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5화 죄인들 (5)
카스티안은 이명에 ‘완벽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흑요 등급 모험가로, 모험가 길드가 자랑하는 최상위 전력 중 한 명이다.
즉, 그 명성에 걸맞은 실전성이 입증된 인물이란 의미였다.
베르덴이 통찰력을 발휘했다.
‘언뜻 선명하나, 자세히 보면 두루뭉술하다.’
세계 회의에서 봤을 때는 흑요 등급 모험가다운 강한 인상만 느껴졌지만…… 신경을 최대한 기울이자 어딘가 기묘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초점이 맞지 않는다고 할까?
카스티안은 한 명일 텐데 많은 사람이 겹쳐 있는 듯한 감각이 엄습했다. 마치 그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잔상처럼 말이다.
스릉.
카스티안은 장식이 단조로운 바스타드 소드를 손에 들었다. 검신이 상당히 길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날이 두꺼웠다.
“그 외날 검은 안 뽑으실 겁니까?”
“아직 그럴 가치를 느끼지 못했으니까.”
눈 덮인 오두막에서 나온 아드리안과 카스티안이 마주 섰다. 서로 전력을 알아보자는 망국의 죄인의 제안을 아드리안이 받은 것이다.
베르덴, 레지날프, 안데스는 한곳에 모여 관객을 맡았다.
“감히 주군께 호기를 부린 건 네놈이니 대충 하진 않겠다.”
“호기를 부린 적은 없습니다만, 그거야 아무래도 좋겠죠. 검을 한번 맞대는 걸로도 많은 것을 전할 수 있으니까요.”
카스티안은 엄숙하게 양손으로 검 손잡이를 잡아 관자놀이까지 끌어 올렸다. 예리하고 두꺼운 검끝이 아드리안에게 향했다.
아드리안은 광검에 손목을 얹은 채로 카스티안을 응시했다.
“종을 울려 주십시오.”
[알겠네.]
안데스가 텅 빈 주전자를 향해 천천히 손가락을 뻗었다. 죽음의 기운이 명멸하며 자그마한 파도처럼 퍼져 나갔다.
베르덴이 내심 기대감을 가졌다.
‘아칸드는 생명의 틀을 벗어나는 불사의 의식을 치렀으니, 사실상 카스티안이 크세리온의 마지막 후손이다.’
안데스의 기억을 통해서 옛 왕의 무위가 어떤지 본 적이 있다. 나약한 인간의 몸으로 초월을 타고난 운명의 사도…….
확실히 그 힘은 루아스교와 다크워튼 마탑이 긴 시간 경계할 법했다.
아칸드의 부모는 그저 왕과 왕비였고, 크세리온 왕가에 아칸드와 비슷한 존재가 있었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다.
필시 혈통의 힘은 아닐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스티안은 옛 왕의 육친이니 상식과는 거리가 먼 저만의 특색을 지녔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과연 어떨까.”
둥.
주전자에서 울려 퍼진 둔탁한 금속음이 귓가를 잠시 스쳤다.
카스티안이 달려들기도 전에 아드리안의 신형이 사라졌다──쩌억! 안면을 주먹으로 강타하는 소리와 함께 카스티안이 뒤로 밀려났다.
“옛 왕의 동생치고는 평범하군.”
“형에 비하면 별것 없다. 그 소리는 질리도록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때마다 이렇게 대답하곤 했습니다.”
카스티안이 턱을 살짝 당겼다. 입술이 터져 피가 흘러내렸지만, 날카로운 속도로 꽂힌 일격에도 그의 자세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상한 건 내가 아니라 형이라고.”
전신의 근육이 조여들며 내면에서 수많은 음성이 메아리쳤다.
우리의 염원을.
* * *
카스티안이 지면을 박찼다. 근처 나무들을 덮은 눈이 쏟아져 내렸다.
묵직한 검격이 눈보라를 갈랐다.
아드리안이 가볍게 상체를 비틀었다.
‘완력은 제법.’
검기 없이도 검압이 느껴진다. 맷집도 상당하니 육탄전에 자신 있는 모양이다.
‘일단 프로하스 국왕의 하위 호환 정도인가.’
눈발이 몰아친다.
아드리안이 정확한 간격으로 카스티안의 검로를 벗어났다. 단 네 걸음으로 다섯 번의 공격을 회피한 그가 무게중심을 바꾸었다.
사각을 파고든 발차기가 카스티안의 옆통수로 향했다.
그때였다.
후욱.
카스티안이 절묘한 순간에 자세를 낮추며 거리를 좁혔다. 완벽한 반격이었다. 아드리안이 그의 칼날을 손으로 밀어 일격을 파훼했다.
아드리안이 물었다.
“검기를 왜 아껴 두지?”
“아껴 두지 않았습니다.”
카스티안이 확언했다.
“애초에 검기를 발현하지 못하니까요.”
“뭐?”
쿵!
카스티안은 허공을 벤 검을 끝까지 휘둘러 땅을 내리찍었다. 그리고 왼발을 크게 내디디며 왼 주먹을 내질렀다.
아드리안이 제자리에 선 채 그 주먹을 한 손으로 붙잡았다.
‘……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말도 안 된다.
이 정도의 경지에 도달한 전사가 기를 깨우치지 못했다니? 불가능하다. 다리가 없는데 어찌 달리기를 한단 말인가?
인간은 기와 마력, 신성력을 통해 타 종족에 비해 열세였던 힘을 보완하고, 결국 대륙의 지배 종족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달리 말하자면 세 가지 힘이 없는 인간은 가장 나약한 개체인 것이다.
아무리 신체를 단련한 전사라고 할지언정 기운이 없는 이상 경지는 한정된다.
마력이 없는 마법사와 신성력이 없는 성직자처럼 장래가 없다. 기껏해야 힘과 덩치만 좀 키울 수 있을 뿐이겠지.
그런 의미에서 카스티안은 상식적으로 존재해선 안 되는 전사였다.
“……!”
아드리안의 팔이 움찔거렸다.
카스티안의 주먹에 실린 힘이 서서히 강해지고 있다. 마치 수천, 수만 명이 넘는 ‘인력(人力)’이 점차 한곳에 모여드는 기분이었다.
쩌저적.
카스티안이 딛고 있는, 얼어붙은 땅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에서 붉은 기운이 더욱 강맹해졌다.
“이 정도면 가치는 있습니까?”
“괜히 오래 산 건 아니었나 보군.”
서로 내지른 주먹이 부딪쳤다. 대기를 흔들며 물러난 두 사람이 재차 쇄도했다. 아드리안이 광검을 발도했다.
카앙! 캉! 카가가각───쩌어어엉!
검광이 번쩍일 때마다 대지에 쌓인 눈이 위로 솟구쳤다. 겨울바람이 일며 그들 주변에 눈보라가 요동쳤다.
신속의 검술이 삽시간에 카스티안으로 하여금 방어를 강제하게 했다.
‘거의 흐트러지지 않은 호흡. 체력을 소모하는 기색도 없다. 검술과 체술은 실전 지향적으로 투박한 면이 두드러지고. 순수한 신체 능력은 괴랄할 정도로 막강해. 균형은 개나 줬군.’
신체의 조화가 어긋나다 못해 이렇게나 뒤틀린 전사는 처음이었다. 공방일체의 리반데일 대공이 본다면 대체 뭐라고 할까.
아드리안은 통찰력을 유지하면서 조금 더 수준을 높였다. 카스티안의 전력을 면밀하게 파악하기 위해 본 실력을 발휘했다.
츠가가각───
광검이 미끄러지듯 파고들더니 순식간에 하늘로 치솟았다. 그 압력에 빨려 들어간 카스티안의 팔도 퉁겨지듯 떠올랐다.
그 와중에도 카스티안은 단단히 검을 붙잡고 있었다.
뻐억!
아드리안이 허공에서 한 바퀴 회전해 카스티안의 손을 후려쳤다. 뼈를 부러뜨릴 듯 강력한 발차기가 손등에 작렬했다.
완벽에 가까운 무력화였으나 카스티안은 여전히 검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뒤로 밀려난 팔을 따라서 그대로 몸을 돌려 반격을 시도했다.
800년 전의 시대를 뒤로하고 현대에서 깨어난 카스티안은 모험가로 신분을 정한 뒤 밑바닥부터 시작했다.
백결 등급에서 동 등급.
동 등급에서 은 등급.
은 등급에서 금 등급.
금 등급에서 백금 등급.
백금 등급에서 미스릴 등급.
미스릴 등급에서 흑요 등급.
카스티안은 특유의 신체 능력으로 수많은 의뢰를 실패 없이 완수했으며.
어떤 위급한 상황에 닥쳐도 한번 검을 잡았으면 모든 위협이 사라질 때까지 손아귀에서 힘을 푼 적이 없었다.
가히 모험가의 귀감.
그것이야말로 카스티안에게 완벽한 모험가라는 이명이 붙은 까닭이었다.
파앗.
아드리안의 광검 [실렌다르]에 자색의 기운이 아른거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십수 합이 오가면서 불꽃이 튀었다.
카스티안은 방어 검술에 집중하면서도 담담하게 검속에 적응하려 했다.
‘이대로 끝내도 무방하지만……그렇게 밋밋하게 마무리하고 싶진 않은 모양이군.’
카스티안이 감춘 저력을 아드리안이 거의 가늠한 순간이었다. 쿠웅!!! 녀석이 발을 굴리며 머리 위로 바스타드 소드를 들었다.
두근.
심장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검날에 미증유의 힘이 실렸다. 아주 정직하게 수직을 가르는 검격에서 파공음이 터졌다.
연광連光
빛을 번뜩인 광검이 바스타드 소드와 정면에서 충돌했다. 충격파를 실은 돌풍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 주변 일대를 휩쓸었다.
쐐애애액───와지끈!
나무들이 휘청거리고, 다 낡은 오두막은 기둥이 무너지며 폭삭 내려앉았다. 먼지처럼 일어난 새하얀 눈발이 다리를 스쳤다.
[둘 다 고생했네.]
“잘 봤소.”
“수고했다.”
안데스와 레지날프가 손뼉을 치며 대련의 종료를 알렸다. 베르덴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카스티안을 관찰했다.
“아무리 봐도 그 힘 자체는 스스로 쌓은 게 아닌 것 같군.”
아드리안이 광검을 거두었다.
“아티팩트인가?”
“비슷할 겁니다. 아마도.”
카스티안이 자신의 가슴 정중앙에 손을 얹었다.
“이 안에 크세리온 제국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바마마와 어바마마만이 아니라 만인의 뜻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분들이 제가 가진 힘의 원천이죠.”
베르덴이 물었다.
“영혼이 깃들었다는 건가?”
“영혼인지, 아니면 그저 공허한 의지인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초대 네크로맨서께서도 분간이 되지 않는다고 하셨죠.”
[아티팩트엔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기상천외한 것들이 있으니 말일세. 카스티안의 삶을 이어 주는 그것도 그중 하나겠지.]
카스티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저 아티팩트라는 것조차 몰랐던 ‘국보’에 소원을 빌었는데, 그 소원이 이 방식으로 이루어졌을 뿐입니다. 저는 만족합니다. 이렇게나마 죄를 갚을 수 있으니까요. 어쨌든 이 정도라면 제 전력을 어느 정도 파악하셨을 터.”
그가 검을 회수했다.
“저는 모험가 길드를 통해서 히아레마르 탐색에 참여합니다. 용검 마그라스를 손에 넣을 수 있도록 비밀리에 조력하겠습니다. 이 점 부디 염두에 두시고 계획을 구상하시길.”
새로운 전력이 늘었다.
카스티안이 지휘하는 모험가 길드가 도와준다면 수색만이 아니라 여러 돌발 사태가 발생해도 아주 큰 도움이 되리라.
그때, 카스티안이 다시 황금 열쇠를 내밀었다.
“기억으로, 초월자 전쟁에서의 옛 왕을 보셨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참고만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무엇을 상상했고 대비하셨든 간에 그 이상일 테니까요. 그건 누구보다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충고는 고맙게 받지.”
베르덴이 황금 열쇠를 건네받고는 카스티안에게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기는 거지?”
“옛 왕에게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고 해도 죄가 없는 건 아닙니다.”
카스티안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크세리온의 핏줄이니까요.”
왕족과 황족은 그 드높은 지위에 걸맞은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그들은 국가와 국민을 수호할 의무가 있다.
망국의 죄인.
카스티안 리니게아 타인 크세리온의 대죄는, 지켜야 할 그 무엇도 지키지 못한 채 국가의 멸망을 막지 못한 죄였다.
* * *
“여기가 주인 없는 땅이라고? 시벌, 황금 해골이 준 보물을 사교계에 팔아먹는다고 하더니. 그 돈을 여기다 쏟아붓고 있었구만.”
도시, 어레인에 입성한 갈리아크가 거칠게 턱을 쓸었다. 네리엔과 고드도 예상보다 훨씬 발전 속도가 빠르다며 감탄했다.
그들의 겉모습은 작년 이맘때쯤과 비교해 상당히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전사는 전사대로.
마법사는 마법사대로.
갈리아크가 미스릴 등급 모험가인 걸 생각해도 상당히 부유해 보인다. 전부 베르덴이 선의로 건넨 보물 덕분이었다.
황금의 죄인의 창고에서 가장 값이 적게 나가는 것들이었지만 보물은 보물이었다.
갈리아크 파티가 지금 시점에서 주인 없는 땅에 온 이유는 간단했다.
베르덴이 불렀기 때문이었다.
갈리아크 파티가 황금의 두개골을 넘기는 대신, 베르덴에게 언젠가 황금의 길이 열리면 데려가 달라고 계약했기에.
고드가 침을 삼켰다.
“그나저나…… 그 황금의 길에는 뭐가 있을까요? 고대 아티팩트? 잊힌 마법? 그런 게 있겠죠? 기대가 돼서 요즘 잠이 안 올 지경입니다……! 아참, 마도의 정복자께 일단 감사의 의미로 절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애셔한테 절을 왜 해. 미쳤어?”
“당연히 저희가 최근에 먹고, 입고, 산 거 전부 그분께서 주신 보물에서 나온 거니까요! 그러니까 이제부터 반말하지 말고 존댓말이라도 꼬박꼬박 사용하시라 이겁니다, 예?”
“아주 사고 싶은 거 죄다 사더니, 머리 끝까지 기어오르네. 그 책 줘 봐. 찢어발겨서 불쏘시개로 쓰게. 씹새야.”
“잠시 지나가겠습니다.”
“야! 사람 지나가잖아! 둘 다 좀 비켜!”
“내가 뭔 길을 막았는데. 정 지나갈 거면 옆으로 돌아가든가, 시발─”
네리엔이 힘껏 갈리아크와 고드를 길 가장자리로 밀어냈다. 갈리아크는 지나가는 사람 뒤통수를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갈리아크 파티로 인해 소란스러워진 거리를 뒤로하며, 행인이 허허 웃었다.
“사이가 좋은 모험가 파티군요.”
행인───리스너가 앞에 보이는 어레인 성채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방주의 전령이 에온의 권역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