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4화 세계 회의 (8)
“찬성 8표, 반대 21표. 불법적인 마약 유통을 제한하기 위한 대륙적인 통제령은 부결되었음을 선포한다.”
이텔 국왕의 안(案)은 기각되었다.
불법 마약의 오남용이 시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건 모두 알고 있지만 이 건은 속셈이 너무나도 훤히 보였다.
세계 각국에서 파견한 국가급 전력으로 특수 조직을 구성해 잘 보이지도 않는 음지 곳곳의 마약 공급 및 판매를 강력하게 통제하겠다?
대체 누구 좋으라고?
고블린 잡는 데 어느 누가 특수 개체 잡는 칼을 쓴단 말인가?
시국을 생각하면 더 괘씸하다.
과거 주인 없는 땅은 영지전이 빈번했던 만큼 여러 마약도 만연했지만 베르덴이 집권한 이후 거의 근절되었다.
무시무시한 대륙 뒷세계?
이번에 혈맹이 아주 제대로 박살 나면서 그쪽 거물들의 머리가 대거 잘린 탓에 상당히 힘을 잃은 상태다.
평소 마약을 눈엣가시라고 여겨 왔다면, 지금 상황에서는 소국의 힘만으로 유의미하게 대응할 수 있을 터였다.
굳이 세계가 신경 쓸 것 없이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의제가 나왔을까?
간단한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력을 최대한 아끼고 싶은 국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음지가 약화했어도 괜히 상대하다가 손해 보기는 싫으니 세계를 향해 도와 달라고 불쌍한 척을 한 셈이다.
강대국이나 초월자 세력 하나만 개입해도 많은 걸 아낄 수 있을 테니까.
아마도 이텔 국왕은 그런 국가들을 대표해서 방패를 든 것이겠지. 물론 그 책임을 감수할 만한 대가를 약속받고서.
그러나 뻔해도 너무 뻔했다.
노력이 부족했다.
재미라도 있었으면 이그나시아가 몇 개 국가는 살갑게 도와주고 나머지 국가는 내버려 둬서 서로 반목하게 만들고는, 신나게 강 건너 불구경이라도 했겠지만…….
단순히 ‘아, 참석자는 많고 마약은 안 좋은 거니까 해당 안건의 취지에 대부분 공감하고 찬성하겠지?’라고, 예상한 그 조잡한 판단은 창의적이지도 않았고 재미도 없었다.
“에휴, 머리가 안 되면 재롱이라도 떨어 보든가.”
“이그나시아, 두 번째 경고다. 하원에 압력을 행사하지 마라.”
“네네네네네네네네네.”
이그나시아가 건성으로 대답했으나 그래도 선을 넘지는 않았다. 그저 맛 좋은 과자를 거칠게 으적거릴 뿐이었다.
하원의 왕들은 그녀의 표정을 차마 올려다볼 생각도 못 했다.
반면에 리비안트 공왕과 벨디른 공화국의 최고 의원들은 연줄이자, 과거에 맺은 그 인연에 안도하며 서늘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쨌든.
한껏 눈치를 보면서도, 그래도 왕이랍시고 제 이권을 취하려 슬쩍 세계를 떠보는 행위는 같잖다 못해 귀여울 지경이다.
“크크큭.”
초월자도 초월자지만, 정치계 초월자인 제라클 황제는 조소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제국의 혹독한 정치를 경험해 온 인물이다.
어쭙잖게 까불다가 저렇게 식은땀만 흘리는 멍청이들을 비웃는 건 소년기 때부터 익힌 작은 쾌락이었다.
제라클 황제를 태어났을 때부터 지켜봐 온 리반데일 대공은 정말로 좋지 않은 버릇이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투표는 계속되었다.
“찬성 32표, 반대 7표. 해양 마석 광산의 추가 개발안 및 마석 조약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한다.”
비렌테의 마법 협회장, 오더스 에벤드라가 발의한 제안은 통과되었다.
사실 반대할 이유가 없기는 했다.
10대 마탑이 마석이 대량 산적해 있을 가능성이 높은 해양 지역을 탐사해 광산을 개발하고, 그 광산 채굴량의 일정 비율을 의무적으로 각국에 판매해야 한다는 건 국가적으로나 세계적으로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득밖에 없었다.
물론 마탑 기준으로도 엄청나게 많은 자금을 쏟아부어야 하겠지만 비용이 분산되니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당연히 과실도 나눠야 하지만, 과실을 아예 얻지 못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런데도 반대표가 나온 건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였다.
그야…… 알 바 아니니까.
드워프는 화산 지대의 모든 광산을 장악하고 있었고, 엘프는 마석이 필요 없고, 수인은 마석에 관심이 없었다.
즉, 마석 조약의 대상이 아니다.
세계 회의라고 해서 반드시 세상에 군림하는 모두에게 적용될 이유는 없다. 수인, 엘프, 드워프를 제외해도 세상은 세상이다.
그리고 나머지 반대표는 어차피 통과될 안건이니 괜히 한번 반대해 본 것이라는 얄팍한 변명에 따른 것이었다.
혼자 경고 두 번 받은 어느 초월자 이야기는 아니다.
이처럼 누군가는 한없이 가볍고, 누군가는 아주 무거운 마음으로 임하는 공론───이것이 진정 세계 회의다.
섭리자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대륙 간 상호 무역은 토론 결과 참석자 49인 중 37인이 참여를 희망했다. 투표는 의미가 없다고 사전에 고지했다. 이로써 대륙 무역 협정서가 공식화되었음을 선포한다.”
“북부도 전 대륙의 국가들과 이렇게 직접적으로 교역을 하게 될 기회가 올 줄이야.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있네요.”
“사는 곳이 다르면 문화가 판이한 법이지. 서로 얻을 게 많겠군.”
에레스와 반젤리스가 해당 안건이 통과한 것에 대해 호평했다.
국가와 국가를 넘어 대륙과 대륙 수준의 무역이 시행되는 순간이었는데, 이에 불참한 선언한 세력은 각자만의 이유가 있었다.
드워프는 아르나크 제국 외에는 협력국을 가질 마음이 없다.
적어도 당장은 말이다.
루아스 교국은 무역으로 이득을 취하는 나라가 아닐뿐더러 어디까지나 인류를 보호하는 종교이기에 세 명의 신인은 중립으로서 관망했다.
템플은 무역이 의미가 없는 중립 세력이다.
모험가 본부도 마찬가지라서 모험가 본부장과 흑해는 지켜볼 뿐이었다.
키퍼도 그렇다.
마그누스 은행을 비롯한 3대 은행은 애초에 무역 대상이 아니다.
레프라기움 마탑은 다른 세력과의 연결 고리를 갖는 것에 무관심했다.
다크워튼 마탑은 레프라기움 마탑을 제외한 10대 마탑 중에서 유일하게 이렇다 할 무역 관계가 필요하지 않은 마탑이었다.
‘설마 수인이 무역에 응할 줄이야. 그나저나 내 안건은 곧 베르덴 님의 안건이기도 하니까 다크워튼 마탑주님께서 호응해 주실 줄 알았는데…… 그래도 해낸 거겠지?’
실리스가 조심스럽게 주먹을 쥐었다.
평생의 은인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이렇게 세상에 보란 듯이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는 현실이 너무도 기뻤다.
에스퍼렌사 공작과 칼리아, 그리고 로리안은 그런 실리스의 뒷모습을 아주 대견스럽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복수심에 에스티리아 왕국 수도를 지워 버리려고 했던 마녀는 더 이상 없었다.
“이것으로 첫 번째 소의회에서 발의된 모든 소의제에 대한 투표를 마쳤다. 세계 회의 공식 법률에 따라 휴식을 위한 정회를 선언한다.”
소단원은 끝났다.
“1시간 뒤 첫 번째 대의회를 시작하겠다. 이상.”
이제 대단원이다.
* * *
“아침에 개회했는데 벌써 밤이야? 시간 참 빠르네. 분위기가 그래서 그런가.”
“으아아…… 선배, 이거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한 거 아니야?”
“과연 세계 회의다운 무대였다.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군.”
이자벨라, 유니아, 라테온이 차례대로 회의에 대해 평가했다.
베르덴 일행은 복도로 나와 창가에 자리 잡은 채 바깥을 구경했다. 어느새 태양은 자취를 감추고 달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세계 회의가 끝나기 전까지 대기실로는 갈 수가 없어서 회의장에서 쉬거나, 복도를 돌아다니는 것만 가능했다.
참고로 이그나시아의 초위 마법으로 구현된 이 마름모 십이면체 형태의 회의장에서는 생리 작용이 일부 제한된다.
정확히는 그 속도가 아주 느려진다.
덕분에 세계 회의가 계속되는 동안엔 초월자만이 아니라 초월자가 아닌 참석자들도 화장실을 갈 일이 없어졌다.
아드리안이 말했다.
“수왕이 무역에 손을 얹을 줄은 몰랐습니다. 과연 어떤 의도일지.”
“아마도 흥미 본위겠지만…… 내가 판단하기에 수왕은 이그나시아와 비슷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달랐다.”
이그나시아가 쾌락을 위해 움직인다면, 수왕은 명확한 목적이 없기에 쾌락을 좇는다, 베르덴은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수왕은 초월적인 강자이나 흔히 말하는 초월자는 아니다. 초대 마도왕이 구축한 초월자 개념은 인간의 것이다.
그래서 수왕은 존재로서 정의된 이상이 없다.
“한마디로 일관성이란 게 없으니 변덕스러움은 이그나시아 이상일 수도 있다. 놈이 무엇을 하든 간에 앞으로 계속 경계하는 편이 좋겠지. 그 강함은 절대로 가볍게 볼 수 없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아드리안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보헤미른 마탑 세력이 걸어왔다. 베르덴 일행을 지나서 다른 복도에서 쉴 생각인 모양이었다.
“…….”
로벨린과 그 호위들이 머리만 숙였다. 베르덴과 아드리안은 말없이 짧게 고개만 까딱하는 것만으로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렇게 지나쳐 가는 로벨린의 뒷모습을, 베르덴은 잠시 눈에 담았다.
‘아직은 공식 석상에서 이 정도의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주어진 상황을 뜻대로 이용할 수 있으니까. 지난 마법계 총회에서 그랬듯, 남은 세계 회의에서도…….’
하지만 언젠가는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때는 그리 멀지 않으리라.
“베르덴.”
에스티리아 왕국 호위 기사인 칼리아가 혼자서 찾아왔다. 그녀가 베르덴의 일행에 합류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실리스는?”
“리비안트 공국과 벨디른 공화국 측과 이야기 중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냉전 상태였는데, 어느 날 찾아온 마법사 한 명과 인연을 맺더니 어느샌가 동맹이 되어 버렸군.”
벨디른 공화국과 에스티리아 왕국이 전쟁을 벌였고, 그 전쟁 속에서 리비안트 공작이 독립을 선언해 공국이 탄생했다.
사실상 우호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서로의 마음에 새겨진 앙금은 깊고 또 깊었으니까.
그런데 그걸 가능케 한 것이 베르덴이었다
칼리아가 속삭였다.
“그래서 계획대로 되고 있는 건가? 그 초월자 몇을 죽였다는 수왕의 발언 때문에 여러모로 곤란한 건 아닌가?”
“예상 밖이긴 했지만, 그걸 오히려 역이용해 볼 생각이다. 걱정할 것 없다.”
베르덴은 자신 있게 말했다. 그 옆모습을 멍하니 보던 칼리아가 저도 모르게 손을 쥐었다. 심장이 조금 크게 두근거렸다.
그녀의 시점에서 베르덴은 항상 이랬다.
귀족 의뢰인와 평민 용병의 관계로 왕국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당했다. 칼리아의 목숨을 구해 줬을 때도 그랬다.
언제나 자신만의 확신을 갖고 마음속에 품은 고고한 뜻을 관철했다.
칼리아는 정의를 바라고, 베르덴은 그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개념의 정의를 추구한다. 그의 정의는 곧 그녀의 정의를 아우른다.
솔직히 말해서 외모나 성격도 차고 넘칠 만큼 이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그 의지가 칼리아가 상상해 온 이상형 그 자체였다.
삶을 몇 번 되풀이한다고 한들 이건 다시 없을 인연이리라.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다시 한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칼리아, 너도 알다시피 세계 회의는 나로 인해서 시작됐다. 그러니 세계 회의의 끝을 장식하는 것도 나다.”
“…….”
“끝까지 지켜봐라. 내가 주도하는 흐름을.”
칼리아 드 에스퍼렌사는 사랑에 빠졌다.
* * *
“이형종 공존에 대한 대의제 개정에다가 대륙 상호 무역 협정…… 베르덴의 궁극적인 노림수가 무엇일까요.”
대행자, 메이아가 중얼거리며 어두운 창밖을 바라봤다.
밤의 장막이 감싸안은 거대 도시의 풍경은 제법 아름답기는 했지만, 그녀의 근심을 덜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
섭리자도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첫 번째 소의회에서 본 것을 바탕으로, 두 번째 소의회와 대의회에서 베르덴이 무엇을 하려는지 예측하려 한 것이다.
이형종 공존.
대륙 간 무역 협정.
‘세상을 향한 영향…….’
섭리자는 속으로 되뇌었다.
‘타국에 미치는 영향이…….’
직감이 반응한다.
상념이 더욱 깊어졌다.
‘세계에 대한 파급력이 상당이 크…….’
이윽고 섭리자가 눈을 부릅뜨며 거친 손길로 창가를 붙잡았다. 평소에는 한 점 흐트러짐 없던 눈동자가 거칠게 요동쳤다.
‘영향력!’
갑작스러운 섭리자의 행동에 메이아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놀라는 걸 넘어 조금, 아니 꽤 경악했다.
“섭리자, 지금…….”
그 섭리자가 입꼬리를 비틀며 웃고 있다.
그건 분명한 희열이었다.
* * *
세계 회의장의 공기가 무슨 고향이라도 된 듯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그 정도로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의 밀도가 높았다.
오늘날의 기억은 단언컨대 죽어서도 잊지 못하리라.
…….
본격적으로 대의제 의논이 시작되려 하자, 이 공간의 분위기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
소름 끼치도록 고요하다.
소의제와 대의제는 그 무게감부터가 그야말로 격이 달랐다.
“이번 세계 회의가 개최된 이유 중 하나인 적룡, 사르칸드라의 비늘은, 우리가 반드시 결론을 내려야 하는 기본 대의제다. 세계 의장으로서, 해당 주제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발언은 경고 조치 후 일절 받아들이지 않겠다. 이해했나?”
참석자들이 제각기 대답하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긍정의 뜻을 보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1세기 전 몇 개나 되는 도시를 불태우고 수많은 인명을 학살한 뒤 마경으로 사라진 적룡, 사르칸드라. 마해에서 그 드래곤의 꼬리 비늘을 발견한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대응할지 세계 회의의 참석자들은 의제를 모아 구체적인 행동을 결정하라.”
섭리자가 이전과 동일하게 상원 테이블을 세 번 두드렸다.
자연스럽게 참석자들의 감각이 곤두섰다.
“첫 번째 대의회를 시작하겠다. 표결은 완전히 논의가 끝난 뒤에 진행하겠다. 제의자는 거수하라.”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제라클 디안 세레아노르 아르나크 황제, 발언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