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6화 혈맹 (2)
베르덴 일행이 침묵의 사막에서 볼일을 마치고 대륙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당연히 송별식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생명의 거목이 공간 좌표를 안정시키고 있는 이상 그럴 생각만 있다면 언제든 사막에 방문할 수 있으니까.
침묵의 사막은 이제 미개척 지대가 아니었다.
척박해도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그런 오해가 생기고, 깊어지고 만 건 그저 대륙이 무지했을 뿐이다. 이처럼 세계에는 인류가 알아내지 못한 것이 얼마나 많을까.
“드디어 돌아가는군. 으음, 사막에 적응해서 그런지 이젠 대륙이 낯설 지경이야. 아무튼 손꼽힐 만큼 즐거운 경험이었다.”
레그리트는 힐라와 함께 거의 1년 가까이 침묵의 사막을 탐색했다.
최초의 마탑을 찾고, 투하르 신조와 배교자의 분쟁에 휩쓸리고, 투하르 신조와 키론다르와 전쟁을 벌이고, 용인이 되고…… 레그리트조차 이렇게 농밀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보람이 넘친다.
레그리트가 우측 이마에 박힌 드래곤의 부러진 뿔을 쓰다듬으며 등을 돌렸다.
“너도 즐거웠나?”
“심심하진 않았지.”
베르덴은 마력이 돌아온 대지와 아직 마력이 고갈된 사막 사이의 경계선을 바라보다가 생명의 거목에 시선을 두었다.
“덕분에 생각 이상으로 많은 걸 얻었다. 여기까지 안내해 줘서 고맙군.”
“감사 인사는 됐다. 자격 있는 후보를 시련으로 이끄는 건 선장의 의무니까. 솔직히 말해서 시련치곤 과하긴 했지만 말이야.”
방주가 지나온 길에는 선장이 아닌 일개 후보가 초월자로 각성한 사례도 없고, 선장 시련으로 초월급 존재 둘을 토벌한 경우도 없다.
아주 오랜 역사의 기록이 오늘날에 이르러 다시 쓰이고 있다. 그런 시대에 태어난 건 그야말로 축복이 아닐 수가 없다.
레그리트가 말했다.
“이미 말했던 대로 나와 힐라는 여기서 곧장 아크로 복귀하겠다. 선장으로서 여러모로 보고할 게 한둘이 아니니. 겸사겸사 네가 요청한 것도 언질을 해 놓겠다. 방주는 신경 쓰지 말고 혈맹부터 처리하도록.”
“부탁하지.”
“여섯 번째 선장으로서 방주의 특수한 정보망을 이용하는 건 당연한 권리다. 아직 너는 차기 선장이긴 해도 윗분께 고유 비행정을 받았으니 권리를 앞당겨 사용해도 딱히 문제는 없지. 하물며 고작 사람 하나 찾는 것쯤은.”
베르덴이 방주를 통해 소재를 찾으려는 사람은 예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데이로스 가문의 생존자───제니아 데이로스.
이자벨라의 가족에게 비극을 안긴 원흉인 크로든 올렌티아가, 그녀의 여동생이 죽지 않고 갑자기 사라졌다고 발언했다.
제니아의 죽음이 확실시되지 않는 이상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든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든 반드시 찾아야 한다.
그것이 베르덴과 이자벨라 데이로스가 나눈 약속이었다.
‘방주의 범세계적인 정보력을 동원했으니, 어떤 식으로든 단서를 얻을 수 있겠지.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본래 베르덴은 방주 후보, 그것도 절반의 후보에 불과했던 터라 방주의 정보망을 아주 조금도 이용할 수 없었다.
시련과 시련 극복에 대한 보상을 대가로 방주의 의무 일부만 따르기로, 리비안트 공국에서 리스너와 계약했기 때문이었다.
베르덴은 오직 성장과 연관된 방주의 부분적인 도움만 필요했다.
당시엔 그랬다.
그로부터 몇 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여섯 번째 선장직을 선뜻 수락하게 된 걸 생각하면 참으로 많은 것이 변한 셈이다.
그때, 레그리트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슬슬 출발해야겠군. 아, 그 전에 그 칠흑의 장갑 좀 벗어 줄 수 있나? 한쪽만.”
“……? 그래.”
베르덴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명시의 환란]을 반쯤 벗었다. 오른손의 손날 부분이 드러난 순간 레그리트가 다가왔다.
꽉.
레그리트가 어느 정도 치악력을 실어 베르덴의 맨손을 물었다. 용인이 되면서 좀 더 날카로워진 치아의 감촉이 느껴졌다.
베르덴이 시선을 내렸다.
“뭐 하냐.”
“한 번쯤은 깨물어 보고 싶었거든.”
레그리트는 나름대로 만족했는지, 그러면서도 조금 부끄러웠는지 헛기침을 하며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그러곤 허공에 향해 주먹을 쥐고는, 팔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의문을 탐험하라, 미라비스(Miravis).”
────!
후방에서 중대형급 비행정이 소리 없이 공간을 뚫고 등장했다. 베르덴의 아르시스와 거의 비슷한 크기였는데, 외형은 사뭇 달랐다.
아르시르가 위압적이었다면.
미라비스는 자유로웠다.
“그럼 세계 회의에서 보도록 하지, 베르덴.”
쿵!
레그리트가 지면을 박차고는 근방에 있던 힐라를 낚아채 미라비스에 탑승했다. 힘 조절이 며칠 전보다 더 편해 보인다.
용인의 신체 감각에 조금씩 유의미하게 적응하고 있는 모양.
잠시 후, 미라비스의 선체가 반투명한 보랏빛 아지렁이에 휩싸이더니 점차 흐릿해지다가 어느샌가 자취를 감추었다.
누하라의 안정된 공간 좌표는 다른 사람에게도 통로로 작용한다.
그렇게 미지의 탐색자가 사막을 떠났다.
‘신체 감각을 되찾는 것보다, 충동을 참아 내는 게 먼저일 것 같은데. 뭐, 알아서 하겠지만.’
베르덴이 손에 생겨난 잇자국을 응시하다가 다시 장갑을 착용했다.
레그리트가 용인이 되면서 그 내면을 통찰하기 더 어려워졌기에 좀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리 내색할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흐음.”
이자벨라가 다가왔다.
그러곤 웃었다.
“용인의 성적 충동은 사람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걸까? 가주는 어떻게 생각해?”
“…….”
베르덴은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최선책을 강구했다. 찰나의 순간에 명확한 길을 찾은 그가 주제를 전환했다.
“세계 회의가 개최되기 전에 가르간트로 넘어갈 거다. 그때 하루 정도는 도심을 돌아다니며 느긋하게 보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지?”
“……진심이야?”
“싫으면 말고.”
이자벨라가 자신을 지나쳐 가는 베르덴의 팔을 붙잡았다.
“아니, 이렇게 주도권을 가져가네? 너무 비겁한 거 아니야?”
“대답은?”
“일정은 내가 짤 거야.”
이자벨라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이건 진짜 웃음이었다.
* * *
[출발. 준비.]
[복귀 준비 완료했습니다.]
히히힝.
드레드미어에 올라탄 베타와 알파가 누하라 외곽 끝자락에서 두 사람을 맞이했다. 대륙으로 가는 건 베르덴 일행만이 아니다.
대륙과 사막을 주기적으로 오가며 문물의 교류를 담당할 인원을 따로 선발했다.
대표적으로 바르슬란 일족의 방구석 지식인이자 이번에 처음으로 복부에 바람구멍이 났었던 아리온 바르슬란이 그에 포함되었다.
“어, 언제든 출발하셔도, 됩니다……!”
아리온이 체격보다 거대한 배낭을 짋어지고, 자신의 가족인 카라쉬의 고삐를 쥔 채 바들바들 다리를 떨었다.
아공간에 넣어도 되는데, 아리온은 한사코 거절했다.
“자신에게 소중한 물건은, 자신이 챙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암, 그래야지.”
이는 리토 바르슬란의 가르침이었다.
참고로 리토도 연금술 도구와 재료가 담긴 큰 배낭을 메고 있었다.
이번에 부상자를 위해 포션을 만드느라 재료가 소진되긴 했지만, 최초의 마탑에서 연금술 기구를 추가로 가져온 터라 크기는 더 커졌고, 무게도 더 무거워진 상태.
“그나저나 황금을 그만큼이나 가져왔는데 제대로 쓰지도 못했구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설마 국가의 도시들이 산산이 전이되어 사라질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아쉽나?”
“뭐? 아쉽냐고? 하하하하! 난 ‘그것’만 있으면 되는데? 하하하핫!!!!”
실존하는 엘릭서를, 그것도 두 개나 손에 넣은 리토는 시종일관 흥분에 차서 허구한 날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연금술의 궁극이 눈앞에 있다. 어쩌면 연금술의 끝을 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 기대감이 괴짜 연금술사의 삶을 자극했다.
사방이 떠들썩해졌다.
그때를 틈타 배교자 라미샤가 종이 뭉치를 들고 앞으로 나왔다.
“아, 저기. 이자벨라 님. 여기 저번에 요청하셨던 그림이요.”
“어디 보자…… 어머.”
당연하게도 라미샤는 그림 그리는 걸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다.
배교 활동을 하며 틈틈이 쌓아 올린 취미 생활에 불과했지만, 다행히 객관적으로 봐도 그녀는 그림에 소질에 있었다.
괜히 나하린드에서 알파와 베타가 라미샤의 그림을 칭찬한 게 아니다.
단 한 번도 가르침받은 길이 없기에 정형화되지 않은 순수하게 감각적으로 표현된 인물상…… 거기엔 서로를 보며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베르덴과 이자벨라가 있었다.
이자벨라는 한때 행운의 선율가로 불렸던 대륙의 음악가. 그녀는 유명한 예술가로서 가련한 라미샤의 예술적인 재능을 엿보았다.
“마음에 드네.”
“저, 정말로요?”
“그럼. 정말로.”
누가 볼세라 재빠르게 그림들을 [끝없는 만상]의 아공간에 보관한 이자벨라가 슬쩍 라미샤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넌 앞으로 내가 챙겨 줄게.”
“앗, 가, 감사합니다!”
나하린드 암살조에 선발되었던 만큼 라미샤도 싸울 줄은 알지만, 이 세계라는 냉혹한 무대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실제 전력보다는 가장 활약할 수 있는 곳에 두는 게 옳을 터.
이제 라미샤는 에온의 화가다.
마법에만 국한되지 않는 에온은 모든 방면에서 인재를 환영한다. 그렇게 라미샤는 오늘의 대륙행에 당첨되었다.
그런 라미샤와 이자벨라를 못 본 척하고 넘어간 베르덴이 존재감을 일부 개방하며 모두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10일 이내로 에온에서 물자와 함께 책임자를 파견할 거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베르덴의 말에 경청했다.
“믿고, 기다리도록.”
즉시 누하라에서 배웅을 나온 새로운 투하르의 지도자층이 화답했다.
“평안하십시오, 대군주님!”
“훗날에 신을 뵙겠나이다……!”
“이곳 누하라를 예전 투하르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보금자리로 만들겠습니다!”
“추방자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아아!”
“에온을 위해!!!”
“새로운 신을 위해!!!”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이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익숙한 면면이 스쳐 지나갔다.
해방된 노예들을 이끄는 타르비, 배교의 독니 타스리크, 시라즈, 타딤, 자르미나, 라스탄 바르슬란. 배교자를 통솔했던 파잔과 오라핫, 투하르 신조의 전 서열 2위 아침의 볕, 추방자 르도크…….
침묵의 사막에 투하르 신조와 배교자의 구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에온만이 있을 뿐이다.
방랑의 무나딤이 들뜬 한숨을 내쉬었다.
“안 좋은 기억이 많지만, 그래도 사막을 떠나려니 마음이 좀 그러네요. 대륙을 밟아 보는 건 처음이라 긴장도 되고요.”
“금방 적응할 거다.”
“……네, 그래야죠.”
그녀가 제 팔을 쓸었다.
투하르 대신전에서 발견한 인피 지도를 통해서 최초의 마족의 유골을 찾아낸 이후 베르덴은 방랑의 무나딤에게 공훈을 약속했지만.
워낙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그녀는 무엇을 받을지 당장 정하지는 못했다.
───머리가 복잡해서 그런데…… 생각할 시간을 조금 주실 수 있을까요?
───여유롭게 고민해라.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그런데 설마 그 시간이 많다는 게 이래서 많은 걸 줄이야……. 방랑의 무나딤은 낯선 대륙을 앞에 두고 살짝 몸을 떨었다.
‘대체 이분은 내게 뭘 기대하는 걸까.’
방랑의 무나딤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베르덴의 저의가 궁금했다. 아무튼 그녀가 대륙으로 가는 건 정해진 사안이었다.
안데스가 턱뼈를 달싹였다.
[하하, 그리 겁먹을 건 없네. 원래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니까.]
“지난번에 대륙은 감히 상상조차 하기 싫어지는 위험한 것들로 가득하다면서요?”
[그러니까 사는 게 끔찍하단 뜻이지.]
“…….”
[농담이네. 베르덴, 언제쯤 출발하나?]
베르덴이 즉답했다.
“지금.
<게이트>
무한의 마도와 [아인베르]를 통해 공간 이동문을 개방했다.
지체할 것 없다.
이자벨라를 선두로 차례대로 다른 좌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베르덴이 시선을 높였다.
저 먼 언덕에서 생명의 거목과 관리자, 그리고 오메가가 배웅하고 있다. 손을 흔들자, 그들도 마주 손을 흔들었다.
생명의 거목은 무수한 나뭇잎을 떨구며 거대한 가지를 흔들었고, 오메가는 동그란 몸체를 왔다 갔다 움직였다.
[안녕.]
[다음에 뵙겠습니다.]
드레드미어가 투레질을 하는 동안 알파와 베타도 앙증맞은 팔을 휘저었다. 언제든 재회할 수 있기에 이만 걸음을 돌렸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베르덴은 마음속으로 한 번 더 인사를 건네고는 <게이트>를 넘었다.
주인 없는 땅의 어레인으로.
* * *
동대륙 중앙부.
에스티리아 왕국, 리비안트 공국, 미들로스 자치령, 벨디른 공화국의 연합군이 경계선을 구축해 언데드 군세를 차단했다.
원소 마법이 빗발치는 전장 속에서 새하얀 검이 좀비를 갈랐다.
칼리아 드 에스퍼렌사가 짧게 호흡했다.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군.’
얼마 전에 언데드 수천을 토벌했는데 이번에도 언데드 수천이 등장했다.
주검의 영광.
재작년에 에스티리아 왕국의 곡창 지대를 사기로 광범위하게 오염시켰던 언데드 사태, 그를 일으킨 흑마법사들을 베르덴과 함께 토벌했던 때가 떠오를 지경이었다.
<화염구>
콰아아앙!
리치 세 마리가 동시에 시전한 3위계 마법을 백결 기사단이 방패로 차단함과 동시에 칼리아가 빠르게 돌진했다.
검이 두개골을 반으로 쪼갰다.
그대로 미끄러지듯 나아가 무릎으로 다른 리치의 척추를 부수고, 다시 한번 회전하며 다리를 올려쳐 또 다른 리치의 머리뼈를 박살 냈다.
백결 기사단장 베스파가 소리쳤다.
“칼리아 님……! 호위에게서 멋대로 벗어나지 좀 마십시오!”
“이 정도는 괜찮다. 토벌도 거의 끝났─”
“저기, 시체 골렘이다!”
“개체 일곱!”
썩은 악취를 품기는 거대 언데드가 전선을 향해 다가온다. 그 주위로 대략 300마리 가까이 되는 시체들이 따라붙었다.
칼리아가 혀를 차고, 마법사들이 일제히 지팡이로 조준한 그때였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하늘에서 날아온 마법 폭격이 언데드 잔당을 죄다 쓸어버렸다. 후폭풍에 몸을 움츠렸다가 다시 시선을 높였다.
“저건…….”
“보헤미른 마탑이다! 마탑에서 지원을 왔다!”
마탑이라는 원군에 환호성이 이는 와중…… 칼리아는 보헤미른 마탑의 마법사 중 가장 앞에 있는 여인을 주목했다.
붉은 머리칼.
붉은 눈동자.
“……로벨린.”
임시 보헤미른 마탑주.
그리고.
‘베르덴의 소꿉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