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9화 신전 (1)
동대륙의 토벌군단이, 서대륙의 토벌군단이 어떤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지 알 필요는 없다. 대충 개요 정도만 파악해도 차고 넘친다.
초점은 뚜렷하게.
주변시는 흐릿하게.
다른 지역의 군단에 신경을 할애하는 건 본인의 임무를 완수한 뒤의 일이니, 베르덴이 숙지한 내용 전부를 모든 참석자의 머릿속에 때려박는 것 자체가 무식한 용량 낭비다.
베르덴은 지극히 당연하게도 낯설어야 할 고도의 전쟁 전략들을 아무렇지 않게 소화한 자신의 모습을 관조했다.
‘놈의 지식이…… 도움이 되긴 하는군.’
베르덴은 보헤미른 마탑과 전쟁을 벌이긴 했지만 그 승리는 기만과 기습으로 이루어졌다.
발로크 베시아스가 지휘한 마탑은 완전히 함정에 빠지고 나서야 블랙 아워 너머에 숨어 있는 베르덴을 인식했으니까.
장로회, 이티움.
분광의 행렬.
진췌의 포화.
지성의 역학.
이는 보헤미른 마탑의 주력.
다히트 웨스로엘도 유격전으로 전장을 유지했지 보헤미른 마탑과 총력전을 벌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블랙 아워와 소사이어티를 정면에서 압살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자랑했다.
보헤미른 마탑은 엄연히 초월자를 제외한 마탑 무력 서열 2위였다.
한 전장에서 서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정면으로 들이받았다면 공멸, 혹은 베르덴의 패배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베르덴은 철저하게 이티움의 장로들을 꾀어내어 암살했다. 불시에 강습해서 상대의 장기를 헤집어 최대한 전력을 약화시킨 다음에 쐐기를 힘껏 박았다.
다히트의 기억을 온전히 받은 베르덴은 특수전의 달인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베르덴의 경험적 역량은 단기전에 특화되어 있지 국가 간의 대규모 전장을 아우르지는 못했다. 겪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그 공백이 드라벤 르마르크의 일생을 이해함으로써 채워졌다.
초월자 전쟁에서의 모든 경험.
군사 작전의 방대한 지식.
이론만으로 계산할 수 없는 현장 판단의 번뜩임.
반토레온과 안데스가 몸담은 세계 연합과 싸워온 대전쟁의 정수가 베르덴의 뇌리에 새겨졌고, 그것은 현대에 이르러 새로운 세계 연합이 크세리온 제국을 겨누는 칼날이 되었으니.
계획에 없던 변화는 아르카디옴에 참여하기 전, 베르덴이 결국 세계 연합장을 선택했던 판단에 강한 확신을 더해 주었다.
쿵. 쿵. 쿵.
“긴급 정상 회의를 종료한다.”
베르덴은 계획 수립을 마치자마자 의장으로서 해산을 명령했다. 그럴듯한 인사말도, 웅장한 연설도 지금은 사치였다.
……사실 그러려고 하긴 했는데, 참석자들 일부 얼굴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반나절의 회의 강행군은 평범한 머리로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으어어…….”
“귀국, 귀국…….”
“끼에엑.”
참석자 중에서 젊은 축에 속한 벨디른 공화국의 브릴런 최고 의원은 상반신이 활처럼 굽고 눈이 멍한 정도로 그쳤지만.
나이가 제법 든 왕들은 주저앉거나 비틀거리며 간신히 테이블을 짚었다. 몸이 약한 노덴 공왕은 풀썩 기절했다.
실제 피로에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서약자의 언령이 심신을 편안하게 해 주고, 빛의 기적이 정신적 회복을 도왔어도, 고단했던 회의의 시간만큼은 지울 수 없는 얼룩처럼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는 탓이다.
쉬고 싶다.
자고 싶다.
머리 쓰기 싫다…….
필사적으로 구상한 계획안들이 지속된 반려와 회의를 거쳐 모조리 통과될 때까지 최고의 상태를 유지하던 왕들.
그들은 회의 종료가 선언되자마자 기껏 막아 둔 스트레스를 풀어헤침으로써 임의로 머릿속 스위치를 꺼 버렸다.
“언데드가 따로 없군.”
“토벌할까? 씨앗.”
“테아렐, 그 해괴한 말투를 어디서 배워 온 건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피곤한 데다가 해야 할 일도 많으니 이만 본부로 돌아갑시다.”
모험가 길드 본부장인 살베르에게도 참으로 힘든 회의였다.
뇌가 지끈거리는 것 같달까.
‘……내 재임 중에 모험가 총동원령을 내리게 될 줄이야.’
등급에 관계없이 플레이트를 가진 모든 모험가는 길드의 부름에 답해야 하며, 모든 길드장은 본부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역대 본부장들이 이 초법적 권한을 행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것은 특수 개체‘들’이 대륙 전역에서 준동하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대책이므로.
얼마나 많은 모험가가 죽을까.
살베르 웬디시르는 참담하면서도, 다소 추악한 기대감을 느꼈다. 그렇다. 플레이트를 가진 모험가 중에는 현역만 있는 게 아니다.
명예롭게 은퇴한 뒤에도 공식적으로 플레이트의 소유를 허락받은 옛 모험가들 또한 길드 총동원령의 대상이다.
‘한때, 테아렐과 함께했던…….’
살베르는 테아렐의 주변에서 다섯 명의 그림자가 일렁이는 듯했다. 그의 안목으로는 개인 최강이 마의 공포라면, 파티 단위 최강은 수십 년 전에 활약한 테아렐의 모험가 파티였다.
그녀의 동료들이라면 필시 길드의 다급한 외침에 응하리라.
비명과 고통을 낳을 전쟁을 앞두고도 살베르는 그 모험가 파티의 완전한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다는 확신에 환희했다.
물론 스스로도 음습하다는 걸 알기에 마음 깊이 감정을 내리눌렀다.
정상 회의장을 떠나는 발걸음.
베르덴이 제공한 통신 장치를 공식적으로 하나씩 챙긴 참석자들은 짧은 인사를 나누고는 밤늦게 귀국길에 오르거나, 새벽에 출발하기 위해 노르드발트의 거처로 향했다.
머리 굴리는 게 일상인 마법사들도 지친 얼굴로 휴식을 찾았다.
오직 초월자들만 쌩쌩하게 귀국했다.
긴급 정상 회의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자리를 지키는 베르덴.
데우스는 담담히 돌아섰고, 메이아는 ‘테아렐 좀 어떻게 해라’란 의미가 담긴 눈으로 베르덴을 흘기며 데우스의 뒤를 따랐다.
‘나도 저럴 줄 알았나.’
하지만 테아렐의 기행을 자제시킬 생각은 딱히 없었다. 그걸로 저항의 씨앗을 한 명이라도 밝혀 내면 그에게도 이득이었으니까.
여기저기 캐내는 게 영 마음에 안 들면 명단을 넘기든가.
후웅.
베르덴이 회의에서 만들어진 문서들을 아공간에 수납했다.
세계 연합을 창설했고, 연합장 자리에 올랐으니 전쟁 기반은 마련됐다.
이제 놈의 전령이 오기 전 에온의 수장으로서, 또 개인으로서 미루어 둔 일들을 마무리하면 준비는 끝난다.
───로벨린.
베르덴은 막 회의장을 나가려는 로벨린을 향해 의념을 보냈다.
개인적인 용무였다.
───이따 데리러 가지.
로벨린은 능숙하게 내색하지 않고 그대로 복도로 나아갔다.
그렇게 아세트로 올딘까지 떠나 주변이 공허해질 무렵 베르덴, 아드리안, 이자벨라, 알파, 베타, 그리고 에레스만 남게 되었다.
안데스는 일단 라인델과 동행했고, 반토레온은 오랜만에 다크워튼 마탑을 구경하겠다며 안데스를 타고 이동했다.
그 둘은 나중에 하이랜다아에 자리 잡은 초월자 연합의 본거지에서 합류할 예정이었다.
회의장 전체를 차단하여 접근을 방지한 에레스가 말했다.
“여섯 번째 선장의 직속 부대가 파견됐는데 아직 만나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그쪽에서 직접 연락을 취할 기회조차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방주 선장 간의 대화였다.
“어쩌다 보니 자리에 있을 틈이 없더군. 이후에 만나 보도록 하지. 그보다 방주에선 이번 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보류 중입니다. 이렇게 세계 연합이 발족한 이상 신중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방주가 크게 드러날 수도 있으니까요. 죽음의 문, 아니 사문이 인류의 존속에 위협이 된다고 판명되지도 않았고요.”
“내가 옛 왕 자체가 인류에게 위협이라고 보고한다면.”
베르덴은 더는 방주에 어정쩡하게 발을 걸치지 않았다. 경이의 답파자. 새로운 여섯 번째 선장으로서 다른 선장과 같은 권위를 갖고 있다.
“윗분께서는 당신의 의견을 참고해 긍정적으로 숙고하시겠죠. 뭐, 당연한 말이지만 선장으로서는 아니어도 저희 모두가 세계 연합에 힘을 쏟아 난국을 헤쳐 나갈 겁니다. 베르덴, 당신처럼요. 연합장 역할, 잘 어울리던데요.”
방주는 인류의 존립을 수호하는 집단이지 방패가 아니다. 하물며 수인, 엘프, 드워프까지 있는데 방패 역할을 할 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전언입니다. 당신의 직속 부대가 전달할 예정이었는데 제 몫이 됐군요. 곧 아세트로와 쉐오른 장로님께서 주인 없는 땅으로 찾아간다고 합니다.”
“장로님께서?”
“자세한 내용은 만나면 알게 되겠죠? 별개로…… 자, 여기요.”
그가 품속에서 숫자가 기입된 종이를 꺼내 베르덴에게 넘겼다.
“이건…….”
“청구서입니다.”
에레스가 웃었다. 웃고 있었지만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당신하고 성녀가 부순 테이블. 프로하스에서만 발견되는 귀한 빙정암으로 제작한 물건입니다. 정상 회의를 위해, 국고에서 보관하던 걸 꺼낸 다음 정말로 정성들여 준비했죠. 알다시피 프로하스가 재정이 그리 풍족한 나라가 아니라 장인들을 고용하는 데만 제 사비까지 털었습니다. ”
“…….”
“그런데 회의 시작하자마자 박살이 났네요, 하하.”
“…….”
“교국에서 반, 에온에서 반 내 주셔야겠습니다. 돈으로도 못 구하는 거지만.”
청구된 금액은 수십억 단위였지만, 그보다는 이렇게 다시 프로하스의 물건을 훼손하지 말라는 에레스의 강력한 경고가 본질이었다.
알파가 소곤거렸다.
[도망?]
“……그런 거 누가 가르쳤어?”
[일곱 번째 위상. 그레이브 러드워스. 수틀릴 때 도주하면 없었던 일이 된다고 함. 마법도시 비렌테 용병 출신의 조언.]
이자벨라와 알파가 내는 작은 소리는 못 들은 척했다.
“……미안하군. 돌아가서 지불하지.”
“감사합니다.”
[질문 있습니다.]
베타의 외눈이 명멸했다.
[정상 회의장 벽면이 무너진 것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
아드리안이 뜨끔했다.
“아, 그거요.”
에레스가 뒷짐을 졌다.
“노르드발트는 프로하스가 고안한 마법적 방어 설계가 되어 있지만, 기능을 가동하지 않으면 적당히 단단한 성채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성자와 당신이 충돌한 탓에 가동하지 않은 요새가 훼손됐죠. 덕분에 회로를 다시 깔아야 됐습니다.”
“…….”
“하지만 먼저 공격한 사람도, 그로 인해 요새를 부순 사람도 성자입니다. 이 건에 대해서는 당신의 책임은 없습니다.”
에레스가 창밖을 향해 턱짓했다.
“그래서 루아스교에 청구서를 보냈습니다. 두 개.”
* * *
“…….”
“…….”
성녀 에르세티아와 성자 레온하르트가 각자에게 전달된 청구서를 목격했다. 슬그머니 눈치를 보던 두 사람이 북부의 왕이 직접 작성한 고지서를 내밀며 고개를 숙였다.
“잘못했어요.”
“죄, 죄송합니다.”
참고로 루아스 교국의 재정은 교황 로마누스가 담당한다. 짧은 난동으로 인한 손해가 얼마나 컸는지 액수로 환산되었다.
전쟁이 앞에 뒀는데 이게 무슨 심각한 일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일국의 재무를 관리한 적 없는 이들의 소견이다.
“허허.”
특히 검소를 미덕으로 여기는 로마누스는 그저 웃었다.
* * *
비행정으로 보헤미른 마탑으로 돌아온 로벨린은 몰래 밖으로 나와 근처 산등성이에서 달을 바라보며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언제나 반가운 기척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어서 한동안 직접 연락을 못 했군.”
“너 바쁜 거 누가 몰라. 그리고 나도 바빴어. 임시 마탑주니까. 서대륙 곳곳을 누비면서 언데드 토벌도 하고 말이야.”
로벨린은 나무에 기대어 회의가 힘들었다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실제로 힘들기도 했지만 베르덴을 대면한 기쁨을 애써 감추기 위함이었다.
그녀도 베르덴에게 할 말이 있었다.
언데드 토벌을 진행하다 체득한 ‘새로운 마법적 능력’을 보여 주고 싶었다. 다만, 그 전에 베르덴이 할 말부터 들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볼일이 뭔데?”
“대마력.”
베르덴이 말했다.
“너에게도 전수하려고.”
“대마력이라면, 네가 마도 축제에서 발표한 그거? 그건 에온의 고유 마력 운용법이잖아. 나는 에온 소속이 아닌데?”
“그런 걸 따져야 하나?”
베르덴에게 있어 로벨린은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소꿉친구였다.
같은 고아원에서 자란 가족이었다.
“유니아와 카인 덕분에 대마력의 체화를 조금 더 앞당길 수 있게 됐다. 이제 에온의 모든 마법사에게 전수할 예정이고.”
“…….”
“너에게도 필요할 거다. 전쟁을 대비해서.”
대마력을 습득하면 난전에서 생존 확률이 조금은 높아질 것이다. 로벨린이 어느 집단에 속해 있든 간에 대마력을 공유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로벨린은 베르덴의 의도를 이해했다.
고마웠지만 비참했다.
로벨린은 아직 베르덴의 짐에 불과했다. 그녀는 그렇게 느꼈다. 그래도 괜한 아집을 부리며 베르덴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나도 이제 더 강해질 수 있으니까.’
‘우연히’ 자신의 마도를 비약적으로 강화할 체계를 자각했던 순간, 그 순간을 떠올리며 로벨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전수 방법은?”
“몸에 마법진을 새기면…….”
……?!
베르덴이 당황한 듯 눈을 부릅뜨고는 동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신앙?
신성력이 느닷없이 중앙 대륙을 가리켰다. 그것도 아주 강하게.
“왜……? 무슨 일 생겼어?”
“잠깐, 중앙 대륙에 다녀오지.”
베르덴이 그 말을 남기고 곧장 움직이려던 찰나 멈칫했다. 로벨린. 로벨린에게 어디까지 비밀을 감출 것인가.
언제까지 입을 다물 것인가.
걱정이 묻어난 그녀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결심한 듯 이내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자.”
* * *
푸른 산맥의 정상.
조각가 호세가 오두막을 짓고 사는 장소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그 절벽 근처의 설산 동굴에 두 사람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윽고.
베르덴과 로벨린은 어둠이 품은 건축물을 목격했다.
로벨린이 중얼거렸다.
“……신전?”
위로 향한 그녀의 시선이 신전 가운데 솟아오른 조각상에 닿았다.
참으로 기이했다.
조각상이 베르덴을 닮아 있었다.
‘아니, 이건 닮은 수준이 아니잖아.’
베르덴을 완벽하게 본뜬 꽤 커다란 조각상이 거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