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1화 약진(躍進) (3)
상대의 주의를 전투에 집중시키고 혼전을 유도하여 적들을 한데 모은 다음── 그 자리에 유니아의 마법을 투사한다.
물론 유리온 일행도 마법 범위에 포함되나, 전력이 필요 이상 떨어지지 않는 선에서 충격을 버틸 방법이 있었다.
공동 서약: 연명聯命
결속을 받아들인 존재와 피해를 나누거나 몰아주는 서약자의 절기 중 하나.
유리온은 극점의 전력들이 감당했어야 했을 피해량 일부를 자신이 떠안았다. 초월자의 체력과 저항력은 그들과 궤를 달리하므로.
서걱.
참으로 건조한 절삭음이었다.
창백한 목이 절단되면서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다. 피도 튀지 않고, 단말마의 비명 또한 없다. 그저 원인과 결과만 있을 뿐이다.
쿵, 제6사령관이 쓰러졌다.
그와 함께 아직 지진이 멎지 않은 땅 위로 머리통이 굴러떨어졌다. 만약 생기가 있었다면 제법 잘생겼다는 평가를 들을 만한 얼굴이었다.
[혼자, 보내…… 지…… 말았…….]
현실을 보지 않는 눈동자.
과거에 전하는 공허한 목소리.
[미안…… 루, 가르…… 트…….]
발음이 불분명해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장을 끝으로 제6사령관이 침묵했다. 제국의 아홉 사령관 중 하나가 연합의 남부 제1군단장에게 무너졌다.
‘다행히 참수되고도 움직이는 언데드 계열은 아닌 모양이군.’
유리온은 발끝에 힘을 줘 극적으로 높였던 속도에 제동을 걸었다.
어두운 황금빛의 기운이 급속도로 흐려지더니, 동시에 내장이 진탕되는 격통이 유리온의 신경계를 날카롭게 찔렀다.
희생 서약의 대가.
강제 서약의 반동.
전가받은 마법의 충격량.
‘베르덴의 후배라고 하더니. 그 파괴력 하나만큼은 절륜하구나…….’
예상보다 제법 부담이 컸지만 상정을 아주 벗어날 정도는 아니다.
흐름을 이어 가야 한다.
“로안.”
“예, 폐하.”
언령의 기사단장 – 로안이 선두에서 질풍처럼 내달렸다. 유리온이 그 뒤를 쫓았다. 사령관의 토벌에 만족하고 안주할 때가 아니었다.
사령관은 하나 더 있으니까.
마법의 여파에 솟구친 대지의 파편들이 가라앉기 시작할 무렵 유리온과 로안의 시야에 이곳의 마지막 전장이 들어왔다.
제8사령관이 제6사령관과 합류하지 못하도록 발을 묶어 둔 극점들이 보였다.
“크으윽……!”
벨트로아 마탑주는 스태프를 붙잡고 있던 오른손의 절반이 날아갔다.
불굴의 이닉토르는 왼쪽 다리에 관통상이 생기면서 기동력을 상실했다.
레오나 부단장은 어깨가 뚫려 헤비 랜스를 놓쳤고, 그레고르반 추기경은 몸에 박힌 화살들을 통해 스며든 사기를 몰아내고 있었다.
시간은 벌었으나, 그것도 이제는 한계.
촤아아악!
제8사령관 루에린이 손에 든 뼛조각을 역수로 잡아 단검처럼 휘둘렀다. 뼈 특유의 예리함에 그레고르반의 배가 찢겼다.
그러고는 지겹게 엉기는 레오나의 가슴에 단검을 박아 넣고 뒤차기로 밀어낸 뒤, 허공에 떠올라 거꾸로 선 채 적들을 노렸다.
유리온이 미간을 찡그렸다.
“뭔 곡예사가 따로 없네.”
“길을 열겠습니다.”
세 발의 화살이 날아왔다.
로안이 검을 휘둘러 두 개를 쳐내고, 남은 하나는 손바닥으로 밀었다. 궤적이 틀어진 그것이 유리온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다시 세 발의 화살이 들이닥쳤다.
로안이 내지른 검기가 하나를 격추했다. 곡선을 그린 검면이 두 개의 화살을 비스듬히 다른 방향으로 유도했다.
그 각도를 크게 바꾸지 못한 탓에 승모근의 일부가 화살촉에 걸려 뜯겼다.
또다시 세 발의 화살이 쇄도했다.
로안은 검을 던져 뼈 화살을 부수었다. 하나는 붙잡았지만, 뒤이어 날아온 화살이 손바닥을 꿰뚫고 전완까지 파고들었다.
화살 한 발 한 발에 담긴 죽음의 무게가 로안의 전신을 경직시켰다.
다음에 날아올 화살이 그의 두개골을 파열시킬 게 자명했으나, 앞서 아홉 발의 화살을 막아 내면서 길은 열렸다.
“증속하여 질주하라.”
유리온이 로안을 옆으로 밀치고 다시금 강하게 전진했다.
로안이 희생하며 루에린과의 거리를 좁히는 시간 동안, 서약의 반동에서 조금 회복했다.
사기의 화살이 갈라졌다.
간격에 들어섰다.
‘이 녀석까지 잡는다.’
유리온이 굽이치듯이 아래에서 위로 서약의 검을 쳐 올렸다. 활을 박살 내고, 그 너머의 목을 절단하는 광경을 그리기 위해.
그 순간 루에린이 활을 잡은 한 손을 놓고 그대로 내리찍었다.
연합의 방식을 학습했다는 것처럼 야만적인 골격의 단검이 유리온의 눈동자에 반사됐다.
서로의 일격이 닿기 직전이지만 누구 하나 멈추지 않았다.
유리온의 입술이 벌어졌다.
강제 서약: 하명下命
사령관의 행동을 잠시나마 정지시키고 먼저 목을 베어 버린다. 뼈의 단검에 찔리긴 하겠지만 그리하면 확실하게 끝을 볼 수 있을 터.
진심이 부딪치는 공간 속에서 유리온도 초월자답게 물러설 줄을 몰랐다.
“멈───”
낯선 검기가 그들을 향해 날아든 건 그때였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
전장이 거의 절반으로 갈라졌다고 해도 좋을 만큼 거대한 검기였다. 정확하게는 순수한 검기가 아닌 죽음의 기운을 근원으로 둔 검기였다.
그 외압에 유리온과 루에린이 각자 반대 방향으로 날아갔다. 흙에 온몸이 더럽혀지는 것도 잠시 곧바로 균형을 되찾았다.
유리온이 하늘을 노려봤다.
‘뭐야, 설마 다른 사령관이 왔나?’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피하지 않았으면 치명상을 입었으리라. 그러나 피하는 대신 서약의 검을 끝까지 내지르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적도 단검을 끝까지 내리찍지 못했지만 말이다.
뚝…… 뚝…….
유리온의 볼에 새겨진 상처에서 붉은 피가 방울져 떨어졌다. 루에린은 출혈이 없었지만 목이 절단되다가 만 흔적이 새롭게 생겼다.
찰나의 정적은 곧 사라졌다.
‘……낭패군.’
새로운 적이 누군지 인식한 유리온이 참지 못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하필이면 비대칭 전력이라니. 벤디에가 상대하고 있던 거 아니었나.’
그의 전장에 거검을 든 크세리온 제국의 사령관이 등장했다. 옛 왕과의 회담에서 모습을 보인 네 마리의 언데드 중 하나였다.
놈이 난입해 온 방향을 바라보자…… 새로운 언데드 군단이 언덕을 덮고 있었다.
“아, 다 이겼는데 이렇게 재를 뿌리네.”
유리온의 군단은 꽤 전력을 보존했지만 전반적으로 지친 상태였다.
저만한 숫자를 정면에서 상대하기는 어렵다.
강제 예속한 언데드 거수는 제국의 군단에 심대한 피해를 준 뒤 타락자들에게 산산조각 나고 있는 터라 활용할 수 없는 상황.
‘혹시 벤디에가 당한 건가. 아니, 그랬다면 저놈도 만신창이가 됐어야 정상이다. 그냥 상황이 예상했던 것보다 많이 꼬였다고 봐야겠지.’
유리온이 손목을 슬쩍 어루만졌다.
통신 장치가 미동도 안 했다.
‘내 통신 장치는 전투 중 망가졌지만, 다른 애들이 이미 알아서 소식을 전했을 터. 관건은 연합 본부에서 비대칭 전력을 보낼 때까지 버틸 수 있는가…… 못해도 몇 분은 버텨야 할 텐데.’
전쟁의 묵시록 – 네크라논이 거구에 어울리는 큰 보폭으로 제8사령관에게 접근한다. 그놈은 연합군을 보고 있지 않았다.
‘승산은 없다. 그래도 해야겠지.’
유리온은 깊게 숨을 내쉬고는……강렬한 전의를 다시 끌어 냈다.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리.’
언령을 발하며 진각을 밟은 유리온이 네크라논의 앞을 막아섰다. 네크라논이 그쪽으로 시선만 보내고는 거검을 움직였다.
카가가가강, 쩌엉───!
두 검이 연이어 부딪치다가 충격파가 일며 맞닿은 채로 정지했다.
“내가 제법 거슬렸나 봐. 이쪽에 전력을 여지없이 투입하는 걸 보면.”
[제6사령관을 처리했군.]
“역시 너도 말할 줄 아는군. 아까 할버드 휘두르던 녀석이 제6사령관이었나? 그래, 내가 이 검으로 목을 베어 버렸지.”
유리온이 칼날에 체중을 실었다.
“복수는 쉽지 않을 거다.”
[그만한 감정은 느끼지 않을뿐더러 목적이 감정에 가려지는 것은 전쟁에 대한 모독.]
네크라논이 그를 내려다봤다.
[성급하게 굴지 마라, 유리온 하이로스.]
“언데드가 누굴 가르쳐?”
유리온이 입을 닫고 높아진 신체 능력으로 기교를 펼쳤다. 거검의 면을 손으로 밀며, 역수로 잡은 서약의 검으로 내리눌러 고정.
그 상태에서 거검을 짓누른 팔을 중심점으로 삼아 몸을 회전시키며 땅을 박찼다.
훤히 열린 네크라논의 안면을 향하는 검끝.
이에 반격해 오는 커다란 건틀릿.
“큽……!”
권압(拳壓)이 유리온을 날려 버렸다. 팔과 무릎으로 막았음에도 신음이 번졌다. 콰가각! 수십 미터가량을 떠밀린 그가 검을 지면에 박았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즉각 돌진하려던 순간 뭔가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로안 단장이었다.
“폐하, 원군입니다.”
“그래, 제국에서 원군이…… 뭐?”
유리온이 휙 고개를 돌렸다.
“우리 편?”
로안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길을 향했다. 새로운 언데드 군단 옆쪽으로 인간들이 보였다. 또 비행정도 나타났다.
벤디에가 지휘를 맡은 남부의 토벌군단이 언데드를 몰아내고 있었다.
우와아아아──────!
와아아──────!
생기가 가득하다 못해 넘치는 저 함성이 타락자가 아님을 증명했다.
‘잠깐…… 그럼 저 언데드들은 지원을 온 게 아니라 후퇴하고 있었던 건가?’
그렇다면 벤디에는 어디에?
유리온이 두리번거리자 아니나 다를까 벤디에가 등장했다.
콰과과과과과과광!
무구형 아티팩트 [아르테]에서 쏟아지는 홍금색의 화살이 전장을 초토화했다. 대량의 언데드를 쓸어버린 그녀가 네크라논을 겨냥했다.
기의 폭발에 흔들리는 지축.
네크라논은 곧장 제8사령관을 회수하곤 남쪽으로 도약했다.
타락의 사문이 있는 방향으로.
탁.
벤디에가 유리온 옆에 착지했다.
“괜찮습니까?”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보다 저 녀석 안 쫓아?”
“옛 왕의 최측근 정도 되는 개체들은 특수한 능력이 있나 보더군요. 저 제3사령관은 언데드를 폭주시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 끝장을 보면 사문을 폐쇄하기 전에 저희 군단도 거의 궤멸될 테죠.”
사령관은 반드시 처단해야 할 개체이나 궁극적인 목적은 사문을 없애는 것.
남부 제1토벌군단과 제2토벌군단은 병기가 자리를 잡을, 적의 앞마당을 확보해야 한다.
불확실한 사령관 토벌에 몰두했다가 병력의 피해가 급증하면 임무의 성공률이 낮아진다. 지금은 계획에 충실해야 할 때다.
“언데드의 폭주……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아주 위험한 능력인 것 같은데. 보아하니 너희가 승리한 것 같다만.”
“마침 지원군이 오지 않았으면 저희 또한 위험했을 겁니다.”
우중충한 하늘에서 선명한 광채가 비쳤다.
루아스교의 비행정 함대가 무지막지한 신성력으로 사기를 정화하고 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교황의 고유한 대규모 비행정이었다.
“로마누스잖아?”
분쟁 지대를 벗어나 로니아 왕국의 타락자들을 상대해야 할 교황이 예정보다 일찍 그들의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벤디에가 말했다.
“성녀에게 계시가 내려왔다고 합니다. 동대륙 남부 토벌군이 위험에 직면했다고.”
“신의 계시?”
“예, 그 결과 교황이 즉각 대도시 브레필드를 완전 정화한 뒤, 연합의 허가를 받아 공간을 이동해 전장에 복귀했고요.”
콰아아앙!
그녀는 언데드군에 계속해서 기의 화살을 사출하며 말을 이었다.
“현재 개요는 이렇습니다.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습니까?”
“이해 안 가긴 무슨.”
유리온이 안도하며 주저앉았다.
“일단 이겼다는 거잖아.”
“정황을 보아 앞마당 확보까지는 무리 없이 진행될 것 같더군요. 그나저나 제국의 사령관을 토벌했다고 들었는데요.”
“아, 그거.”
유리온이 갓 잡은 제6사령관의 시신이 어디에 있나 두리번거리자, 레오나와 이닉토르가 눈치껏 수습해서 가져오고 있었다.
사령관의 시신이 눈앞에 놓였다.
벤디에는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하게 절단된 목의 단면에 주목했다.
“공훈이군요.”
“군단장으로서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초월자들이 크세리온 제국의 전력을 깎아 낸 것에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을 때…… 이닉토르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말씀드려야 할 게 있습니다.”
“말해 봐.”
“이 얼굴…… 처음 본 순간 이상하게 낯이 익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누구를 닮았는지 기억이 났습니다.”
“닮았다고……?”
유리온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벤디에는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두 분도 아시다시피 모험가 길드 본부에는 최초의 모험가와 그분의 파티원들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닉토르는 스스로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제6사령관을 가리켰다.
“최초의 모험가의 동료 중 하나…… 그분과 매우 흡사합니다.”
* * *
전쟁의 소식은 국제 신문사 등을 통해서 세간에도 전해지고 있다. 크고 작은 전쟁에서 거머쥔 연합군의 승리는 신문의 제목을 장식했다.
“각지에서 초월자들이 활약하고 있더군.”
글러트니의 수장───발리온 프레이아는 신문을 통해 전황을 파악했다. 델하룬에서 베르덴과 옛 왕이 충돌했다는 것까지.
전쟁이 격렬해질수록 그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키르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면 초월자들의 생체 조직을 수월하게 손에 넣을 수 있겠네요.”
궁극적으로는 베르덴의 피가 목표였다.
녀석의 유전 정보가 신인류에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기에.
글러트니는 전쟁이 기꺼웠다.
그러나…… 근처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호세는 솟구친 불쾌감에 반사적으로 마음에 품고 있던 불만을 내뱉고 말았다.
“겁쟁이.”
“……?”
발리온과 키르에가 시선을 옮겼다.
“아.”
글러트니에게 붙잡힌 채 신인류의 아기를 가르치고 있는…… 베르덴 신앙자 호세가 아차하며 자신의 입을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