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2화 참석자들 (1)
한 명을 죽였을 때는 살인자.
열 명을 죽였을 때는 학살자.
백 명을 죽였을 때는 승리자.
천 명을 죽였을 때는 지도자.
만 명을 죽였을 때는 영웅.
십만 명을 죽였을 때는 구원자.
백만 명을 죽였을 때는 지배자.
천만 명을 죽였을 때는 정복자.
초월자를 죽였을 때는 초월자.
초월자들을 죽였을 때는 제왕.
그 이상을 죽였을 때는 폭군.
…….
부정에서 긍정으로, 긍정에서 다시 부정으로.
대륙에 피와 죽음이 흐를수록 아칸드 리니게아 타인 크세리온을 수식하는 단어가 달라졌다.
크세리온 왕국이 자랑하는 영웅이었던 그는 크세리온 황제가 되어 초월자 전쟁을 확대, 이 세계를 전란으로 뒤덮었다.
사내는 여인의 잘린 목 앞에서 무릎을 꿇었고, 여인은 사내의 잘린 목 앞에서 슬픔을 빚었다.
부모는 잘린 아이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 오열했고, 아이는 부모의 잘린 머리를 바라본 채 구슬피 울었다.
하지만 아칸드는 죄책감 따위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마치 청소를 하듯 시야에 닿는 모든 인간을 쓸어버렸다.
그건 허구한 날 개미집을 파내고 개미와 개미의 알을 밟아 죽이는 것보다 더했다. 생명이라고 보지도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그 수많은 죽음에 대한 책임을 누가 져야만 했는가? 아칸드 또한 자식이었으므로 부모가 대신 죄를 짊어졌다.
아칸드의 숨겨진 본질을 몰랐다 해도 아바마마는 결국 아버지였으며, 그것이 필연적인 흐름이라 해도 결국 아바마마는 아칸드에게 직접 제위를 물려준 선왕이었기에.
결국 어마마마는 아칸드를 낳은 어머니였기에.
두 사람은 가족을 사랑했고, 국민을 사랑했고, 나라를 사랑했다. 평화도 사랑했지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전쟁 또한 사랑할 줄 알았다.
위정자로서의 능력은 부족했을지언정 이타적인 왕과 왕비였다.
그래서 죄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아칸드가 지휘하는 군대가 몰살한 도시를 찾아가 수만 명에 육박하는 사람의 머리가 창대에 걸려 있는 걸 목격한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는 크세리온 제국으로 돌아와 목을 매달았다.
생에 더는 연연하지 않겠다는 듯 발에 차인 의자는 멀리 나가떨어져 있었고……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는 다리가 허공에 떠 있는 동안 내내 서로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다른 자식 한 명을 외면한 채.
사실 외면한 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절대로 용서받아서도 위로받아서도 안 되는 죄인.
그래서 차마 아칸드와 달랐던 둘째 아들을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살고 싶어질까 봐.
“…….”
망국의 죄인은 목에 걸린 흑요 플레이트를 꽈악 쥐었다. 소리 없이 숨을 쉬었다. 그 손 아래, 갑옷으로 가려진 가슴 중앙에 박힌 ‘고대 아티팩트’의 잔잔한 맥동이 느껴졌다.
‘오른팔, 오른다리, 몸통은 루아스 교국에 있고. 왼팔, 왼다리, 머리는 주검의 영광에게 있다. 이제 남은 건 전쟁뿐이야.’
주검의 영광이 어떤 방법으로 루아스 교국에 있는 신체들을 탈취하려고 하는지 조금도 짐작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가 머지않았다는 건 틀림없다.
‘반드시 막아야 한다.’
2차 초월자 전쟁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발발해서는 안 된다. 현재의 세상이 공포와 절규로 다시금 물드는 건 볼 수 없다.
두근.
황자님은 할 수 있어요, 믿고 있어요, 미안하다, 복수를! 복수해야 합니다! 황제의 신체를 찢어발겨야 합니다! 황자님이 책임져 주세요. 책임을 지게 해서 죄송합니다. 우리의 바람을. 크세리온 제국…… 아니, 왕국의 염원을. 왕자님. 황자님. 부탁드려요. 아! 당신 때문이야. 그러니까 책임지고 마무리해! 우리가 힘이 되어 줄 테니까! 황자님은 가장 마지막에 죽어! 그러니 절대로 무너지지 마! 당신이! 황자님이! 네가! 자네가! 그대가! 진정한 크세리온 황제니까!
내면에서 수많은 통곡이 쏟아져 나오며 망국의 죄인을 쥐어짰다. 아프지 않다. 전부 이해한다. 이 모든 걸 알고 죄인이 된 거니까.
그는 800년 전의 사람이었지만 다른 죄인과는 달리 순수한 인간이었다.
‘상황이 좋지 않은 건 애써 부정할 수도 없지만, 초대 네크로맨서께서 강력한 아군을 구하셨으니 그리 절망적이지는 않다.’
어떻게 주검의 영광이 옛 왕의 신체들을 정확히 찾을 수 있었는지가 변수이나, 그걸 걱정해 봤자 당장 바뀌는 건 없다.
과거는 이제 와 되풀이되지 않는다. 그는 비관 대신 희망을 품었다.
오늘 개최될 세계 회의는 그런 내년을 암시하는 분수령이 되리라.
스윽.
망국의 죄인이 고개를 들었다. 아침과 밤이 섞인 새벽의 상공이 세상을 깨웠다. 그 한가운데에 누군가 있었다.
“시작이군.”
───!
존재감이 급격하게 강해진다.
하늘하늘한 몽환적인 격이 가르간트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 * *
이그나시아가 가르간트의 드높은 상공에서 길게 심호흡했다. 새벽녘의 공기가 차분하게 그녀의 폐를 적셨다.
“후우, 하.”
찬란한 눈동자는 짙은 어둠과 그 어둠을 조금씩 밀어내고 있는 태양의 빛이 공존하는 영롱한 세상을 담고 있었다.
세계 회의에는 세계 회의만의 특별한 장소가 필요하다.
만약 아르나크 제국이 개최지였다면 제국 황실은 별도로 거대한 건축물을 세웠으리라. 다른 국가라고 해도 마찬가지.
그런 의미에서 이그나시아가 세계 회의 장소를 준비하는 방식은 달랐다.
시간은 상대적이다.
몇 분에 비해 몇 초는 한때와도 같고.
몇 시간에 비해 몇 초는 순간과도 같으며.
며칠에 비해 몇 초는 찰나와도 같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흘러갈 세월에 비해서 세계 회의의 시간도 잠깐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것은 깨기 직전 꾼 꿈과 다를 바가 없다.
아무리 꿈속에서는 긴박했어도 결국 깨고 보면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리고 아침을 먹을 때면 대부분 망각하는 것이다.
세상 누구든, 꿈을 꾸는 존재는 결국 꿈을 잊고 산다.
그렇기에 환상이다.
대륙이 주목하는 세계 회의도 결국에는 그렇게 여겨질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의 존재마저도 그렇게 잊히겠지.
그런 환상적인 상상에 잠겨 있던 이그나시아가 이내 양손을 모았다.
엄지를 제외하고, 왼손과 오른손 각각 네 개의 손가락을 겹쳤다. 저마다의 첫 번째 마디가 서로를 포근하게 감쌌다.
화아아아아악.
고유 마력이 넘실거린다. 이그나시아의 눈동자와 머리카락이 화려하게 빛났다. 공허한 새벽의 하늘에 작은 은하수가 흐르는 듯했다.
“……역시 이 모양이 좋겠지?”
마치 세상을 향해 동의를 구하는 듯한 물음.
이윽고 심상으로 환상의 구체적인 형태를 결정한 이그나시아가 입꼬리를 올렸다. 양 팔꿈치를 좌우 바깥으로 밀었다.
첫 번째 마디에서 마찰을 일으키던 손가락들이 잡아당겨지면서 손톱에 닿고, 손끝을 지나 완전히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초위 마법.
경계 현현: <환허계──진하(震河)>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다. 그리고 그 틈새에서 어마어마한 크기의 건축물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눈대중으로는 측량하기 어려운 크기의 그림자가 가르간트 중심부를 뒤덮었다.
그것은 3차원의 마름모───마름모 십이면체 형태를 하고 있었다.
───쾅! 쾅! 쾅! 쾅!
마름모 중앙에 있는 네 개의 꼭지점에서 네 개의 쇠사슬이 뻗어 나왔다. 그 끝부분을 장식한 날카로운 첨단이 허공에 단단히 박혔다.
마치 눈으로 보이지 않은 투명한 벽면에 고정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이것은 본래 실재하지 않은 걸 현실에 구현하는 초위 마법이다.
역사적으로 환영 계열의 마법계 초월자가 여럿 있었으나 이그나시아의 환상은 본질적으로 개념이 달랐다.
이에 혹자는 말한다.
계외의 길몽은 대륙의 길몽이 되고.
계외의 악몽은 세상의 악몽이 된다.
“잘 봤니?”
이그나시아가 상공에서 내려오며 성숙한 미소를 띠었다.
허공에 고정된, 환상으로 만들어진 소파에 앉아 있던 실리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물론입니다. 실제로 초위 마법을 보는 건 처음입니다. 평생토록 잊지 못할 영광스러운 광경이었습니다, 이그나시아 님.”
“이해는?”
“……저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었습니다.”
실리스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대 마녀의 고유 마법으로 환상을 일으켰다. 이그나시아를 흉내 내려 했으나 당연히 실패했다.
실리스가 어렴풋이라도 이해한 건 1푼조차 되지 않았다.
“아하하, 그거면 됐어.”
이그나시아가 입술을 할짝였다.
조금 흥분에 찬 모습.
“지성을 가진 존재는 누구나 자신만의 공상을 가져. 하나 허황된 건 결국에는 허황된 것일 뿐이지. 수많은 인간이 초월을 꿈꿔도 초월자가 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야.”
이그나시아가 소파에 앉아서 실리스의 어깨를 감쌌다.
하늘을 향해 손을 휘젓자 거대한 건축물 위로 자욱한 구름이 걷히면서 무수한 별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 별빛일까? 아니야. 내가 만들어 낸 거짓된 별빛에 불과하지. 근데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겐 진짜 별빛이 되는 거야. 그게 바로 진정한 환상의 극위(極位)란다. 그리고 극을 벗어나 진정한 환상의 초월에 다다르면 그 영역이 넓어져. 존재에서 존재가 아닌 것까지.”
이그나시아가 속삭였다.
“말 그대로 세상을 속이는 거야. 그러면 세상에 속하는 모든 존재는 모든 환상을 실감할 수밖에 없게 되거든.”
“아…….”
“인지의 차이. 이렇듯 진상(眞相)과 허상(虛像)은 한 끗 차이란다.”
부드러운 손길이 백금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어째서 베르덴이 비선실세로 지내 온 실리스를 에스티리아 국왕으로 내보냈는가, 어째서 실리스를 자신과 만나도록 보고만 있었는가.
지난 삼 일간 이그나시아는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베르덴, 이 음흉한 녀석.’
과거가 뇌리를 스쳤다.
이그나시아는 초월자의 재목이었기에 태어났을 때부터 특별했다. 그녀에게 꿈은 현실처럼 느껴졌고, 현실은 꿈처럼 느껴졌다.
그 선천적인 감각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어느 날 부모님이 아주 어렵게 모신 환영 계열 마도사는, 고작 다섯 살에 불과했던 이그나시아를 지극정성으로 가르쳤다.
당시 한계 위계 측정은 안 해 봤어도 재능이 아예 넘쳐흐르는 게 보였으니 괜히 마법계의 이목을 끄는 대신 한적한 마을에서 조용히 이그나시아를 마법사로 키운 것이다.
상당히 긴 시간을 함께 지냈기에 둘의 유대감은 끈끈한 스승과 제자와도 같았다.
하지만…… 이그나시아가 마도를 개척한 순간 관계는 틑어졌다.
이해를 벗어난 재능.
스승은 벌레가 되었다.
본능적인 판단이었는지 이성적인 결단이었는지 두려움과 질투로 물든 스승은 짓밟히기 전에 제자를 죽이려고 했다.
마법사는 편협하다.
마도사는 더욱 그렇다.
자신만의 세상이 무너져 버린 그들의 말로는 대개 추하고 비참하다. 이그나시아의 스승도 그런 인물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환영 계열 마도를 개방한 스승은 되레 압도당했고, 곧 정신이 완전히 으깨져 인형이 되고 말았다.
끝내는 이그나시아의 명령을 따라 해안 절벽에 몸을 던졌다.
6위계 중위 마도사가 기습에도 불구하고 5위계 하위 마도사에게 패배하며 아무도 모르게 세상에서 지워졌다.
마법계에서 명성이 높았던 그녀의 스승은 그렇게 영영 실종당했다.
그때 이그나시아는 슬프지 않았다.
기쁘지도 않았다.
정신을 침범하면서 느낀 스승의 감정이 하찮기만 했다. 한편으로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세상에 있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8할쯤 예상한 대로 진정한 환상의 개념을 궁극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마법사는 아무도 없었다.
언제나처럼 이그나시아는 자신의 영역에서 홀로 고고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실리스야, 너는 지닌 재능에 비해서 정신력과 가르침이 턱없이 부족해. 그냥 힘만 센 아이가 팔만 휘두르는 느낌이지. 네 혈관에 흐르는 피는 지금의 너에게 과분해. 하지만 걱정하지 말렴.”
실리스가 꼴깍 침을 삼켰다.
“내가 너의 경계를 열어 줄게.”
이그나시아의 자그마한 웃음에는 끊없는 광기가 가득했다. 그녀의 눈빛은 아주 소중한 보물을 보듯이 초롱초롱했다.
실리스에게 나지막이 약속한 이그나시아가 높이 오른팔을 들었다.
“자, 이제 세계 회의를 시작할까?”
따악───!
강하게 손끝을 튕겼다,
가르간트 전체가 잠에서 깨어났다.
* * *
아침 해가 반쯤 떠오른 시각에 군중들이 거리로 나왔다. 아까까지 잠을 자고 있던 사람도 정신이 맑은 상태로 상공을 멍하니 응시했다.
“저게…… 세계 회의장!”
하루아침에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거대한 건축물이 머리 위에 놓였다. 햇빛이 가려져 사방이 꽤 어둡다.
건물 아래의 가르간트 중심부 사람들의 세상은 여전히 밤이었다.
“오오…….”
미스릴 등급 모험가 파티의 겔톤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 마력, 이 광경. 마법사로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가 여기서 진정으로 보고자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마법계 총회의 때는 비렌테로 갈 상황이 아니라 어쩔 수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뵙고 말겠다. 이렇게 멀리서라도!’
겔톤은 베르덴을 보러 왔다.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다중 연속성 이론을 배웠던 기억과, 벨디른 공화국에서 유골룡과 아인종 무리에 맞서 싸웠던 기억을 상기했다.
언제 다시 떠올려 봐도 그야말로 생애 다시 없을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젠티르 마탑 출신을 버리고 모험가로 살아가기로 결정한 겔톤은 축복받은 마법사였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
초월자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다는 건 자손대대로 물려줄 영원한 자랑이었다. 물론 그때는 초월자가 아니었지만 중요한 건 아니다.
‘언제 오시려나…….’
겔톤은 동료들에게 따로 양해를 구해 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서 있었다. 베르덴이 보인다면 열렬히 팔을 흔들 작정이었다.
그 순간.
쿵──────!
지면이 강하게 흔들렸다. 흡사 지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일반인은 설마 건축물에 문제가 있나 싶어서 고개를 들었지만, 그에 비해 감각이 예민한 사람들은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지축이 계속 흔들린다.
멀리서 사람들이 크게 움직이며 인파가 출렁이는 게 느껴진다. 비명인지 함성인지 모를 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겔톤은 끝까지 거리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겔톤이 눈을 부릅떴다.
‘저 존재가 바로…….’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몸이 떨렸다.
의식은 흔들임 없이 선명한데 육체가 말을 듣지 않았다. 사냥감이 된 기분이다. 유골룡을 맞닥뜨렸을 때 이후로 처음이다.
아니, 그때의 공포를 분명히 웃돌고 있다.
‘수인족의 왕!’
동대륙의 하부 수인 부족, 중앙 대륙의 중부 수인 부족과 상부 수인 부족, 그리고 수인 대부족을 힘으로 지배하는 수인족 최강자.
수왕(獸王), 안티아스.
쿵──────!
무지막지한 발소리와 함께 드래곤의 것을 닮은 거대한 꼬리가 가도를 부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