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9화 지적 충돌 (3)
호화로운 가구로 꾸며진 밀실, 그러니까 세 번째 게임 대기실의 테이블 위에는 식지 않은 산해진미가 깔려 있다.
장식용 책장.
장작이 타되 숯이 되지 않는 난롯불.
분위기는 아늑하다.
베르덴은 당연하다는 듯 음식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일인용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알파와 베타는 각자 소파의 팔걸이 부분에 앉아 베르덴과 함께 호스트가 준 규칙서를 정독했다.
‘기존에 없던 삼파전…….’
지적 충돌에는 여러 기본 승리 및 패배 조건이 있다.
누가 먼저 상대 진영의 왕을 사로잡는가?
누가 먼저 두 개의 태고의 지식을 현인 기물에게 전달하는가?
누가 먼저 세력의 현인들을 전부 잃는가?
누가 먼저 세 명의 절대자 중 한 명을 손에 넣는가?
여기서 승패 조건 두 개가 추가됐다.
누가 먼저 상대의 핵심 구역을 점령하는가?
그리고.
‘누가 먼저 진영 승리 요건을 만족하는가.’
두 번째 게임에서 참가자들에게 부여받은 지식의 과업과 성격이 비슷하다. 호스트는 각 세 개의 진영에 특별한 과업을 준 셈이다.
“우리의 조건은…… 운명과 저항자의 진영 승리 조건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
게임 규칙서에는 블러디아와 데우스에게 주어진 개별 요건이 실리지 않았다. 말인즉슨 게임을 하면서 눈치껏 알아내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운명과 저항자는 어떤 특수한 과정을 진행해서 승리할 수 있고, 그 과정을 도중에 끊으면 우리가 이긴다는 건가.”
[계획 방해?]
[현실하고 흡사합니다.]
지적 충돌은 머나먼 과거에 발생한 운명전에서 비롯됐다. 운명과 저항자의 전쟁. 여기에 호스트는 현실을 반영했다.
초대 마도왕의 이상과 닿아 있는 마탑의 동력원을 흡수하고, ‘당신’이 구축한 운명의 수레바퀴를 파괴한 베르덴을 넣음으로써.
“다만 결국 게임에 불과한 이상 역천의 마법진을 사용할 수 없다. 현실을 모방할 수 없으니 운명 측과 저항자 측의 조건도 다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결과는 같을 수도 있습니다.]
이에 알파가 긍정했다.
[저항자. 개인 승리 요건을 만족. 마도왕 폐하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이루려는 것인지 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째서 ‘당신’이 운명의 개념을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고, 운명의 진정한 원천이 뭔지 파악하지 못한 상태이지만.
운명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묶어 반복에 의한 순환을 일으키려는 건 이해했다.
원인은 몰라도 결과는 파악한 것이다.
반면에 초대 마도왕은 비밀투성이다.
여전히 ‘당신’에게 저항하고 있으며 미친 선택을 내렸다는 것만 알 뿐이다.
대체 어떤 목적으로 마탑의 동력원을 만들었고, 마탑의 동력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베르덴은 밝혀내지 못했다.
초대 마도왕은 어떤 세상을 바라는가.
‘두 진영이 다른 승리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도록 길을 틀어막고, 데우스가 개인 승리 조건을 완성하게 유도하면 답을 알 수 있다고…….’
베르덴이 규칙서를 내려놓았다.
“차라리 저항 측에서 게임을 포기할 것 같군.”
[좋은 선택.]
알파는 양손을 펼쳤다. 참고로 태고의 게임에서 얻은 부상은 전부 회복했다. 녀석의 오른팔엔 부서진 흔적이 전혀 없었다.
[상대. 첫 번째 귀빈과 세 번째 주빈. 애셔 폐하의 승리. 상급 질문권 획득.]
지식의 섭취를 원하지 않는 베르덴은 귀빈들과 주빈에게 승리하면 질문권을 얻는다.
두 자릿수 귀빈에게서 얻는 하급 질문권은 최대 3개까지.
한 자릿수 귀빈에게서 얻는 중급 질문권은 최대 2개까지.
첫 번째 귀빈과 세 번째 주빈에게서 얻는 상급 질문권은 최대 1개까지.
‘첫 번째 게임을 시작할 때 획득한 하급 질문권을 사용했으니, 우리가 확보한 하급 질문권과 중급 질문권은 각각 2개와 1개.’
중급 질문권은 하나밖에 습득하지 못했다.
베르덴이 실질적으로 처리한 한 자릿수 귀빈은 태고의 모험극에서 엘프를 지휘하던 아홉 번째 귀빈, 모르텔란밖에 없으므로.
그래도 테아렐이 중급 질문권의 대답을 공유해 주었으니 2개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딱히 개의치 않았다.
‘상급 질문권을 손에 넣으면 운명의 원천이 뭔지, 혹은 초대 마도왕의 이상이 뭔지 들을 수 있다. 과한 지식은 독이라고 하나, 호스트의 그간 행동으로 보면 정식으로 얻은 질문권 때문에 금기 위반이 발생하게 할 것 같지는 않은데.’
물론 호스트를 믿을 수 없기는 하나, 생각해 보면 그는 간접적으로 중립을 고수했다.
사도인데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애매한 태도.
그래서 함정을 팠으면 팠지, 베르덴이 승리하든 패배하든 피해만 보게 되는 편파적인 결과를 원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아까도 생각했듯 신뢰할 수 없지만 말이다.
“뭐가 됐든 지면 안 되겠군.”
[승리가 최선입니다.]
블러디아에게 지식을 빼앗기면 치명적이다. 또 데우스가 지식을 먹는지는 모르겠으나 둘 중 누구도 승리하게 놔둘 생각은 없다.
드라벤 르마크르의 영혼을 넘길 수 없고…….
데우스가 저항자의 승리 조건을 충족하는 것을 지켜볼 바에 상급 질문권을 입수해 호스트에게 답을 구하는 편이 낫다.
후웅.
베르덴은 마력으로 아까 보았었던 개정된 지적 충돌을 구현했다. 베르덴과 베타는 이 게임을 해 본 적이 없다.
알파만 루자크 팔테인과 기존의 지적 충돌을 딱 한 번 해 봤을 뿐이다.
과거 아르카디옴에 몇 번이나 참석한 블러디아와 데우스에 비하면 일천한 경험.
그러나…… 자신은 있다.
베르덴, 알파, 베타가 타고난 지적 능력은 어디에 내놔도 밀리지 않는다.
그렇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
[전략 수립 개시.]
네 번째 주빈의 고유 권한───셋이서 하나.
변수는 없다.
* * *
네 번째 귀빈──펠디안느 피어시아 레이트는 두 번째 게임의 통과자이자 세 번째 게임의 포기자로서 특별 관람실을 받았다.
정면에 설치된 커다란 벽은 고요한 게임 무대를 비추고 있었다.
“이야, 구경꾼으로서 이렇게 기대되는 구도는 또 처음이군요. 태고 시대의 아르카디옴의 풍경도 이런 느낌이었을지…….”
한때 아르카디옴에는 데우스 위덴과 베르덴보다 먼저 호스트에게 주빈으로 선정된 특별한 존재들이 있었다.
첫 번째 주빈 – 올다르크.
두 번째 주빈 – ‘당신’.
그 둘이 참석한 아르카디옴이 어떻게 전개됐는지 알 수 없지만, 상상만 해도 떨릴 정도로 서로 이해의 범주를 넘어선 지성을 부딪쳤으리라.
펠디안느는 두 명의 절대자가 게임 하는 광경을 보고 싶다는 호기심을 비치며, 처음으로 아르카디옴에서 이루어지는 삼파전의 지적 충돌 무대를 보았다.
“어쩌면…… 그때보다 지금이 더 놀라울지도.”
와삭, 와삭.
옥수수 알갱이를 튀겨 부풀린 간식을 한 손에 들고 음미하듯 씹어 먹었다. 아르카디옴의 음식이 아니라 그가 직접 가져온 것이다.
정상 회의까지 약 하루하고도 반나절.
만약 게임 종료가 늦어져서 펠디안느가 데우스와 베르덴처럼 지각한다면, 베르덴에게 저항의 씨앗임을 발각될 가능성이 생긴다.
심지어 선조님에게도 어떠한 의심을 받을지도 모른다. 아티슨 마탑의 번외 장로인 인드렌 피어시아 레이트에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펠디안느는 태평했다.
적어도 지금은 바깥 상황에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화면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곧 화면에서 일렁임이 생겼다.
“오, 시작하는군요.”
* * *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둡고 공허한 지식의 만찬회장에 다시 세 개의 문이 나타났다.
“…….”
베르덴을 선두로, 데우스와 블러디아가 차례대로 등장했다. 그들은 참가자 발판에 올라서 서로 정확한 각도와 간격으로 자리를 잡았다.
운명의 블러디아.
저항의 데우스.
역천의 베르덴.
세 개의 진영이 삼각형을 이룬다.
번쩍!
천장에서 쏟아진 빛이 참가자들과 지적 게임의 무대를 수직으로 비추었다. 그리고 게임 심판을 겸해 관람객들을 위한 사회자가 바로 섰다.
사회자는 호스트가 아니라 아르카디옴의 집사 중 하나였다.
“……마지막 게임. 지고한 윗분들의 지적 충돌의 진행과 사회를 담당하게 된 아르카디옴의 27번째 집사, 셸브론입니다. 미천한 제게 이처럼 영광스러운 기회를 주신 호스트께 감사를.”
베르덴이 처음으로 아르카디옴에 방문했을 때 루자크의 명을 받고, 베르덴과 루자크가 독대하도록 유도한 셸브론이었다.
본래 셸브론은 무례의 대가로 지식의 망령들이 득실거리는 지식의 매립지에 던져질 예정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베르덴이 셸브론에게 관심을 둔 덕분에 그는 복직할 수 있었다.
꾸벅.
셸브론은 세 번째 주빈, 네 번째 주빈, 첫 번째 귀빈 순으로 허리를 숙였다. 베르덴에게는 조금 더 경의와 감사를 담았다.
얼굴과 몸에 다닥다닥 붙은 따개비를 이발하듯 정리해 온 그는 심호흡하고 최대한 예를 갖춰서 심판 역할에 몰입했다.
“본 게임을 시작하기 앞서서 개정된 지적 충돌의 규칙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셸브론은 무대를 보는 관람객들을 위해서 무엇이 바뀌었고, 무엇이 추가되었는지 일목요연하게 설명을 거듭했다.
새로움!
셀 수 없이 즐겼던 지적 충돌을 호스트가 직접 개량했다니, 아르카디옴의 지식인으로서 관객들은 내적으로 열광했다.
지역 타일의 효과.
기물별 능력.
추가 승리 조건.
개인 승리 요건의 존재.
…….
셸브론은 수십 분에 걸쳐 깔끔하게 설명을 마친 뒤 한 발 물러났다.
그를 비추던 조명 하나가 걷혔다.
셸브론은 이제 무대 바깥에서 관객들만 들리도록 사회를 맡을 것이고, 필요할 때만 심판으로서 개입할 것이다.
지적 충돌은 온전히 참가자들의 것.
“게임을 포기하지 않았군. 마렌 왕국에 숨겨 둔 근거지를 대피시키려면 시간이 없을 텐데.”
[크흐흣, 도발도 다 하는군.]
블러디아가 사납게 눈을 반쯤 떴다.
[핏덩이가.]
베르덴과 블러디아는 두 번째 게임에서 서로의 역린을 건드렸다. 방심한 블러디아는 기억을 강제로 공유당해 자존심이 상했고, 베르덴은 알파가 다치는 모습을 봐야만 했다.
‘역시 모험극에서 강한 충돌이 있었군.’
데우스는 개입하지 않고, 둘의 반목을 고려한 게임 전략을 구상했다.
목적은 드라벤의 영혼.
그 또한 아르카디옴에서 승리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순서는 세 번째 주빈, 네 번째 주빈, 마지막으로 첫 번째 귀빈 순으로 순환합니다. 게임 도중에 대화는 가능하나, 물리적인 공격이나 과한 도발이 가해질 시 심판으로서 개입하겠습니다.”
셸브론이 어둠 속에서 말했다.
“그럼…….”
그 순간 모든 기물이 움직이며 몸을 풀었다.
“세 번째 게임, 지적 충돌을 시작하겠습니다.”
게임이 개시되자마자 데우스가 강한 의지로 손을 뻗었다. 이 지적 충돌에서는 직접 기물을 옮길 필요가 없다.
쿵! 쿵!
보병 기물이 두 칸 전진했다.
‘앞으로.’
직후 베르덴이 일절 고민하지 않고 좌측의 보병 기물을 움직였다.
쿵!
* * *
각 진영의 기물들이 빠르게 움직인다.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고 간극이 없다. 세 명은 마치 마구잡이로 두는 것처럼 쉴 새 없이 전략대로 기물을 조종했다.
훅, 쩌적!
마법으로 은폐한 데우스의 보병이 경계에서 만난 블러디아의 보병을 타격했다. 블러디아의 보병은 큰 피해를 당해 물러났다.
그렇다.
개량된 지적 충돌에서는 체스처럼 기병이 무조건 한 번에 죽지 않는다. 예를 들어 보병 기물은 최대 세 번까지 공격을 견딜 수 있으며, 한 번 기습을 당하면 다음에는 반드시 파괴된다.
또한 공격을 당하면 한 칸, 또는 두 칸 무작위로 물러나게 된다.
“…….”
테아렐은 마치 전쟁의 축소판과 같은 보드게임을 조용히 응시했다.
그러다가 가까워진 기척을 향해 말했다.
“무슨 볼일이야?”
{동반 관람을 청하러 왔다. 이런 게임을 혼자 보는 것은 아까우니.}
“아무 데나 앉든가.”
테아렐은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호스트는 개인 의자를 가져와 그녀 옆에 자리했다. 둘이 나란히 치열한 지적 충돌을 관찰했다.
테아렐이 물었다.
“그래서 용건은?”
{너는 누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애셔.”
그녀가 즉답했다.
“친분과는 별개로 애셔의 지능은 높아. 거기다가 알파와 베타까지 더해졌지. 네 번째 주빈은 혼자이되 다수인 거나 다름없어.”
{객관적인 평가로군. 하나 근시안적인 시각이다.}
“근시안적?”
테아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 게임의 명칭은 지적 충돌이지만, 지적 충돌에 임하는 참가자는 순수한 지적 존재가 아니다. 언제나 감정이 함께하지. 그렇기에 애셔는 불리하다.}
우뚝.
{아직 선을 넘지 않았으니까.}
화면 속 베르덴이 기물을 움직이다가 멈칫한다.
테아렐이 눈을 크게 떴다.
“……뭐야?”
{단순한 이야기다.}
베르덴은 아드리안 기물을 바라본 채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동공이 떨렸다. 그것이야말로 베르덴의 약점이었다.
{타인의 희생이 두려운 거지.}
베르덴은 희생을 자처하는 존재.
하지만 완전한 승리는 없다.
지적 충돌에서조차 승리하려면 기물을 희생해야 한다. 그것이 설령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주변인을 닮은 기물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