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6화 대마력 (1)
공허한 두 눈구멍이 갈색 가죽 끈에 꿰어진 황금 열쇠를 응시했다. 그 찬란한 광채는, 황금의 죄인의 색깔과 똑같았다.
[……아, 그랬었죠.]
손가락뼈로 천천히 굴리는 황금 열쇠에 조명의 빛이 잠시 반사됐다.
그 빛 속에서 기억의 파편이 떠올랐다.
───후호호호홋. 드디어 제 차례군요. 죽는 게 처음이라 긴장되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합니다. 아참, 남은 황금을 가져왔는데, 혹시 제 유골을 도금해 줄 수 있으십니까?
───황금 유골이라. 어려울 건 없네. 그런데 그러고 싶은 이유가 달리 있나?
───그도 그럴 것이 제가 가진 게 돈밖에 없지 않습니까? 다행히 아칸드가 부활하지 못해 제가 영영 깨어나지 못하게 된다면 제 유골만 떠돌아다니게 될 텐데. 기왕 뼛조각이 될 거, 황금 뼛조각이 되는 편이 값이 나갈 테니까요! 그래야 절 주운 사람들이 좀 더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생전의 죄인이 웃었다.
───무가치한 삶을 살았으니. 사후에라도 가치 있는 것이 되고 싶습니다.
자아가 더 뚜렷해졌다.
황금의 죄인은 옛 왕을 떠올리고 절규했을 때와 다르게 차분히 기억에 적응했다. 마음에 아로새겼던 그날의 다짐…….
아직 흐릿하지만 곧 무엇을 해야 할지, 그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로베르트, 되도록 많이 배워 두십시오. 그래야 덜 후회하거든요.]
“네?”
[세상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후호호홋.]
황금의 죄인이 황금 열쇠를 목에 걸고 호탕하게 웃었다.
리토가 제조한 보양 포션을 마시면서까지 에온의 7차 추가 예산안을 작성하고 있던 로베르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골 스승님, 이상한 소리 좀 그만하시고 검토나 빨리 해 주세요. 바쁩니다. 안 그래도 연금술 부서에서 또 예산 올려 달라고 해서 머리 아픈데 진짜.”
[…….]
고대 스켈레톤이고 뭐고, 오늘로써 닷새 동안 네 시간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한 로베르트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 * *
레지날프와 은행……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으나, 베르덴이 마그누스 은행장에게서 거액을 대출했을 때 어느 정도는 레지날프의 입김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세 개 중 두 개의 황금 유골을 갖고 레지날프를 찾았을 때부터 초대 네크로맨서와 죄인들은 베르덴을 주시하고 있었으므로.
‘예상외의 전력이다.’
대륙 3대 은행을 발아래 둔 죽음의 죄인.
아드리안이 적당히 선을 지켰다고 해도 초월자의 기예와 합을 이룰 수 있는, 원리 불명의 무력을 갖춘 망국의 죄인.
천문학적인 재산을 가진 황금의 죄인.
다크워튼 마탑을 직접 창립하고 초월자 전쟁에서 살아남은 초대 네크로맨서.
세력의 주 구성원은 넷이 전부지만 그 영향력은 어느 세력 못지않다. 레지날프가 마음먹고 은행의 자금 순환만 막아도 대륙 전역에서는 끔찍한 비명이 터질 터였다.
피울음 역병으로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든 주검의 영광과 어느 의미로 비슷했다.
재계의 주인이 도시의 한적한 골목에서 고물상을 하고 있었다니.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넌 레지날프한테 잘해라.”
“네…… 넵?”
“가라.”
외로운 늑대, 로메르가 어리둥절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는 꾸벅 인사를 하고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체격이 조금 커진 모습이다.
매 끼마다 질 좋은 식사를 하고, 최근에는 치안대 훈련에 참여해 제법 난이도 높은 신체 단련을 꾸준히 거듭한 결과였다.
로메르의 성격을 고려하면 밥만 축내며 여자를 꼬시는 데 시간을 할애했을 텐데.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당연히 에온에 얹혀사는 몸으로 여자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문제가 커질 테니 최대한 자제하는 거겠지만 말이다.
뭐, 어쨌든.
‘사실상 주검의 영광과 완전한 대척점에 있는 건 죄인들이군. 루아스교가 아니라.’
이 정도라면 주검의 영광과 전면전을 치러도 큰 문제는 없다. 첫 번째 하인과 두 번째 하인의 경지가 남다르다고 해도 승리는 자명하다.
다만 하인들이 어떤 존재를 되살렸다는 변수가 마음에 걸릴 뿐이다.
‘그러니 대응해야지.’
베르덴은 레바나와 알데반을 호출해 다크워튼 마탑으로 보냈다.
이번에 부활한 존재에 대한 정보를 얻을 겸 초대 네크로맨서와 당대의 네크로맨서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일단 필요한 조치를 마친 베르덴은 성의 응접실로 향했다.
“방주에서 지금 시점에 너를 보냈다는 건 역시 즉위식 관련이겠지.”
오늘은 평범한 청년으로 변장한 리스너가 찻잔을 든 채로 말했다.
“본래 시간이 좀 더 걸릴 예정이었는데 윗분께서 앞당기셨습니다.”
리스너가 말하는 윗분은 오직 한 사람뿐이다.
방주의 리더.
“이유는?”
“듣지 못했습니다. 권한 밖이기도 하고요. 제게 주어진 임무는 어디까지나 늦어도 내일까지 베르덴 님을 모시고 아크로 복귀하는 거랍니다. 음! 차 맛이 정말 좋군요. 단맛 뒤에 감도는 씁쓸함이 상당히 중독적입니다.”
리스너는 연속으로 차를 홀짝이고는 그 온기를 음미했다.
“언제쯤 출발할 수 있으십니까?”
“오늘 밤으로 하지.”
“알겠습니다. 그때까지 준비해 놓도록 하죠. 물론 시간을 앞당기셔도 상관없으니 미리 말씀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리스너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방주에 몸담은 지 꽤 됐지만 선장 즉위식을 보는 건 이제 세 번째입니다. 새로운 선장이 탄생하는 건 처음이고요. 심지어 그 위(位)에 오르는 분이 다름 아닌 베르덴 님이시니, 방주의 오랜 역사에 길이 남을 날이 될 겁니다.”
“그런가?”
“그렇지요. 방주에서의 교류전. 마법계 총회의에 이어 세계 회의. 베르덴 님의 활약은 후보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차고 넘칠 만큼 인상적이었으니까요.”
고대의 시련을 극복하고 글러트니의 간부들까지 처단한 위업.
방주의 후보 시절부터 베르덴만큼의 업적을 남긴 사람도 없었고, 이토록 단기간 내에 선장이 된 사례도 전무했다.
“리비안트 공국에서 처음 뵈었을 때부터 이럴 줄 알고 있었습니다. 방주가 오랫동안 추척해 온 박사를 처리했을 때부터 말이죠. 렌 발하그 장로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베르덴 님은 그야말로 이상적인 선장 후보입니다.”
“칭찬은 됐고.”
베르덴이 몸을 일으켰다.
“도시 바깥에 다녀오겠다. 여기서 다시 만나도록 하지.”
“예, 그러시죠. 곧 즉위식에서 대대적으로 축하를 받으시겠지만, 그전에 제가 먼저 개인으로서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리스너가 마치 축배를 들듯이 양손으로 찻잔을 조금 높이 들었다.
“인류를 위한 당신의 공헌에, 깊은 감사를.”
* * *
주인 없는 땅의 인적 없는 숲.
하늘섬으로 향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이는 마도 축제의 준비이기도 했다.
유니아가 소리쳤다.
“드디어 완성한 거야, 선배?!”
“이론은 완성했다. 아직 나를 제외하고 습득한 마법사가 없으니, 궁극적으로 완성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서 너희를 부른 거다.”
베르덴이 단언했다.
“유니아, 카인. 지금부터 너희에게 에온의 마력 운용법. ‘대마력’을 가르치겠다.”
“……!”
천재 쌍둥이의 낯빛에 기대감과 긴장감이 동시에 감돌았다.
베르덴은 타인을 지도할 때, 그 강도에 있어서는 단 한 치의 관용도 없었다. 두 사람은 짧은 대련을 할 때마다 극한까지 몰리곤 했다.
대신 그 효과는 확실했다.
이자벨라가 구사하는 원소 계열 마법도 베르덴의 작품이었다.
“대마력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마력 증폭을 이용한 일종의 강화다. 몸의 적응력을 벗어날 정도로 마력의 밀도를 일순간에 높인 다음, 질적으로 변형된 마력을 자신의 육체에 새롭게 적응시키는 게 기본 바탕이지.”
서두는 짧게, 바로 본론으로.
베르덴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를 바라듯 두 사람도 이런저런 반응을 보이는 대신 요점만 짚어 질문했다.
“마법사가 깨우친 마력은 본연의 상태일 때 가장 안전하고 자연스럽다고 알고 있습니다, 선배. 그렇게 하면 마력회로에 지장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임의로는 어렵다. 외부 수단을 사용해서 마력의 흐름만 비틀어도 마력회로에 심대한 타격을 입을 테니. 더 나아가 마력의 성질에 손을 대면 열에 여덟은 죽겠지.”
“나머지 두 명은 장애를 겪을 거고.”
마력에 대한 여러 상식은 유니아와 카인도 아주 자세히 알고 있다. 마력으로 신체적 변화의 영역까지 넘봤다가는 즉사할 수도 있다.
마력의 통로인 마력 회로와 마력의 저장고인 심장은 아주 섬세한 기관이다.
하지만.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 베르덴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선배의 설명만 들어 보면 목숨을 걸어도 모자랄 것 같은데. 우리가 어떻게 하면 돼?”
“내가 직접 부여한 마법진이 보조할 테니 걱정할 건 없다.”
“엥? 그게 전부야?”
“그게 너희를 택한 이유지.”
유니아와 카인의 마력 조작 능력은 마력 제어에 닿아 있고, 어렸을 때부터 오스가르에게 워 메이지의 훈련법을 익힌 신체는 강건하다.
무엇보다도 타고난 마법적 재능은 초월자들의 반열이다.
유니아는 태어나자마자 마력을 깨우친 마법사, 그 한계 위계는 8위계.
카인은 5살에 마법사가 되자마자 3위계에 도달한 마법사, 그 한계 위계는 7위계.
녀석들만큼이나 대마력을 체득하는 데 적합한 인재는 아마 없으리라.
“일단 대마력을 발현하면 어떤 마법적 현상이 발생하는지 시범부터 보여 주마.”
베르덴이 천천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한순간이었다.
이마에 핏대가 돋았다. 동시에 베르덴의 몸에서 마력이 폭발하듯 터지며 언덕에 얕게 쌓여 있던 눈이 멀리까지 밀려났다.
손으로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유형화된 마력에 두 사람이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유니아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마력이…… 변했어?”
베르덴의 마력회로 밖으로 ‘아주 선명한 마력’이 넘실거렸다. 그 테두리는 남색에 가까웠고, 그 내부는 본래의 것처럼 푸른색이었다.
“이게 대마력이다. 내 방식대로 마력의 밀도를 극한 이상으로 높인 결과물이지. 대마력에도 단계가 있어서, 지금 내 수준까지 도달하려면 상당한 마력이 필요하지만 너희에겐 문제없을 거다.”
유니아와 카인은 벽안 소유자다.
베르덴의 무한과 감히 비교할 수는 없을지언정 그들도 다른 마법사보다 방대한 마력을 타고났음을 푸른 눈동자가 증명한다.
“와아.”
유니아가 마법적 감각을 끌어올려서 대마력을 자세히 감지했다. 어찌나 밀도가 높은지 그 안쪽을 엿볼 수가 없었다.
“마력이라고 하기에는 뭐랄까. 심하게 무거운 것 같은데. 선배, 이 마력으로 마법 쓸 수 있어? 아니면 그냥 신체를 적응시키는 용도가 전부야? 대마력에 적응하면 뭐가 바뀌는데?”
“선배는 이미 대마력의 적응을 마친 겁니까?”
질문이 쏟아졌다.
첫째는 대마력을 일반 마력처럼 사용할 수 있는가.
둘째는 대마력에 적응하면 어떻게 되는가.
셋째는 베르덴은 대마력에 적응했는가.
베르덴은 카인의 의문에 먼저 답했다.
“아니, 나는 대마력에 적응할 수 없다.”
“어째…… 아, 초월자라서.”
그렇다.
초월자의 신체가 가진 항상성은 갑작스러운 변화를 배척한다.
베르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마력 밀도를 높인 상태를 유지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그는 <아케인>을 통해 마력의 밀도를 필요할 때마다 극성으로 끌어올려 사용해 왔으므로.
‘내 신체는 <아케인>에 완전히 적응했다. 기술의 차이가 크니 <아케인> 대신 대마력을 사용해서 얻을 이득도 없고.’
이렇듯 대마력은 베르덴이 아니라 에온을 위한 마력 운용법이다.
‘항상성이 파괴된다면 모르겠지만.’
너무도 극단적인 상황이라 굳이 가정해서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직접 경험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영역이었기에.
베르덴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대마력은 특정 고유 마법들을 시전하기 위한 마력으로 쓸 수 있다. 또한 대마력은 단계마다 경지는 달라도, 근본적으로는 개인이 아닌 공통의 성격을 띠지.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했나?”
“음, 그러니까.”
유니아가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대마력을 체득한 마법사는 똑같은 고유 마법을 다룰 수 있다는 거네? 마치 하나의 계파처럼…… 어? 잠깐만.”
그녀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거 아케나드 마도국의 <아케인>하고 비슷한 것 같은데?”
무서운 직감이다.
유니아가 지적한 대로 대마력의 기원은 마도왕의 마력 운용법에서 일부 기인한다. 그러나 원리와 운용 방식에서는 겹치는 부분이 사실상 없다.
특정 혈통과 불특정 집단.
초대 마도왕과 베르덴의 목적이 완전하게 다르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부분이 없지는 않지. 그러나 대마력은 혈통 같은 것에 얽매이지 않고 에온에 소속된 마법사 전원에게 전파될 거다.”
베르덴이 다가와 두 사람의 왼팔과 오른팔을 잡아 끌었다.
“그리고 대마력을 체득한 에온의 마법사는 내가 창안한 고유 마법들을 배우게 될 거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에온만을 위해 만든. 너희들이 그 첫 번째다.”
베르덴이 허공에 팔을 뻗어 섬세하게 마력을 조각했다.
“마법진 이식을 시작하지.”
베르덴의 전신에 새겨진 것과 다른, 이자벨라의 등에 새겨진 것과 다른…… 세 번째 형태의 역천의 마법진이 현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