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5화 세계 집합 (2)
가르간트는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인 만큼, 당연히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다. 구역마다 다르긴 하나 인구 밀도도 굉장히 높은 편이다.
낮은 낮대로, 밤은 밤대로.
인간, 수인, 드물게는 엘프와 드워프가 건물의 숲을 거닌다. 다른 도시에서 축제라고 할 법한 것도 이곳에선 흔한 행사에 불과하다.
거대 도시의 사회 기반 시설은 어떤 도시도 감히 비할 수 없다.
그런데 현재 가르간트에 인파로 인한 혼란이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타인과 타인이 불가피하게 접촉하는 빈도수가 많아지니 시비가 붙어 싸움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아졌다.
괜히 지름길 삼아 마차째로 좁은 도로로 진입한 귀족의 얼굴이 볼 법하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순찰단이 비지땀을 흘리며 제 임무를 수행했다. 그래도 감정이 격해져 섣불리 날붙이를 꺼내 드는 사람은 없었다.
명시된 기한 동안 살인을 절대 금한다는 엄준한 칙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물론 가르간트에 왕은 없다. 그 이상의 존재가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도시에 우뚝 솟아난 환상의 안식처가 곧 억제력이다.
가르간트는 계외(界外)의 권역이다.
“아하하, 떠들썩해서 좋네. 이 정도로 주목받은 건 처음이야. 드래곤의 소재를 내건 내 경매는 그냥 동네 잔치 수준이었잖아?”
“뭐, 그렇겠지.”
드래곤의 뼈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이고, 이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는 쟁쟁한 세력은 얼마 되지 않는다.
자격을 충족하지 못한 세력과 사람이 힘들게 찾아올 이유가 없는 것이다.
반면, 세계 회의는 다르다.
인간이 아닌 종족을 포함한, 모든 대륙의 세력이 한데 모인다.
일반적으로 대면조차 할 수 없는 귀한 존재들과 어떻게든 연줄이라도 만들어 보고 싶은 사람들에겐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으며.
단순히 구경을 하러 온 사람들에겐 생애 다시 없을 기억이 될 수 있다.
마법계 총회의에 참석하는 초월자들을 잠시라도 보기 위해서 비렌테에 한껏 몰려들었던 마법사들처럼 말이다.
“약속은 제대로 지켰네, 기대했던 대로.”
창가에 서 있던 이그나시아가 소파에 풀썩 드러누웠다.
밤하늘의 은하수가 담긴 듯한 몽환적인 눈동자가 바로 맞은편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베르덴을 향했다.
“황제가 세계 회의 개최지를 쉽게 포기하려 들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설득한 거야? 어떤 고도의 협상 기술이라도 있었던 거니?”
“거래를 했지.”
“거래 내용이 뭔데?”
“곧 알게 될 거다.”
베르덴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하다. 이그나시아는 언제나 달큰한 종류의 간식을 즐긴다.
“또 보여 줄 듯 안 보여 줄 듯 구네. 역시. 그래야 베르덴이지. 원체 입이 가벼운 것들은 재미가 금방 식는다니까. 그렇다고 입이 너무 무거운 것도 영 답답해서 별로고.”
그녀의 눈꼬리가 휘었다.
“대신 입이 무거운 걸 강제로 여는 건 꽤 재미가 있지만. 그렇지 않니?”
“…….”
아드리안은 침묵으로 답했다. 그는 이그나시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다른 건 차치하고 성격 차이가 주요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그나시아는 생글생글 웃었다.
“아드리안이 이렇게 딱 붙어서 호위하고 있는 걸 보니, 몸에 뭔가 문제가 생겼나 봐? 툭 건드리기라도 하면 폭발이라도 해?”
“그래 보이나?”
“어머, 초월자로서 내가 너희보다 선배거든? 그걸 모르겠니? 너 지금 엄청 흉흉해. 세계 회의가 아니라 세계 전쟁이라도 하러 온 것처럼.”
이그나시아가 순간 사라졌다가 베르덴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예민하게 경계할 필요 없다는 명령을 들은 아드리안은 애써 대처하지 않고 그녀의 움직임만 주시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볼을 건드렸다.
“대륙 전체에 역병이 터져도, 혈맹이 덤벼도 안 보이더니. 그동안 마법 연구만 했니? 그래서 무슨 마법을 만든 거야? 나한테만 살짝 귀띔해 봐. 응? 응? 응?”
“호기심은.”
베르덴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주변을 환기했다. 그와 함께 아공간에서 책 한 권이 소환되었다.
제목부터 내용까지, 모든 문자는 대륙 공용어와 겹치지 않았다.
이그나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대어, 가 아니잖아. 뭐야, 이건?”
“선물이다. 무슨 문자인지 알겠나?”
“잠깐…….”
이그나시아는 취미 생활로써 대대적인 경매를 주최해 왔다. 꽤 오랫동안. 그 경험으로 쌓은 관록은 어지간히 이름을 날린 감정사의 뺨을 수차례 치고도 남을 수준이다.
그런 초월자가 고작 책 한 권에 꽤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전혀 모르겠는데? 뭐지? 고대어 이전 시대의 유물인가? 대체 이런 골동품을 어디서 구해 온 거야? 어디 유적이라도 발견했니?”
“비슷하지.”
이그나시아가 책을 노려보다가 잠깐 흠칫하더니 그 냄새에 집중했다. 소재 자체에 깊게 새겨진 향취가 코끝을 스쳤다.
“모래 냄새…… 모래?”
이그나시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사막?”
“이건 사막어의 문자를 대륙 공용어의 문자로 대응한 해석본이다. 참고하면 그 책도 읽을 수 있을 거다.”
문자 해석본은 아리온에게 일임했다. 폐관하기 전 이자벨라에게 부탁한, 이그나시아를 위한 선물이 이것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다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사막어, 사막어. 그러니까 사막에 문명이 있다는 얘기야?”
“궁금하면 책을 읽어라.”
“밀고 당기는 게 진짜…… 아하하하하핫.”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다가 어느 순간 뚝 멈췄다.
“원하는 게 뭐야?”
“선물이라니까.”
“그래, 선물 고마워. 근데 이건 날 자극하기 위한 미끼잖아. 나, 지금 엄청 재밌거든? 그래서 웬만한 요구는 다 들어줄 것 같으니까 숨기지 말고 어서 말해 봐. 늦기 전에.”
이그나시아는 합리보다 흥미를 우선하는 성향이 강하다. 베르덴이 아는 한 쾌락주의자로서 그녀보다 욕망을 우선하는 초월자는 없다.
베르덴이 말했다.
“나하고 사업 하나 같이 하지.”
* * *
베르덴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일단 미스릴을 대량으로 구할 생각이다. 미스릴 광산이라면 더할 나위 없고.”
“고작 미스릴? 그건 에온만으로 충분하잖아?”
“고작 그 정도 규모가 아니니까. 우리만으로는 현실적으로 역량이 부족하다. 초기 단계부터 시선을 과하게 끄는 건 가능한 피하고 싶군.”
이그나시아가 피식 웃었다.
“하긴, 에온에겐 적이 많으니까.”
마법계 총회의에서 보헤미른 마탑의 인체 실험을 빌미로 10대 마탑을 압박한 데다가 언데드 군세와 혈맹이 주인 없는 땅을 노리기도 했다.
무대 위에서 에온을 향해 이빨을 드러낼 만한 세력, 혹은 세력들이 있다는 뜻.
그런 와중에 미스릴을 과하게 수급한다는 소문이 퍼지면, 선을 넘을 듯 말듯 교묘하게 방해가 들어올 것이다.
에온와 직접적인 마찰이 없는 세력도 동참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누가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건 당연한 일이므로.
와삭.
이그나시아가 부드럽고 달달한 최고급 과자를 우물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무슨 사업이길래 미스릴이 그렇게 많이 필요한데? 사업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려는 건? 시시하게 돈 때문은 아닐 거잖아.”
“결과적으로 마법 체계가 변하겠지.”
“뭐?”
베르덴이 마법사로서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는 선언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았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향해 또 말을 이었다.
“먼 고대에 실전된 영창 마법의 실마리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미스릴은 이를 위한 도구로 사용할 계획이고.”
스펠라이트(Spellite).
이는 다름 아닌 미스릴을 특수 공법으로 가공한 물질로, 최초의 마탑에서 텔로르가 직접 설명해 준 금속이었다.
스펠라이트로 제작된 지팡이는 이 세상에 보다 강한 요청을 할 수 있게 되어, 영창 마법의 위력이 높아지는 현상을 일으킨다.
‘물론 그 전에 영창 마법을 완전히 되살릴 필요는 있지만, 최소한의 기반과 마법적 원리는 구축했으니 결국 시간문제다.’
남은 건 실천적 연구뿐이다.
베르덴은 현시대에 걸맞게 다시금 개편될 마법 체계를 선점할 생각이었다. 이미 머릿속으론 구상을 끝마쳤다.
“난데없이 영창 마법이라니…… 인공 골렘부터 시작해서 실전된 고대 마법 기술을 죄다 되살리고 있네. 이러다가 스크롤도 만들겠어?”
“…….”
이그나시아가 묻는다.
“미스릴을 어떤 식으로 사용하면 영창 마법의 촉매제가 되는데?”
“미스릴을 일정 기준 이상 확보해 주면 결과물을 보여 주지. 필요한 연구가 끝나는 즉시 영창 마법을 공유할 거고. 달리 원하는 게 더 있다면 나중에 계약서를 쓸 때 논의하는 게 좋겠군.”
“진짜 영창 마법을 손에 넣었나 보네……. 근데 왜 나야? 다른 세력도 있잖아?”
“우린 공범이니까.”
이그나시아는 다히트에게 동조하여 위계 돌파 현상을 대륙 전체에 흩뿌렸고, 베르덴은 블랙 아워와 보헤미른 마탑 수뇌부를 끝장내고도 제재 대상에서 벗어났다.
사실상 둘이야말로 현 마법계를 혼란스럽게 만든 주범인 셈이다.
들키면 곤란한 비밀을 서로 공유하는 것.
이는 되레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베르덴과 이그나시아의 개인적인 관계는 여전히 동등하다.
이그나시아가 슬그머니 입가를 가리고는 작게 어깨를 들썩였다.
“재밌네. 재밌겠어. 영창 마법이 완성되면 정말로 마법계에 대격변이 일 것 같은데. 그럼 재밌는 사건이 훨씬 더 많아질 테고?”
“대답은?”
“좋아, 수락할게.”
이그나시아가 동업자가 되었다.
“근데 되도록 외부의 시선을 끌지 않는 선에서 확보할 수 있는 미스릴의 양은, 가르간트에서도 아주 많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 다른 수급처도 구해야 하지 않겠어?”
“이미 확보했다. 공범자가 너 하나는 아니거든.”
에온의 권역 바깥에도 베르덴과 함께하는 세력이 있다. 로벨린이 이끄는 보헤미른 마탑과 메드란트가 지휘하는 오스테아 마탑이 그렇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이야, 뒤에서 일 꾸미는 거 봐? 음흉하기 짝이 없네. 암중에서 다히트 웨스로엘을 살해하고, 발로크 베시아스와 그 무리를 죽이고, 주인 없는 땅을 통일해 멋대로 권역으로 선포하고, 3계명이라는 명분으로 뒷세계가 고개도 못 들게 짓밟고 있는 초월자답다고 할까?”
“누가 들으면 대단한 악인으로 알겠군.”
“너한테 당한 애들한테는 훌륭한 악인이지.”
이그나시아가 책을 짚었다.
“어쨌든. 사업과 별개로 이런 선물을 줬으니 답례는 해야겠지? 세계 회의 당일에 발표할 건데, 너한테는 지금 말해 줄게.”
“듣고 있다.”
“동대륙 북쪽. 델하룬이 초월자 세력에 의해서 통일됐어.”
베르덴이 미간을 좁혓다.
“……지도자는?”
“너도 들어 봤을 거야. ‘마울러(Mauler)’라고.”
이그나시아가 다리를 꼬았다.
“얼마 전에 세계 회의에 참석하겠다고 나한테 연락을 보냈어. 그래서 애들 보내서 자세히 확인했지. 잠적한 동안 아주 이를 갈았는지 세력이 꽤 만만치가 않던데?”
“그리고.”
“마울러는 동대륙을 원하고 있어. 본인이 직접 그렇게 말했지. 그러니까 세계 회의에서 네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높거든? 반응을 보니 너도 짐작은 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순간 웃음기가 사라졌다.
“수왕에게 패배했다고는 하지만 얕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당대의 수왕은 수인족 고금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생물로서 경외받고 있다고 하니까. 그런 녀석과 맞붙고도 이렇게 재기한 걸 보면 예전보다 경지가 높아졌겠지. 뭐, 어쨌든!”
이그나시아가 턱을 괴었다.
“재밌는 광경. 기대해도 되겠지?”
“마음대로.”
베르덴은 담담하게 대답하고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엘프는 당일에 도착할 거다. 용건은 마쳤으니, 이만 가 보도록 하지.”
“그래…… 아참. 최근 에온에서 엄청나게 귀한 장신구를 판다고 들었는데. 가장 등급이 높은 걸로 하나 준비해 줄래?”
황금의 죄인은 전염병으로 세상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소문에 소문을 퍼뜨렸다. 고대의 장신구는 이미 사교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예약해 두지.”
그렇게 베르덴과 아드리안이 환상의 안식처를 떠났다. 건물 꼭대기에서 칠흑의 마차가 멀어져 가는 것이 훤히 보였다.
세계 회의는 어떻게 진행될까?
난장판이 될까?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
이그나시아는 참기가 어려웠다. 날짜를 앞당기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다. 그렇게 기대감에 젖어 있던 바로 그때였다.
휙.
이그나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초월자의 감각이 곤두섰다. 가르간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가 강하게 명멸했다.
“어머…… 이건 또 뭘까?”
* * *
날카로운 방패를 본뜬 상징.
에스티리아 왕국의 마차 행렬이 가르간트의 거리를 지나고 있다.
그 안에는 칼리아와 칼리아를 호위하는 카인과 에네트만이 아니라 에스퍼렌사 공작, 그리고 인형 왕녀라 불리는 실리스 본인이 탑승해 있었다.
본래 실리스는 1왕자 발르그나를 꼭두각시로 내세워 왕국을 통치하고 있었지만, 세계 회의에서도 인형극을 벌일 수는 없었다.
당장 발각될 테니까.
그녀에게는 초월자들을 속일 수 있다는 오만한 자신감 따위는 없었다.
실리스가 조용히 심호흡했다.
‘베르덴 님과 상의했으니 걱정은 없지만…… 그래도 긴장되네.’
이렇게 직접 세상에 나오는 건 처음이다.
에스티리아 왕국이 에온의 권역으로 지정되지 않았다면, 베르덴이란 든든한 지지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앞으로 소란이 일기는 할 테지만 수습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암월의 꿈…… 정확히는 그 안에 섞여 있는 계외의 마법을 경험하고, 방주의 조율자 덕분에 그에 적응한 그녀의 고대 혈통 마법이 예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으므로.
예정대로 가면 어떤 문제도 없으──
“이상하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옆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허억.
호흡이 뒤틀린다.
맞은편에 앉은 그 에스퍼렌사 공작조차 감히 반응하지 못했다. 그는 검에 손을 얹지도 못한 채 눈만 부릅뜨고 있을 뿐이었다.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저도 모르게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대, 대체. 뭐가?’
실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꿈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아름다운 여인이 실리스의 어깨에 팔을 얹은 채 눈을 빛내고 있었다.
환상의 초월자인 이그나시아가 속삭인다.
“왜 너한테서 내 힘이 느껴지는 걸까? 자세히 설명해 줄래?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마녀가, 계외를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