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7화 대마력 (2)
베르덴의 육체 앞면에는 역천의 마법진 ‘원형’이 새겨져 있다.
몸통을 중심으로 팔꿈치와 허벅지까지 뻗어 나간 정교한 술식.
마도 축제를 며칠 앞두고, 보헤미른 마탑에서의 비공식 인체 실험을 마치고 나서 날붙이로 직접 새겨 넣은 흉터이기도 했다.
그 흉터는 초월자로 각성하면서 몸과 하나가 돼 일종의 문신처럼, 원래 그러했던 것처럼 이질감조차 없이 육체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자벨라의 등에는 ‘부분적인’ 역천의 마법진이 각인되어 있다.
그녀와 그녀의 상처를 재생시키는 [되살아나는 피]와 하나가 될 때까지, 베르덴이 단검으로 살과 근육을 파내 그린 것이었다.
역천의 마법진…… 그 원본은 마력회로를 강제로 확장시키는 개신과 궁극적으로 육체의 재구성이라는 마법적 기적을 일으킨다.
이자벨라의 것은 후자에 초점을 맞추어 베르덴이 변형한 역천이었다.
베르덴은 한계 위계의 선을 넘었고, 이자벨라는 종족의 선을 넘어 반평생 체내에서 반발해 온 가보와 융합해 마족이 되었다.
섭리의 역행.
역천.
운명의 거부.
베르덴의 살기 위한 발버둥은 일견 경계(境界)를 넘는 이적을 보였다. 그것은 우연이기도 하며, 우연이 아니기도 했다.
계기와 의도는 분명했을지언정 영향력은 예측을 크게 벗어났으므로.
이자벨라가 끝없는 부정의 이능력을 일깨우려는 과정에서 형안을 통해 영혼 같은 걸 보게 된 것도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볼 수 없는 것을 본다.
그 또한 어느 의미로는 경계를 넘었다고 할 수 있을 테니까.
화아아아악.
하나의 원, 여덟 개의 삼각형, 일곱 개의 작은 원, 세 개의 반원, 열일곱 개의 곡선, 쉰다섯 개의 직선, 여든아홉 개의 문자.
무한의 마도로 구현된 격상의 마법진이 발광해 시야를 물들였다.
유니아와 카인이 눈을 부릅떴다.
두 사람은 실전에서 마법진을 활용하지는 않지만 마법진에 대해 꽤 해박했다. 현자들이 조기 교육으로 쌓아 올린 지식의 탑이었다.
그들은 눈앞에 떠오른 마법진의 수준을 알아보고 경악했다.
“무, 무슨 마법진이 이렇게 괴랄해?”
“뭔가…… 익숙한 느낌이.”
눈에 익을 수밖에 없다.
에온의 심볼에는 소사이어티와 블랙 아워의 상징 말고도 역천의 마법진이 포함돼 있으니까. 다만 둘은 에온의 의미가 역천이란 건 알아도 그게 진정 무슨 뜻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렇다.
대마력은 <아케인>만이 아니라 역천에도 뿌리를 두었다. 이자벨라처럼 육체의 재구성에 집중된 부분 역천이 아니다.
에온에 부여할 역천은 개신과 육체의 재구성이란 마법적 현상을 동시에 발현하되 안정성과 실용성에 중점을 둔 산물이다.
역천의 열화판이자.
원본의 파생형.
그것이 개인이 아닌 집단을 위해 수정된 세 번째 형태의 역천이었다.
다시 말해…….
세 번째 역천은 마력회로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사용자의 몸을 대마력과 조화를 이루도록 단계적으로 변화시키는 마법진이다.
이를 통해 마력회로의 일부만이 재구성된 에온의 마법사들은 베르덴 사이에 마법적 교집합을 형성하게 된다.
본래 마력 밀도를 높이는 방법을 따로 가르쳐서 반복 숙달 시키는 게 선제였으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수정한 역천의 마법진은 마력 흐름을 유도하는 기능이 더해졌으므로.
‘원천의 마도처럼 마력만으로 상대방의 흐름을 강제할 수는 없어도, 마력 외의 매개체가 있다면 나 또한 재현은 가능하다.’
어떻게 하면 타인의 마력에 자연스럽게 간섭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을, 반젤리스와의 대련에서 몸소 경험해 얻은 덕분이었다.
베르덴의 마법 이해력은, 그의 유일한 선천적 재능이었다.
베르덴이 말했다.
“지금부터 이 마법진을 손등에 각인할 거다. 전혀 아프지 않은 데다가 마법진은 언제든 지울 수 있으니 안심하고.”
베르덴은 자신과 이자벨라의 살갗을 파헤치고 나서야, 날카로운 도구 없이 역천을 새기는 방법을 깨우쳤다.
파아아앗.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의 손등에 베르덴의 손이 닿았다. 마력의 빛이 쉴 새 없이 번쩍이며 특유의 마법진이 피부 위로 떠올랐다.
외부에서 내부로.
시시각각 조형되는 마법진이 고유한 마력회로에 접속하기 시작했다.
유니아가 숨을 흘렸다.
‘이상한 기분…….’
마법진을 처음 이식해서 그런 걸까.
뭐라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각이 그녀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소름이 쫙 돋을 듯하면도, 또 어딘가 간질간질했다.
일단 확실한 건 이렇게 요란한데도 고통은 전혀 없었다는 점이었다.
유니아는 거의 완성되어 가는 마법진을 관찰하며 슬쩍 베르덴을 살폈다. 벽안에는 자그마한 불안감도 존재하지 않았다.
“선배.”
베르덴은 역천의 이식을 계속 진행하면서 대화에 응했다. 이 또한 여유가 전혀 없었던 과거와 대비되는 광경이었다.
“왜.”
“이 마법진은 대체 뭐야……?”
사물의 흥미로운 원리를 해석하는 것은 마법사의 본능이다.
쌍둥이는 호기심이 동했다.
베르덴이 답했다.
“내 역작이지.”
일순간 언덕 한가운데를 물들이고 있던 푸른빛이 사라졌다.
세 번째 형(型)의 역천이 완성됐다.
팟───
유니아와 카인의 손등에서부터 푸른색의 줄기가 뻗어 나와 전신의 피부를 뒤덮었다. 잠시 마력회로가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심장부터 손등까지, 마력회로는 역순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카인이 눈을 깜빡이더니 마법진이 떠오른 손을 쥐었다 폈다.
“벌써 끝난 겁니까?”
“그렇게 되도록 의도했으니까. 마법진은 마력을 주입하면 기동한다. 시험해 보도록.”
유니아와 카인이 서로를 잠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전신의 마력회로를 활성화하고, 그 마력을 손등에 최대한 집중시켰다.
……!
마법진이 명멸하며 마력을 축적했다.
상당한 마력을 소모했음에도 아직 채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 사람은 눈을 감고 마력 주입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였다.
뭔가가 채워진 느낌이 든다. 반사적으로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마법진이 발광했다. 안에서 폭발하듯 분출된 마력이 그들의 마력회로를 번개처럼 질주하며 마법진으로 다시 돌아갔다.
“흡……?!”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숨을 삼켰다.
마치 까마득한 상공에서 낙하하는 것처럼 온몸이 붕 뜨는 듯했다. 그러나───역시 이렇다 할 고통은 전혀 없었다.
“마력 밀도를 높여, 마력회로 바깥으로 넘쳐흐를 정도의 마력량을 외부로 드러내지 않는 경지.”
베르덴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게 대마력의 제1단계다.”
유니아와 카인이 이리저리 자신의 몸을 살피며 마력회로를 관조했다. 겉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으나 속은 전력에 가까운 상태.
전신에서 흘러나와 주변 일대를 뒤덮고도 남아야 하는 방대한 마력이 유형화조차 되지 않은 채 흐르고 있었다.
“이게 1단계야? 마력 소모가 극심하긴 한데…… 되게 안정적이다. 여기서 마도의 위계 돌파까지 하면 위력이 엄청날 것 같은데?”
“너의 경우엔, 대마력이 마도 위계 돌파의 반동도 일부 줄여 줄 거다. 하지만 4단계에 오르기 전까지는 시도할 생각 마라. 오히려 후유증이 더 클 테니까.”
“대마력은 총 몇 단계로 이루어진 겁니까?”
“총 여섯 단계다. 방금 내가 보여 준 게 대마력의 마지막 단계지.”
베르덴이 턱짓했다. 두 사람이 마력을 갈무리해 대마력을 거두었다.
“대마력에 적응하는 방법은 오래, 그리고 자주 마법진을 기동하는 것밖에 없다. 적응 시간은 저마다 천차만별이고. 다른 마법사였다면 1단계를 터득하는 것도 시간이 꽤 걸렸겠지.”
“우리가 천재라는 거지?”
“너희의 재능과 마력량을 고려하면 3단계까지는 문제없다. 거기까지 도달하면 대마력을 이용한 고유 마법을 가르칠 거고. 시간이 그리 많지 없으니 대련은 한동안 중지하겠다. 너희는 경지를 높이는 데 최선을 다하도록.”
“응? 시간?”
쌍둥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시간이 부족한 겁니까?”
“마도 축제가 얼마 안 남았으니까.”
베르덴은 마도 축제에서 에온의 기술력을 선보일 계획이었다. 당연히 그 일정에는 대마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니아와 카인은 마법계 전체에 대마력을 선보일 당사자였다.
“카인, 마도 축제까지 며칠 남았지?”
“13일 정도.”
“선배, 기간이 좀 짧은 것 같은데?”
“불가능했다면 애초에 말하지도 않았다.”
베르덴이 단호히 말했다.
“노력해.”
“엣.”
베르덴은 타인을 지도할 때 그 강도에 있어서는 한 치의 관용도 없다. 대마력 3단계에 이르지 못하면 곧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
만에 하나라도 시간 내에 경지를 높이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유니아와 카인은 굳이 상상하지 않았다.
* * *
저녁 때까지 유니아와 카인의 대마력을 지도한 베르덴은 일행을 데리고, 리스너를 따라 공간을 넘어 아크로 향하는 비행정에 탑승했다.
“정식으로 선장이 되시면 아르시스로 언제든지 아크를 출입할 수 있게 됩니다. 선장의 고유 권한 중 하나이지요. 앞으로 제가 직접 데려다드리지 못하니, 그 부분은 참 아쉽습니다.”
마음대로 하늘섬을 오갈 수 있다.
아크의 기원에 관심이 많은 베르덴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권한이었다. 잘하면 초대 마도왕의 흔적을 금방 찾아낼지도 몰랐다.
“우윽…….”
“어, 괜찮아요?”
“아직도 극복 못 한 건가.”
[울렁증. 확인.]
베르덴의 주변엔 알파, 베타, 아드리안, 이자벨라 말고도 한 명이 더 있었다. 바로 어레인에 머무르고 있던 레이라였다.
보다시피 여전히 공간 이동에 전혀 적응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레이라가 천천히 비틀거리며 일어나 벽에 등을 기대었다.
투구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졌어요.”
“그래도 회복 시간이 조금 빨라지셨습니다.”
테일라가 <다중 공간 이동> 마법이 깃들어 있는 회중시계를 품속에 넣었다.
그녀는 도시 연합 카일리언스에서 하늘섬으로, 레이라를 방주의 교류전으로 안내한 방주의 일원 중 한 명이었다.
리스너가 말했다.
“본래 며칠 동안 비행해야 하나, 이번엔 윗분께서 아크의 출입 절차를 최대한 생략해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지체하지 않고 다시 공간을 이동하겠습니다. 선체로 들어가시죠.”
레이라가 부르르 떨었다.
“그래도 공간 이동 횟수는 줄어드니까 안심해 주십시오.”
“얼마나 줄어들죠?”
테일라가 설명을 보충했다.
“두 번 정도입니다.”
“……먼저 들어가죠.”
레이라는 말없이 일어나서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선체 내부로 향했다. 뭐, 하긴. 다른 사람 앞에서 속을 게워 내기는 싫을 터였다.
칠흑의 갑옷과 망토로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의 어깨가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이자벨라가 입가를 쓸었다.
“저 사람, 뭔가 귀여운데?”
카일리언스에서부터 유골룡 토벌까지 함께한 아드리안과 다르게, 중앙 대륙에서 베르덴과 합류한 이자벨라는 레이라를 제대로 대면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자벨라는 레이라가 마음에 든 듯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척의 소형 비행정이 아크의 선착장에 도착했다.
대륙의 시간으론 자정이었으나 아크의 풍경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곳은 언제나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세상과 분리된 섬이었다.
그리고 선착장에는 베르덴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크에 다시 방문하신 걸 환영합니다, 여러분.”
“직접 마중 온 건가?”
“후후, 같은 선장으로서 당연한 일이죠.”
세계의 주시자───다리시아 스텔라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회색의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있는데도 그녀는 정확히 베르덴 일행을 인지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방주의 다섯 선장 중 하나로서 세계의 주시자의 의무를 계승하는 다리시아 스텔라입니다.”
[안녕. 알파.]
[처음 뵙겠습니다. 베타입니다.]
“아드리안 첸버스다.”
“안녕하세요. 이자벨라 데이로스…… 입니다.”
아드리안은 대충 고개만 까딱거렸다.
이자벨라는 인사를 하다가 말고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어두운 드레스로 가려지지 않는 다리시아의 몸매가 눈에 들어왔다.
……경악스럽다.
레이라는 겨우 테일러에게 부축을 받으며 뒤늦게 비행정에서 내려왔다.
“그럼, 임무를 마쳤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리스너. 편히 휴식을─”
그 순간.
쿵. 쿵. 쿵. 쿵. 쿵.
멀리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온다. 모두 선착장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재액의 토벌자가 베르덴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