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0화 약진(躍進) (2)
유리온이 초월자로의 각성과 동시에 터득한 ‘희생 서약’은 합당한 희생을 치러, 모든 서약을 강화하는 명료한 초월기.
합의 없는 강제성을 기준으로───서약 대상의 격이 높을수록, 서약이 명시하는 범위가 넓을수록, 서약 구조가 일방적일수록 유리온이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무거워진다.
공동 서약: 준칙準則
유리온이 제6사령관에게 자신이 정립한 규칙을 언령으로 강요했다.
내용은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것’.
공동 서약은 유리온도 함께 규칙을 지켜야 하므로 구조는 대등. 일방적이지 않기에 그만큼 희생 서약의 대가는 감소한다.
“이르자면 일대일 투기장이지.”
파공음이 퍼지면서 유리온의 기를 머금은 칼날이 맹렬히 밀려온다.
[……!]
제6사령관이 저항감을 느꼈다. 거리를 벌려 유리한 간극에서 반격하려는 반사 작용이 벽에 가로막힌 듯이 이어지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구속구가 특정 행동을 억제하는 것 같은 불쾌한 감각이었다.
물러날 수 없으면 전진밖에 없다.
멈추는 건…… 논외.
후웅──
제6사령관이 할버드를 여러 방향으로 회전시키며 마주 질주했다. 내리꽂히듯 떨어지는 도끼날과 목으로 솟구치는 검기의 경로가 겹쳤고.
서로의 무기가 튕겨 나간 것도 잠시 자세를 다잡아 동시에 살수를 내질렀다.
쩌엉!
할버드와 서약의 검이 뒤얽혔다.
손아귀가 흔들렸다.
자율 서약의 묵언으로 입을 닫았을 때 유리온의 신체 능력은 제6사령관과 큰 차이가 없어 힘겨루기가 성립했다.
둘이 딛고 있는 땅이 갈라지는 도중 언데드의 전투 감각이 측면을 경고했다.
다만───반박자 늦게.
“증속(增速)하여 관통하라.”
최상위 타락자와 겨루던 레오나가 직선을 관통하던 와중에 언령으로 한층 더 속도를 높이며 경로에 있는 제6사령관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커다란 랜스가 갑옷을 꿰뚫고는 그 안의 육체까지 약간 손상시켰다.
인간의 한계로 초월적인 존재에게 대적할 수 있는 최상위권의 강자들.
세간은 그들을 극점이라 일컬으며 찬양한다.
뒤늦게 쇳소리가 퍼졌다.
제대로 빈틈을 찔려 버린 탓에 무게 중심이 옆으로 쏠렸다.
물러서서 재정비하려고 했지만 뒷발이 서약에 걸려 움직이지 않았고, 되레 앞발과 엇갈려 무게중심만 더 망가졌다.
서약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쩌어어어엉!
갑주에 선명한 검흔이 새겨진 제6사령관이 지면에 부딪치며 밀려났다.
“언데드라서 순진한 건가? 일대일은 무슨. 이곳은 투기장이 아니라 전장이다.”
유리온의 언령은 육신에 국한되지 않고 정신계에도 영향을 주기도 한다.
이그나시아에 비하면 잡기술에 불과하지만 사고를 미세하게 치우치게 할 수 있는 것. 이것은 언어의 힘이었다.
유리온이 직전에 언급한 일대일 투기장이라는 말에 경도된 제6사령관은, 레오나의 기습에 늦게 반응하는 결과를 낳았다.
농락이나 다름없는 전법에 생기 없는 표정이 찰나 움찔거렸다.
둘이 다시금 충돌했다.
불퇴의 규칙 안에서 공방이 이어질 때마다 공기가 흔들렸다. 검끝이 죽은 얼굴 피부를 갈랐고, 할버드의 창대가 몸통을 후려쳤다.
서로에게 가해지는 충격의 연속에 그들의 모습도 잔혹한 전장의 배경에 녹아들었다.
[……!]
제6사령관이 후방에서 날카로운 살기가 날아드는 걸 감지했다.
이번에는 곧장 대응했다.
온갖 사투를 극복한 역전의 전사와도 같이 경험이 풍부하다는 듯 유리온을 일순간에 밀어낸 제6사령관이 강하게 상체를 틀었다.
유리온이 무엇을 하든 간에 뒤를 노리는 인간부터 단칼에 양단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하지만…… 난입은 없었다.
언령의 기사단장은 제8사령관의 화살을 회피하며 기세만 보냈을 뿐.
유리온은 하이랜디아의 국왕이다. 왕은 홀로 서지 않는다. 여타 초월자는 단독에 강하지만 그는 집단에 능숙하다.
언령의 기사단의 호흡은 유리온과 가히 완벽하게 어우러지므로.
초월자의 검기가 정확히 목을 노린다.
피할 수 없다.
물러설 수 없는 상태에서 측면을 내줬으니 일격을 허용해야 한다. 비겁하기 짝이 없는 싸움법에 결국에 시체의 입이 쩍 벌어졌다.
[──────!!]
제6사령관이 서약의 강제력에 대항했다. 뒤틀리는 기분. 그것마저 도외시하고는 앞발이 뒷발의 경계를 넘을 때까지 몸을 뒤로 밀어냈다.
할버드와 검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뜻대로 움직이는 다리.
제6사령관이 뒤로 한 발 물러난 자세에서 상체를 숙이며 대각선으로 양팔을 쳐올렸다. 풍압이 일어나며 도끼날에 사기가 번졌다.
서약의 검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할버드가 수직으로 떨어졌다.
“서약을 어겼군.”
유리온이 제자리에서 맨손으로 흉포한 할버드를 붙잡았다.
그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가 폭증했다.
“위약자(違約者).”
서약을 위반한 존재는 위약자로 취급되어 마땅한 대가를 치러야 하며.
서약자는 그 집법자(執法者)가 된다.
서약 파기: 수렴收斂
공동 서약은 제6사령관에 의해 파기됐다.
콰아앙────!
어두운 황금빛의 권격이 즉각 제6사령관의 명치에 꽂혔다. 갑옷이 박살 났다. 부패한 피부와 근육이 터져 균열이 생겼다.
쿠웅! 쿵! 쿠웅! 쿠우웅!
할버드가 전장 한복판에 꽂혔다.
땅에 몇 번이고 처박히며 날아간 그가 비틀거리다 다시 지면을 짚더니, 이내 고개를 들고 강렬한 적의를 내비쳤다.
[네놈…….]
“말도 할 줄 알았어? 그렇다면 다른 사령관 개체도 언어 표현이 가능하다는 뜻으로 봐도 되겠군. 참으로 신기해.”
유리온이 서약의 검을 회수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것 같은 기술에다가 유의미한 감정의 분출. 너희는 뭐지? 하나부터 열까지 상식적인 언데드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정체를 넘어 본질이 무엇인가.
사령관은 침묵했다.
자아의 뿌리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명령만이 존재의 이유이므로.
“말하기 싫으면 됐다. 어차피 기대도 안 했어.”
상대방의 일방적인 서약 파기로 얻은 힘이 집행을 마치고 사라졌다. 격이 원래대로 돌아갔지만, 상대가 연이어 서약을 무시하면 유리온은 다시금 집법자로서 기능하리라.
“네 죽은 몸뚱이를 다크워튼 마탑에 넘기면 뭐라도 나오겠지.”
유리온은 검을 곧게 세웠다.
“단언하마.”
자율 서약: 공약共約
자기 자신과 맺은 약속을 이행하는 동안 유리온의 초감각이 깨어나는 대신, 그 공약을 완수하지 못하면 상응하는 대가를 받는 절기.
“너는 내게 참수된다.”
[시끄럽, 다……!]
도발에 격분한 제6사령관이 거꾸로 박힌 할버드를 잡아챘다. 사기가 맥동한다. 그건 기예의 형태를 띠며 유리온을 향해 쇄도했다.
* * *
토벌군단의 전장이 훤히 보이는 하늘에서 강력한 중력의 기류가 모여들었다.
* * *
콰아아아아앙!
벨트로아의 화염 구체 군집이 명멸하더니 주변을 증발시켰다. 흘러내린 땀은 기화하여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콰과광! 콰앙! 콰아아아앙!
허공에서 타락한 마법사와 마법전을 벌이는 그의 연산 능력은 계속해서 증가했다. 초월자를 제외하고 화염계 마법에서 화산섬의 마탑주에 비견되는 마법적 존재는 없으니.
적해.
벨트로아 리움 솔라스텔은 붉은 바다다.
[인간이 어찌 이만한 열기를……!]
격렬한 여섯 개의 화염의 줄기가 살아 있는 것처럼 굽이치며 공간을 불태우더니 하나의 구체로 합쳐지며 응축되었다.
시야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 대폭발에 간접적으로 휩쓸린 타락자가 신음하며 거리를 벌리려 애썼고, 벨트로아는 집요하게 타락자의 경로를 불살랐다.
지상에서도 교전이 계속됐다.
레오나는 모든 검격을 막아 내고, 랜스를 내지른 뒤 방패로 상대를 끌어안듯 당겨 투구로 타락자의 안면을 찍었다.
이닉토르는 아슬아슬하게 회피를 거듭하다가 투척 도구를 던져 움직임을 잠시 봉쇄, 스쳐 지나가며 다른 타락자의 손목을 절단했다.
토벌에 여러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건 모험가의 전투법이었다.
최상위 타락자는 수만에서 수십만에 달하는 시체로 제단을 만들어 힘 자체는 극점에 버금 갔지만, 경험의 공백마저 메우지는 못했다.
타락자들이 밀린다.
서서히…….
다만 그와 다르게 전황은 크세리온 제국 측이 약간 우세였다. 연합은 초월자가 한 명인데 반해 사령관은 둘이었으니까.
제8사령관, 루에린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의 속도로 전장을 누비고 있다.
“좀처럼 닿지 않는군!”
팔라딘의 정점────그레고르반이 계속 접근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권각은 허공을 스쳤고, 동시에 화살이 날아왔다.
이미 어깨와 팔, 허벅지 그리고 옆구리에 한 발씩 꽂힌 상태. 교국의 추기경이 아니었다면 진즉 사기에 오염돼 즉사했을 것이다.
그나마 그레고르반이 방어를 자처하는 동안 단장이 사령관에게 도달했지만 그 신묘한 몸놀림 탓에 제대로 일격을 먹이지 못했다.
투확!
뼈 화살이 도중에 폭발했다.
수많은 화살 파편이 눈동자를 장식했다.
<성광: 고해>
“증속하라.”
권격이 숱한 빛살이 돼 쏟아졌고, 검날은 수십 개의 잔상을 새겼다.
카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강!
가까스로 전부 막아 냈지만 그조차도 상당한 부담이 된 지 오래다. 사령관은 초월자급. 더군다나 상성마저 좋지 않다.
‘더 잡아 두긴 어렵겠군.’
단장은 그렇게 판단했다.
그것이 신호였다.
투확!
루에린이 집중해서 날린 화살이 그레고르반의 신성 보호막을 관통─단장의 심장을 노리는 순간 레오나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방패가 충격을 흡수했다.
레오나는 지반에 다리를 단단히 박아 넣어 여파를 견뎌 냈고, 벨트로아는 빗방울 하나하나가 폭발하는 적염의 비를 내려 적들의 움직임을 제한했다.
루에린이 벨트로아부터 떨어뜨리려는 순간 고개를 휙 돌렸다.
[……!]
유리온의 날아차기가 작렬했다. 활로 막아 냈으나 그뿐이었다. 검끝이 활시위에 걸리면서 추격타의 틈이 열렸다.
손목을 잡힌 채 업어 쳐진 루에린의 배를 유리온이 힘껏 짓밟았다.
쩌어엉!
유리온을 추격해 온 제6사령관의 할버드를 단장과 레오나가 막아 냈다. 도끼날이 유리온의 정수리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서약의 검이 다가온다.
루에린이 일순간 압박을 풀고, 두 다리로 유리온의 관절을 제압했다. 손목이 밀리며 검이 빗나갔고, 무릎 뒤쪽이 당겨지며 중심이 흐트러졌다.
그 구도에서 사출한 화살이 유리온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타락자들이 난입했다.
루에린이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자 이닉토르가 앞을 가로막았다.
난전에 이은 난전.
아군과 적이 뒤얽히며 다른 종류의 혼란이 전장을 지배했다. 검기든 마법이든 잘못 날린 순간 아군에게 피해를 입을 정도로 그들은 가까운 간격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를 따라서 크세리온 제국의 전력끼리도 간극이 좁혀질 수밖에 없었다.
“유니아.”
유리온의 속삭임이 하늘까지 닿았다.
“지금이 적기다.”
마법적 반응을 은폐하고 있던 모든 장막과 흐름이 걷혔다. 막대한 마력…… 그걸 감지할 수 있는 자들이 일제히 시선을 높였다.
마도 <무아(無我)>
대마력: 아스트라(Astra).
평소의 경지는 극점에 미치지 못하나 그 최고점은 초월에 닿아 있으니, 마도의 위계 돌파,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아티팩트, 대마력을 일격에 쏟아부었다.
마법을 강화하는 마도의 위성체 여섯 개가 한 번에 소모되었다.
“우리 편 빼고 다 죽어.”
<왜성(矮星): 란시네이트>
중력이 부여된 대규모 폭풍의 투사체가 하늘에서 지상으로 쏘아졌다. 그 중심부에는 베르덴을 연상케 하는 푸른 유성이 박혀 있었다.
삽시간에 직하(直下)하는 마법.
콰아아아아─────────!
중력의 회전체가 지각을 파고들더니 그 안쪽으로 들어간 별이 폭발했다. 지반이 뒤집혔다. 전장 내의 또 다른 전장이 으깨졌다.
쿠과과과과과과과!
로니아 왕국의 공작 출신 타락자가 즉사했으며 나머지는 와해돼 흩어졌다.
크거나 작은 부상을 입은 채로.
실시간으로 여기저기 솟구치며 붕괴하는 대지…… 그 혼돈에서 오직 준비를 갖추고 있던 세계 연합만이 움직였다.
[크헉……!]
레오나의 헤비 랜스가 회전하며 정신을 못 차리는 타락자를 뚫었다. 기의 회전력에 휘말린 놈의 비루한 육신이 갈기갈기 찢어져 분쇄됐다.
[아아아아아아악!]
벨트로아의 적염 기둥이 마지막 타락자를 발밑부터 구워 버렸다. 고열에 잠식당한 수인족 타락자가 새까만 잿더미로 변모했다.
최상위 타락자 셋, 전멸.
사령관들은 위험을 인지하고 무너지는 땅덩어리를 연신 박차며 집결하려 했으나, 그 사이는 이닉토르와 그레고르반이 점거한 상황이었다.
그들은 제6사령관을 뒤로한 채 루에린만을 향해서 돌진했다.
[──────!]
각개격파는 안 된다.
기억나지 않는 본능이 말한다.
제6사령관은 소리 없는 함성을 내지르며 전력으로 추격에 나섰다. 그 움직임은 기습을 염두에 두지 않을 정도로 무리한 운용이었다.
“심지어 동료 의식도 있는 건가. 보면 볼수록 인간 같군.”
[?!]
제6사령관의 눈길이 곧바로 위를 향했다.
강제 서약: 하명下命
“멈춰라.”
희생 서약으로 강화된 절기가 제6사령관의 전신을 붙들었다. ‘목’을 아주 훤히 내보이게 된 그는 시선도 돌릴 수 없었다.
동격인 존재의 움직임을 완전히 정지시킬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찰나인 터라 한 수에 끝장을 내려면 설계가 필요했으니.
목소리의 전이.
제6사령관의 시선 끝에는 서약을 통하여 유리온의 음성을 전달한 단장이 있었다.
음성의 주인은 위쪽이 아닌 정면에서 나타났다.
“유감이다.”
유리온 하이로스가 지나쳐 갔다. 초감각이 가리킨 궤적을 따라 서약의 검이 생기가 전혀 없는 살가죽과 척추를 갈랐다.
제6사령관이 참수됐다.
서약자의 공약은 이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