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5화 아르카디옴의 끝 (3)
고통받는 영혼이 없기를 바랐기에 기꺼이 타인을 희생시켰다. 무고하든 무고하지 않든 학살과 유린을 서슴지 않았으며, 그 단연한 의지에 죄책감이 묻어날 여유는 없었다.
죽음이 없는 세상.
잔혹하게 살해당한 희생자조차 진실을 깨달으면 학살자에게 감사를 전할 것이다. 끔찍한 사후(死後)는 사라지고 영혼은 비로소 해방될 테니, 고통받지 않는 이상향의 완성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여전히 같은 이상을 추구할지언정 평생 걸어왔던 길이 잘못됐다. 손에 묻힌 피가 무의미해졌다. 아득한 상실감이 목을 조른다.
이상을 좇으며 외면했던 죄와 감정이 그늘처럼 드리웠다.
실패자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
드라벤 르마르크는 잃어버린 존재 의의를 되찾기 위해 묵묵히 기다렸다.
* * *
원시적이고, 또 원초적인 지역에 대한 정보가 마력을 통해 전해진다.
까마득한 지하에서 하늘까지, 초월자의 한계를 넘어선 마법적인 감각이 일대를 꿰뚫었다. 질적으로 다른 공간이 빠르게 해석됐다.
‘……자연적인 천지(天地)가 아니군. 내외적으로 그럴 듯하게 조성했지만.’
베르덴이 손끝이 식물을 스쳤다.
현뢰가 희미하게 번뜩였다.
개념 구조가 붕괴된 그것은 바닷물로 변해 땅에 스며들었다.
‘이곳은, 여전히 심해다.’
모든 생물과 무생물이 각 고유성을 갖고 있으나, 본질은 결국 바다. 이르자면 바닷물을 토대로 구현된 모형 정원이다.
호스트는 왜 이렇게 공간을 꾸민 걸까. 의문이긴 했으나 중요한 사안은 아니었다.
정확히 77초 동안 <마력 감지>를 유지한 베르덴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찾았다.’
호스트는 ‘동쪽’에 있다.
불과 십수 킬로미터 떨어진 ‘안개 호수’에서 특유의 기척이 감지된다.
기이한 안개다.
마력을 밀어내고, 공간 좌표가 뒤죽박죽이며, 3차원으로 밀폐되어 있어 4차원을 경유하는 <차원 이동>으로 침투할 수 없다.
‘내부 파악은 불가능. 그리고, 직접 걸어 들어가는 것만이 유일한 경로인가.’
호스트는 애초에 악착같이 숨어 있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하긴 지적인 즐거움을 고려하는 놈이니, 여기까지 온 마당에 결말을 질질 끌어 모두의 시간을 낭비하게 하진 않을 터였다.
목적지가 밝혀졌으니 당장 이동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
하지만…….
블러디아와 데우스를 기습한 다음에 한발 먼저 움직임으로써 확보한 시간은 호스트를 찾는 데 거의 다 써 버렸다.
안개 호수에 첫 번째로 도착한다고 해도 금방 따라잡힐 터.
상대가 상대인 이상 자칫 안개 속에서 역전당할 가능성이 있다. 호스트의 정확한 거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시간을 끌고 알파와 베타를 보내는 것도 방법이긴 하나, 블러디아가 광범위 섬멸을 시도하면 녀석들이 휩쓸릴 수 있다. 우리가 셋이서 하나라는 걸 확실히 인지하고 있으니, 따로 행동하는 전략은 간단히 파악당하겠지.’
베르덴은 주저 없이 판단했다.
“알파, 베타.”
[확인.]
[이해했습니다. 기동을 중지하겠습니다.]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말뜻을 이해한 알파와 베타가, 베르덴의 손길을 받아들여 일시적으로 핵을 정지시켰다.
가사 상태에 빠진 골렘은 생명체가 아니라 사물로 인식되기에 아공간에 보관할 수 있다. 칼리아가 직접 끼워 준 반지 [레인디아]에 알파와 베타의 프레임이 안치됐다.
이질적인 심해의 풍경을 인식하는 데 8초.
마력으로 이 공간의 본질을 밝혀내고, 호스트를 찾는 데 77초.
알파와 베타를 거두는 데 4초.
한곳에서 무려 89초를 보냈으니 결국에 교전은 피할 수 없다.
오히려 그래야 한다.
베르덴이 호스트의 대략적인 위치를 알아내는 데 77초를 할애했으니, 베르덴을 뒤따라가지 않는 이상 블러디아와 데우스 또한 적어도 77초 이상은 탐지에 집중해야 하므로.
‘내가 이동하지 않고 여유를 주지 않으면, 둘은 호스트의 거처를 특정할 수 없다.’
정보의 우위를 점했다.
그림은 그려졌다.
<암화>
[아인베르]로 파멸에 연쇄 개념을 부여.
‘여기서 끊는다.’
베르덴의 [인테리스]가 파멸로 물들었다. 뇌성이 모형 정원을 뒤흔들었다. 공간을 지배한 그가 허공을 디디며 팔을 내질렀다.
쩍.
블러디아의 발톱과 파멸의 창이 격돌했다. 서로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도 실제로 맞닿은 것처럼 강한 압력이 몰아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아───!
두 사람을 둘러싼 하늘과 땅이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진다.
고룡의 불가해한 근력은 손에 닿는 것을 가루로 만들었고, 파멸의 전류는 모형 정원을 구축하는 힘을 지워 본래의 것으로 되돌렸다.
충격파가 주변으로 번지면서 나무, 흙, 구름, 또 드래곤과 꽤 닮은 이형종 등을 이루고 있던 바닷물이 비처럼 떨어졌다.
[운명 파괴에서 비롯된 힘…… 과연,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실제로 경험하고 나서야 얼마나 끔찍한 개념인지 이해가 돼. 근본적인 의미로, 올다르크보다 흉악한 마력이 있다니.]
블러디아가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면서 상공에 떠 있다. 방금까지 없었던 그녀의 꼬리가 소리보다 빨리 허공을 갈랐다.
대지가 사선으로 절단된 경계선 앞에서 데우스가 모습을 보였다.
[크흐흣, 정신 나간 올다르크는 어떻게든 저 힘을 손에 넣고 싶어 안달이 났겠구나. ‘당신’이 바라는 것 이상으로. 그렇지 않나?]
“주제 넘는군.”
데우스 위덴은 노기를 띠었다.
“욕망에 지배된 사도 따위가.”
[욕망에 충실한 것이야말로 생명체의 자연스러운 본성이지. 정신 이상자들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상에 예속된 삶을 자처할까. ‘당신’이나 올다르크나…… 올다르크의 영향을 받은 초월자들이나.]
블러디아가 상공으로 솟구쳤다.
[내가 보기에 미친 건 네놈들이다.]
날갯짓만으로 대기의 압을 뒤틀고, 포효 한 번에 번개를 무릎 꿇린다. 격정적인 드래곤 앞에서 바람은 길이 되고, 천둥은 의지가 되니.
격룡(激龍)이 비상하면 천궁이 울부짖는다.
바람에 실려 순수한 속도로 한순간에 지상에 도달한 그녀가 공간을 짓밟았다. 지축이 무너졌다. 모형 정원이 약간 기운 듯했다.
청보랏빛 전격이 감도는 발톱을 아래에서 위로 휘두르자 데우스가 있던 장소가 고온의 플라즈마로 뒤덮였다.
쿵!
그대로 무게중심을 이동하며 블러디아가 거리를 좁혀 왔다.
‘속도는 약화된 인간계 최초의 왕을 조금 웃도는 정도. 고룡 중 하나의 능력인가.’
그러나 블러디아의 이동 경로는 복잡하지 않고 죄다 직선적이다. 반응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세계의 틈새 때와는 다르다.
쩌어엉!
베르덴이 우측으로 회전하여 블러디아의 기습을 차단했다.
은근히 ‘서쪽’을 지키듯 행동했다.
일정 간격을 두고 현뢰와 플라즈마가 쉴 새 없이 교차했다.
초 단위로 전개되는 공방.
[……뭐?]
모험극에서는 서로의 힘이 극도로 제한되었기에 별로 인상이 깊지 않았는데…….
아무리 폴리모프를 완전히 해제하지 않았다지만, 블러디아는 감히 자신과 대등하게 육탄전을 벌이는 베르덴을 이상하게 쳐다봤다.
주검의 영광을 죽이는 과정에서 8위계에 도달한 것은 알고 있다. 베르덴의 마법적 재능이 올다르크에 준할 정도라는 것도 이해했다. 내버려 두면 머지않아 운명의 사도들과 정면으로 맞설 수 있을 거라는 것도 예상했다.
그런데…… 이건 너무 빠르다.
뭔가 놓친 게 있다.
히아레마르 내해에서 의식을 잃고, 이후 대륙에 다시 등장할 때까지. 베르덴이 모종의 성장을 이룩한 게 자명했다.
파지지지직!
강력한 전기장으로 형성된 플라즈마의 막이 일부 깨졌다. 뇌명이 진동한다. 블러디아의 팔이 위쪽으로 튕겨졌다.
현뢰로 허공에 새겨 넣은 여덟 개의 극점.
회전하는 스태프.
규칙 없이 난반사하는 파멸의 기류.
대담하게 진각을 밟은 베르덴은 지근거리에서 파멸 그 자체로 변한 [인테리스]를 투창했다. 현뢰의 팔각형 중심을 통과한 그것이 강렬한 개념의 파장을 일으켰다.
팔각형은 일종의 외부 영역이다.
베르덴이 내부 영역에서 극대화한 고유 마법은, 외부 영역을 통과하면서 일순간에 극적으로 위력이 증폭된다.
여덟 개의 점에서 뻗어 나온 전격이 [인테리스]와 연결되었다.
<멸인(滅印)>
베르덴의 마도 창술────베르카엘룸의 고유 마법이 블러디아에게 작렬했다.
직후에 날아오른 베르덴의 손에 현뢰가 집중되며 [인테리스]가 돌아왔고, 베르덴은 다시 한번 지상을 마도로 심판했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연쇄 파멸이 발생하면서 화산의 한쪽 면이 크게 무너졌다. 용암이 크게 폭발했다. 블러디아가 충돌한 지점을 화산쇄설류가 휩쓸었고, 뒤를 이어 마그마의 폭포가 잔해를 덮어 버렸다.
그 순간…… 베르덴의 몸 주위에서 플라즈마가 일었다.
전하의 인력이 발생했다.
밑으로 당겨진 베르덴은 즉각 파멸로 연결점을 끊었으나, 아래에서 솟구친 블러디아의 간격에 이미 들어온 상태였다.
<차원 전이─ [────!] 블러디아가 포효로 베르덴의 공간 감각을 잠시 빼앗았다. [인테리스]의 몸통을 힘껏 붙잡아 내리끄는 우악스러운 손길. 두 사람이 마그마 속에서 뒤엉켰다. 블러디아의 복부에는 비늘이 나 있었다. 비늘엔 약간의 상처만 있었다. 그의 파멸에 직격당했는데도 거뜬히 견뎌 낸 것이다. ‘추상조차 손상하는 파멸의 특성을 감쇄한 건가. 타고난 저항력 하나만큼은, 내가 본 그 어떤 것보다도 뛰어나군.’ 네 번째 사도는 사도 중에서 가장 죽이기 어려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블러디아의 생명력이리라. [아까부터 묘하게 서쪽을 지키던데. 여기에 없는 올다르크의 피조물들이 그쪽에 있구나. 네가 시간을 끄는 사이 호스트를 찾으려고.] 블러디아가 서쪽을 노려봤다. [뻔하기는.] 베르덴은 애써 담담한 척 연기하며 화산 밖으로 탈출했다. 걸렸다. 블러디아라면 그 미세한 움직임의 의도를 알아차릴 줄 알았다. ‘데우스 또한 들었을 터.’ 알파와 베타는 아공간에 있고, 호스트는 동쪽에 있다. 방향을 속임으로써 베르덴은 자그마한 우위를 얻게 되었다. 블러디아의 살의가 서쪽으로 향하고, 베르덴은 서쪽을 지키는 척 행동했다. 그러던 도중 마법적 술식이 새겨진 거대한 기둥 세 개가 치솟더니 베르덴과 블러디아를 삼각형으로 에워쌌다. ‘기둥 자체는 마법이 아니다. 기둥을 불러낸 것이 마법…….’ 베르덴의 마법적 이해력이 활성화했다. ‘소환 마법?’ 테오도르의 소환 마법과는 근본이 다른 듯했지만 바깥에서 불러온다는 의미에서 마법의 발동 형식은 상당히 비슷했다. 그의 생각이 새로운 정보를 입력했다. 섭리자는 소환 마법을 다룬다. 마도 <천리(天理)>
기둥에서 일제히 발생한 마법적 이치가 베르덴과 블러디아를 구속했다. 두 사람조차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강한 억제력이었다.
블러디아의 포효를 차단하면서, 베르덴의 마도를 일시적으로 닫아 버리는 개념적 억압.
“아르카디옴이 끝날 때까지 얌전히 있도록.”
데우스의 손끝에서 여러 마법진이 전개되더니, 그의 손길을 따라서 기둥들의 마법이 단단하게 굳기 시작했다.
‘이런 구속 마법을 숨기고 있었나.’
베르덴이 전신에 힘을 주었다.
‘일시에 파괴한다.’
몸 내부에서 응축된 마도의 마력이 마안을 통해 현현하려던 찰나…… 기둥을 고정하는 대지가 바다로 화했다.
지지대를 잃은 기둥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면서 모든 구속이 해제됐다.
* * *
‘……테아렐?’
테아렐도 지식의 매립지를 넘어 이곳으로 넘어온 건가? 베르덴이 시선을 던진 그곳에서 심해의 여인이 걸어온다.
“아직도 안 끝났어?”
마지막 경쟁에 개입한 테아렐이 태해의 마도로 호스트의 모형 정원을 조작했다. 바다의 개념을 품은 초월자이기 때문인지, 그녀는 마치 정원의 주인인 듯 굴었다.
“정상 회의가 임박했어.”
테아렐이 턱짓했다.
“어서 끝내. 시간 없으니까.”
그녀는 사도의 막강한 존재감을 앞두고도 당당히 의지를 표명했다. 테아렐은 그를 대신해서 사도의 발목을 잡을 작정이었다.
베르덴이 물었다.
“가능하겠나?”
“생각이 있어.”
테아렐이 데우스를 힐끗거렸다. 베르덴은 그녀가 무슨 근거로 나섰는지 이해했다. 그래, 그렇게 하면 데우스와 블러디아, 둘 다 움직일 수 없다.
“신세를 졌군.”
“베타한테 빚 갚은 셈 쳐.”
베르덴은 고개를 끄덕이곤 서쪽이 아니라 대놓고 동쪽으로 향했다.
[동쪽?]
블러디아가 눈살을 찌푸리고 추격하려고 하자 테아렐이 막아섰다.
[하, 너 따위가 날 막겠다는 것이냐?]
“솔직히 나로선 힘들겠지.”
테아렐이 옆을 가리켰다.
“근데 쟤는 다르고.”
“…….”
“내가 사도의 대적자라며. 초대 마도왕에게 꽤 중요한.”
테아렐은 아르카디옴에서 데우스가 저항자라는 걸 이해했다. 그리고 데우스가 초대 마도왕과 아주 관련이 깊다는 것도.
“날 죽게 할 생각은 없잖아. 안 그래? 마기온 선생.
* * *
테아렐에게 뒤를 맡긴 베르덴은 최대 속도로 안개 호수로 향했다. 새하얀 안개가 피어오른 지역이 그를 반겼다.
어떻게 들어가야 할까.
베르덴은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하늘에서부터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앞이 거의 보이질 않는군.’
투명한 호수 위에 선 베르덴이 두리번거리며 환경에 적응했다. 그리고…… 안개 너머에서 익숙한 그림자가 다가왔다.
그림자가 말했다.
“역시 네가 먼저 왔군.”
베르덴은 그림자가 채 걷히기도 전에 상대방의 정체를 간파했다.
“드라벤 르마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