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화 개회(開會) (1)
화악───!
가라앉아 있던 대기가 들썩인다.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공기의 압력. 서슬 퍼런 광검의 날에 자색의 기운이 넘실거린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다.
“주군, 베겠습니다.”
“뜻대로.”
베르덴의 허락이 떨어졌다.
아드리안이 역수로 잡은 검을 휘두르다가 순간 정지했다.
반동력이 작용했다.
자쇄紫碎
보랏빛 충격파가 터졌다. 그 힘을 온몸으로 받은 마울러가 꽤 나가떨어졌으나 가도에 발이 닿자 쉽게 제동을 걸었다.
구경꾼이 입을 벌렸다.
“어……?”
갑작스러운 초월자와 초월자의 전투에 만인이 경악했다. 군중들의 통제를 담당하는 가르간트의 순찰대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다급한 얼굴로 고개를 쳐들었다.
“저, 정말로 방관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자칫 휩쓸리기라도 한다면 한두 명 죽는 게 아닐 텐데요……!”
───네가 막을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그나시아의 의념을 전달받은 순찰대장이 곧장 목소리를 죽였다. 저 사이에 끼는 건 제 발로 처형장에 목을 맡기는 것과 진배없다.
초월자의 힘을 접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같은 선택을 내리겠지.
“대장님!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희는…….”
“큼, 그냥…… 지켜봐라. 저분들의 힘을 견식하는 건 다시 없을 영광이니.”
순찰대장은 그나마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를 지켰다. 자신이 불안한 모습을 보이면 순찰단은 물론이거니와 대중들도 공포에 빠질 게 분명했다.
그걸 수습하는 건 온전히 순찰대장의 몫이 될 터였다.
“속도가 특기라더니.”
툭툭.
마울러가 보란 듯이 갑옷을 털고는 왕의 망토를 뒤로 젖혔다. 왼다리를 앞에 두었다. 무릎을 살짝 굽히고 건틀릿 속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의 전신에서 연한 파란색의 기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강성剛性의 태세.
“힘은 가볍군.”
아드리안은 대꾸할 생각도 없는지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울러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순간 코앞에 도달한 기척.
아래에서 솟구치는 검격을 향해 위에서 내려찍은 일권이 꽂혔다.
─────────!
닿지 않았는데도 물리력이 발생했다.
기와 기의 충돌이다.
서로의 힘이 맞물리는 흐름을 따라서 광검의 궤적이 뒤바뀌었다.
아드리안이 회전하며 발뒤꿈치로 마울러의 관자놀이를 찍어 버렸다.
‘……급소가 무의미하다.’
쉼 없이 망치로 두들겨져 밀도가 높아진 금속을 때린 감각이다. 어지간한 체술로는 생채기조차 나지 않을 듯하다.
상대의 저항력을 가늠하고는 디딤 발에 힘을 줘 뛰어올랐다.
후욱.
무지막지한 권격이 아슬아슬하게 허리를 스쳐 지나간다.
마울러가 양팔을 교차했다.
허공에서 한 바퀴 돌며 착지한 아드라안이 칼날을 세웠다.
연광連光
강렬한 검광이 건틀릿과 마찰을 일으키다가 이내 흩어졌다. 초월적인 감각이 체감 시간을 잘게 쪼개 느리게 만들었다.
즉시 반격에 나선 마울러가 허릿심으로 주먹을 쳐올렸다.
강성 – 타경打驚
굽이치는 힘의 압력.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널찍한 골목 너머 아무도 없는 건물 상층부가 박살 났다. 머리 위로 공성추가 날아온 듯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심하게 흩날렸다.
“그래…….”
마울러가 자세를 바로 잡았다.
“새끼라고 해도 초월자라 이거냐?”
아드리안은 어느샌가 자리를 벗어나 여유롭게 검을 다잡고 있었다. 몸통 중앙을 노린 권의 압력이 닿지도 않은 것이다.
심지어 회피한 걸로도 모자라 마울러의 옆구리를 가르기까지. 고대 아티팩트인 갑옷에 미세한 검흔이 새겨졌다.
“그 검, 어디서 났지?”
“닥쳐라.”
“같잖게 기사답게 굴긴. 그 충성이나 검이나, 망나니 새끼에게는 과분한 것 같은데.”
마울러가 몸을 채 돌리지도 않고 지면을 부수듯 박찼다. 나부끼는 망토와 함께 등이 빠르게 다가오며 시야를 덮었다.
망토에 가려진 팔꿈치가 허공을 갈랐다. 광검이 목을 노린다. 그 칼날을 미리 손으로 쳐 내고 두 번의 주먹을 내질렀다.
각각 힘을 검끝에, 그리고 손끝에 적절히 집중 및 분배했기에 불필요한 낭비가 없었다. 물리적 여파가 최소화됐다.
고작 수십 미터 떨어진 사람들은 그래서 피해를 입지 않았다.
연환(連環)의 태세.
그때, 마울러가 주먹을 풀더니 왼팔은 몸 뒤로 최대한 끌어당기고 오른 팔뚝은 수평으로 눕혀 앞에 두었다.
직후 접근한 아드리안이 신속(迅速)의 영역에 들어섰다.
난무亂舞
연환 – 섬벌殲伐
───파공음이 연이어 귓가를 스쳤다.
아드리안이 맹공을 퍼붓고 그를 마울러가 쳐 내며 유연하게 흘려 냈다. 광검의 예리함이 본래의 위력을 발하는 걸 철저하게 차단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애매한 검격은 피하거나 막지 않고 무시한 채 전진하고 있다.
‘절대적인 속도는 명백히 나보다 느리다. 그런데 밀리지 않는다는 건…….’
아드리안이 통찰력으로 마울러의 기 흐름을 포착했다.
‘역시 ‘선행’인가.’
마울러는 뒤늦게 반응하지 않는다. 아드리안이 움직이기 전에, 그 몸놀림을 예상하고 미리 행동을 결정 짓고 있다.
그렇기에 선행(先行).
특히나 앞서 두 번의 기예에 대한 대처에 그러한 모습이 부각되었다, 실제로 기의 흐름도 선제적으로 운용되고 있다.
무모한 전투법이다.
예측이 빗나가면 높은 확률로 허점을 내줄지도 모를 일인데. 그만큼 감각과 판단에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리라.
‘그렇다면 이것도 반응할까.’
아드리안이 각력에 집중해 속도를 한 단계 더 높였다. 지금까지 파악한 마울러의 반사 신경을 조금 웃도는 수준으로.
일순간 그가 주변 모든 존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카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강!
검과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난반사되어 일대에 울려 퍼졌다. 속도의 질이 달라졌다. 찰나의 순간에 수십 합이 교차했다.
반 박자 늦게 흘려보낸 검기가 델하룬의 상징을 담은 망토를 일부 훼손했다.
여전히 기척은 쉴 새 없이 이동하고 있다.
마울러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갔다.
‘이 새끼 봐라. 초월에 완전히 적응했군. 분명히 신성 새끼하고 각성 시기가 비슷할 텐데. 괜한 허세는 아니었나.’
경지가 예상 범위를 초과했다.
나름대로 초월자로의 특별함은 갖춘 모양이지만 경악스럽지는 않다. 왜냐하면 세월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힘도, 속도도, 강인함도, 간교함도…… 마울러는 그 정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와 말 그대로 죽기 전까지 맞붙었다.
그의 상체를 반쯤 뒤덮은 끔찍한 흉터가 모든 걸 증명한다.
마울러도 흉악하게 입가를 당기며 기의 밀도를 한 단계 더 높였다.
쩡.
광검을 정면으로 튕겨 냈다. 지면에 거의 닿을 정도로 높이가 낮은 권격을 땅에서 하늘로 강하게 밀어냈다.
그 경로를 따라 가도의 표면이 갈라지며 기류가 뒤틀렸다.
동시에 아드리안의 다리를 노린 발차기의 궤도가 급격히 솟구쳤다. 그러다 다시금 궤도가 바뀌면서 머리에서 몸으로 타점이 이동했다.
그런 혼잡한 일격을 가까스로 피해 낸 아드리안의 앞에 주먹이 드리웠다.
쾅!!! 콰드드드득───
아드리안이 뒤로 밀려나면서 빈 손으로 가도를 짚었다. 강한 마찰이 발생했다. 돌조각을 긁는 소리가 고막을 자극했다.
상대의 앞날을 내다보려 하는 마울러는 지체하지 않고 육박했다.
핏.
마울러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볼에서 아주 조금 피가 흘렀다.
눈꺼풀이 깜짝하기도 전에 아드리안이 마울러를 지나치며 벤 것이다. 퉷, 아드리안이 혀끝에 감도는 약간의 핏물을 뱉어 냈다.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전투가 가속화됐다.
초월자들의 힘을 일부나마 볼 수 있다는 흥분과 경악이, 고작 몇 분 뒤에 감당하지 못할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마치 제약 없이 폭주하는 거대한 마차들 사이에 끼어 있는 기분이다.
스치면 시체도 못 찾는다.
‘이쯤 했으면 됐잖아……? 이런 젠장. 왜 아무도 안 말리는 거야?!’
가르간트의 순찰대장도 이쯤 돼서는 더는 불안감을 감내할 수 없었지만 여전히 계외는 과자를 먹으며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최근 들어 불안정해진 머리카락이 조금씩 떨어질 지경이다. 하지만 속으로 욕도 하지 못하는 게 그의 현주소였다.
그 순간.
마울러가 거칠게 웃었다.
아드리안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무전(無前)의 태세.
강성의 태세가 방어에, 연환의 태세가 공격에 특화되어 있다면 무전의 태세는 오직 파괴력만을 고려해 만들어진 태세다.
앞발에 무게가 실렸다.
가도를 덮은 먼지가 붕 떠올랐다.
무전 – 태륜泰輪
팔에 회전력이 실렸다. 일점에 집중된 권기(拳氣)가 정면을 점차 파괴했다. 여기서 회피하면 후방의 사람들은 몰살이다.
훅.
아드리안이 극단적으로 자세를 낮추고는 수직을 절단했다.
아래에서 위로.
신월新月
거대한 보랏빛 초승달이 권압을 받아 내더니 품에 안듯이 감싸고 하늘로 솟구쳤다. 그야말로 놀라운 힘의 제어였다.
그런데 마울러의 기는 워낙 밀도가 높아서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상공에서 뭔가가 떨어진다.
수십 개로 나뉜 마울러의 권기가 메테오처럼 추락한다. 소란이 커진다. 그 범위는 명백히 군중들을 향하고 있었다.
이그나시아가 소리쳤다.
“와! 어떡해! 이러다 다 죽겠는걸!”
“저놈의 쾌락주의자…….”
서약자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멈춰라.”
기예의 부산물이 정지했다.
베르덴과 반젤리스도 가만히 있지 않고 마법으로 한 손 거들었다. 공간의 비틀림과 다양한 원소 마법이 그것들을 요격했다.
그러던 도중 멀리서 ‘거대한 창’이 해당 상공을 가로질렀다.
──────콰아아아앙!
절반의 권기를 박살 낸 그것이 아드리안과 마울러 사이에 단단히 꽂혔다. 직후 기온이 떨어짐과 동시에 들끓던 열기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창이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단 한 대의 마차가 세 명의 호위를 받으며 대로를 거닐고 있고.
차디찬 땅에 적합한 복장을 갖춘 자들이 거칠게 걸음을 옮기고 있다.
모험가 길드 본부장.
흑해 – 테아렐.
마(魔)의 공포.
완벽한 모험가.
불굴의 이닉토르.
프로하스 국왕 – 에레스.
근위전사장 – 리엔제.
대전사장.
북부의 대전사들.
모든 대륙의 토벌을 주도하는 세력과 혹독하고 차가운 대륙 북부를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 회의장에 도착했다.
마차가 정지했다.
모험가 길드 본부장이 늙은 피부를 어루만지며 껄껄 웃었다.
“회의 시작도 안 했는데 힘이 넘치십니다그려.”
“이그나시아가 문제지.”
테아렐이 슬쩍 창문 너머로 아드리안과 마울러를 바라봤다.
“적당히 해. 시끄러워.”
“동감합니다. 일단 여기까지 하시죠.”
에레스 또한 보검 [니비스]의 칼자루에 손목을 얹으며 미소 지었다. 화사한 금발과 벽안에 냉기가 감돌았다.
쩌적.
마의 공포라 불리는 흑요 등급 모험가가 대지에 박힌 자신의 창을 회수했다.
마울러가 내심 반응했다.
갑옷과 투구로 피부가 한 점 드러나지 않은 마의 공포는 초월자가 아닌데도 이상할 정도의 위험한 기색을 풍겼다.
‘이놈은 또 뭐야.’
한편 아드리안은 오랜만에 마주하는 에레스에게 잠시 시선을 두고는 아는 척하지 않고 광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주군께서 하신 말씀. 새겨듣도록.”
“건방진 새끼.”
아드리안은 다시 검을 뽑고 싶었으나 결국 더는 상대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왔던 길을 되짚어 간 그가 베르덴에게 돌아왔다.
알파가 손을 흔들었다.
[고생.]
“수고했다, 아드리안.”
“당장 끝장을 내기에는 어려웠습니다. 다음에 죽이겠습니다.”
“보기보다 교활하더군. 그건 놈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고 결정하지.”
아무렇지 않게 마울러의 죽음을 논하는 모습에 서약자가 턱을 쓸었다.
‘음…… 얘네들 때문에 초월자 전쟁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
현재 초월자 숫자가 꽤 되기에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였다. 이상주의자는 궁극적으로 합리적이지 않으니까.
초월자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타인을 짓밟는 족속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서약자 자신도 지금까지 그래 왔다.
“먼저 들어가지.”
베르덴과 아드리안을 따라서 에온과 동대륙의 삼국이 회의장으로 향했다. 반젤리스는 당연하다는 듯 마도국을 이끌고 베르덴과 걸음을 함께 했다.
‘반젤리스는 또 왜 저래. 둘이 뭐 있나?’
서약자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하이랜디아 왕국을 통솔해 계외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참석자가 늘어 간다.
모험가 길드 본부와 프로하스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 * *
“폐하.”
“썩 나쁘진 않아.”
마울러가 볼에 묻은 피를 훑었다. 이미 상처는 나아 있었다. 포션의 힘이 아닌 그 초월적인 육체에 깃든 재생력이었다.
“확실히 저력은 있다. 상식적으로 신성은 그보다 더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놈이 궁지에서 벗어난 건 아니지.”
세계 회의는 계획대로 이용한다.
그렇게 마울러는 델하룬, 카일리언스, 로니아 왕국을 데리고 회의장으로 진입했다. 그들의 존재감이 사라지며 허전함이 감돌았다.
이그나시아가 기지개를 켰다.
“볼만했네. 에피타이저로는 나쁘지 않았어.”
그녀의 시선을 조금 멀리 던졌다.
마법 자주 연대의 마법주와 비렌테의 협회장도 도착했다.
키퍼, 아세트로 올딘은 언제나처럼 꼬마 둘을 대동했다.
그는 마울러와 천검이 남긴 전투 흔적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기묘한 마법으로 말끔히 도시를 원상태로 복구했다.
“아하하, 유난 떨기는.”
다크워튼 마탑과 세계 종교인 루아스 교국도 등장했다.
네크로맨서.
교황.
성녀.
성자.
분명 그들은 공식적으로도 비공식적으로 협력 관계에 있었지만 아무리 봐도 빛과 어둠이 살벌하게 대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는 레프라기움 마탑이 있었다. 정체 모를 백색의 마법사들을 진두지휘하는 섭리자와 대행자.
그런 서열 1위의 마탑 옆으로 마지막 인간종이 나란히 이동했다.
세계수의 관리자 – 세렌디아.
가디언 엘프 – 카란스.
대수림의 눈 – 메르퀴엔.
그 외 수백 명에 이르는 엘프들.
과연 극단적인 집단주의를 표방하는 엘프다운 숫자였다.
세렌디아와 섭리자가 시선을 교환했다가 조용히 고개를 바로 했다. 레프라기움 마탑과 엘프 사이에는 정적만이 있었다.
“느낌상 하나같이 숨기는 게 많긴 하네. 이렇게 보니까. 뭐, 아무튼.”
이그나시아가 웃었다
“이제 다 왔네?”
개회식이 임박했다.
개회 연설은 이그나시아가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