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0화 여섯 번째 (3)
역시 녹록하지 않다.
세계 회의에서 전반적인 틀은 잡았지만 심도 있게 세부 내용을 의논하기 시작하니 의견 충돌이 상당히 잦았다.
특히 해양 마석 광산의 추가 개발안 및 마석 조약 건이 그러했다.
하긴 해당 기술에 특화된 10대 마탑이 중심이고, 방향성에 따라서 결과적인 손익 차가 크니 여러모로 말이 많아질 수밖에.
메드란트가 오른쪽 눈가에 새겨진 깊은 흉터를 가볍게 쓸었다.
‘마탑주로서는 구차하게 굴어서라도 돈 몇 푼 더 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권 다툼에 끼어들 것 없다고 언질을 받았기에 적당히 협의에 응했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에온의 것만 챙긴 것이다.
베르덴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깟 이득이 아니라 세계의 결속이므로.
그렇기에 메드란트는 스스로 회의 참여자가 아닌 중재자라는 마음으로 회의에 임했다.
다만.
이와 별개로 그는 만족스러운 여유를 느꼈다.
‘풍족하다는 게 이런 기분이었나.’
다종다양의 마법 연구를 진행하느라 돈이 필요한 아티슨 마탑과 달리, 오스테아 마탑은 순수하게 자금 부족으로 연일 허덕였다.
돈은 돈을 부르는 법.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자해 더 천문학적인 이득을 벌어들이는 10대 마탑의 방식에서 오스테아 마탑은 가장 뒤떨어졌다.
아무리 고대와 관련된 마법적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술과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해도 큰돈이 되는 사업은 따로 있다.
그런데 에온이 배경이 되어 주니 오스테아 마탑은 옛날에는 감히 생각도 하지 못했던 사치스러운 체면을 차릴 수 있었다.
메드란트가 소사이어티의 창설자 중 한 명이자 에온의 간부라는 사실이 세계 회의를 통해 만천하에 알려진 후…….
이러한 막대한 자금줄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오스테아 마탑의 마법사들을 설득하는 데 큰 비중을 차지했다.
만약 일이 조금이라도 잘못 풀렸다면, 오스테아 마탑주 자리에서 메드란트를 당장 축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으리라.
‘너무 잘 풀려서 문제긴 하지만.’
주변에 둘러앉은 마탑주들을 보아라.
평소 최하위 마탑이라고 은근히 무시하던 시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오히려 호의를 보이는 등 잘 보이려는 듯한 태도가 노골적이다.
화산섬의 마탑주의 눈웃음이 심히 부담스러울 지경이다.
어쨌든.
히아레마르 내해 탐사, 마석 광산 개발안, 마석 조약 협정은 이미 끝났다. 방금 막 대륙 무역 협정도 정리되었다.
‘남은 주제는 마경 정벌을 위한 탐색뿐.’
일명 세계 회의 뒷정리 회의가 진행된 지 벌써 십수 일이 지났다.
오늘 오전엔 마석 조약 협정을 마쳤으니 오후엔 마경 탐색이 진행될 예정이다. 아마 마경 탐색은 대략 이틀 정도 걸릴 터.
몇몇 세력과 다르게 메드란트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주제에 참석한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 수면은 취했어도 정신적으로 피곤함이 몰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메드란트는 깨끗한 물로 마른 목을 축이고 있자 한쪽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뭘 쳐다보는 건가, 북부 인간.”
“네놈 깃털이 술에 들어갔다.”
“……? 그게 뭐.”
“그걸 모르니까 수인이지.”
인간과 수인은 자라나는 환경 이전에 태생부터가 다르다. 깃털이 술에 들어갔으니 더럽다, 이런 당연할 법한 생각도 당연하지 않다.
날개 달린 수인───익수인(飛獸人)에게 깃털은 깨끗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깃털의 청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익수인의 습관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북부인으로서 기름으로 떡진 머리카락쯤은 신경 안 써도 몸에 수북이 난 털들이 술잔에 들어가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의 관점에서 익수인의 깃털은 몸에 난 털이나 다름없었다.
북부인과 익수인이 서로를 응시했다.
국경이 맞닿은 프로하스와 수인 대부족은 사이가 좋지 않다. 실제로 대륙 무역 협정에서 둘이 갈등을 빚은 시간이 거의 3할이었다.
‘프로하스의 대전사장과 비왕(飛王). 지적 능력은 보기보다 우수한 편이긴 하나, 역시 겉보기처럼 거친 작자들답군.’
날뛰기라도 하면 골치 아프겠지만 분위기를 보니 거기까지는 가지 않을 것 같았다. 둘은 그냥 상대방을 병신 보듯 할 뿐이었다.
루아스교의 그레고르반은 다툼이 일어나면 즉각 중재할 생각으로 차만 홀짝거렸다.
루아스교에서는 성녀 대신에 삼정의 추기경이, 대부족에서는 수왕 대신에 비왕이 참석한 것이 새삼 다행이었다.
또 세계 회의에서처럼 충돌한다면 이번에는 말릴 초월자는 여기에 없다.
“성녀와 수왕께서 이 자리에 직접 오지 않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두 분이 또 부딪치셨다면, 제가 말릴 방법은 전혀 없었을 테니까요.”
생각이 실제로 들려오길래 메드란트가 고개를 돌렸다.
이데라트 연맹장, 테리웬이 그 인상 좋은 얼굴로 도수가 낮은 화이트 와인을 조금씩 음미하며, 회의로 지친 심신을 달래고 있었다.
“후우…… 드디어 세계 회의 참석자 중 37인이나 참여한 대륙 무역 협정이 마무리되었군요. 생각보다 화합이 잘 이루어져서 다행입니다. 마경 정벌도 이렇게 잘 끝나야 할 텐데요.”
“마석 조약과 마석 광산 개발안 때처럼 서로 며칠 동안 언성을 높이는 일만 적었으면 좋겠군. 귀가 다 아프니.”
“허허허, 아무래도 적지 않겠습니까. 마경 정벌을 주도하는 건 아르나크 제국과 에온이니까요. 게다가 드워프와 엘프는 각각 제국과 에온을 각각 지원하고 있고요. 이렇게 중심이 잘 잡혀 있으면 흔들림이 적은 법이지요.”
테리웬이 껄껄 웃는다.
메드란트는 조용히 잔을 비우며 테리웬의 모습을 슬쩍 관찰했다. 오늘 오전 회의를 재개하기 전에 그는 통신 장치로 새로운 정보를 입수했다.
‘용검과 주검의 영광과 관련해 레논 버나드에겐 수상한 정황이 포착됐으나, 테리웬은 아예 무관한 듯 깨끗하다…… 고.’
어디서 얻은 정보인지는 모르지만 베르덴이 한 말이니 신빙성은 충분하다. 그와 더해서 이제까지 테리웬은 모든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첫 회의에서 히아레마르 내해 탐색 시기를 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약 26일 뒤에 시작된다던 금환일식까지 오늘부로 8일 남았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에온과 모험가 길드 외에는 없다.
일단은.
모험가 길드에선 조기 탐색을 하는 게 어떠냐고 선뜻 생각을 내놓았다. 정확히 금환일식 직전, 또는 직후에 말이다.
의견이 분분했다.
너무 이르다는 말들과,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빨리 시작하자는 말들이 오갔다. 테리웬은 그 둘 중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고집하지 않았다.
‘……처음엔 부정적인 표정을 드러내다가, 찬성 의견을 경청한 후에 찬성 측으로 기울었다. 그러고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것 같다며 반대 의사를 적당히 보이다가 결국 찬성에 1표.’
그야말로 망설임의 표본이었다.
찬성과 반대, 둘 다 납득할 부분이 있다는 사람의 반응이었다.
이상하지 않다.
애초에 평화를 사랑하는 테리웬의 성정은 그리 모질지가 못한 편이었다. 그가 단호해질 때는 다종족 화합 관련 사안 외에는 없었다.
그런데 왜일까.
“그럼 맛있는 식사나 하러 가실까요?”
“그러지.”
메드란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일어나며 테리웬의 뒤를 따라나섰다.
이데라트 연맹장.
테리웬.
평화주의자.
모든 종족의 화합을 원하는 자.
너무도 흠잡을 점이 없다는 점이 도리어 흠으로 느껴진다. 마법사답지 않지만 어떤 근거도 없는 그런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과연.
‘과연 테리웬은, 금환일식이 언제쯤 일어나는지 알고 있었을까? 정말로 레논 버나드의 기행과 완전히 무관할까?’
베르덴과 흑해가 까마득한 심해에서 얻어 온 그 정보를, 용검 마그라스의 소재가 드러나는 그 명확한 시기를.
메드라트 케덴은 아주 조금, 아주 조금 테리웬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 * *
대륙은 오전과 오후가 지나서 밤이 깊고 새벽이 시작되는 시간.
엑소디움의 최상층에 도달한 베르덴은 방주의 지도자의 공간에 발을 디뎠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감각을 곤두세웠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자 한 윗분의 모습이 벽안에 비쳤다. 와인 특유의 깊고 달짝지근한 향이 베르덴의 후각을 자극했다.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적당히 발걸음을 옮기며 다가갔다.
“어떤 자리를 고르겠나.”
근엄한 음성.
고풍스러운 직사각형 테이블은 도합 열 개의 의자로 둘러싸였다. 윗분은 당연하다는 듯이 상석에 앉아 있었다.
베르덴은 그의 좌우가 아닌 바로 맞은편에 있는 유일한 의자에 몸을 실었다.
“흠, 역시 다르군.”
윗분은 빈 유리잔에 자신의 것과 동일한 와인을 따르고는 가볍게 손짓했다. 테이블을 쭈욱 가로지른 잔이 베르덴 앞에 정지했다.
안에 담긴 와인은 고요한 호수처럼 어떤 미동도 없었다.
“베르덴입니다.”
베르덴이 자신을 소개했다. 렌 발하그 장로와 쉐오른 장로가 무궁한 경의와 충정을 바치는 방주의 지도자를 대하는 태도로.
윗분이 고개를 끄떡였다.
“방주를 이끄는 자다.”
“여기까지 왔으니 최소한 얼굴은 뵐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베르덴이 통찰할 수 없는 그림자가 윗분의 모습을 일부 가리고 있다. 그의 목부터 머리까지 어둠으로 뒤덮였다.
윤곽만 겨우 보이는 정도.
눈으로 확실히 식별할 수 있는 건, 경지를 가늠할 수 없는 사내의 초월적인 육체와 그가 한 손에 들고 있는 와인뿐이었다.
“현 방주 내에서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여덟 명뿐이다. 물론 이미 여섯 번째 선장으로 확정된 네게 정체를 밝히지 못할 것도 없지만, 그 전에 약속을 받을 필요가 있다.”
“발설하지 않겠다는 약속 말입니까.”
“넌 방주의 정통 입단 절차를 통과한 아이들과 다르니까. 비로소 약속해야 의미가 있다.”
베르덴이 방주와 접촉하고 그와 연을 갖게 된 건 전혀 방주의 의도가 아니었다.
방주는 베르덴을 찾지 못했다.
베르덴이 방주를 찾아내게 만들었다.
그것이 베르덴과 기존 방주의 구성원과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아니, 차이점이라고 하기보다는 차별점이 맞았다.
“애셔. 처음 들었을 때는 울림이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했지.”
윗분이 와인을 약간 머금었다. 창백한 보랏빛을 머금은 붉은 액체가 크게 기울어졌다가 다시 수평을 되찾았다.
“글러트니의 박사는 방주에서 정보만 입수했을 뿐 실물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세계의 주시자의 능력과는 별개로 추적 시간이 십 년 단위로 길어졌지. 우리는 박사의 명확한 인상착의를 알아내기 위해서 의심 지역에 정보망을 펼쳤으나 별 소득은 없었고. 그런데 그런 박사를, 정체 모를 어린 마법사가 처단했다며, 어느 날 리비안트 공국에서 소식이 들려오더군.”
“어리지는 않았습니다.”
“늙음과 젊음은 상대적이지. 내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는 발리온에게 들었을 터. 쉐오른 장로라고 해도 내게는 어리다. 언제나.”
확실히 300세가 넘은 나이는 어딜 봐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물론 ‘당신’과 초대 마도왕 이외에도 키론다르와 초대 네크로맨서를 마주했던 베르덴에겐 크게 감흥이 없는 숫자였다.
하다못해 알파의 기동 시간도 500년이 넘어가는 데다가, 그하룬과 제라딘이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도 거의 3세기에 육박한다.
윗분이 말을 이었다.
“방주가 섬멸해야 하는 대상을 개인이 처리한 건 단순하기 짝이 없는 행운의 유무인가.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 철회했다. 세계의 주시자가 너를 주시하지 못했으니.”
아에로돈의 눈으로 보지 못했다?
“제가 세상의 눈에 비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여기 최상층처럼.”
“방주의 모든 구성원을 선별하는 주시자가 어떤 판단을 내릴 수도 없다, 그것이 네가 특별한 이유다. 그래서 무슨 비밀이 있는 건지. 시험해 보기로 했지. 레이라의 시련 개입과 글러트니의 토벌로 최소한의 평가를 내린 뒤, 집단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너에게 고대 시련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결과적으로 베르덴은 최소한의 조건만 지키는 대신 방주에 정식으로 들어가지 않고도 고대 시련을 받을 수 있었다.
마도왕의 무덤.
이는 베르덴에게 관리자와 알파, 더 나아가 베타 등과의 인연이 생긴 계기였다.
“솔직히 말해서 시련을 앞에 두고 끝내 포기할 줄 알았다. 너라면 스스로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여겼지. 기회는 나중에라도 있으니 훗날을 도모하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니…… 그런데 넌 오히려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더군. 그리고 다른 후보들처럼 실패하지 않고 극복하기까지.”
윗분이 천천히 빙글빙글 돌리고 있던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초대 마도왕의 무덤을 정복한 너는 <아케인>과 초대 마도왕의 로브를 손에 넣었다. 그뿐만 아니라 직전과 다른 경지까지도. 그러니 묻겠다.”
정적이 공간을 휘감았다.
“너는 초대 마도왕의 후손인가?”
“아닙니다. 먼저 질문을 하셨으니 이번에는 제가 묻겠습니다.”
베르덴은 즉답하는 걸로도 모자라 역으로 문답의 주체를 바꾸었다. 상대방에게 궁금한 점이 많은 것은 피차 마찬가지였다.
“제가 극복한 고대 시련은, 정말로 초대 마도왕의 ‘무덤’이 맞습니까?”
“…….”
베르덴의 직설적인 화법에 윗분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은근히 떠볼 때가 아니다. 베르덴은 확실한 정보를 원했다.
초대 마도왕의 비교적 최근 단서를 쥔 존재가 바로 눈앞에 있다.
그때, 윗분이 말했다.
“죽어 묻히지 않았는데 어찌 무덤일까.”
무덤의 명칭이 부정되었다.
두 사람은 자신에게 날아온 질문에 그저 진실로 답했다.
“첫만남이기도 하기에 간단한 대화만 나누려고 했는데. 과연 베르덴, 넌 언제나 내 예상을 빗나가게 만드는군. 좋다. 서로 알아내고 싶은 것은 많고, 각자 가진 비밀은 많으니.”
윗분이 나지막이 말했다.
“누구의 비밀이 더 많은지 겨뤄 보도록 하지. 다만 그 전에 내 정체를 밝히는 것이 순서일 터. 베르덴, 내가 누군지 알고 있나?”
“예상은 하고 있습니다. 외부에 정체를 발설하지 않겠다고 미리 약속드리죠.”
300년이라는 시간.
압도적인 무투계 초월자.
인류만을 이끌려는 자.
공식 역사에서 이런 명확한 특징이 겹친 존재는 단 한 명밖에 없다. 서대륙에서 침묵의 사막, 중앙 대륙, 마경을 지나 동대륙에 도착한…… 이 세계를 횡단한 자.
“모험가 길드의 창설자.”
윗분의 신분을 감추고 있던 그림자가 서서히 걷혔다. 아카데미와 모험가 길드에 세워진 동상과 똑같이 생긴 인물상이 드러났다.
“다시 소개하지.”
최초의 모험가.
“현 방주의 지도자, ‘루가르트’다.”
당시 수인, 엘프, 드워프를 압도해 이종족 전쟁을 끝낸 초월자. 3세기 전의 ‘대륙 최강자’가 베르덴에게 진명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