼 운명으로서 완성되어 가는 것도 아니고.
옛 왕이나 거인처럼 봉인된 것도 아니다.
보다시피 빛을 중심으로 집결한 인류나 하늘에 왕관을 바친 왕처럼 아예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것도 아니다.
호스트는 차라리 드래곤과 비슷했다.
적룡 사르칸드라가 다름 아닌 마해에 둥지를 튼 것처럼…… 호스트는 바다 깊숙한 곳을 안식처로 삼고 있었다.
여러 의문이 교차한다.
베르덴이 생각을 정리하고는 알파와 베타를 곁에 둔 채 물었다.
계단을 오르듯 순차적으로.
“서로 공통점이 없는 주변 인물이 내게서 바다 냄새가 난다고 하더군. 전부가 그런 게 아니라 오직 일부만이. 그 원리가 궁금한데.”
{네가 가진 [그링 아르카넘]은 말 그대로 바다와 직결되어 있다. 통로가 연결되면 바다의 향기가 나기 마련이지. 다만 이번 경우엔 루자크와 셸브론이 [그링 아르카넘]을 자극했기 때문에 무차별적으로 냄새가 먼저 전해진 것이다. 우연인 셈이지.}
아무래도 특정 인물만이 바다의 냄새를 감지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호스트의 내면을 통찰할 수 없어 거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애셔, 알파, 베타. 너희들이 이곳에 발을 디딘 건 내가 초청했기 때문이다. 하나 통로가 예정보다 일찍 개방된 이유는 그 과정에서 네가 [그링 아르카넘]에 위협을 가한 탓이지. 루자크와 셸브론은 본인들이 열였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원인을 야기한 건 둘이니 후자라고 해도 차이는 없겠지.}
“무슨 뜻이지?”
{[그링 아르카넘]은 단순한 책이 아니다. 오히려 생물과도 같지. 네가 주인이니 앞으로는 주의하기를 바라마.}
베르덴이 아공간이 아닌 품속에 넣어 놓은 세계 금서를 의식했다.
살아 있다니.
생명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지만 일단 호스트의 충고를 기억해 두었다.
“오늘과 같은 불상사가 없다면 함부로 대하는 일은 없을 거다.”
다시 문답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이곳에서 [그링 아르카넘]을 자극하지도 않았는데 바다를 감지하는 경우는 뭐지?”
{바다에 지극히 예민하다고 볼 수 있다.}
베르덴이 암시한 인물은 모험가 길드의 흑해, 테아렐이었다. 과연 바다의 초월자라 불리는 만큼 남다른 감각이다.
역시 그녀가 바다를 경계하면서도 강한 흥미를 품은 까닭은, 눈앞에 있는 호스트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였다.
{참혹한 전장이군.}
호스트가 시선을 내려 지적 충돌 게임의 현장을 시야에 담았다. 루자크의 진영은 사실상 제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알파가 마법의 절대자 기물을 가리켰다.
[알파. 승리.]
{최고의 지성을 일부 물려받은 존재이니 당연한 결과겠지. 지적 충돌의 승패는 아직 이뤄지지 않은 수를 계산하는 능력이 큰 비중을 차지하니.}
[호스트. 이 보드게임의 정체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베르덴이 물어보려던 의혹을 베타가 대신해서 언급했다. 이번에도 호스트는 기꺼이 대답을 아끼지 않았다.
{지적 충돌은 과거의 사실을 기반으로 한 간단한 놀이다.}
호스트가 길쭉한 손가락을 뻗어 루자크의 기물을 직접 움직였다.
그것도 두 개를.
태고의 지식 타일을 지나 세 개의 절대자 타일을 거친 그것들이, 게임의 규칙에 따라 절대자로 변하기 시작했다.
알파가 소환한 것을 포함해 총 세 개의 절대자 기물이 보드 위에 놓였다.
{침묵의 사막에서 고대의 신들이 참패하고 끝내 몰락한 대분기.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고 발발한 ‘운명전’이 배경이지.}
“……!”
{운명의 창조자, 운명의 저항자. 당시에는 두 개의 진영이 있었고, 가장 강력한 태고의 존재 셋이 있었다.}
탁…… 탁…… 탁.
{태초의 마법사, 태초의 드래곤, 그리고 지금은 이름과 이명을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당신’.}
[마도왕 폐하.]
스태프를 손에 쥔 마법의 절대자 기물.
잿빛이 특징인 거룡의 기물.
로브로 얼굴을 가린 채 양손 모아 기도하는 어느 여인의 기물.
그것들이 베르덴의 정면을 마주 바라보며 일렬로 나열되었다.
{애셔, 너에겐 익숙할 것이다. 이미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접한 적이 있으니.}
베르덴이 패잔병의 감옥에서 잿빛의 용을 만난 건 최근의 일이다. 혹시 모를 금기 탓에 아무에게도 해당 정보를 발설하지 않았다.
아드리안에게도, 이자벨라에게도, 알파에게도, 베타에게도.
[태초의 드래곤?]
베르덴이 조금 늦게 입술을 뗐다.
“……소환 마법을 시험했을 때 만났다. 금기에 저촉하는 내용이 있어 말할 수 없었지.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가벼운 입은 재앙을 부르는 법이니.}
호스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머지 문답은 다른 장소로 이동하면서 마저 하도록 하지. 너희들을 초대한 이유는 아르카디옴을 설명하기 위해서니까.}
[잠시 멈추십시오.]
베타에게 시선이 쏠렸다.
[지적 충돌에서 절대자 기물끼리 충돌하면 어떻게 됩니까?]
승리 조건이라 다름 없는 기물을 서로 소환하면 어떻게 될까.
베타의 순수한 의문이었다.
{이 보드로 표현할 수 있는 결과는 한정되어 있다.}
호스트가 마법의 절대자 기물과 ‘당신’의 기물을 서로 부딪쳤다.
그 순간 빛과 파동이 보드를 덮쳤다.
콰아앙!
보드가 파괴됐다.
알파의 기물과 루자크의 기물이 너 나 할 것 없이 여파에 휩쓸려 산산이 부서지거나 소멸하거나, 멀리 나가떨어졌다.
지적 충돌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붕괴되었다.
{참고가 되었길 바라지.}
“호스트.”
베르덴이 시선을 높였다.
“너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호스트가 평소 버릇인 듯 뒷짐을 지고는 상체를 굽혔다. 서로의 시선이 조금 더 가까운 거리에서 교차했다.
{적어도 네가 원하는 해답은 전부.}
* * *
서대륙 남쪽에 있는 두 개의 마탑 중 하나인 헬리온 마탑은 꽤 오랜만에 대대적인 의전을 진행 중이었다.
헬리온 마탑의 영역에 도열한 수많은 마법사가 마탑의 귀중한 손님을 환영했다.
“세계 회의가 폐회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이렇게 다름 아닌 헬리온 마탑에서 다시 뵈니 감회가 참 새롭습니다, 제라클 디안 세레아노르 아르나크 황제 폐하.”
헬리온 마탑주, 트리톤 마르투스는 로브 위로 두드러진 거대한 근육을 꿈틀거리며 공손히 제라클 황제의 손을 잡았다.
전선전쟁이라는 이명답게 곳곳에 난 흉터가 그의 삶을 대변했다.
제라클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자네와 같은 마음이네. 부디 오늘의 대화가 위대한 아르나크 제국과 현명한 헬리온 마탑 간의 관계를 진전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길 바라지.”
“하하하하! 현명하다니. 폐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트리톤이 한껏 웃었다.
“그럼 제가 직접 두 분께 헬리온 마탑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황제 폐하를 위해 특별히 중상층의 연구실 일부도 개방해 놓았으니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트리톤을 따라서 제라클 황제와 리반데일 대공 등 제국 인사가 마탑에 입성했다. 복도를 걸으면서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지만 역시나 겉모습과 달리 트리톤도 만만치 않았다.
순박한 듯하면서도 교묘한 처세술.
트리톤 마르투스는 전쟁에 익숙했기에 오히려 속임수에 능했다.
‘어떻게든 제국과의 계약을 성사시킨다.’
세계 회의의 여러 안건과 마탑 차원의 계약이 이 회담에 달려 있다. 트리톤은 마탑주로서 내심 각오를 다졌다.
그렇게 그들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갔나?]
텅 빈 복도에 미약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반응은 전무했다.
[갔구나!]
톡.
복도 천장에 달라붙어 있던 천공룡 아에로돈이 바닥에 착지했다. 기척은 희미하다. 그리고 강력한 마력이 아주 위쪽에서 느껴지고 있다.
마침내 기다리던 순간이 오고 만 것이다.
마탑의 동력원이 코앞이다!
[후하하하하하! 올다르크 놈! 이 천공룡을 너무 가볍게 봤구나. 그때 내 영혼을 죽이지 않아서 이렇게 후환을 남기다니.]
녀석이 이빨을 드러냈다.
[그 대가로 네 비밀을 샅샅이 파헤쳐 주마.]
헬리온 마탑 침입 성공.
미니 드래곤───아에로돈이 마탑의, 초대 마도왕의 비밀을 향해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