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1화 세계 집합 – 이틀 (3)
아드리안의 이마에 핏대가 돋았다.
“주군께서 식사하시는 도중 들이닥쳐서는 대답을 요구해? 예의는 개나 줘 버렸나?”
“일부러 기척을 드러내면서 왔잖아.”
테아렐이 살갗에 거의 닿을 듯 말 듯한 광검을 내려다봤다.
“미리 적의가 없다는 걸 드러내고, 보다시피 내 목에 칼을 겨누게도 하고 있어. 이 정도면 최소한의 예의는 챙긴 것 같은데. 이래도 예의를 개한테 줬다고 생각해?”
“그렇다면.”
“그래?”
테아렐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만 뻥긋거렸다.
“멍.”
“…….”
두 초월자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시선을 부딪쳤다. 뒤에 있던 지배인이 벌벌 떨었다. 분위기가 점점 더 심각해지는 게 느껴졌다.
아드리안의 성질이 굉장히 사납다는 건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걸 베르덴이 중재했다.
“물러서라.”
“예, 주군.”
아드리안이 즉시 광검을 거두었다. 그제야 눈치를 보고 있던 라테온과 카인도 슬그머니 검끝을 회수했다.
……쪼르르륵.
베르덴이 <염동력>으로 새로운 잔을 가져와서 와인을 따른 다음 테아렐과 가까운 테이블 모서리로 보냈다.
일단 손님 취급은 하겠다는 뜻이었다.
“내게 바다 냄새가 난다고 했나? 최근 해변가에 간 적은 없는데.”
“그런 얕은 냄새가 아니야. 훨씬 더 깊어. 그런 게 너에게서 느껴져. 너를 둘러싼 외부에서도.”
테아렐이 계속 입술을 달싹였다.
“이런 경우에는 외부 요인일 가능성이 높아. 예를 들어 고대 아티팩트의 각인 기능으로 소유주가 고대 아티팩트와 연결되는 것과 비슷하지. 그래서 그렇게 물어본 거야.”
무슨 물건을 얻었는가.
베르덴은 테아렐이 지적한 바다 냄새가 무엇인지 곱씹어 봤다.
마법계 총회의에선 별다른 반응이 없었던 그녀가 갑자기 이런다는 것은 그사이에 베르덴에게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였다.
‘……그링 아르카넘.’
초월자 테아렐이 과민하게 반응할 정도로 대단한 물건이라고 하면 그것밖에 없었다. 6대 전설 중 3대 전설에 오른 지식을 탐하는 세계 금서.
그것에 직접 각인 같은 걸 한 적은 없지만 그를 암시하는 말은 들은 적은 있다.
───나는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네 번째로 총명한 자. 가장 밑바닥에서 웅크린 자. 그리고, 지식의 만찬회를 주도하는 자. 호스트(Host).
───네 이름은, 베르덴.
───하지만 전통적으로 지식의 만찬회에서는 진명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여 만찬회에서 너를 가리키는 이름은 애셔로 등록하겠다.
그링 아르카넘으로 만났던 존재가 베르덴 자신을 주빈으로 등재했다. 물론 고작 글을 끄적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으리라.
‘뭔지는 몰라도 그 자체에 어떤 개념적인 힘이 작용한 건가.’
베르덴은 여전히 호스트가 어떤 생물인지 알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주어진 단서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테아렐이 언급한 바다를 억지로라도 결부시키니 조금은 짐작이 갔다.
‘호스트를 만난 공간은 어두웠다. 내가 내뱉은 날숨이 평소보다 무거웠고, 시종일관 몸이 붕 떠 있는 감각을 느꼈다.’
베르덴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마치 물속처럼.’
신경이 곤두선다.
몰가른의 미래 벽화에 새겨진 그림.
물결치는 바다.
그렇다.
아마 호스트는 사막의 신인 이슈르나 옛 왕처럼 미래 운명과 연관된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 말인즉슨 높은 확률로 적으로서 대면하게 될 터.
다만…… 마냥 그렇다고 확정하기엔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었다.
───호스트는 ‘당신’과 초대 마도왕과 관련된 존재입니까?
───바로 그걸 알아내는 것이, 내가 그대에게 주는 숙제다.
‘스승님께선 호스트가 무엇인지 알고 계셨음에도 내가 그링 아르카넘을 소유하길 유도하셨다. 나에게 호스트의 정체를 파악해 보라는 숙제까지 주시면서. 대체 왜?’
이슈르처럼 운명으로서 완전한 힘을 얻기 전에 처리하란 뜻일까, 아니면 강적이니 성장의 발판으로 쓰라는 의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원계(遠計)를 위해서일까.
당연하게도 베르덴은 안 좋은 의미에서 관리자를 의심하지 않았다. 아주 조금도. 그의 신뢰는 그렇게나 얄팍하지 않았다.
‘……뭐가 됐든 간에 현재 정보만으론 스승님의 의도를 헤아리기 어렵다.’
그래서 베르덴은 생각을 전환했다.
테아렐을 중점으로.
‘테아렐이 추구하는 이상은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지만 바다에 몰두하고 집착하고 있다는 건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마법계 총회의에서 섭리자에게 한 질문을 생각하면 바다를 경계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추측한 대로 호스트가 바다과 관련된 존재라면, 어쩌면 테아렐은 어떤 식으로든 호스트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용할 수 있나?
조력을 구할 수 있나?
글쎄.
테아렐에게 그링 아르카넘의 정보를 공유하는 건 시기상조다. 적어도 아직은 그렇다. 테아렐은 방주의 일원도 아닌 데다가 직간접적인 교류도 마법계 회의 한 번밖에 없었으니까.
급박한 상황이거나 당장 그만한 가치가 있다면 모를까,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상대에게 최고 기밀을 선뜻 공유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베르덴의 방식이 아니었다.
“짐작 가는 게 있나 봐.”
테아렐이 담담하게 중얼거리고는 베르덴이 준 와인을 머금었다.
사고를 최대로 가속한 베르덴이 실제로 생각에 잠긴 시간은 잠깐에 불과했지만, 그녀는 그 짧은 순간에도 확신을 얻었다.
초월자는 워낙 고집스러워서 의심을 없애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베르덴은 숨기지 않았다.
물론 드러내지도 않았다.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군. 뭐, 세계 회의가 당장 내일이니까. 너도 내가 불청객의 질문에 순순히 답할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을 거고.”
“나는 기대했어.”
“다음을 기약하지.”
정말로 기대했다는 테아렐의 반응을, 베르덴은 시원하게 무시했다.
“훗날 내가 원할 때 연락하겠다. 그땐 아드리안을 도발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음.”
테아렐이 낮게 목소리를 흘린 뒤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두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머지않아 너는 나를 찾게 될 테니까.”
테아렐이 옆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녀의 눈길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팔짱을 끼고 있는 아드리안에게 머물렀다.
“그리고 도발 아니었는데.”
“……?”
“농담이었어. 이닉토르가 분위기를 환기하려면 그게 좋다고 해서.”
그렇게 해명하는 테아렐에게서는 어떤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드리안과 벌인 신경전 같은 대화는 누구에게나 도발적으로 보였지만, 정작 그녀에겐 그런 뜻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테아렐이 떠났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걸 끝까지 지켜보던 아드리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한 놈이 한둘이 아니군.”
“네가 할 말이야?”
[인정.]
이자벨라가 어이가 없다는 듯 지적했다. 솔직히 아드리안의 성질머리에 비해서 테아렐의 천연스러운 태도는 귀여운 수준이었다.
따로 여유 시간을 받아 개인적으로 휴식 중인 에네트가 여기 있었다면, 아드리안을 비호했을지도 몰랐다.
“…….”
베르덴이 발코니 쪽을 쳐다봤다.
테아렐을 따라서 레스토랑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모험가 길드 본부의 전력이 움직인다.
개중에는 비렌테의 마법계 총회의에서 테아렐을 직접 호위했던 흑요 등급 모험가 불굴의 이닉토르도 있었다.
그러나 베르덴의 시선을 빼앗은 건 오직 단 한 명뿐이었다.
전신 갑옷으로 피부를 조금도 드러내지 않은 흑요 등급 모험가…… 방주에서는 재액의 토벌자라 불리는 사내.
마치 석상처럼 지붕에 서 있던 그는 베르덴과 시선을 교환하고는 별 반응 없이 그대로 등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역시 선장 대부분이 참석하는군.’
재액의 토벌자.
미지의 탐색자.
북부의 감시자.
균형의 조율자.
언제나 아크에 머무르는 세계의 주시자를 제외한 네 명의 선장이 가르간트에 모였다.
아세트로와 에레스를 제외한 두 사람은 초월자나 세력의 대표는 아니었지만, 무력도 무력이고 신분도 신분이니 결국에는 세계 회의에 호위로서 참석할 게 틀림없었다.
가르간트는 겉으로는 떠들썩했으나, 속은 더없이 고요했다.
우리는 폭풍의 눈에 서 있다.
* * *
하이랜디아 국왕이자 서약자라는 이명을 가진 유리온 하이로스가 푹신푹신한 소파에 편히 누운 채 감탄사를 흘렸다.
“그래? 다행히 베르덴은 아드리안과는 다르게 이성에 관심은 확실히 있는 것 같군. 좋아. 결혼을 염두에 두는 초월자가 늘어나는 건 더할 나위 없이 기꺼운 일이지.”
“그렇습니까.”
서약자 직속인 언령의 기사단의 부단장, 격진의 레오나가 말했다.
“검은 화산에서의 일을 생각해 보면 정체를 감출 수 있는데도 공공연하게 드러낸 걸 보면 신성께서는 과시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의외로.”
“아니. 이 내가 봤을 땐 이자벨라 측이 요구했을 가능성이 높다. 베르덴에겐 칼리아 드 에스퍼렌사란 여자도 있으니까. 더 있을 수도 있고. 그런 경쟁자를 향해 이자벨라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야. 이 내가 정실이라고.”
유리온은 그게 정답이라는 양 당당하게 견해를 밝혔다. 그는 초월자 중에서 이성 관계에 가장 통달해 있다고 평소 자신했다.
작금의 시대에서 결혼을 한 초월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유리온이 얼굴 앞에서 손을 휘휘 저었다.
“베르덴을 생각해 봐. 인물 자체도 뛰어난 데다가 내력은 그야말로 엄청나잖아. 이성이 안 꼬이려야 안 꼬일 수가 없지.”
“신성께서 문란하다는 말씀입니까?”
레오나가 검은 화산 지대와 주인 없는 땅에서 보았던 베르덴을 곰곰이 상기하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렷다.
“그렇게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만, 그보다는 냉혹한 면모가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실제로 신성은 피의 행보를 보여 왔습니다. 그러니 이성보단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문란한 건 성욕만을 위해서 여자 수십 명씩 끼고 다니는 저급한 것들에게나 어울리는 단어고. 그리고 이성적인 흥미는 친절함이나 두려움 자체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궁금증에서 생기는 거다.”
유리온이 의자 팔걸이에 손을 얹었다.
“이성 간의 관계가 진전되는 건 상대의 속내를 파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왜 착한 남자는 재미없다고 할까? 착하다는 게 좋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그만큼 물이 맑기에 바닥이 금방 보여 흥미를 잃기 십상이기 때문이지. 그래서 흔히 나쁜 놈이 인기가 많다고 하는 거야. 상대를 알아 가는 재미가 있거든.”
“…….”
“나중에 만족하든 실망하든 그 과정에서 흥미는 오래갈 수밖에 없다. 관계도 오래 지속되고. 그럴수록 정도 생기기 마련이지. 그래서 과묵하고, 차갑고, 무서운 사내가 이성적으로 유리한 거다. 그 껍질 안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거든. 자자, 그래서 내가 한 말을 짧게 요약하면?”
“신성은 나쁜 사내다?”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레오나.
그녀는 유리온과 하이랜디아를 수호하기 위해서 궁극적인 강함을 추구하는 기사이기에 이성 따위에 정말로 관심이 없었다.
유리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여전하군, 레오나. 내가 평소에 말했을 텐데. 세월 금방 간다고. 늦기 전에 이성에도 관심을 가져 봐. 가정을 실제로 가져 봐야 아! 이래서 결혼을 하는구나─ 하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지. 나이 들면 후회한다니까?”
“아, 네.”
레오나가 강한 어조로 말을 끊어 버렸다.
유리온은 극도의 결혼 예찬론자라 결혼 이야기만 나오면 잡설이 많아지기에 이럴 때는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리거나 화제를 돌리는 게 최선이었다.
레오나가 물었다.
“그래서 세계 회의는 본 예정대로 진행할 의향이십니까?”
“아, 그거야 물론.”
유리온이 표정을 아예 지웠다. 방금까지 사담을 나누었던 사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존재감이 내면을 자극했다.
“피울음 역병, 언데드 사태, 세 개 대륙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 사고, 세력들이 숨긴 비밀, 그 외 기타 등등. 마음에 들지 않아. 하마터면 내 아내, 내 딸, 내 국가에 피해가 갈 수 있었어. 가만히 지켜보는 건 여기까지다.”
꽈드드득.
금속 팔걸이가 우그러졌다.
“이번에 헤집어서 들어내야겠다. 루아스교든 마탑이든 뭐든.”
세계 회의를 향해 분란을 예고한 유리온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웃음을 머금었다.
“아내와 딸아이가 왔군.”
유리온이 뒷짐을 진 채 빠른 걸음으로 마당으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의 아내와 딸, 그리고 그 둘을 호위했던 언령의 기사단원들과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리온 하이로스.
레오나에게 있어 그는 인간적이고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경애하는 왕이었으며…… 그는 자신의 가족과 국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철혈의 왕이었다.
* * *
짹짹짹.
새가 지저귄다.
7대 마도왕, 반젤리스 루인 아케나드가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는 세계 회의에 올라올 안건들을 예상하려 하고 있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베르덴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곧 다시 만나겠구나.”
메드레일이 대답했다.
“네, 조부님.”
메드레일의 눈은 긴장감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그 기대는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베르덴을 향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은 여자가 남자를 바라보는 눈빛은 절대로 아니었다.
이윽고 시간이 흘러 세상에서 몇 번째인지도 모를 낮이 저물었고.
다시금 자정이 넘었다.
세계 회의 D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