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3화 아르카디옴의 끝 (1)
보다시피 세 개의 진영이 세 개의 태고의 지식을 나누어 가졌다. 태고의 지식을 전달받은 현인 기물은 각자의 본진에서 왕처럼 보호받고 있다.
블러디아가 습관처럼 연신 손톱을 튕겼다.
‘일대일이면 모를까, 삼파전이라 전력의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고 태고의 지식을 빼앗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태고의 지식을 가진 기물로 총 다섯 개의 절대자 타일 중 세 개를 지나, 절대자를 불러내는 것도 이미 늦어 버렸다.
역천 진영이 무대의 중심 지역 태반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접근도 도박이다. 빌어먹을 운명 파괴자가 함정을 파 놓았을 테니.
‘하나, 기물 하나조차 잃으려고 하지 않는 강박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운명 파괴자도 절대자를 부를 수 없다. 결과적으로 모든 진영이 태고의 지식과 관련된 승리 조건은 전부 충족할 수 없게 됐구나.’
남은 방법은 종전과 진영 승리 조건.
운명 측의 개인 승리 요건은 운명의 수레바퀴의 완성이다. 그러나 블러디아는 이를 배제했다. 마땅한 선택이었다.
‘지적 충돌이 운명 탄생의 인과를 온전히 비추지 않는다고 해도, 운명 파괴자는 그 안에 남은 자그마한 실마리조차 미친 듯이 끈질기게 붙잡아 답을 알려고 할 테니.’
저항자 진영 또한 동력원의 인과에 대한 단서를 조금도 내보이지 않고 있다. 진영 승리 따위 처음부터 고려조차 한 적도 없다는 듯.
데우스나 블러디아나 베르덴의 지적 능력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래서 아르카디옴은 귀찮다니까…… 크흐흐핫.’
블러디아는 제 손등으로 팔꿈치를 받치며 입가를 어루만졌다. 인공 골렘의 모욕으로 차올랐던 분노는 뒤로 미루었다.
더 이상 고도의 수싸움에서 질질 끌려다니기에는 그녀의 인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승산이야 낮아지겠지만, 손해를 감수해서라도 네놈이 그토록 지키고자 하는 같잖은 기물 하나쯤은 죽여 주도록 하마.’
블러디아가 회수할 수 없는 기물들을 포기하고 남은 전력으로 새로운 진형을 구축했다. 그 전략에서 피 냄새가 날 지경이었다.
문외한이 봐도 그녀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너무도 노골적이었다.
‘게임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적어도 내 심기라도 건드리겠단 건가. 혹시 빈틈을 보이면 그 기회를 발판 삼아 판을 뒤집으려고.’
베르덴은 차분히 대응했다.
‘퍼즐 조각은 갖춰졌다.’
좌측에는 블러디아.
우측에는 데우스 위덴.
역천 진영은 더욱 영역을 장악해 한 턴에 세 개의 기물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베르덴, 알파, 베타가 각각 방위를 전담했다.
굳이 의념으로 전하지 않아도 녀석들은 베르덴이 어떤 결말을 원하는지 이해했으니, 한 수 한 수에 오류는 없었다.
카앙! 캉! 콰지직!
퍼버버버벙!
광전사처럼 몰아치려 하는 블러디아의 기물들을 저지하며 흐트러뜨리고, 신비주의자처럼 신중하게 움직이는 데우스의 기물들을 위압적으로 순차적으로 깎아 낸다.
공격할 것인가, 방어할 것인가, 후퇴할 것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턴을 넘길 것인가.
베르덴 일행은 매번 그들에게 네 개의 선택지를 제시했고, 역천이 그리는 그림에 어울리도록 선택을 유도하여 강요했다.
‘이제 기물의 숫자는 충분히 줄었다.’
지적 충돌의 규칙이 안내하지 않는 승리의 최소 조건이 충족됐다.
수백 턴이 진행되는 동안에 게임 무대를 완전히 이해한 베르덴은, 방주의 쉐오른 장로에게 배운 공간 지배를 시전하는 듯한 느낌으로 수많은 경우의 수를 손안에 두었다.
변수를 통제해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기 위해.
‘호스트, 네가 부르짖지 않아도 알고 있다. 내가 ‘당신’과 초대 마도왕에 견주려면 강인해져야 하는 것도, 그들에 비해서 지금의 나는 한없이 연약하다는 것도.’
거대한 전쟁은 비극을 동반한다.
누군가는 죽는다.
그래도 승리해야 한다.
어떤 지도자가 한 줌의 모래에서 떨어지는 모래 알갱이들을 신경 쓸까. 작은 것에 연연하면 참패에 더 가까워질 뿐이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지 않으면 전부 잃을 수도 있는 세상.
개인보다 무리를 우선하고, 무리보다 마을을, 마을보다 도시를, 도시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생존의 섭리다.
베르덴 또한 전쟁을 겪었다.
블랙 아워의 3대 지도자가 되어 보헤미른 마탑과 전면전을 치렀을 때 사상자가 발생했다. 블랙 아워와 소사이어티의 일원들이 눈을 감았다.
베르덴을 믿고 충성을 바쳤기에 그가 주도하는 전쟁에서 죽거나 다친 것이다.
인연이 닿은 시간은 짧아도 떠나간 이의 이름은 여전히 기억한다.
아무리 베르덴이 최전선에서 가장 위험한 적을 상대했더라도 책임은 가벼워지지 않는다. 베르덴이 희생을 자처하는 것은 지도자이자 정점으로서 책임을 지기 위함이다.
이는 스스로를 위한 행동이기도 하다.
명령으로 수하들의 목숨을 저울질하며 안전한 후방에서 지켜보는 것은, 베르덴에게는 차마 견딜 수 없는 수치였으므로.
‘누군가가 보기에는 위선이고, 자기 위안일지도 모른다.’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것 하나만큼은 단언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든 간에 베르덴은 가장 앞에 서 있을 것이다.
이야말로 에온의 방식이다.
쿵.
베르덴 기물이 한 칸 전진해 지적 충돌의 중심에 자리했다. 전반적으로 기묘한 배치였다. 블러디아와 데우스가 무슨 수인지 헤아리고 있던 도중 베르덴이 보란 듯 목소리를 높였다.
“더 볼 것 없을 텐데.”
베르덴은 지적 충돌의 심판을 맡은 셸브론에게 고개를 향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곳을 구경하고 있을 호스트에게 선언했다.
“교착 상태다.”
* * *
스테일메이트(stalemate).
본래는 한 차례에서 무엇을 하든 자충수가 되는 탓에 규칙상 수를 둘 수 없어 무승부가 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현재 지적 충돌 상황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용어였다. 어딜 둘러봐도 자충수가 되는 상황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교착? 무슨 헛소리를.]
블러디아가 중얼거리며 기물을 움직이려던 손을 거두었다.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인다. 그래, 그렇게 신경을 기울여 수의 수를 예측하고 나서야 비로소 보일 것이다.
그때, 수백이 넘는 수를 넘본 블러디아의 동공이 확장됐다.
[어?]
상대 핵심 구역을 점령하고자 하면 도중에 귀족 기물이 반드시 잡힌다.
왕을 사로잡아 역천 진영을 없앤다고 해도 저항 진영을 끝장낼 기물이 부족해진다.
태고의 지식을 빼앗자니 현인 기물들이 그대로 노출된다. 규칙상 현인 기물을 전부 잃어버린 진영은 패배한다.
위에 언급한 것과 다른 수는 악수다. 역천 진영을 어쩌지도 못한 채 왕이 잡히든 뭐든 곧 패배를 내놓는 것과 진배없다.
저항 진영을 이끄는 데우스도 같은 상황.
다시 말해…… 베르덴이 배치해 놓은 기물들이 존재하는 한 승리 조건들을 만족할 수 없으며, 둘이 양쪽에서 베르덴을 없애 둘만 남게 되면 결과적으로 스테일메이트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하고자 한다면 누군가는 이길 수 있다.’
데우스가 말했다.
“기물 몇 개만 포기해도 승기를 잡을 수 있을 텐데, 기어코 그걸 마다하겠다는 건가.”
베르덴이 대답했다.
“난 패배하지도, 승리하지도 않겠다.”
지적 충돌 – 삼파전의 결점.
두 진영 사이에 깊게 개입한 한 진영이 상황을 좌지우지하고, 승리마저 포기한다면 누구도 이기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셋 중에 하나가 없어도, 하나만 살아남지 않으면 아무도 승자가 되지 못한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비이성적이야. 고작 진짜도 아닌 기물 몇 마리 희생하는 것이 두려워서 다 잡은 승리를 내다 버리겠다고? 여기서 이기면 네가 원하는 비밀을 알 수 있는데도?]
“남이 열어 준 길만을 걸었다면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을 테지.”
베르덴은 먹으면 독이 되는 미끼를 덥석 삼키는 머저리가 아니다. 현실과 게임을 구분하며 신념마저 상황에 따라 편한 대로 적용할 정도로 주관이 희미한 것도 아니다.
───{지성체를 위한 존엄성을 버려라, 애셔. 그것은 무가치한 사상이다. 그렇게 한다면 내 지식을 기꺼이 나누어 주마. 아. 초월자라서 고유한 이상을 버릴 수 없다고? 과연 그럴까.}
───{너는 여타 초월자와는 다르게 이상을 버리고도 그 위로 나아갈 수 있다. 과거의 ‘당신’처럼. 이미 넌 최소한의 자격을 충족했다. 그저 온전히 자각하지 못했을 뿐.}
───{망설일 것 전혀 없다. 침묵의 사막에서 봤을 텐데. 그 올다르크가 최초의 마탑을 세운 네 명의 키론다르에게 무엇을 했는지. 현실을 직시해라. 그것이야말로 고상한 것이니.}
───{앞으로 한 걸음만 나아가면 된다. 이미 너보다 앞서 걷는 자들이 있으니 어려울 것 없다. 존경하지 않나? 올다르크를.}
아르카디옴에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호스트가 유혹하듯이 언급한 최소한의 자격이란 필시 신격을 의미했다.
이상을 버림으로써 운명을 창조하지 않은 과거의 ‘당신’처럼 자유로운 신이 될 수 있다고 간접적으로 속삭인 것이다.
‘돌이켜 보면 호스트는 계속 나를 시험했다.’
만약 호스트의 언변에 현혹당했다면 베르덴은 이상을 포기했을 것이고, 이상에 얽매인 진정한 신의 길을 걷지 못했으리라.
‘또한 지금도.’
여기서 반 걸음만 나아가면 머지않아 올다르크와 ‘당신’과 같은 반열에 들지도 모른다. 즉, 자기희생을 변질시키는 것.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베르덴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한층 더 완고해졌다.
‘누구에게도 놀아날 생각은 없다. 모든 건 완연한 나의 선택으로.’
베르덴이 고집스럽게 천명했다.
“너희가 어떤 비밀을 감추고 있는진 내 방식대로 알아내겠다.”
[심판.]
알파가 손가락을 튕겼다. 어서 결론을 내리라고 종용하자 셸브론이 뭐라고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덜덜 떨었다.
“어, 어, 그, 그러니까…… 말입니다…….”
개정된 규칙을 열심히 숙지하면 뭐 하나?
수많은 경우의 수 뒤에 결국 스테일메이트가 날 거라고 귀빈과 주빈들께서 그러시는데, 애석하게도 셸브론은 그만한 지적 능력이 없는 터라 도저히 판을 해석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결론지었다가 나중에 문제 되면 끝장이다.
셸브론은 징벌을 받아 지식의 매립지로 추락해 망령이 되는 끔찍한 상상에 사로잡혔다.
그때였다.
{승자가 될 수 있는데도, 승패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겠다니. 지식인으로서는 참으로 어리석지만…… 그렇기에 고귀하군.}
호스트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서로 단 한 번의 실수조차도 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결국에 교착 상태로 끝날 거라는 애셔의 주장은 타당하다.}
“…….”
{애셔가 지적 충돌의 스테일메이트를 제안했다. 이에 응하겠는가?}
데우스와 블러디아는 잠시 침묵한 채 어지러운 전장을 굽어봤다. 둘 중 가장 먼저 뜻을 표명한 것은 데우스였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흥, 시시한 결말이구나. 정신이 미친 것도 아니고.]
[아가리.]
블러디아가 뜨뜻미지근한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녀도 스테일메이트를 받아들인 것이다.
어쨌든 패배하지 않았다는 점이 선택의 무게를 가볍게 했다.
{마기온과 블러디아가 애셔의 스테일메이트를 받아들였다.}
호스트가 심판을 대행했다.
{세 번째 주빈, 네 번째 주빈, 첫 번째 귀빈. 나, 호스트는 세 번째 게임, 삼파전의 지적 충돌에 참가한 지식인들이 내린 결론을 인정하겠다.}
공간이 약하게 진동한다.
{지적 충돌의 승자도, 패자도 없다.}
주변을 둘러싼 바다가 흔들린 것 같았다.
{이것으로 아르카디옴의 마지막 세 번째 ‘게임’을 마치겠다.}
게임이 끝났다.
무대를 둘러싼 어둠이 점차 밝아진다. 셸브론은 겨우 살았다는 듯 덜덜 떨리는 무릎을 잡고 안도의 한숨을 연신 내뱉었다.
그 순간 베르덴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역시.’
호스트는 시작부터 ‘아르카디옴의 끝’에 도달한 지식인에게 드라벤 르마르크의 영혼을 선사하겠다고 공표했다.
게임의 마지막 승자가 아니라.
그렇지 않았다면 호스트의 성격상 이렇게 심심한 무승부를 허용했을 리 없다.
모험극에서 얻은 새로운 정보를 기억하라.
아르카디옴의 게임에는 언제나 허점이 있었다는 걸…….
그럼 아르카디옴의 끝이란 무엇인가?
아르카디옴의 주인은 호스트다. 지식의 만찬회를 연 것도 호스트다. 아르카디옴을 유지하는 것도 물론 호스트다…… 또한 아르카디옴을 끝내는 것도 당연히 호스트.
‘드라벤의 영혼을 확보하려면 호스트를 찾아야 한다. 저 둘보다 먼저.’
호스트의 본 의도가 그것이다.
화아아아악!
알파와 베타가 함께 품속을 파고든다. 베르덴은 기다렸다는 듯 마력회로를 활성화하면서 블러디아와 데우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들도 곧 이 사실을 깨달을 터.
아르카디옴에서는 물리적인 살생이 금지되어 있지만 충돌은 가능하다. 게임도 끝났으니 최소한의 마찰에 대한 제약도 사라졌다.
죽이지만 않으면 견제는 가능하다.
죽지도 않겠지만.
[음?]
“이런.”
블러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데우스가 즉각 마력을 전개했다.
마도 <파멸>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
파멸의 광선이 터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둘을 집어삼켰다. 셸브론이 비명을 질렀다. 베르덴은 즉각 자리를 벗어났다.
[호스트 찾기. 개시.]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됐다.
콰아앙!
블러디아가 전신을 짓누르던 잔해를 그 자리에서 날려 버렸다. 갑자기 기습을 당한 그녀가 붉은 머리를 넘겼다.
직후에 높은 지성으로 호스트의 마지막 의도를 이해했다.
참고로 데우스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하. 그래서.]
블러디아가 헛웃음을 짓고는 날개를 넓게 펴며 입을 쩍 벌렸다.
[───────────────!!]
분노의 포효가 심해를 격동시켰다.
“히이이이이익!”
셸브론이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