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75화.
요정왕(妖精王), 루미사르 엘드라실.
그가 누구인가.
아브타르텔의 지배자라 불리는 다섯 종족.
왕의 시험을 끝내고 왕좌의 주인에 오른 다섯 종족 중 하나인 요정족의 왕이자, 아브타르텔 역사상 최강의 결계술사.
‘엘드라실이라는 성도 왕좌의 주인이 되며 얻은 거라던가.’
네 번째 왕좌의 주인의 이름에는 엘드라실이라는 성이 붙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아브타르텔에 있는 다섯 개의 왕좌는 각기 다른 형상을 띄고 있으며, 그것에는 모두 하나의 고유 이름이 붙어있다.
그중 요정왕이 차지한 왕좌의 이름이 엘드라실.
본디 평민이었던 요정왕에게는 달리 성씨가 없었고, 명색이 왕인데 성씨 하나 없을 수는 없었기에 엘드라실을 붙인 것이다.
어쩌다 보니 아브타르텔에 오직 한 명뿐인 유일한 이름이 된 셈.
“맙소사. 다, 당신은.”
“요정왕……. 자취를 감추었다고 들었는데 이런 곳에 계셨군요.”
“제 몸 안에 계셨던 겁니까? 대체 어떻게…… 아니, 그보다 언제부터……?”
그런 존재가 눈앞에 나타난 것에 아리드나와 앨로윈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중에서도 앨로윈은 충격이 더욱 커 보였다.
자취를 감추었다고 알려진 요정왕이 나타난 것도 놀라운데, 심지어 숨어있던 곳이 자신의 몸 안이었다니?
어찌 놀라지 않고 배기겠는가.
[아리드나, 깨어난 모습을 보니 반갑군. 그간 이 자가 얼마나 근심걱정을 했는지 그대는 모를 거야. 충신을 두었어. 앞으로 잘해주게.]
“크, 크흠.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그보다 언제부터 제 안에 계셨던 겁니까?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괜히 말 돌리기는……. 뭐, 궁금한 게 당연하겠지. 답해주자면 꽤나 오래 전부터다. 어디 보자…… 아리드나가 쓰러졌을 즈음부터겠군?]
“……맙소사. 그럼 어째서 제 안에?”
[그대밖에 적합한 그릇이 없었거든. 뭐, 엄연히 따지면 네 안에 있던 것도 아니야. 난 지금 거처에 갇혀 있는 신세이니까.]
“예?”
앨로윈이 눈을 끔뻑였다.
그럼 자신이 보고 있는 건 뭐냐는 듯한 얼굴로.
그에 피식 웃은 루미사르가 조금 더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시간이 없으니 자세한 건 나중에 직접 만나게 되면 설명하지. 간단하게 설명하면 지금 난 본체가 아니야. 내 고유 능력으로 그대의 혼에 내 의지를 실어 전할 수 있는 것뿐.]
“그…….”
[이해되지 않아도 넘어가거라.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
“아…… 알겠습니다.”
도현은 한 발짝 떨어져서 대화하는 그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정확히는 루미사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도 그럴 게 무려 요정왕이다.
다른 다섯 왕좌에 오른 왕들 사이에서도 그의 존재는 무척 희귀했다.
갓오세가 오픈된 이래 유저들은 물론, 그 어떤 NPC들에게조차 여태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왕.
‘실제로 요정들도 자신들의 왕임에도 그 근황을 모르는 눈치였지.’
그런 자를 이렇게 뜻밖의 장소에서 조우하게 되었으니 어찌 신기하지 않으랴.
그렇게 자세히 눈에 담은 루미사르는…… 뭐랄까.
다른 요정들과는 많이 달랐다.
당장 크기부터가 요정이라기엔 크고, 인간이라기엔 많이 작은 어중간한 크기랄까.
작게는 사람의 손바닥에서, 크게는 머리통만 한 크기였던 요정들과 달리 루미사르는 지하드와 엇비슷한 크기였다.
‘……내가 더 크거든 주인?’
‘리자? 리자…….’
‘뭐? 아냐, 엘리자. 내가 지금 로브 때문에 귀가 가려져서 그렇지 확실히 크다구!’
‘으음, 도토리 키재기 같네만.’
발끈해서 투덜거리는 지하드에겐 미안하지만, 솔직히 똑같아 보인다.
그리 말해주자 입을 빼죽 내밀며 잔뜩 토라진 지하드의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찰랑거리는 금발과 새하얀 피부. 길게 자란 속눈썹과 큰 눈망울.
여자인지 남자인지 분간이 안 가는 어린아이만이 지닐 수 있는 잘생쁨까지.
인형 같은 외형을 지닌 루미사르와 달리 지하드는 비열한 고블린 그 자체였으니, 키에서까지 밀리고 싶진 않았겠지.
‘……그, 그런 거 아니거든? 왜 갑자기 나를 막 때려?’
‘때린 적 없는데?’
‘말로 패는 것도 때리는 거야. 어? 언어 폭행 뭐 그런 거 몰라? 이런 것도 법적 처벌받는다던데?’
……이놈은 갈수록 아는 게 많아진다.
관심받는 걸 워낙 즐기는 탓에 유저들이 떠드는 소릴 많이 들어서인가?
하여튼 항의하는 지하드는 적당히 무시하고,
‘생각보다 막 엄청난 기세가 느껴지진 않네.’
얘기를 듣자니 본체가 아닌 의지를 혼에 실은 거니 뭐니 하던데, 그래서인가?
나름대로 추측하고 있을 때였다.
너무 빤히 바라보아서일까, 어느 순간 루미사르와 눈이 마주쳤다.
움찔한 도현을 빤히 바라보던 그가 못마땅한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흐음, 네 활약은 잘 들었다. 비록 이 녀석이 도중에 납치를 당한 탓에 직접 보진 못했지만, 요정들이 그리 칭찬을 하더군. 신기한 인간이라고.]
“……감사합니다.”
분명 칭찬을 하는데 표정은 왜 저리 썩어있을까.
[엘리넬, 그녀가 네놈을 무척 좋게 보더군. 쯧, 내 보기엔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
[하나 정작 이놈은 그녀는 뒷전에 거들떠도 안 보고 있고. 쯧. 그녀가 죽으면 애써 네놈이 선택된 이유가 없어지지 않는가.]
……아무래도 이유가 있었나 보다.
‘그나저나 엘리넬도 잘 구한 모양이네. 루팔로가 죽고 난 후로 사라졌다 해서 죽은 건가 했는데.’
솔직히 대화 한 번 안 해본 NPC지만, 사라진 소녀가 남긴 팔찌의 주인이 그녀인 만큼 내심 신경이 쓰이긴 했다.
그녀가 죽으면 퀘스트도 실패하는 건가 걱정되기도 했고.
하나 퀘스트는 멀쩡했기에 그녀도 살아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그 생각이 맞았다.
[이 자들에게 감사하거라. 이들이 그녀를 구하지 않았다면, 전쟁의 여파에 휩쓸려 꼼짝없이 죽었을 테니. 그랬다면 네 놈도 원하는 걸 얻지 못했을 거다.]
“아……. 감사합니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걸요. 모두 앨로윈의 덕이죠. 구출되는 과정에서도 그녀부터 찾았다고 들었거든요.”
“아닙니다. 그녀는 저희를 위해 큰 희생을 했습니다. 당연히 그녀를 구해야 마땅하지요.”
[후후, 역시 내가 택한 그릇답다.]
겸손한 앨로윈의 모습에 루미사르가 흡족한 미소를 머금던 때였다.
스으-
‘어? 주인.’
‘리자!’
‘……나도 봤어.’
도현의 안색이 굳었다.
루미사르의 형체가 이전에 비해 눈에 띄게 흐릿해져 있는 게 아닌가.
본인도 그걸 자각한 것일까.
제 몸을 내려다본 루미사르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이젠 정말 시간이 없군. 하여튼 이건 다 좋은데 강림하는 순간 지속시간이 너무 짧아진다니까.]
홱 고개를 돌린 그가 도현을 똑바로 마주했다.
[카이저. 투신의 의지를 이은 계승자여.]
그런 그의 목소리는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위엄이 담겨있긴 하나, 어딘가 장난기가 묻어있던 전과 달리 한없이 무거운 목소리.
어린아이의 목소리에서 저런 음성이 나올 수 있나 싶을 만큼 묵직한 기세가 담겨있었다.
[그대는 더없이 훌륭하게 자격을 증명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 없이, 그저 담담한 어조.
마치 정해진 멘트를 내뱉는 듯 고조 없는 목소리에 도현이 움찔한 순간, 루미사르가 천천히 양손을 들었다.
둥실-
그러자 그 움직임에 이끌리듯, 도현의 품에 있던 무언가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건 반지였다.
[다섯 번째 운명의 조각의 반쪽 열쇠]
도현이 힘겹게 얻어낸 조각의 열쇠.
한데…… 놀랍게도 공중으로 떠오른 반지는 하나가 아니었다.
[진리의 눈이 발동됩니다.]
[메인 퀘스트와 관련된 아이템을 발견하였습니다.]
[‘요정왕(妖精王), 루미사르 엘드라실’이 열쇠를 잠식한 어두운 기운을 몰아냅니다.]
[인벤토리에 들어있던 ‘다섯 번째 운명의 조각의 남은 반쪽 열쇠’가 열쇠에 반응하여 합쳐집니다.]
‘……두 개를 가지고 있었어?’
아마도 이번 대륙 퀘스트의 보상으로 얻었을 남은 반쪽 열쇠.
도현도 모른 채 가지고 있던 두 열쇠가, 요정왕에 의해 하나의 열쇠로 합쳐졌고,
[열쇠를 완성하여 조건을 충족합니다.]
[‘요정왕(妖精王), 루미사르 엘드라실’이 보유하던 다섯 번째 운명의 조각 ‘용맹과 의지의 증표’가 깨어납니다.]
번쩍!
경쾌한 알림과 함께 열쇠가 루미사르에게 흡수되며 눈부신 빛이 뿜어지더니, 이내 하나의 형상을 이루어냈다.
철의 방패와 순백의 검이 합쳐진 형상.
루미사르의 위로 떠 올랐던 그 형상은 서서히 내려와 도현의 심장에 흡수되었다.
[다섯 번째 운명의 조각 ‘용맹과 의지의 증표’을 얻었습니다.]
“아…….”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다섯 번째 운명의 조각을 얻은 것.
증표가 흡수되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충족감에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릴 때, 루미사르가 말을 이었다.
[이로써 그대는 다섯 개의 운명의 조각을 얻게 되었다.]
“아.”
그에 도현의 눈이 반짝였다.
언제 다 모으나 싶던 조각을 벌써 반이나 모은 것을 새삼 자각한 것이다.
아무리 시작이 반이라지만, 이제 막 하나를 모았을 때랑 정말로 반을 모은 건 천지 차이였다.
하나 애석하게도 평화롭게 만족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다섯 개의 운명의 조각을 얻으며 타이틀 ‘카이야르의 계승자’의 두 번째 특수 옵션이 해금됩니다.]
[본격적인 메인 스트림에 돌입합니다.]
[메임 스트림에 돌입하며 고대의 약속이 파기됩니다.]
‘……뭐?’
척 봐도 심상치 않은 메시지들의 향연이 도현을 반겼으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새도 없이, 멍해진 도현을 향해 루미사르가 말을 이어갔다.
[이로써 고대의 약속은 끝이 났다. 앞으로의 여정은 이전과 많이 다를 것이다. 더는 그들을 막을 명분도, 약속도 없으니…… 모두가 움직이기 시작하겠지.]
“그게 무슨…….”
[이제는 약속의 보호 없이, 오롯이 그대의 힘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 지금의 그대는 많이 부족하다. 곧 움직일 그들에 비하면 한없이 나약하고, 미숙하지.]
“대체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희미해진 루미사르의 모습에 도현이 다급히 외쳐보지만, 그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을 따름이었다.
[내게 주어진 사명은 그대를 그에게로 인도하는 것. 나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다만 한 가지 충고하자면…… 그 힘. 역경을 헤쳐나가는 검을 하루 빨리 완성하라.]
[그러지 않는다면…… 미래는 없을 테니……. 이 뒤는 부탁하지, 루슬레인.]
옅어진 목소리가 힘겹게 끝말을 내뱉었고, 그 말을 들은 도현의 눈이 부릅 뜨였다.
[가장 위대한 기사왕이여.]
“……!”
—-!!
정확히는 그 멘트 뒤에 뿜어진 찬란한 광휘와 함께 등장한 거대한 존재감 때문이었다.
짧은 은색 머리와 구릿빛 피부.
은색 갑주를 뒤덮은 늑대 갈기와 새하얀 방패, 그리고 순백의 검.
하나하나가 뛰어난 드워프가 제작한 휘황찬란한 무구들이었지만, 그러한 무구들조차 그의 존재감을 가릴 수는 없었다.
[잠들어있던 기사왕(騎士王), ‘루슬레인 발레몽’의 의지가 깨어납니다.]
[고대 인류의 기사왕(騎士王), ‘루슬레인 발레몽’의 의지가 현신하였습니다.]
‘기사왕……!’
고대 오왕 중에서도 최상위권의 전투력을 가졌던 남자.
신들조차 경계하던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기사왕(騎士王)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