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76화.
제국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기사왕을 꼽는다면, 단연 사자왕을 꼽을 수 있었다.
항상 선두에서 기사들을 이끌며 병사들을 통솔하는 카리스마와 리더쉽.
거기에 더불어 본인의 무력 또한 지고의 경지에 오른 위대한 왕.
왕이면서도 본인을 한 명의 기사라고 칭하며, 후손들에게 진한 동경심을 안겨준 그보다 기사왕이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이는 없었으니까.
하나 이는 편협한 반쪽짜리 역사에 한에서일 뿐.
사자왕이 위대한 기사이자 왕이었던 건 맞지만, 가장 위대한 기사왕이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당장 잊혀진 왕부터가 있으니까.’
잊혀진 왕의 본신의 힘은, 지금의 검황과 비교해도 절대 그 밑이 아니었다.
살아온 세월이 많은 검황에 비해, 잊혀진 왕은 비교적 젊은 나이인 3~40대 정도였던 걸 생각하면 그 재능은 검황 이상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럼에도 모두에게 잊혀져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비운의 왕.
그렇듯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위대한 인물들이 몇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현은 확신할 수 있었다.
[……비로소 여기까지 왔는가. 계승자여.]
눈앞에 있는 저 남자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사왕일 거라고.
당장 느껴지는 존재감부터가 궤를 달리한다.
잊혀진 왕 또한 본신을 드러내진 못했다지만, 그건 루슬레인도 마찬가지.
그럼에도 이게 과연 인간이 맞는지 의심될 만큼 초월적인 기세가 느껴졌다.
‘……주, 주인. 숨쉬기가 힘들어.’
‘리, 리자…….’
‘크윽…… 저자가 고대 기사들의 정점……. 과연 엄청난 압박감입니다.’
오죽하면 그저 서 있는 것뿐임에도, 지하드와 엘리자가 가쁜 숨을 내쉬고 있겠는가.
이는 다른 오왕들을 마주했을 때조차 보이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리고 그건 도현도 마찬가지였다.
‘……이전의 오왕들과 비교해도 차원이 달라.’
이걸 과연 같은 왕으로 묶을 수 있는 건가?
하나같이 괴물들뿐이었던 오왕들의 존재감이 가볍게 느껴질 만큼 압도적이었다.
분명 아군일 것을 알고 있음에도, 본능적으로 전투태세를 취하게 될 만큼.
“카, 카이저 님. 이 자는 대체……?”
“엄청난 기운……. 요정왕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아니, 그 이상의 기운입니다. 저분이 정녕 인간이 맞나요?”
꿀꺽,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잇따른다.
갑자기 요정왕이 사라지며 등장한 압도적인 존재에, 앨로윈과 아리드나 또한 여간 긴장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곳에서 여유로운 건 오직 한 사람.
스윽-
무심한 얼굴로 서 있는 기사왕뿐이었다.
그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시선이 닿을 때마다, 아리드나와 앨로윈이 몸을 움찔 떨었다.
그때까지도 무심했던 그의 시선은, 그들을 넘어 지하드와 엘리자에게 닿은 순간 미묘한 이채를 띄었다.
마치 흥미롭다는 듯 몇 초간 머문 후에야 떼어졌고,
-후아…….
-리, 리자…….
두 녀석은 긴장을 놓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모두를 살피며 넘어간 기사왕의 시선은 이내 도현에게로 향했고, 처음으로 그의 입이 열렸다.
[그대로군. 우리의 의지를 잇는 자가.]
“……예.”
그 뒤로 또다시 말이 없었다.
마치 내면을 들여다보듯, 한참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미묘해졌다.
[……이상하군.]
“……?”
[벌써 이토록 많은 의지를 이었다니. 게다가…… 이 기운은 불멸, 그 자인가? 아직 그와 조우할 시기가 아닐 텐데?]
“……??”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릴 때마다 도현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 올랐다.
‘아니, 진짜로 이상한 거였어?’
템포가 좀 빠르지 않나 싶었는데, 조각을 남긴 장본인이 저리 말하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사실상 확인사살을 가한 꼴 아닌가.
허탈한 얼굴이 된 도현의 모습을 본 것일까.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는 듯 보였던 기사왕이 입을 뗐다.
[이 정도로 짙은 기운이면 불멸과 직접 조우한 모양이군. 그를 만났다는 건 고대의 약속 또한 깨졌다는 소리겠지.]
“……맞습니다.”
[용케도 살아남았구나. 그래, 우리의 의지를 잇는 자여.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지?]
“카이저입니다.”
[카이저라…… 어딘가 카시야르가 떠오르는 이름이군. 시간이 없을 테니 본점만 말하도록 하겠다.]
도현이 경청한다는 의미로 눈을 마주하자, 그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의 말대로 얘기는 짧았다.
[그대는 다섯 개의 조각을 모았다. 이는 우리 다섯 왕의 의지를 모두 이었다는 뜻이기도 하지.]
“…….”
[이것은 고대의 약속이 끝났다는 뜻으로, 앞으로 그대에게 닥칠 시련은 더욱 거세고 험난해질 것이다.]
안 그래도 짐작하고 있던 바이기에 도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지랄 맞은 메인 퀘스트의 난이도는 그야말로 지칠 줄 모르고 수직 상승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나 사막에도 오아시스는 있기 마련.
아예 죽으라는 건 아닌지, 어지러운 시련 뒤에 달콤한 보상이 숨어있었다.
[카시야르, 네 말이 맞았구나. 자신의 계승자라면 분명 이 단계까지 금방 도달할 거라 했었지…….]
과거를 회상하는 듯 기사왕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다섯 개의 조각을 모은 지금, 그대에게 한 가지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변화…… 말입니까?”
[그 녀석이 남긴 일종의 조건부 가호다. 자격을 지닌 계승자만이 얻을 수 있도록 장치를 심어두었지. 시간이 없으니 확인은 다음에 하고…… 우선은 이걸 받아라.]
천천히 내민 그의 손에는 작은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익숙한 모양새였다.
그가 들고 있는 철의 방패.
마치 그것을 본떠 크기만 한 손에 쥐어질 만큼 작게 줄인 듯한 모습이었으니까.
다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결코 작지 않았다.
[루슬레인의 맹세(Oath of Rouslaine) – 엑스세라툼을 획득하였습니다.]
“이건…….”
[다른 녀석들의 의지를 모두 이었음에도 새삼 놀라는 건가. 자격을 증명한 그대에게 건네는 나의 선물이다. 한창 활동할 때조차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았던 내 비기가 담긴 정수지.]
“!”
도현의 눈이 커졌다.
기사왕의 비기가 담긴 정수라니, 척 봐도 범상치 않은 설명 아닌가!
하물며 기사왕이 어디 그냥 왕인가?
과거 아브타르텔의 주인 중 하나였던 고대 인류의 정점에 서 있던 다섯 왕 중 하나.
하물며 눈앞의 저 기사왕은 다른 오왕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풍기고 있다.
‘그런 자의 비기라니…….’
당장이라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참아냈다.
루슬레인의 신형이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던 탓이었다.
얻은 아이템의 정보야 언제든 확인할 수 있지만, 그는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무슨 말을 남길지 모르니, 최대한 집중하고 있는 게 맞았다.
그런 도현의 의지를 느낀 걸까.
[이거 참, 익숙한 눈빛이군……. 계승자는 이런 것까지 닮는 건가.]
담담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은 옅은 미소를 피워낸 그가 사라지기 직전, 한 마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곧 아브타르텔에 다신 없을 큰 전쟁이 일어날 거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대와 나는 곧 다시 만나게 될 거다. ……아니. 우리 모두가 만나게 되겠지.]
“……! 그게 무슨……!”
그에 눈을 부릅 뜬 도현이 소리치려 했지만, 아쉽게도 주어진 시간은 여기까지였다.
점점 희미해져 가던 기사왕의 신형이, 이젠 알아보기도 힘들 만큼 희미해지며 흩어지고 있던 것이다.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것 같군. 만나서 반가웠다.]
“아니, 잠시만요.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게 무슨 뜻인지만 알려주세요.”
평소보다 몇 배는 빨라진 말투에 다급함이 물씬 느껴진다.
하나 기사왕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머리부터 형체를 잃어가던 그의 신형이, 이젠 턱 밑까지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도현은 포기하지 않고 그에게 집중했다.
스으-
사라져가는 그의 손이, 천천히 앞으로 뻗은 것은 본 것이다.
손을 반만 덮고 있는 은색 갑주의 장갑 사이로 튀어나온 그의 두툼한 검지가 도현을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도현의 손에 쥐어져 있는 엑스세라툼에.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대가 궁금해하는 모든 것은 그 안에 담겨있다. 그대가 나아가야 할 길까지…….
목소리는 거기서 끝이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말만을 남기곤,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카이저 님.”
“아아, 방금 그분은 대체……?”
“공기를 짓누르던 기운이 사라졌어요. 그분은…… 가신 건가요?”
-후아, 죽다 살아났네. 입 한 번 벙긋하기가 힘들었어.
-리자리자…….
-저게 기사의 정점…… 감히 그 경지를 헤아릴 수조차 없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갈 길이 멀군요.
루슬레인이 떠나며 퍼져있던 그의 존재감이 사라지자, 곳곳에서 참았던 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지간히도 긴장했는지 아직도 멍한 얼굴들이었다.
‘하긴…… 역대급이긴 했지.’
그나마 도현은 버틸 만했는데, 아마 오왕들을 여럿 만나와서 그러지 않을까 싶다.
‘오왕쯤 되면 모두 비슷하다 생각했는데, 그래도 전투력의 차이가 있구나.’
하기야 애당초 오왕들은 각 분야의 정점들.
무력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기사의 정점이, 여타 분야의 정점보다 풍기는 기세가 강할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니 문득 그러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기사왕이 이 정도인데 카시야르는 대체 얼마나 강했던 거지?’
저런 기사왕조차 투신으로 불리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각 분야의 정점에 오른 오왕들을 누르고, 그 중심에 선 카시야르의 전성기는 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저번에 마도왕의 반지를 통해 만나긴 했으나, 어린 시절을 불러냈다 보니 체감이 되지 않았다.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여기가 갓갤 밸런스 토론장도 아니고.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당장 지금은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게 차고 넘쳤다.
‘기사왕의 비기라…… 어디 효과 좀 봐볼까.’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비롯한 기사왕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는 정수 루슬레인의 맹세 – 엑스세라툼.
[아직 확인하지 않은 알림이 많습니다.]
[돌발 퀘스트 ‘아리드나’를 클리어하였습니다.]
[님프 여왕 아리드나에게서 보상을 받으십시오.]
[대륙 퀘스트 ‘대재앙의 서곡(序曲)’을 기여도 1위로 완수하여 특수 보상이 주어졌습니다.]
…….
아리드나에게서 받아야 할 퀘스트 보상에, 대륙 퀘스트를 깨며 받은 보상들.
[타이틀 ‘카시야르의 계승자’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발동 조건을 충족하여 타이틀 ‘카시야르의 계승자’에 봉인되어있던 능력이 일부 해금됩니다.]
게다가 조금 전부터 요란하게 울리는 칭호까지.
확인할 게 천지였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킨 도현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이 중 가장 먼저 확인할 것은…….
‘역시 이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