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3화 여섯 번째 (6)
이해력이란 사물을 구별하고 해석하는 힘.
베르덴은 마법의 요체에서 찰나의 분석을 통해 원리를 파악한다.
기억 없이도 다른 사람의 마도 일부를 모방하고. 관리자와의 마법전에서 <아케인>을 재현한 기반이 베르덴의 재능이었다.
어떤 마법이든 핵심을 한순간이라도 포착하면, 그 마법은 사라지지 않는 이상 베르덴의 이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주에서 운석을 불러들이는 초대 마도왕의 고유 영창 마법이 그러했듯이.
베르덴의 마법적 해석이 온전히 발휘되지 않도록 하려면, 반젤리스의 마도처럼 본질을 꿰뚫지 못하게 막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엑소디움의 보관소에 있던 입방체를 건든 자는, 그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마치 유리를 산산조각 내어 사막에 흩뿌린 듯, 그는 핵심을 조각내고 흩어 감추는 방식으로 흔적을 은폐했다.
확실히 교묘했다.
다만 해법은 아니었다.
유리를 잘게 부숴 사막의 표면에 흩뿌리는 것은 오답이었다. 시간이라도 벌려고 했다면 유리 자체를 사막 아래에 깊숙이 숨겼어야 했다.
베르덴은 사막이 감각 아래로 들어오자마자 지면 위 모든 유리 조각의 형태를 이해했고, 부서지기 전의 유리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완성했다.
핵심을 지각한 순간.
해당 입방체에 원거리에서 간섭한 마법의 구조를 간파하자 그 흔적이 보였다. 특정 방향에서 누군가가 입방체를 조작한 것이다.
보관소 내부에서.
심지어 바로 최근에.
“혹시 보관소에 감시 체계가 따로 있습니까?”
베르덴이 휙 고개를 돌렸다.
틀림없다.
분명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보관소 벽 한쪽에서 마법이 시전됐다. 별다른 시선은 감지되지 않았지만 정황상 누군가가 보관소를…… 아니,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감시 체계라니. 무슨 뜻이지?”
루가르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베르덴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보관소의 벽을 계속 응시했다.
착각이 아니라고 확신했기에.
그야말로 찰나였다.
……!
한순간 마법적 감각이 번쩍이더니 나무뿌리처럼 엑소디움 전체에 뻗어 있는 마력의 길이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상공에서 벼락이 고요하게 명멸하듯이 눈 깜짝할 틈이었다.
그러나…… 정체 모를 마력의 흐름이 결국 어디로 이어지는지를 파악하기엔, 베르덴에게 부족함이 없는 시간이었다.
“아크에 외인(外人)이 있는 것 같습니다.”
“뭐?”
“안내하겠습니다.”
지면에서 약간 떠오른 베르덴이 곧바로 보관소를 벗어났다. 루가르트는 이유를 묻지 않고 베르덴과 속도를 맞추었다.
폐쇄된 문에 가로막힐 때마다 그가 손수 통로를 열어 주었다.
지하에서, 더 깊은 지하로.
하늘섬의 밑바닥에 가까워지자 사람들의 기척이 매우 희미해졌다. 두 사람은 은은한 푸른빛이 적당히 어둠을 밝히는 구역에 들어섰다.
“여기는 어떤 공간입니까?”
“아크의 마지막 관리실이다. 평소에는 단 하나의 관리실만 운용하고, 다른 네 개의 관리실은 사용하지 않고 있지. 이곳은 그중에서도 실질적인 기능이 가장 적어서 우선도가 떨어지는 관리실이다.”
관리실…….
베르덴은 손끝으로 벽을 짚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눈까지 감은 채 뭔가를 찾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루가르트가 와인을 크게 들이켰다.
‘그립군.’
어렸을 적 고향 근처의 어두운 동굴을 탐험했을 때가 떠올랐다.
눅눅한 공기, 고블린의 울음소리, 울퉁불퉁한 벽을 더듬거리는 감촉…… 그 흥분과 떨림이 모험가를 만들었다.
그때였다.
후웅.
베르덴이 다섯 손가락을 펼치고는 시계 방향으로 손목을 90도 비틀었다. 벽면에 맞닿은 피부와 마력이 마찰을 일으켰다.
그 벽 틈새에서 푸른빛이 일렁이더니 곧 숨겨진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크에 대해 내가 모르는 부분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걸 차기 선장을 통해 확인하게 될 줄이야.”
“앞장서겠습니다.”
터벅, 터벅.
베르덴과 루가르트가 다섯 번째 관리실에 감춰진 비밀스러운 방에 발을 디뎠다. 절대로 넓다고는 할 수 없는 그런 장소었다.
아무데나 서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것만으로도 방 전체가 훤히 보였다.
딱히 눈여겨볼 만한 것은 없었다.
비밀 공간 중심에 떡하니 설치된 ‘유선형 관’을 제외한다면.
“누군가 이곳에서 마법으로 입방체를 조작했고, 그와 더해서 보관소를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었다는 건가. 어떤 기척도 남기지 않고 감쪽같이 사라진 걸 보면 보통내기가 아니군.”
루가르트는 관을 두드려 보면서 감각을 예민하게 일깨웠다. 역시 반응은 없었다. 텅 빈 유선형 관처럼 이 방은 공허했다.
“네가 보기엔 어떻지?”
“추적을 지속하기엔 이미 늦은 것 같습니다.”
베르덴도 유일한 단서로 보이는 관을 조심스레 살폈다.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으니 어떤 용도인지 알 턱이 없었다.
겉보기에는 말이다.
‘마력이 미세하게 반응하고 있어.’
스윽──
유리를 닦듯 손바닥으로 관 아랫부분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쓸었다. 마력의 장막이 일렁이며 가려진 문자가 나타났다.
고대 문자.
알파에게 직접 배운 적이 있기에 해석은 어렵지 않았다.
‘개체명…… 감마.’
최초의 마탑 밑바닥에서 오메가가 언급했었던 그 개체명이다.
오메가, 알파, 베타, 감마.
전율이 일었다.
어째서 방주의 지도자인 루가르트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가.
단번에 이해됐다.
‘역시 아크에 있었나.’
초대 마도왕의 네 번째 인공 골렘이 아크에 있는 게 확인됐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순서상 알파와 베타 다음에 창조되었을 테니 어떤 기능을 갖추고 있을지 생각만으로는 예상할 수 없다.
베르덴은 소리 없이 다시 손바닥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을 훑었다. 마력의 장막이 재생성되며 감마의 이름이 은폐됐다.
지금 감마의 존재를 방주에 알리는 건 이르다고 판단한 것이다.
‘감마가 나를 피했으니까.’
그 이유를 알아내기 전까지는 조심스럽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 당장 감마를 쫓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녀석은 쭉 아크에 있을 테니까.
선장직에 오르면 감마를 찾을 기회는 몇 번이고 주어질 터였다.
그때, 느긋하게 방을 둘러보던 루가르트가 입을 열었다.
“아크에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있다면 아마 초대 마도왕과 깊게 연관된 존재겠지. 역시 그의 발자취를 쫓는 것은 내 역할이 아니었어. 그동안 몇 번이고 내 판단을 의심했는데…… 오늘 그 판단이 옳았음이 계속 증명되니 후련할 지경이야.”
그간의 고충을 털어 내듯 깊은 한숨이었다.
베르덴은 그런 루가르트의 사고방식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각자의 사상을 논하기에는 적합한 자리가 아니었기에 침묵했다.
“지금까지 내가 감지하지도 못했으니 수색해 봤자 의미는 없겠지. 외인이 있다고 알려지면 방주에서도 큰 소란이 발생할 테고. 이 건은 일단 너와 나만 알고 있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그럼 내가 질문할 차례군.”
엑소디움의 최상층에서 각자 한 번의 문답을 마친 이후…….
렐릭을 선택하러 지하로 온 베르덴은 보관소에 감시 체계가 따로 있냐고 물었었다. 그 또한 엄밀히 따지면 질문이긴 했다.
베르덴은 황당했지만 그러든 말든 루가르트는 말을 이었다.
“세계 회의가 열렸을 당시, 나 역시 가르간트에 있었다. 모든 인간종이 참석한다고 하기에 오랜만에 쉐오른 장로와 함께 대륙으로 향했지. 한데 그곳에서 기이한 존재를 마주했다. 네 근처에서.”
“근처에서……?”
“내가 ‘직접적으로’ 충돌했던 존재 중에서 가장 강한 자였다.”
루가르트가 낮게 속삭였다.
“황금빛 정십자가를 목에 단 거구의 노인. 너를 향한 살의가 보기 드물 정도로 짙던데. 혹시 그자를 알고 있나?”
“……!!”
광신자 노인.
허구의 공간 속에서 기예로 인해 치명상을 입을 뻔했던 순간과 금기 위반으로 세계수가 개입했던 광경이 뇌리를 스쳤다.
“음, 알고 있었나. 적이 누군지 인지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군.”
루가르트가 와인으로 또 입안을 적셨다. 아끼지 않고 마셔 댄 탓에 미처 만족하기도 전 벌써 와인병이 바닥을 보였다.
“아쉽게도 술이 떨어졌으니 이 문답은 여기까지 하지. 분위기도 어수선하고. 오늘 못한 대답은 다음에 듣겠다.”
루가르트가 선뜻 한발 물러섰다.
베르덴이 물었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궁금하지만 잠시 참겠다. 원래 방주의 지도자는 인내하는 자리니. 무엇보다 즉위식을 코앞에 둔 차기 선장을 곤란하게 만들 만큼, 나는 호기심을 우선하지 않는다.”
절제의 미덕.
이는 모험가와 마법사의 차이기도 했다.
“그래서 렐릭은 그걸로 정한 건가?”
“그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이것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베르덴이 손바닥보다 작은 회색 입방체를 들어 보였다.
“그 입방체는 내 기억에 2세기가 넘도록 보관돼 있던 아티팩트다. 명칭은 전해지지 않았고. 마력으로 자유롭게 패턴을 구현해 저장하거나 형태를 조율하는 등 마법이나 마법진의 설계 용도로 추측하는데, 워낙 다루기 까다로워서 여타 아티팩트처럼 마땅한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었지.”
루가르트가 뒷짐을 졌다.
“다른 사람이라면 무용할지라도 너에게는 가장 어울리는 렐릭이 되겠군. 아무래도 그 안에는 초대 마도왕이 남긴 비밀이 있는 듯하니.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네가 추구하는 이상에, 그리고 인류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겠다.”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방체를 아공간에 수납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돌아갈까. 아참, 그 입방체의 명칭을 달리 생각하지 않았다면 작명은 세계의 주시자에게 맡겨도 되겠나?”
“상관없습니다만. 이유가 있습니까?”
“이유야 있지.”
루가르트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 아이는 이름 짓는 걸 좋아하거든.”
* * *
알파와 베타는 허락을 받고 엑소디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방주의 본거지는 안전하기에 아드리안과 이자벨라와 동행하지는 않았다.
본래 안내자가 붙어야 하나, 차기 선장의 세력에 속한 녀석들은 방주 후보가 지켜야 할 규칙와 의무에 속박되지 않았다.
[마지막 동생. 어디?]
[아크에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그러나 감마에 대한 단서는 전무합니다.]
아직 베르덴에게 그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한 골렘 형제는 성채를 탐사했다. 아무도 듣지 못하게 대화를 나누며, 자신들을 신기하게 보는 방주의 일원들과 인사를 하면서 말이다.
알파가 베타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베타. 동생을 발견. 어떤 기분?]
베타는 언제나처럼 형을 머리에 인 채로 음성을 내었다.
[알파는 어떤 기분이었습니까?]
[이산가족 상봉. 행복.]
[저도 행복할 것 같습니다.]
오메가와 알파는 저마다 관리자가 곁에 있었지만 베타는 아니었다. 베타는 300 ~ 400년 동안 대수림에 홀로 방치되었다.
알파와 베르덴이 없었다면 베타는 다시 기동하지 못했으리라.
알파가 가족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처럼 베타도 그러했다.
새로운 동생…….
언젠가 베타는 막내를 마주한다면 뭘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간단했다. 알파가 베타를 보살피듯이 하면 어떤 문제도 없을 터였다.
[혹 감마도 외로워할지 모릅니다. 서둘러 찾아야 합니다.]
[인정. 그래도 성급함은 금물. 베르덴 폐하께서 찾아 주실 것. 우린 막내 동생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는 게 좋을 듯.]
[선물입니까. 좋은 생각입니다.]
알파와 베타는 마지막 형제가 무엇을 좋아할지 재잘재잘 떠들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들의 마력이 아주 멀어지고 나서야 복도 벽이 일렁였다.
스르륵.
완성체의 기능 중 하나로 물질을 통과한 감마가 모습을 보였다.
[……선물은 무슨. 저 멍청이들.]
감마가 제 얼굴을 짚었다.
[아, 진짜. 그러게 폐기했어야 했다니까.]
당장 깨어났을 때는 오메가, 알파, 베타를 처리할 자신이 었었는데. 고작 저 대화를 엿들은 것만으로도 망설임이 생겨 버렸다.
정이 뭐라고.
부디 완전히 깨어난 창조주가 이 하나뿐인 약점을 극복하기를.
* * *
방주의 지도자와 처음으로 만났으며 선장직을 따라서 계승될 렐릭도 결정했다.
대륙의 시간으로 다음 날이 밝았다.
남은 건 즉위식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