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74화.
“저를요?”
“네.”
“……제가 왜 나오죠?”
도현의 떨떠름한 반문에 아리드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때문에 불렀어요. 그건 정말이지…… 끔찍한 장면이었거든요. 불타는 마을…… 아니, 마을뿐만이 아니에요.”
“…….”
“어디까지 번져있는지 모를 불길과 지상을 잠식한 심연들이 끊임없이 이어졌어요. 어쩌면 세상 전부가 그런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런 곳의 중심에 제가 있었다는 건가요?”
“네. 사실 이해가 되지 않기는 해요. 과연 생명체가 살 수 있을까 싶은 곳이었거든요.”
……메인 퀘스트와 관련이 있는 건가?
도현의 얼굴이 점차 딱딱하게 굳어갈 때였다.
“그리고…… 그,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하기 곤란한 걸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뗐다 반복하던 그녀가 이내 힘겹게 말했다.
“……하늘을 지배한 거대한 존재감. 솔직히 전혀 믿기지 않지만…… 아니, 믿고 싶지 않지만. 착각이 아니라면 그건 분명…… 신이었어요.”
“방금…… 신이라고 하셨습니까? 맙소사. 그들이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단 건가요? 그런…… 하지만 저한테도 그런 말씀 없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차마 입 밖으로 낼 용기가 없었어요. 어쩌면 현실을 부정한 걸지도 모르죠. 무엇이 되었든 시간이 필요했어요.”
“아…….”
망연자실하다.
그 단어만큼 앨로윈의 표정을 설명할 좋은 표현이 있을까. 어지간히 충격인 듯 보이는 모습에 도현은 내심 감탄했다.
‘저 예언 능력. 생각보다 정확도가 더 높나 본데?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 걸 보면.’
‘그러게, 주인. 보통 예언자라고 불리던 자들도 반은 틀리던데.’
‘으음.’
‘리자리자!’
‘그럼 여왕이 본 장면이 진짜 미래의 한 장면이란 건데…….’
결국, 도현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기 위해 물었다.
“확실한 미래인가요? 예언이라고 해도 틀리는 경우도 많다 들었습니다만.‘
“맞아요. 다른 예언들이 그렇듯, 제가 본 미래도 필연적이지는 않아요. 그보다는…… 일어날 수도 있을 미래의 장면을 보여주는 것에 가깝죠.”
“……다만, 그 확률이 높다는 게 문제입니다.”
“얼마나 높나요?”
“흐음, 제가 보아온 바로는 7대3 정도가 될 겁니다.”
앨로윈의 대답에 지하드가 눈을 크게 떴다.
-……7대3이면 꽤 높은데, 주인? 일어난 경우가 7이라는 거 아니야?
“아쉽게도, 네. 맞아요. 제가 보는 미래는 단편적인 장면.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때가 되면 운명처럼 일어나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제 예언은 가까운 미래를 보여준다는 거예요. 지금까지 보아온 미래의 장면은 모두 늦어도 1년 안에는 일어났었죠.”
그런 지하드의 호들갑에 아리드나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마저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웠지만, 도현은 애써 신경 쓰지 않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건 뭐, 첩첩산중도 정도가 있지…….’
신과 싸우고 나니, 전 심연의 강자가 나오고.
전 심연의 강자를 처치하니 불멸의 주인이 나오더니, 이젠 뭐? 세계 멸망?
심지어 신과 심연이 한 번에 나온다니, 이게 뭔 추석 종합선물도 아니고…….
‘템포가 너무 빠른 거 아닌가?’
대개 RPG가 그렇듯, 각 게임에는 하나의 세계관이 있다.
그 세계관의 주축이 되는 에피소드가 있고 그것을 메인 퀘스트라 칭한다.
그리고 이런 메인 퀘스트들은 보통 소모 속도가 무척 느린 편이었다.
그야 당연하다.
‘메인 퀘스트의 끝은 곧 게임의 엔딩을 뜻하니까.’
괜히 운명의 조각 10개 모으기가 메인 퀘스트겠는가.
당장 도현도 본대륙에서 그리 차곡차곡 조각을 모았어도, 지금 고작 4개밖에 없다.
남은 6개를 모을 걸 생각하면 한참 남았다고 봐야 했다.
‘솔직히 다 모을 수 있나 싶긴 해. 현재 알려진 신대륙은 세 개뿐이니…….’
신대륙에 여러 개씩 퍼져있는 건가 했는데, 엘라니스에 하나밖에 없는 듯한 걸 보니 그것도 아닌 거 같고.
그냥 아직 열리지 않은 신대륙이 있거나, 뭐 숨겨진 콘텐츠가 있겠구나 하고 넘겼었다.
애초에 도현도 메인 퀘스트의 끝을 보고 싶을 뿐.
현실적으로 당장 결말을 볼 수 있다곤 생각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몇 년 정도는 걸리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얼마 전까지는.
‘콘텐츠 소모 속도가 너무 빨라.’
난이도가 괴랄한 것까진 그럴 수 있다.
애당초 3년은 더 지나야 발생할 메인 퀘스트를 앞당긴 것이니, 밸런스 차이가 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으니까.
하지만 소모 속도가 이 정도로 빠른 건 이상했다.
이건 마치…… 누군가의 의지가 개입된 것 같지 않은가.
-크, 크흐흐……. 곧 다시 보게 될 거다. 이로써 고대의 약속은 끝이 났으니…….
불멸의 주인의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불헌 듯 떠오르는 건 왜일까.
허망하게 돌아가면서도 그의 얼굴에 조금의 불쾌함도 없던 게 신경 쓰인다.
불쾌해하긴커녕, 기꺼워하던 게 마치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듯 보이기까지 한…….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도현이 문득 느껴지는 이질감에 고개를 갸웃했다.
‘음?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어쩐지 집중이 잘 된다 싶더니, 주변이 너무 조용했던 것이다.
그에 고개를 들자, 아리드나와 앨로윈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가 오묘한 표정으로.
“……왜 그러십니까?”
“아니, 그게…… 음.”
“생각보다 놀라지 않으시네요. 저는 제가 직접 본 입장이면서도 믿기지 않았는데.”
“그도 그럴 게 신이지 않습니까? 인간들은 신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하물며 사도들은 모두 신을 모시는 자 아닙니까.”
하물며 이종족들 또한, 장로급 되는 인물들을 제외하면 신을 선량하다 믿고 있는 게 현재의 실태다.
님프들도 르시아와 아리드나, 그리고 앨로윈.
이 셋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신을 맹목적으로 따르진 않을지언정, 선량하다 믿고 있었으니까.
‘그런 상황에 신의 사도가 태연하니 이상할 법도 하지.’
잠시 생각하던 도현은 이내 진실을 말해주기로 했다.
자신이 누구의 계승자이고, 왜 신과 적대하는 게 당연한 것인지.
저들이라면 충분히 믿을 만하다는 생각이었다.
‘가밀리온이 장로급 정도 되는 자들은 믿어도 된다고 했기도 하고.’
다만, 한 사람.
앨로윈한테는 말해도 되는 건지 애매했다.
아리드나를 따르는 듯한 그의 행동에는 모두 진심이 느껴졌지만, 문제는 도현의 눈에 자꾸 이상한 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진리의 눈이 발동 중입니다.]
‘……왜 아직도 내부에 붉은 게 있는 거지?’
처음 앨로윈과 조우했을 때 보았던 붉은 실루엣.
마치 앨로윈 안에 누군가의 혼이 숨어있는 기이한 현상이 아직도 그대로였다.
당시에 그냥 넘어간 건, 저게 무엇인지 알 방도가 없다는 점도 있지만 내심 추측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아리드나가 안에 있는 건 줄 알았는데.’
여왕의 대리인이라는 위치도 그렇고, 정황상 여왕이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 앨로윈이다.
혼수상태가 된 아리드나가 앨로윈의 몸에 깃들어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했건만…….
‘그게 아니라면 저건 뭐지?’
어딜 어떻게 봐도 귀신이나 영혼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러십니까? 저를 왜 그렇게 빤히 보시는…….”
심지어 희미했던 이전과 달리, 지금은 아예 대놓고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데 그럼에도 생김새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몸집은 작은데 뭔가 기세는 웅장한 그런 느낌이랄까.
“……카이저 님?”
앨로윈이 떠들거나 말거나,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길 수 초.
“설마 심연이 깃들어있는 건 아니겠…….”
“……예!?”
순간 자기도 모르게 그리 중얼거렸을 때였다.
[……허]
어이가 없다는 듯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한데 무언가 이질적이다.
마치 고막을 타고 전해진 게 아닌, 머릿속에서 두개골 전체를 울리는 듯한 느낌.
무엇보다 목소리가 어렸다.
‘이건……?’
이곳에 저런 어린 소년의 목소리를 낼 사람은 어디에도 없기에, 도현의 표정이 굳자 목소리가 다시금 이어졌다.
[무엄하다. 감히 그런 불경한 것들과 착각하다니……. 나를 훤히 들여다보기에 정체를 간파한 건가 했더니, 그건 또 아니었군?]
불쾌함이 물씬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한데 왜일까.
분명 어린 목소리로 투정을 부리는 듯한 말투인데, 이상하게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위압감이 느껴진다.
이건 뭐랄까……. 오랜 세월을 살아온 어린 왕의 위엄 같달까.
‘이게 뭔 말도 안 되는.’
자신이 생각해도 비상식적인 표현이었지만, 그것만큼 적합한 표현이 없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음을, 도현은 곧 알 수 있었다.
“카이저 님? 지금 대체 무슨…… 검을 놓으십시오. 아무리 영웅이 시라도 그러시면 저희도 강경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
“아아…… 맙소사. 앨로윈, 잠시 기다리세요.”
“예?”
“앨로윈은 느껴지지 않는 건가요? 어찌 그런 존재를 품고 계셨단 말입니까. 아니, 그 전에 대체 언제부터…….”
“여왕 폐하?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하지 못…….”
경악한 듯 입을 다물지 못하는 아리드나의 모습에 당황한 앨로윈이 물었으나,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질문을 채 끝마치기 전.
파앗!
“크윽……? 이게 무슨…….”
“아아…….”
-와아…….
-리자리자!
마치 세계수의 은혜를 입은 듯한 녹색 빛이 뿜어지며 시야를 뒤덮은 것이다.
그에 가지각색의 반응이 튀어나오며 모두가 그 빛을 바라보았고, 곧 앨로윈은 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유독 눈앞이 밝아 눈을 뜬 순간 본 것이다.
빛의 근원지가…… 자신의 몸이었다는 걸.
“이게 대체……?”
그에 앨로윈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기도 잠시.
—-!
이내 눈앞이 온통 초록빛으로 가득 차다 못해, 색감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었을 즘, 목소리가 들려왔다.
[쯧. 괘씸하지만…… 여기까지 도달한 노고를 생각하여 넘어가 주마.]
노여움이 조금은 남아있는 어린 소년의 목소리.
조금 전과 다른 게 있다면, 도현에게만 들리는 게 아닌 이곳 모두에게 들린다는 것이었다.
이윽고 빛이 그치고 고개를 든 그들의 눈이 부릅 뜨이며 경악으로 차올랐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도현의 감정이 가장 격했다.
그야 당연했다.
도현은 저 눈앞에 나타난 이의 정체를 누구보다 먼저 알게 된 사람이었으니까.
[아브타르텔의 지배자이자 다섯 왕좌의 주인.]
[왕좌의 네 번째 주인, ‘요정왕(妖精王), 루미사르 엘드라실’을 조우하였습니다.]
“미친…….”
아브타르텔의 지배자.
다섯 왕좌의 주인 중 하나이자 역대 최강의 결계술사라고 평가받는 인물.
요정왕(妖精王), 루미사르 엘드라실.
그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