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3화 겁화(劫火) (2)
[베르덴 폐하. 안전?]
알파의 목소리가 전해졌는지 베르덴의 손이 잠깐 움찔거렸다. 아직 손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사고 같은 게 발생한 건 아닌 모양이다.
주변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 다행이네. 그래도 갑자기 너무 놀래키는 거 아니야?”
“조금 자중할 필요가 있긴 합니다, 신성.”
“뭐, 선배니까요.”
“오오…… 이렇게나 경이로운 흑염이라니. 역시 새로운 별이십니다……!”
알데반이 감동에 젖은 얼굴로 숭배하는 모습을 뒤로한 채 알더니스가 어둠에 잠겨 있는 베르덴을 향해 물었다.
“아무래도 자유롭게 거동할 수 없는 상태이신 것 같은데,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가주, 손이라도 잡아 끌어 줄까? 문 바깥에는 소멸이 닿지 않는 것 같은데.”
휙휙.
베르덴이 검지 손가락만 펴서 가볍게 좌우로 흔들었다. 괜찮다는 의미였으며, 잠시만 기다리라는 뜻이었다.
큰 문제가 없다는 건 분명하리라.
긴장감으로 팽팽했던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때, 이자벨라가 작게 말했다.
“근데 가주가 손만 저러고 있으니까 뭔가 귀엽지 않아?”
“……?”
옆에 있던 유니아가 ‘뭐라고요?’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지고지순한 여자가 거기에 있었다.
쩌적.
칠흑의 장갑을 착용한 베르덴의 손가락에 다시금 강하게 힘이 실렸다.
그렇게나 저항력이 견고한 대전당의 벽면이 또 손상됐다. 파손 부분에서 떨어진 잔해는 잿더미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손목, 그리고 팔꿈치.
베르덴이 천천히 망화에서 벗어나며 앞으로 한 걸음씩 내디뎠다. 그는 왼손에 [인테리스]를 단단히 쥐고 있었다.
머지않아 초대 마도왕의 로브가 완전히 드러난 순간 방의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던 암흑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후우.”
베르덴이 턱 가장자리에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훑었다. 외상은 없었지만, 이내 베타의 외눈에서 마력이 빛났다.
[스캔 완료했습니다. 베르덴 폐하에게서 경미한 내상이 발견되었지만 포션을 복용하지 않아도 문제없는 수준입니다.]
[베르덴 폐하. 육체 자체에서 강력한 힘의 파장이 맥동 중임을 감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물리적인 접근을 금지한 터라 이곳에는 최소 국가급 전력 이상인 간부 외에는 없다.
이러한 고위급 마도사들도, 아드리안이 진즉에 간파한 전율적인 힘의 크기를 저마다의 감각을 통해 지금 느끼고 있었다.
멜라드가 제 팔을 내려다봤다.
“뭔가…… 저릿저릿하군요. 소멸과 연결된 새로운 마법을 개발한 겁니까? 이 사태가 그 여파고요?”
“딱히 마법을 만든 건 아니다. 언제 어디서든 최단 시간으로 최대 전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다가 생각해 낸 영역의 응용이지.”
베르덴이 설명한, 방금 전 상황이 발생한 배경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자신을.
불태웠다.
상상도 하지 못한 원인에 분위기가 묘해지면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러니까 자신의 심장 속 마력에 소멸을 시전했다?
“와, 선배. 발상이 진짜 미쳤네.”
유니아가 박수를 쳤다.
“미친 사람이네.”
* * *
베르덴이 깨우친 파멸보다는 아니지만 다히트가 개척한 소멸의 근원적인 파괴력 또한 극도로 위험한 마법적 개념이다.
그 칠흑의 불꽃이 얼마나 많은 존재를 세상에서 지워 버렸던가.
블랙 아워 최초의 구성원이 죽거나 후유증을 얻었다. 척추에 고정된 골렘 의체가 없으면 멜라드는 조금도 걸을 수 없다.
다히트의 모국인 아일론의 수도 성채는 왕과 귀족째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며, 다히트의 블랙 아워와 갈등을 빚었던 세력 대부분도 소멸을 피하지 못했다.
그렇게 위험한 개념을 다른 누구도 아니고 자기 자신에게 향한 것도 아주 경악스러운데 심장에 담긴 마력을 불쏘시개로 삼다니.
사실상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아예 심장을 던진 셈이다.
베르덴이 말했다.
“최악의 결과라고 해도 크게 피해를 입지 않을 거라고 계산이 나왔다. 그래서 판단한 거다. 무작정 시도부터 한 게 아니라.”
“방금 그 현상도 예상에 있었던 거고?
“그건 예외였지.”
“미친 마법사네. 아, 그래서 천재인 건가? 그러면 나도…….”
“그 부분만큼은 본받지 마세요, 유니아.”
멜라드가 진지한 어투로 상식에서 엇나가려 하는 유니아를 만류했다.
안 그래도 마도의 위계 돌파라는 수단이 생기며 아슬아슬하게 선을 지키고 있는데, 여기서 한 발짝 더 넘어가면 장기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이 생길 것이 분명했다.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습니다. 주체적인 판단은 존중하지만, 감당 못 할 정도로 스스로를 혹사시키는 건 현자로서 좌시할 수 없어요.”
“넵, 현자님…….”
“기본적인 역량을 더욱 높이는 게 우선입니다. 마도의 위계 돌파에 의존하는 건 제 살을 깎아 먹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네엥…….”
유니아가 꾸중 아닌 꾸중을 듣고 있는 사이 이자벨라가 형안을 발동해 베르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더 나아가 그의 목을 스스럼없이 어루만지기도 했다.
“뭐랄까. 마치 육체 내부가 공백 없이 채워져 있는 것 같아. 어두운 화염이 아예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도 들고.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경과가 조금 복잡하긴 한데.”
베르덴이 턱을 쓸며 지난 나흘간의 시간을 돌이켜 보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내 심장이, 내 마력 이상의 개념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간과했다. 특히 흑염의 관점에서는.”
<개기식>의 영역 범위를 체내로 한정해 마력을 소멸시키는 건 쉬웠다. 그로부터 소멸의 위력 자체가 강해지는 것도 확인했다.
마력을 훌륭한 장작으로 활용 가능하다는 게 증명된 것이다.
이제 <개기식>을 강제로 유지하는 마법진과 그 육체 부담을 줄일 수 있는 방법만 구상하면 연구는 성공적으로 끝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화염은 산소를 차단하거나 연료를 제거하거나, 온도를 낮추면 꺼진다.
망화가 마도이기도 하면서 기본적인 바탕이 되는 불의 원리를 따르기에 위 셋에 해당하는 요소 중 하나만 충족해도 사그라든다.
마력이 온기를 품은 온도라고 한다면, <무한 - 망화(亡火)>를 개방하는 것은 산소를 주입하는 것과 동일하다.
다시 말해 마도를 닫는 순간 망화는 의지에 따라 사라져야만 한다.
지금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내 심장이 마력의 원천이자, 마도의 근원이라서 그런 건지. 마도를 닫았는데도 <개기식>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확산하더군.”
무한한 마력이 품은 심장.
무한의 마도.
고로 심장 자체가 무한의 개념이기도 하다.
이처럼 특정 신체 부위가 개념적으로 마도와 밀접하게 연결된 사례는, 베르덴 본인에게도 매우 이례적이었다.
그래서 계산에 넣지 못했다.
역천으로 마탑의 동력원을 흡수한 전례도 없고, 결과적으로 두 개의 마도를 개척한 마도사의 선례도 없으니까.
정보가 부족하면 이론을 세울 수 없다.
정보는 최소한의 실제(實際)에 기인한다.
“그렇게 마도를 잠시 닫아 놓은 동안 심장에 깃든 불길은 당장 꺼 버릴 수 없을 만큼 커졌고 확산 속도도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졌다. 방금 너희들이 본 현상은, 그걸 제어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거고. 힘을 외부로 분출시키지 않았다면 소멸을 다스리는 데 시간이 더 오래 걸렸을 거야.”
“이야기를 들어 보니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만.”
“심각하다기보다는 분주했지. 하마터면 손수 만든 문서들이 전부 소실될 뻔했으니까. 그래도 성과는 더할 나위 없이 컸다.”
수습과 별개로 심장에 붙은 망화가 ‘자연적으로’ 타오르는 걸 알아냈다.
뜻밖의 발견이었다.
이걸 이용하면 장기간 마도 개방에 대한 육체적 및 정신적 부담을 고려할 이유가 없다. 마도 없이도 알아서 자생하니까.
그뿐만 아니라 <개기식>의 불길은 잠시도 꺼지지 않고 활동하니, <개기식>을 무의식적으로 유지하는 마법진을 만들 필요도 사라지는 것.
한정된 시간과 노력을 아낌없이 투자할 가치가 차고 넘쳤다.
“보다시피 소멸과 마력 사이에서 최소한의 균형을 이루기는 했지만, 아직은 위태롭다. 애써 힘을 누르고 있어도 이 정도니. 힘의 배분이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때까지는 조심할 생각이다.”
이 균형이 흐트러지는 순간 베르덴은 즉시 최대 전력 상태에 돌입하는 대신 당연하게도 예전에 비해 빠르게 지친다.
전력 질주와 같은 이치다.
다시 균형을 조정하려면 명상에 준하는 집중이 필요하기에, 불가피한 교전이 벌어지지 않은 이상은 균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마도를 운용하는 편이 효율적이었다.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위는 맡겨 주십시오.”
[우리 동생. 호위 특화. 베타. 자기 소개.]
[개체명 베타입니다. 호위 범위를 지정하시면 영역 내 존재를 전부 말살하겠습니다.]
“저는 허가 없이 주군께 접근하는 종자를 전부 죽이겠습니다.”
“그런 걸로 경쟁하지 마라. 어쨌든 그 부분은 너희에게 일임하지.”
베르덴이 시선을 옮겼다.
“내가 맡긴 일은 다 처리했나?”
“그야 물론이지. 알파와 베타가 만든 골렘 의체를 연구자들과 함께 투하르에 보냈고, 브로커한테 혈맹 흡수 맡겼고, 마차와 비행정 대기 중이고, 세계 회의 개최자한테 줄 선물도 준비했고. 당장 떠나도 문제없어.”
“그래, 잘했다.”
이제 가르간트로 향하는 것만 남았다.
당일 출발해도 되지만 가르간트에서 잠시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휴식도 중요하니까. 가장 중대한 건 약속이지만.
“잠깐!”
유니아가 번쩍 손을 들었다.
“그래서 선배는 뭐가 크게 달라진 건데? 경지 자체에 변화가 생긴 건 아닌 것 같은데, 좀 자세하게 설명해 주면 안 돼?”
호기심이 일렁이는 눈길이 향해 온다.
하기야 몇 명을 제외하면 베르덴의 최고 전력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건 다히트와의 결전이다. 지금은 그때와 달라져도 많이 달라졌고.
‘당연히 궁금증이 도질 수밖에. 균형을 다시 맞추기가 귀찮기는 하지만 가끔씩 인식을 갱신하는 편이 좋겠군. 아군의 전력을 어느 정도 파악해 놓는 것도 중요하니.’
다만 말로 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여 주는 편이 나을 것이다.
꽉.
베르덴이 주먹을 쥐었다.
존재감이 극에 다다르며 전신에서 칠흑의 화염이 피어오른다. 겁화(劫火). 마치 세상을 불태우려는 듯 지극히 강렬한 불길이었다.
푸른빛을 띠는 [인테리스]의 오브도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골렘 연구 시설의 관리자.
레오닐 베르타나스.
다히트 웨스로엘.
발로크 베시아스.
리반데일 대공.
광신자 노인.
텔로르 크렌드로스.
이슈르.
불완전한 초월에 닿았던 존재까지 포함해,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합을 나누었던 과거의 강적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피로 쌓아 올린 과거의 경험이 지금의 그에게 한 가지 결론을 안겨 주었다.
“동급의 경지에서.”
에온의 정점이 단언했다.
“내 적수는 없다.”
광오한 선언이었으나 그 안에 자만심 따위는 없었다. 베르덴이 바라보고 있는 궁극적인 강함은 ‘당신’과 초대 마도왕이기에.
* * *
아주 먼 거리에서 주인 없는 땅을 주시하고 있던 대행자, 메이아가 3차원을 넘어 대륙과 공간적으로 분리된 영역에 도달했다.
레프라기움 마탑.
고요한 공기를 무시하고 지나친 메이아가 마력 승강기를 타고 올라갔다. 그녀의 목적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동력실이었다.
“현재 베르덴이 가르간트로 향했습니다. 침묵의 사막에 다녀온 이후로 경지가 세부적으로 한 단계 더 높아졌고요.”
“본래 서로 공멸했어야 할 사막의 신과 키론다르 사이에 개입해서 홀로 살아남으려면, 그 정도 경지는 되어야 마땅하겠지.”
얼마 전까지 적룡, 사르칸드라와 기생의 대악마, 이페아카른이 마경을 나오지 못하도록 직접 감시했던 섭리자가 대답했다.
그는 푸른빛을 퍼뜨리는 동력원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벌써 7위계 상위입니다. 성장 속도가 예상의 예상을 넘어섰어요. 최초의 마탑이 보유한 모든 것을 손에 넣었을 텐데. 머지않아 마도의 개념에 통달해서 8위계로 올라설지도 모릅니다.”
“텔로르도 죽기 전에 만족했겠군. 내심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에게 계몽되기를 원해 왔으니.”
“대책을 말씀해 주시죠.”
“때를 기다리는 게 곧 대책이다.”
섭리자가 녹색 안광을 빛냈다.
“베르덴은 침묵의 사막에서 탄생해야 할 ‘운명의 사도(使徒)’를 죽였다. 이제 와서 ‘당신’과 손을 잡을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다.”
“최후의 저항자께서 안배하신 키론다르도 직접 처리했죠. 저는…….”
“두려운가?”
메이아가 입을 다물었다.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메이아도 나름대로 오랫동안 기다림을 견뎌 오고 있는 자다. 섭리자는 그녀가 무슨 불안감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다.
“운명은 허울뿐이며 미래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것. 이것이 본래의 세상이다, 메이아. 운명의 수레바퀴가 만들어 낸 가상 미래의 정보도 결국에는 허상이지. 미래 정보에 집착해 필사적으로 최선의 현실을 만들려고 하지 마라. 그건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니.”
“……그럼 저희는 뭘 해야 하죠?”
“우리는 결정권자가 아니다.”
기다림.
더 오랜 기다림.
더 더 오랜 기다림.
메이아의 인내심도 대단했지만 세상이 너무도 급박하게 변화하니 조금은 조급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나 많은 미래 정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사라지고 있으니까. 끝내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렵다.
“…….”
메이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하염없이 바닥을 내려다봤다. 적막이 깔렸다. 급변하는 세상과 달리 이곳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던───그때였다.
후웅.
동력원에서 미약한 소리가 들렸다.
메이아가 퍼뜩 시선을 높였다. 그 섭리자가 눈을 부릅뜨고 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당황스러워하는 반응이었다.
“설마…….”
섭리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레프라기움 동력원 속에 잠들어 있는 존재의 눈꺼풀이 움직였다.
최후의 저항자가 반쯤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