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4화 붉은 길 (1)
세르노흐 요새 인근에는 물길이 없다. 지하수가 고일 만한 지형도 아니다. 지상과 상당히 멀리 떨어진 지하 비밀 통로에 발 전체가 잠길 정도로 물이 차오를 요소는 없었다.
‘침입자.’
철퍽!
상급 용병 신분의 추종자가 상체를 낮게 낮추며 질주했다. 바다 냄새가 나는 물길을 세게 밟고 어둠을 파고들었다.
연이어 벽과 천장을 박차 변칙성이 부여된 검이 사방을 긁으며 바닥을 내리쳤다.
물기둥이 치솟았다.
테리웬의 호위를 담당하는 다른 추종자들이 숨죽이며 안력을 높였다. 시야를 방해하던 파도가 곧 가라앉았다.
먼지와 흙으로 혼탁한 물길이 점차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어라.”
추종자들이 흠칫했다. 무감정하고 차가운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를 떠올리게 하는…….
‘심해?’
테리웬을 향해 시냇물처럼 졸졸 흐르는 선혈의 물길을 타고 테아렐이 다가온다.
그녀의 곁에서 부서지지 않는 자그마한 파도가 일렁인다. 사족 보행의 작은 골렘은 보란 듯이 그 파도 위에 서 있었다.
모험가 길드의 최고 전력이 무심한 표정으로 테리웬을 가리켰다.
“아는 얼굴이다.”
“흐, 흑해.”
“이데라트 연맹장.”
[성소 학살 사태의 주동자를 발견했습니다.]
테리웬이 못 믿겠다는 듯 눈가를 떨며 뒤꿈치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다른 이들도 당황한 탓에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왜 흑해가 이곳에 있는 거냐.’
흑해가 저항의 씨앗?
크세리온 제국에 속한 초월자를 제외한 나머지가 ‘당신’의 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흑해가 지금 이 순간에 운명의 아성을 정면으로 침범할 거라고는 상상한 적이 없었다.
수십 년 전에는 모험심을 불태웠을지언정 각성한 이후로 바다에만 집착한 그녀였는데, 그간의 행적이 모조리 연기였다고?
테리웬은 그 의문에 대한 그럴듯한 답을 앞에서 찾을 수 있었다.
‘저것은 신성의 골렘, 베타.’
베타와 테아렐은 일상처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에겐 들을 여유도 없었다.
‘여길 습격한 것은 운명 파괴자다. 운명 파괴자는 틀림없는 운명의 적이나 저항의 씨앗이 아니다. 그럼 흑해는 저항의 씨앗이 아니라 운명 파괴자의 수족이 된 것인가?’
세르노흐 요새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이해한 테리웬이 눈을 감았다 떴다. 운명 파괴자가 저항의 씨앗처럼 세력을 갖췄다. 실질적으로 운명에 대적할 집단 말이다.
공간 마법진은 진즉에 차단되어 사용 불가능.
모든 도주로가 막혔다.
초월자를 상대할 만한 전력은 없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현대의 초월자들 중에서 직접적으로 운명의 추종자가 된 존재는 단텔 님이 유일했다.
그때였다.
테아렐이 고개를 돌렸다. 심해가 담긴 눈동자가 테리웬 일행을 직시했다. 끅…… 끄윽…… 그녀가 보인 초월자의 격에 물에 빠진 것처럼 호흡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기회일지도.’
테리웬은 익사하는 와중에도 판단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테, 테아렐 님, 저는……!”
“베르덴이 너 데리고 여기 있으래.”
물길에 파문이 일었다.
“다른 건 필요 없나 봐.”
발아래에서 물방울처럼 미세한 수류의 쐐기들이 솟구쳤다. 미처 반응하지 못한 추종자는 발과 허벅지, 그리고 심장과 뇌가 관통되어 즉사했다.
마도의 보호막과 검막으로 대항한 이들은 방어에 실패해 전신이 꿰였고, 나머지는 간발의 차이로 몸을 빼냈다.
<심네르>
물의 가시가 변형되어 일격을 회피한 추종자들을 원으로 감쌌다.
수중 구체에서 탈출하기 위해 마법을 시전하거나 무기를 휘둘렀으나 일그러진 수구는 재빠르게 완벽한 원형을 되찾았다.
“끄륵…… 컥……!”
“꺼어억, 꺽……!!”
폐 깊숙이 바닷물이 쏟아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테아렐은 심해의 수압을 재현할 수 있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의 바다에서 느낄 법한 끔찍한 압력이 온몸을 덮쳤다.
꽈드드드드드득!
뼈와 살이 짓이겨지는 소리와 함께 물의 구체가 붉게 물들었다. 구속이 풀리자 어떤 고체도 섞이지 않은 액체가 팍 쏟아졌다.
테리웬의 의복이 핏물에 젖었다.
“아까 말한 거 들었지? 운명과 생명, 그중 하나만 택하라고.”
“…….”
“죽어도, 역시 운명 편?”
국제 사회의 정상으로서 오랫동안 안면을 익힌 초월자와 적대 관계가 되니 재앙도 이런 재앙이 따로 없었다.
테아렐은 지인이나 다름없는 테리웬을 죽이는 데 아무런 유감도 없는 듯했다. 수많은 인명을 집어삼킨 바다가 무심한 듯이.
테리웬이 무릎을 꿇었다.
“항복하겠습니다.”
베타가 통신 장치로 해당 발언을 보고했다.
[이데라트 연맹장이 투항했습니다.]
* * *
성신 마법의 여섯 번째 별 – 결성, 보르간투아.
발동된 순간 직경 2km의 영역이 외부와 완전히 격리되며, 첫 번째 별부터 다섯 번째 별까지 기존의 성신 마법의 위력을 한층 더 강화한 채로 구현할 수 있다.
이런 천체의 한계를 넘어선 우주의 영역은 ‘일곱 번째 별’을 위한 성소(星所)이기도 했다.
압축과 재정립.
베르덴은 다양한 마법을 효율적으로 줄여 전력을 개선했다. 이번에 드라벤의 마도가 더해져 다시 한번 최적화할 필요가 있으나, 그것보다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다.
쿠오오오…….
화염 운석의 고열과 충격파가 세르노흐 요새를 증발시켰다. 운석의 크레이터는 지하 수십 미터까지 닿아 있었다.
지상과 그 근처에 있던 추종자들은 잿더미조차 남기지 못했다.
본인들이 자초한 최후였다.
베르덴의 감지 범위에 잡힌 운명의 추종자들은 운명을 버리지 않았으므로. 아무도 운명 대신 생명을 선택하지 않았다.
놈들의 맹목적인 복종은 광기가 어려 상식에서 한참 벗어났다.
파지지지지직!
지하로 뻗어 나간 현뢰의 줄기들이 몸을 관통하고 다른 몸을 찾는다.
베르덴이 지하로 떨어지는 동안 얼마 남지 않은 추종자들의 숫자가 가파르게 감소했다. 검으로 막든 마법으로 차단하든, 파멸의 개념을 한순간도 버티지 못하고 죽음이 쏟아졌다.
‘연맹장이 투항이라.’
계획대로 베르덴과 알파는 하늘에서, 테아렐과 베타는 지하에서 요새를 급습했다.
그리고 비밀 탈출로로 추측되는 장소에서 실종된 이데라트 연맹장을 찾았다. 드라벤이 성소를 습격할 당시 학살을 일으켜 옛 왕을 부활시키는 것을 조력한 인류의 배신자를 말이다.
‘흥미롭군.’
베르덴이 팔을 젖혔다. 알파가 품속에서 로브를 꼭 쥐었다. 소멸과 파멸과 합일한 개념이 스태프에 맺혔다.
<로드 아케인: 재래(災來)>
종말의 벼락이 공간을 궤멸했다.
────────────!
어두운 빛이 번쩍이는 순간 수직선상의 지반이 사라졌다. 개념의 후폭풍이 몰아쳐 요새의 지하 태반 이상을 뿌리부터 와해시켰다.
테아렐이 있던 좌표를 제외한 인근 생명 반응이 일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대적할, 수가 없…….’
세포 자체가 소거되는 걸 직감한 어느 추종자가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산산이 흩어졌다. 그 죽음에는 고통도, 의식도 없었다.
쿠웅.
뻥 뚫린 수직 통로를 순식간에 하강한 베르덴이 바닥에 도달했다. 걸음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테아렐 일행이 보였다.
[지상. 제거 완료.]
[지하, 이상 없습니다.]
테아렐은 통로에 맞게 거대화한 베타의 어깨에 앉아 있었다. 그러고는 아주 피 칠갑을 한 테리웬을 가리켰다.
“얘네들은 정보를 캐낼 수 없다며. 연맹장을 잡은 건 좋은데, 생포한다고 의미 있어? 긴급 정상 회의에 데려가면 좋으려나?”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베르덴은 정확히 세 걸음을 두고 무릎을 꿇은 테리웬을 내려다봤다.
“오랜만이군, 연맹장. 세계 회의 이후 직접 보는 건 처음인가.”
“……베르덴 님.”
“메드란트로부터 소식을 들었을 때는 놀랐다. 평생 종족 간의 화합을 주창한 네가 인류의 배신자가 됐다니. 네가 학살을 주도하지 않았다면 루아스교는 결국 드라벤을 막아 냈을 거고, 옛 왕의 신체 부위를 탈취당하는 일도 없었겠지.”
베르덴이 묻는다.
“전(前) 이데라트 연맹장. 옛 왕의 부활에 지대한 역할을 한 소감이 어떻지?”
“이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했습니다.”
테리웬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현재의 국제 사회로는 영겁의 세월이 흐른다고 해도 다종족의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평생에 걸친 노력 끝에 내놓은 결론이지요. 인간, 엘프, 드워프, 수인…… 그들은 겹칠 수 있을지언정 한데 섞이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지만, 그러한 운명을 바꿀 수만 있다면 평화를 이룩할 수 있습니다. 불가능하다고 여겨 왔던 진정한 세계의…… 영원한 평화가.”
모든 종족의 인과를 조율해 서로 간의 교집합을 극대화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종족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테리웬의 꾸밈없는 진심이었다.
평화에 인생을 바쳤으나, 꿈꿔 온 평화는 실현될 수 없다는 걸 말년에 깨달은 테리웬은 절망했고, 그는 다가온 기회를 붙잡았다.
그렇게 운명의 진실을 들은 뒤 기꺼이 추종자의 길을 걸었다. 다종족의 평화를 위해서. 예나 지금이나 테리웬은 화합을 희망했다.
애초에 꿈을 꾸지 않는 자는 운명의 추종자가 될 수 없다.
세상에 대한 실망과 비관 등이 그들이 신세계를 갈구하게 만들었다. 운명을 따른다는 것은 더 뜻 깊은 과거와, 더 나은 현실, 더 완벽한 미래를 위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그렇게…… 운명이 완성되면 모든 걸 돌이킬 수 있습니다. 저희로 인한 희생까지도 전부…… 그렇기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투항을 하겠다.”
“베르덴 님, 그 운명을 파괴하신 당신께서도 평화를 원하고 계시다는 걸 압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런 행보를 보이지 않으셨을 테지요.”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왜 투항했냐고 물으셨습니까.”
테리웬이 단언했다.
“저는 언제나 평화를 바랄 뿐입니다.”
베르덴의 통찰력으로도 테리웬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 당연하게도 제약이 걸려 있어 <기억 공유>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모험극에서 블러디아의 기억을 엿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그런 제약에 속박되지 않는 사도였고 게임의 규칙으로 인해 본래 저항력의 극히 일부만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짓으로 보이진 않는다.’
베르덴은 테리웬이 노래한 꿈이 기만이라고 보지 않았다. 평화를 사랑한다, 그의 말은 진실이었고, 또 명백한 진심이었다.
“그런가.”
대기가 일렁였다.
“가증스럽긴.”
테리웬이 인지할 수 없는 속도로 파멸의 창날이 그의 목을 훑고 지나갔다. 서서히 커지는 눈동자가 불길한 휘광을 반사했다.
쩍.
그 자리에서 참수당한 테리웬의 머리가 통로에 떨어졌다. 비틀거리다 허물어진 그의 몸뚱이는 곧장 파멸했다.
테아렐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물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대충 말하는 걸 보니, 잘하면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거 아니야?”
“연맹장은 인류의 배신자를 이용해 국제 사회를 붕괴시키려고 했다. 특유의 제약으로 인해서 정보의 진위 여부를 확실하게 가릴 수 없는 이상 정보 자체가 분열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지.”
테리웬이 협조하며 아직 드러나지 않은 배신자를 지목하면 어떻게 될까. 변방 지역 곳곳을…… 세 개의 대륙 전반에 걸쳐서 애매하게 추종자들이 활동하는 구역이라고 정상 회의에서 말하면 필연적으로 혼란이 가중되리라.
[대륙 규모의 전쟁이 확정. 해당 정보들은 오히려 전시에서 독. 맹독.]
“서약자로 진실을 강요하면 되잖아? 루아스교의 이단심문관도 있고.”
“그래서 더 문제지. 이렇게 수작을 부렸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배신자를 색출해 왔던 방법을 파훼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이곳에 있는 추종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테리웬만 항복했다. 만약 서약자의 계약과 루아스교의 심문을 속일 수 있다면, 그의 정보는 국제 사회를 한순간에 무너뜨릴 것이다.
고작 테리웬 한 명으로 인해서 세력 간의 연대가 끝장나는 셈이다.
“그렇게 막대한 위험을 무릅쓰고 살려 둘 이유는 없지. 애써 살려 둘 정도로 테리웬의 책임이 얕은 것도 아니고.”
베르덴이 기괴하게 일그러진 테리웬의 머리를 집어 들었다.
냉기가 시신의 일부를 얼렸다.
“지금 우리에겐 이게 훨씬 더 쓸모가 크다. 국제 사회를 위해서.”
“응, 이해했어.”
테아렐은 그의 설명에 납득했다.
“여기 지울 거지?”
“굳이 남겨 둘 이유는 없지.”
“초위 마법으로?”
“그래.”
“알겠어.”
테아렐이 마도의 극한을 발현했다.
* * *
단텔은 가까스로 세르노흐 요새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베르덴의 영역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하필이면 지하에 있었던 터라 온전히 속도를 내지 못한 탓이었다.
‘그래도, 발각되지는 않은 건가.’
우주의 영역의 끄트머리에서 단텔은 전력으로 은폐했다. 운석이 떨어져 요새를 지워 버리는 광경을 두 눈으로 보았다.
존재감을 최대한 죽였다.
초월자의 감지 능력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자기 자신을 낮추었다. 다소 무방비한 상태가 되지만, 그 대신 단텔은 자유로워진다.
‘이대로 그가 영역을 거둘 때까지…….’
버틴다…… 라는 일념으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그때였다.
지축이 떨렸다.
밤하늘의 별들이 절멸했다.
‘설마.’
단텔은 하늘과 땅을 번갈아 보고는 낭패라는 듯 어금니를 깨물었다. 불길한 직감은 머지않아 현실에 나타났다.
‘초위 마법……!!’
쩌저저저저적.
단텔이 딛고 있는 대지 전체가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