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2화 여섯 번째 (5)
섭리자가 말했다.
───지금 시점에서 깨어난 걸 보니, 베르덴이 엑소디움의 정점에 도달한 건가. 현 방주의 지도자가 여섯 번째 선장으로 정할 거라고 예상은 했으나, 역시 시기가 빠르군.
[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구원’ 계획이 일부 틀어졌다는 건 알겠네.]
감마가 팔짱을 끼며 삐딱하게 섰다. 회색의 금속 몸은 생체 기능만 없을 뿐이지 실루엣만큼은 장신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전혀 골렘답지 않게 달변가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베르덴이 누구야?]
───잿빛 머리카락, 벽안, 20대 후반의 청년, 마법계 초월자, 남다른 외모 등 특징이 분명하니 당장 알아볼 수 있을 거다.
[그 나이에 마법계 초월자라고? 운명이 또 장난을 쳤나 봐? 그래도 여기 아크에 있는 걸 보니 ‘당신’의 사도는 아닌가.]
파앗!
감마가 마력을 조작해 아크 곳곳을 비추는 수십 개의 화면을 띄웠다. 마력의 빛이 이목구비가 없는 매끄러운 얼굴에 반사됐다.
[찾았다, 잿빛 머리.]
루가르트와 함께 엑소디움 아래로 내려가는 낯선 사내를 포착했다. 그의 마력을 분석하던 감마가 순간 멈칫했다.
[……뭐야, 저 마력은? 스캔으로만 보면 창조주와 분간할 수 없잖아. 계측할 수 없다니. 무슨 동력원을 삼킨 것도 아니고. 잠깐만. 혹시 창조주의 후계자라도 되는 거야?]
───특이점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섭리자는 마치 역사를 가르치듯 베르덴과 연관된 사건들을 요약해 설명했다.
마탑의 동력원.
운명 파괴.
베르덴을 흥미롭게 관찰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감마가 다른 화면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격한 감정을 드러냈다.
[어?!]
감마가 화면을 붙잡았다.
[알파와 베타……? 왜 인공 골렘들이 여기에 있는 거야? 아니, 왜 기동하고 있지? ‘프로토타입’은 전부 ‘폐기’한 거 아니었어?]
───폐기했다고 하신 적은 없을 텐데.
[감마 이전의 인공 골렘들은 제 역할을 마쳤다고 하셨잖아. 그게 그거지! 하, 이럴 줄 알았어. 창조주도 정이 많아서 결정적일 때는 마음이 약해지신다니까. 우린 그걸 보완해야 하는 거고. 데우스 위덴, 너처럼 창조주가 의지를 내비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게 아니라. 아무튼. 이렇게 되면 최초의 마탑에 있는 오메가도 기동하고 있을 수도 있겠네?]
감마에게서 나타난 두 개의 푸른 눈이, 실눈처럼 길고 가늘게 열렸다.
[출격 허가만 해. 모조리 폐기하고 올 테니까.]
───네게 주어진 역할은 ‘아크의 보호’다. 네 존재가 드러나선 안 된다는 건 잘 알 테지. 그리고 그들은 너의 형제나 다름없다.
[뭐? 형제?]
감마가 깔깔 웃었다.
[유인원과 사람을 왜 하나로 묶니? 잊었어? 나는 창주조가 설계한 ‘완성체’야. 녀석들처럼 말도 제대로 못 하는 허약한 미완성체가 아니라. 게다가 창조주의 의지조차 모르는 베르덴을 따른다면서? 혹시 모를 변수를 최대한 약화하려면 손을 쓰는 게 옳잖아. 내 말이 틀렸어?]
감마의 지적은 정론이었다.
계획이 순조롭게 흘러가길 바랐다면 변수가 힘을 갖도록 하면 안 됐다. 이미 조치하기 늦었다고 해도 방치는 그릇된 판단이었다.
그녀에 비해 알파와 베타는 형편없었지만, 그들 또한 창조주의 마법적 능력으로 생명을 얻은 지고한 피조물이었다.
잠재력을 얕봐선 안 된다.
[창조주가 잠들어 있다고 해도 그 정도 개입은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그게 싫으면 진즉 변수를 포섭해 통제했어야지. 뭐, 수동적으로 굴기만 하면 창조주가 만족할 것 같아?]
───베르덴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섣불리 손을 대는 것은 하책이라고 판단했지. 누르면 누를수록 그 이상으로 반발하는 성격이니.
감마가 뭐라고 궁시렁거리든 섭리자의 표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최후의 저항자께서는 이미 깨어나 세상을 순행하고 계신다. 육체는 아직 잠들어 계시나 머지않아 온전히 기상하시겠지.
[창조주가? 그것부터 말했어야지! 괜히 쓸데없이 추측하는 데 시간만 낭비했잖아.]
감마가 조각상 같은 우아한 자태로 손등으로 제 턱을 받쳤다.
[창조주가 이걸 지켜본다는 건 베르덴의 존재를 인정하겠다는 뜻…… 하기야 알파와 베타처럼 스캔 기능에만 의존했다면 나도 창조주라고 착각할 마력을 갖고 있으니까, 가치가 대단히 크기는 해. 베르덴이 죽으면 그 안에 깃든 동력원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말이야. 그럼 당분간 어쩔 거야?]
감마가 물었다.
[방관? 아니면 조력?]
───운명이 파괴됐고, 운명의 실마저 무참하게 끊어졌다. 곧 ‘당신’의 추종자들이 대대적으로 움직일 거다. 최후의 저항자께서는 아직 직접적으로 말씀을 하진 않으셨지만, 결국 그 무대에서 베르덴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판가름을 내리시겠지.
섭리자가 단언했다.
───그러니 일단 후자로 방향을 잡을 것이다.
[일단 사도부터 처리한다? 좋네. 잘하면 우리가 뿌린 씨앗들의 전력도 최대한 보존할 수 있을 테고. 하지만 조력할 거면 제대로 하지?]
───듣고 있다.
[이것 봐.]
감마가 사이좋게 같이 다니는 알파와 베타를 가리켰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기술이 너무 뒤떨어졌잖아. 이런 걸로 대체 뭘 할 수 있겠어? 안 돼. 인공 골렘의 완성체로서 이건 용납할 수 없어. 쯧! 아무리 프로토타입이라고 해도 정도가 있지.]
감마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도 내 이전 단계의 골렘이니 적당한 기술을 주면 알아서 발전할 터. 보아하니 보관소에서 새로운 선장이 계승할 물건을 찾으러 가는 것 같은데, 거기에 살짝 끼워 넣자. 창조주와 비슷한 안목이 있다면 그 가치를 알아보고 가져가겠지.]
───변수를 약화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자칫하다 네가 발각되면 그 또한 변수다.
[설마 내가 발각되겠니? 그리고 변수 약화는 창조주의 정신이 눈을 떴다는 걸 인지하기 전 판단이잖아.]
감마가 단언했다.
[동력원에서 다시 깨어난 창조주에게 ‘당신’을 제외한 모든 변수는 무의미해. 그때는 실낱같이 남은 정(情)도 버리실 테니까. 그러니 이런 기술 하나는 넘겨도 문제없어.]
초대 마도왕을 향한 믿음과 신뢰는 감마도 어느 인공 골렘 못지않았다. 섭리자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긋이 응시했다.
───역시 신경 쓰이나. 형제들이.
[뭐어? 아까부터 형제, 형제. 고작 수백 년 사이에 헛소리가 늘었네? 나는 프로토타입을 형제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니까?]
감마가 휙 고개를 돌렸다.
[간단히 파괴되면 인공 골렘으로서 내 체면에도 손상이 가니까 그런 거지. 흥.]
* * *
후우우우웅.
엑소디움의 최상층에서 지하로 향하는 승강기에 탑승했다.
조용한 데다가 꽤 빠르다.
아무리 못해도 3세기 전에 완성됐을 엑소디움의 승강기는, 대륙의 최첨단 마력 승강기보다 수준이 높았다.
‘이게 방주에서 손을 대지 않은 원형이라니. 초대 마도왕의 기술력은 대체 어디까지 닿아 있는 거지?’
사소한 기술 하나하나가 마법의 시대를 가볍게 능가한다.
골렘 기술처럼 재현 자체가 불가능한 게 아니라, 기술의 종류는 같되 그보다 몇 발짝 앞섰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무슨 마법 건축 초월자라고 해도 웃음이 나오지 않을 정도다.
마도국의 센트럼처럼 아크와 엑소디움도 순수한 마법만으로 구축했다면…… 한 번쯤은 그 마법의 원리 및 구조가 어떤지 보고 싶었다.
벌컥벌컥.
루가르트는 와인을 병째로 들이켰다. 아까까지만 해도 와인잔을 이용해서 품위 있게 맛과 향을 즐기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스윽.
베르덴은 루가르트가 선뜻 건넨 와인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도 마치 싸구려 음료처럼 가치를 헤아리기 어려운 와인을 입에 털어 넣었다.
방금 마셨던 와인보다 한층 더 깊은 맛이 감각을 자극했다.
“어떻지?”
“이런 와인을 마셔 보는 것도 처음이지만, 와인을 병째로 마시는 것도 처음입니다.”
“비싼 와인이라고 해서 한껏 무게를 잡으며 즐길 이유는 없다. 내가 처음으로 와인을 접했을 때 이런 식으로 마셨었지……. 소꿉친구가 부모님 몰래 가져온 와인이었는데. 이게 맛만 본 거냐고, 소꿉친구에게 얼마나 맞았었는지.”
루가르트는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며 즐거운 듯 웃었다.
뭐랄까.
방주의 지도자와 최초의 모험가라는 이명을 떼고 보니 한적한 시골 술집의 구석에서나 볼 법한 사내로 느껴졌다.
“내가 지나온 세월과 경험만큼 관록이 쌓이면서 어느새 말과 행동에 위엄이 실리더군. 한데 원래 나는 제법 쾌활한 편이었다. 농담도 할 줄 알고, 장난도 칠 줄 알고, 사랑도 할 줄 알지. 아주 자유롭게. 그야말로 이상적인 모험가처럼.”
“…….”
“초월자로서의 삶이, 인간으로서의 삶을 아득히 추월한 지 오래다. 이제는 그런 감정에 희미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타인과 함께 와인으로 병나발을 부니 그때의 감정이 조금은 되살아나는군. 이보다 좋은 안주는 아마 없을 테지.”
루가르트의 비극은 대륙의 역사에 고스란히 실려 있다. 과정은 역사서마다 좀 차이가 있었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루가르트의 동료는 드워프에게.
루가르트의 형제는 수인족에게.
루가르트의 연인은 엘프에게.
이종족 전쟁에서 루가르트는 소중한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많은 방주의 후보들이 시련에 도전했다. 그리고 극복하지 못한 많은 후보가 죽었지. 나의 시대에서도, 이 시대에서도.”
“…….”
“나의 슬픔만이 특별할 수는 없다.”
승강기가 멈췄다.
“도착했군.”
문이 개방되자마자 루가르트가 바깥으로 발을 내디뎠다.
잠시 그의 등을 바라봤다.
한 손에 와인병을 든 그는, 방주의 지도자가 아닌 그저 처량하게 술에 취해 버린 밤거리의 주정뱅이와 언뜻 비슷했다.
“…….”
베르덴은 루가르트의 이상이 무엇일지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 * *
방주의 보관소.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조직답게 수많은 무구와 보물이 공간을 채웠다. 번잡스러울 정도의 양인데도 보기 좋게 정렬되어 있어 구경하는 데 전혀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현 조율자가 손쓴 덕분이지. 나는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조율자가 보기에는 마치 쓰레기장 같았던 모양이더군. 예전에 보관소를 직접 정돈하고 싶다고 나를 찾아왔을 정도니.”
균형의 조율자───키퍼, 아세트로 올딘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그가 머무는 권역 또한 깔끔하기 짝이 없었으므로.
베르덴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보관된 물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루가르트가 피식 웃었다.
“느긋하게 걸으며 문답을 이어 나가려고 했는데, 네 그 반짝거리는 눈을 보니 렐릭을 고르는 것부터 먼저 해야겠군.”
“아무거나 골라도 됩니까?”
“그래. 초대 선장의 특권이지. 너라면 이상한 걸 선택하진 않을 테고.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신중하게 고르도록.”
보관소 구석으로 향한 루가르트는 대충 근처에 앉아 병나발을 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어쨌든.
베르덴은 통찰력을 발휘하며 보관된 물건들의 내력을 가늠했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아티팩트가 있었고, 그 사이엔 고대 아티팩트로 추정되는 물건이 총 두 개가 잠들어 있었다.
‘음, 소유주한테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은데.’
괜히 지금까지 방주에서 반출하지 않은 이유가 있겠지. 베르덴이 해야 할 일이 여기서 가장 좋은 걸 찾아내는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분이 흘렀다.
“……?”
베르덴이 보관소를 거의 한 바퀴 돌아볼 때즘 웬 입방체가 눈에 띄었다.
위험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어떤 기능이 있는지 이리저리 어루만지자, 곧 입방체가 개방되며 기이한 마력의 조직도가 허공에 현현했다.
‘이건…… 설계도?’
무슨 설계도인지는 당장 알 수 없었다.
다시 입방체를 만지자 마력이 사라지며 입방체가 원래 형태로 돌아왔다. 베르덴은 제자리에서 서서 그 큐브를 면밀히 관찰했다.
“물어볼 게 있습니다.”
멀리서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혹시 보관소에 감시 체계가 따로 있습니까?”
베르덴이 특정 지점을 향해 고개를 향했다.
* * *
저기 화면 너머에 있는 베르덴이 똑바로 감마를 쳐다봤다. 감마의 존재를 알아챈 건 아니었지만…… 문제는 감시를 들켰다는 점이다.
감마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발각, 됐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화면 속에서 베르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와 방주의 지도자가 보관소를 순식간에 벗어났다.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다.
왜 들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큰일이었다.
숨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