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4화 죄인들 (4)
대륙 3대 은행이 이룬 가장 큰 업적을 꼽자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대륙 화폐 통합.
불과 수백 년 전까지만 해도 국가마다 사용하는 화폐가 있었고, 그중 일부 강대국의 것을 국제 통화로 지정하여 기준으로 삼았으나…….
3대 은행이 주도하는 기나긴 설득과 집요한 노력 끝에 세계의 화폐 단위는 ‘엘크’라는 새로운 통화로 일통되었다.
둘째는 자금 순환.
대륙 3대 은행은 금화, 은화, 동화 등으로 화폐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시장을, 엘크 지폐의 발명을 통해 전면 개편하였다.
묵직한 금속 화폐가 아니라 가벼운 종이 뭉치를 들고 다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저축 제도를 대대적으로 구축해 평범한 사람조차 믿고 자금을 맡길 수 있도록 금융적 신뢰를 쌓고, 또 쌓았다.
이렇게 티끌을 모아 태산을 만든 은행은 자금을 투자 등으로 대륙에 순환시켜 이 세상의 이해관계를 하나로 연결했다.
거국적인 투자!
근데 남의 돈!
마탑처럼, 특히 아티슨 마탑처럼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마법적 집단이 3대 은행과 한몸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뜻밖의 국가적 재해를 겪고 사회 안정에 비상이 걸린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은행은 이로써 재계의 중심이 되었다.
은행의 돈놀이를 탐탁지 않게 여길지언정 누구도 은행을 적으로 규정하지 못했다. 은행이 무너진 순간 대륙 경제가 박살 날 테니까.
사회를 기반까지 붕괴시키는 건 초월자 전쟁만이 아니다.
“내 평생에 가장 어렵고 보람찬 일이었소. 나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대륙 3대 은행을 통솔하여 세계를 설득해야 했고, 3대 은행장에게 매번 은행장으로서의 사명을 주지시켜야 했으니…… 그리 사람을 골라냈는데도 욕심에 눈이 멀어 엇나가 버린 은행장이 한둘이 아니었소. 그리고 제대로 된 사람을 은행장 자리에 앉혔는데도 문제였소.”
그 거대한 그림을 그린 장본인이 바로 전쟁 상인, 레지날프였다.
“내가 진심으로 믿을 만한 은행장은 수십 년밖에 살지 못하니 말이오. 그래도 이번 3대 은행장은 가장 사명을 잘 이행하고 있는 인물들이오. 참으로 다행인 부분이지.”
세계 회의의 내용이 어찌 그리 빠르게 죄인들의 귀에 들어갔는지, 죄인들이 구축한 정보력의 원천이 무엇인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에온을 포함해 어떤 세력도 단일로 맞설 수 없는 압도적인 자금력…… 3대 은행이 창립한 이래로 모든 은행장의 배경에는 레지날프가 있었다.
베르덴이 말했다.
“아까 대륙 연합에 가진 모든 걸 쏟아부었다고 했는데. 마그누스 은행을 설립할 자금은 어디서 마련한 거지?”
3대 은행 중에서 가장 먼저 발족한 것은 마그누스 은행이다. 은행이란 명확한 개념이 없었던 시절이니 웬만한 자금으로 운영이 불가능했을 터였다.
하물며 초대 네크로맨서에 더해서 다른 죄인들이 아직 깨어나지 않은 마당엔 더욱이.
“역시 대상인…… 황금의 죄인인가?”
전쟁 상인은 옛 왕과 무기를 거래했고, 대상인은 옛 왕의 자금을 맡았다. 레지날프가 전자이니 정황상 황금의 죄인은 후자일 터였다.
“정답이오.”
레지날프가 수긍했다.
“내가 가진 것은 옛 왕과 치른 전쟁에서 모조리 써 버렸소. 초대 네크로맨서께서도 다크워튼 마탑에 모든 유산을 남기셨고. 하지만 다른 두 사람은 그렇지 않았소. 망국의 죄인과 황금의 죄인. 에온에선 황금의 죄인과 함께 동업 중이니 잘 아실 거요. 그의 수완과 재산이 얼마나 대단한지.”
황금의 죄인은 깨어나자마자 근처 창고에 있는 고대의 액세서리와 보석을 베르덴에게 주었고, 그를 통해서 대륙 사교계를 휘어잡고 있다.
피울음 역병이 퍼지며 난리가 났는데도 불구하고 황금의 죄인은 재산을 쌓아 올렸다.
“황금의 죄인도 지금쯤 기억이 좀 돌아왔을 텐데, 이야기는 나눠 보셨소?”
“나눴지.”
베르덴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스켈레톤이 턱뼈를 달싹거리는 모습을 떠올렸다.
“아내와 자식이 옛 왕에게 희생당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더군. 아내의 이름이 ‘다이에니아’이며, 그 애칭이 ‘다이나’라는 것도. 세세한 기억까지는 나지 않는 듯했지만 그 분노와 증오는 진짜였다.”
다이나 은행과 다이나.
당연하게도 우연의 일치로 이름이 서로 같을 리는 없었다.
“어떤 마음으로 명칭을 정했는지는 이해하지만, 옛 왕의 하인들이 살아 있는 이상 초대 네크로맨서의 안배가 발각될 수도 있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나?”
“황금의 죄인은 창고에 쌓은 재산만큼이나 적이 많았소. 과거 암상인 출신이었던 그는 나처럼 가명을 즐겨 썼는데, 대상인 ‘막시스’로 이름이 굳어진 한편 가족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했소. 그 친구의 유일한 약점이었기 때문이오. 그러니 안 그래도 우리 같은 것들에겐 관심도 없었던 옛 왕의 하인들이 기억할 턱이 없지. 아예 들어 본 적도 없을 테니까.”
“황금의 죄인의 가족들과 인연이 꽤나 깊은 것 같군. 원래 친분이 있었나?”
“밑바닥에서 서로 살아남으려고 의기투합한 적이 있었소. 이내 시간이 흘러 각자 자리를 잡고 십수 년이 지났을 때 옛 왕의 협력자로서 재회했지. 그때 왕래가 좀 있었소. 옛 왕이 본색을 드러내기 전에는 그야말로 우리의 전성기였으니 말이오……. 이후 다이에니아가 자식, 아니 자식을 데리고 황금의 죄인을 떠났을 때 머물 곳을 마련해 주기도 했소.”
“……?”
아드리안이 미간을 좁히더니 곧 경멸의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레지날프가 흠칫했다.
“아, 오해하지 마시오. 친구의 가정을 빼앗은 건 진심으로 절대 아니니까. 그저 다이에니아의 부탁을 들어주었을 뿐이오. 당시의 나로서는 그녀의 상황을 외면하기 어려웠기에. 아무튼 그런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소…….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레지날프가 말을 이었다.
“황금의 죄인이 훗날을 위해 남겨 놓았던 재산이 곧 나의 기반이었소. 하지만 그의 진정한 유산은 따로 있소.”
“그게 황금의 길이겠군.”
───세 가지 황금 유골을 모으는 자에게 황금의 길이 열리리라.
황금의 죄인을 봉인했던 황금 유골에 적혀 있던 글귀. 초대 네크로맨서는 간접적으로 그 길의 끝에 있는 것이 황금 비고라고 언급했었다.
아드리안이 물었다.
“도대체 황금 비고란 장소에 뭐가 있길래 그렇게 무게를 잡는 거지? 어디서 대단한 고대 아티팩트라도 가져다 놓았나?”
“그에 대한 대답은 내 몫이 아니오.”
레지날프의 고개를 따라 모두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어느새 차를 전부 마신 카스티안이 철제 컵을 내려놓았다.
“황금 비고에는 크세리온 제국의 보고(寶庫)가 잠들어 있습니다.”
“보고? 그럼 옛 왕의…… 그게 왜 거기 있는데.”
카스티안 리니게아 타인 크세리온───망국의 죄인이 답했다.
“제가 빼돌렸기 때문입니다.”
* * *
“옛 왕의 봉인으로 크세리온 제국이 몰락하면서, 영토와 보물을 포함하여 제국이 가진 모든 것은 대륙 연합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하나 초대 네크로맨서의 뜻에 동조한 저는, 그전에 황금의 죄인과 함께 가장 중요한 것들을 황성에서 몰래 가져와 별도의 장소에 은닉했습니다. 거기서 초대 네크로맨서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내 첫 번째 도둑질이 그렇게 규모가 클 거라곤 상상도 못 했네.]
옛 왕이 사라지면서 크세리온 제국이 임자 없는 산이 되었다고 해도…….
제국의 수도에 침입한 걸로도 모자라 옛 왕과 그 하인들의 보물을 선별해 밖으로 빼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최소한 제국의 내부 사정과 황성의 구조에 대해 자세히 아는 인물이 필요할 터.’
자연스럽게 왕족을 연상시키는 태도와 그 이름은 카스티안의 정체를 정확히 가리켰다. 옛 왕이 불사의 의식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몸소 대륙 연합에 전한 유일한 인물.
‘크세리온 제2황자.’
아칸드의 하나뿐인 동생.
옛 왕의 혈육이 죄인이 되어 베르덴과 아드리안 앞에 앉아 있다. 다른 이들과 다르게 언데드가 되지 않은 채로 말이다.
“제가 어떻게 이 시대에서 살아 숨 쉴 수 있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아무리 생명을 연장한다고 해도 800년은 까마득한 시간이니까요. 초월자가 아니라 한낱 인간에 불과했던 저에겐 더더욱. 이에 대해서는 차차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카스티안이 허리를 곧게 세웠다.
“초월자 전쟁이 막을 내린 뒤엔 수습하기 어려운 혼란이 남았습니다. 전리품은 어떤 방법으로 분배할 건지, 상처투성이인 인류로서 드워프, 수인, 엘프가 압박해 오면 어떻게 대응할지, 누구와 협력할 것인지, 어떤 국가가 가장 약해졌는지…….”
전쟁은, 다른 전쟁을 또 불러왔다.
“국제 정치는, 옛 왕 앞에서 하나가 되었던 대륙 연합을 뿔뿔이 흩어 버렸습니다. 그 와중에 크세리온 제국의 보고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 대륙은 다시 피를 보게 될 것이 자명했습니다.”
“…….”
“그래서 초월자 전쟁의 여파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제국의 보고가 절실히 필요할 때, 옛 왕의 부활이 행해졌을 때. 저희는 그때 옛 왕이 소유했던 보물들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죄인들은 각자의 사명을 품었죠. 그 자리에서 황금의 죄인은 ‘문지기’를 자처했습니다.”
황금의 죄인은 자신의 존재가 아니면, 설령 같은 죄인이라 해도 황금의 길을 개방할 수 없는 거대한 봉인을 담당했다.
그 봉인 원리는 베르덴에게 보여 준 보물 창고와 동일했으며, 존재와 봉인을 연결하는 것은 안데스가 직접 설계했다.
“그렇게 황금 비고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습니다. 다만, 이 비고에는 여타 금고와는 구별되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다른 점?”
“바로 한 방향이라는 점이오. 비고에 보관된 것을 외부로 꺼낼 수는 없지만, 외부의 것을 비고에 보관할 수 있소. 장기적으로 무언가를 숨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지.”
레지날프가 단언했다.
“가령 내가 모아 온 무기라든가.”
레지날프는 아주 오랫동안 대륙 각지에서 출처가 사실상 없는 무구를 수집했다.
어느 누구도 추적하지 못하도록 여기저기 손을 써서 아예 그를 위한 시장을 만들면서까지 말이다.
무구를 모아다 파는 상인이나, 무구를 싸게 구해 다른 곳에 공급하는 상인…….
그중 무구의 상당수는 레지날프의 손에 넘어갔다.
결과적으로 두 상인의 손님은 같았으나 아무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드리안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설마 죄인들의 행로라는 상회도, 네 입김이 닿은 곳인가?”
“무슨 상회지?”
“예, 주군. 저도 자세히 아는 건 아닙니다만…… 출처가 불분명하거나 처분키 애매한 무구를 사들이는 상회라고 들은 적 있습니다.”
도시, 다운트.
글러트니의 세 번째 송곳니인 벨도란의 신병을 확보했고, 산디르 파엔이 처음으로 조우했던 그곳에서 이런 말이 오갔었다.
───제 역할은 그 중간 지점입니다. 서대륙에서 출처가 불분명하거나 처분하기 애매한 무구들을 팔기를 원하는 희망자들에게서 물건을 받아 가지고 고객을 찾아 넘기는 거죠. 흔히 말하는 유통책인 셈이죠. 근데…… 여기서 법률적인 논란이 좀 들어가긴 합니다.
───그래서, 무기들은 어디로 가지?”
───저도 잘 모르는데요? 아, 잠깐. 정말로. 손에 힘은 푸시고. 진짜 제대로 아는 게 없어요. 저야 중간 다리에 불과한데 나머지는 알아서 뭐 한답니까? 그래도 추측하자면 대륙 곳곳으로 갑니다. 주인 없는 땅으로 가기도 할 거고 다른 상회로 가기도 하겠죠.
───주로 거래하는 상회는.
───여러 곳이 있는데 가장 손이 큰 건 총 두 곳입니다. ‘죄인들의 행로’, 그리고 ‘브란트 상회’. 전자의 이름은 특이하죠? 당최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모르겠는데 돈이 무지막지하게 많다는 소문이 있어요. 가끔 이런 상회들이 주기적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글러트니의 간부가 무슨 이름으로 숨어 있는지 수색하던 과정에서, 아드리안과 지하상가의 상인과 나누었던 대화였다.
아드리안이 죄인들의 행로를 언급하자 레지날프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아는 사람이 보기에는 너무나 노골적인 명칭이었나 보구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저 모를 뿐이니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말이오.”
“이렇듯 황금 비고에는 크세리온 제국의 보물 말고도, 죽음의 죄인이 모은 수많은 무기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카스티안이 제 목덜미를 뒤적거리더니 목걸이를 벗어 식탁 위에 놓았다.
그 질긴 가죽 끈에는 황금빛 열쇠가 걸려 있었다.
“과거를 점차 자각해 가는 황금의 죄인에게는 두 가지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기억, 다른 하나는 황금의 길을 여는 열쇠입니다. 이걸 그에게 건넨다면, 기억이 되살아나는 순간 여러분을 황금 비고로 이끌 것입니다.”
죄인들이 베르덴을 만나러 온 것은 황금 비고의 열쇠를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곧 800년의 대계를 베르덴에게 맡긴다는 뜻이었다.
안데스에게서 이미 듣기는 했지만, 그 무게감은 상당했다.
“…….”
베르덴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황금 열쇠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전에.”
카스티안이 슬쩍 열쇠를 뒤로 뺐다.
“확인할 게 있지 않습니까?”
“달리 검증할 게 더 남아 있나?”
“이로써 저희는 동료니까요.”
베르덴과 아드리안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붉은 기가 감돌았다.
“서로 전력은 알아 두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