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2화 대공세 (8)
적룡 사르칸드라의 숨결에 내장이 전부 타들어 가는 고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을음에 뒤덮인 채 생명이 꺼져가는 자신을 보며 희열에 가득 찬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과 그 광경을 아주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격룡과 거룡의 시선까지도.
증오스럽다.
운명과 저항, 둘 중 무엇을 선택하든 그건 드래곤의 자유지만…… 존중하지 않는다.
한쪽을 택한 이상 다른 한쪽을 고른 이를 혐오하는 것은 마땅한 이치다. 자신만이 전부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만이 세상을 해석한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것들은 억압하고 짓밟는 것이 순리.
드래곤은 자기중심적이다.
적룡도 그런 논리로 청룡을 살해했다. 하지만 그걸 청룡이 납득할 이유는 없다. 같은 논리다. 살해당한 건 적룡이 아닌 청룡이므로.
원망스럽다.
타인을 죽이는 것은 당연시할지언정 자신을 죽이는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 드래곤의 태생적인 본성이다.
그러나 태초의 드래곤──잿빛의 드래곤이 저항을 천명했을 때 드래곤의 상당수가 저항자가 되어 운명을 거부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청룡도 그 필두였다.
잿빛의 드래곤은 용의 시초였으니, 그의 절대적인 존재감과 유일무이한 위상이 다른 드래곤들의 오만한 기질을 압도한 것이다.
하지만.
저항 세력의 패배와 함께 잿빛의 드래곤은 ‘당신’의 힘에 봉인되었다. 정신적 지주를 상실한 드래곤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나 제법 살아남았다.
올다르크의 반격으로 ‘당신’이 깊은 잠에 빠졌고, 그 여파로 운명전은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중단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건 한시적인 유예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운명의 수레바퀴는 세계를 ‘완성’해 갔고, 이에 따라 운명은 확고해졌으며 저항의 불씨는 점차 꺼져 갔으니…… 휴전이 지속된들 승패만 명확해질 뿐이었다.
이윽고 먼 훗날이었다.
적룡은 결국 운명을 택했고.
청룡은 끝까지 저항자로 남았다.
그 결과 둘은 죽고 죽였다.
혐오스럽다.
‘당신’의 권능에 의해서 사룡으로 재탄생한 청룡은 여섯 번째 사도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더 이상 저항 의지를 품지 않았다.
잿빛의 드래곤을 봉인한 ‘당신’도 싫다.
잿빛의 드래곤을 봉인되게 만든 올다르크도 싫다.
[운명이고 저항이고…….]
이 세계가 멸망에 직면해 있다면 차라리 제 손으로 직접 종말을 일으키리라. 모두가 자신과 같은 고통과 절망을 느낄 수 있도록.
[전부…… 죽여 주마.]
하늘 너머의 암흑을 유영하던 용의 형상이 아래로 기울기 시작한다.
황혼 속의 죽음.
가장 신의가 깊었던 창천의 고룡이, 이제는 순수한 초월종의 본성만을 지닌 채로 극악무도한 파괴 욕구를 드러냈다.
* * *
마렌 왕국의 ‘티에르 후작’은 나름대로 국제 신문을 비롯해 연합이 공유한 정보를 토대 삼아 세계 지도에 현재 전장을 기록하고 있었다.
“아직 30일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전황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과거의 전쟁사는 더 이상 참고가 되지 않는구나.”
델하룬 – 전투 종료. 연합군의 승리.
마경 – 현황 파악 불가.
테르네티아 연방 – 전투 중.
펜드렌 호수 – 전투 중.
동대륙 남부 – 전투 중.
마렌 왕국 – 전투 중.
본래라면 사문 폐쇄 원정은 행군만 해도 수십 일은 걸렸어야 했다.
밤낮없이 날뛰는 언데드 군단이 상대이니 이동이 지연돼, 아마 지금과 같은 양상을 띠려면 여름이 지나 가을쯤은 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말인즉슨 최소 100일에서 200일에 걸쳐서 진행될 전쟁 과정이 몇 배나 압축된 셈이다.
‘마법의 시대.’
공간 가방은 보급 운송 문제를 해결했다.
전이는 거리를 단축시켰다.
통신 장치는 명령 전달 체계를 통합했다.
비행정은 이동 수단의 결정체로서 인류가 진정으로 상공을 지배할 수 있게 했다.
마법적 기술의 발달에 따라 일상만이 아닌 전쟁의 형태도 변화했다.
물론 10대 마탑들과 강대국들이 자원과 병기 등을 제공하지 않았다면, 이런 방식의 전투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현재 군단이 사용하는 특수 공간 가방 하나하나의 가치만 따져보아도 국가 차원에서 엄중하게 관리해야 할 정도였으니…… 특히 아티슨 마탑의 기술적 해자가 괜히 두려워질 지경이었다.
“전 대륙에 퍼진 언데드가 골치이기는 하지만 세계 연합은 건재하다. 분명히 우위를 점하고 있어. 이러면 토벌군단이 패배하지 않는 이상 제국이 역전할 틈조차 없을 터…….”
티에르 후작은 자신의 생각과 전망 등 전쟁에 대한 모든 걸 수기로 기록했다.
원래부터 기록이 취미이기도 하지만, 고대 제국과 벌이는 세계급 전쟁은 그야말로 역사의 현장인데 어찌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전선에 있지 않았으나 인간이자 귀족으로서 작금의 전황을 최대한 알아보거나 예측하려고 애쓰며 깃털펜을 끄적거렸다.
언젠가 후세(後世)가 참고할 수 있도록.
드워프가 금속과 창조의 종족이고, 엘프가 자연의 종족이며, 수인이 야생의 종족이라면────인간은 역사의 종족이다.
역사가 있기에 인류는 발전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역사는 다름 아닌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손길로 쌓아 올려지는 것이다.
아무리 사소하다고 할지언정 그 또한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단편.
티에르 후작은 그런 마음으로 빈 책장을 채웠다.
“음?”
문득 책상 위에 올려 둔 유리컵에서 미세한 파문이 일었다. 체감하기에는 희미한 규칙적인 흔들림이었다.
‘지진? 아니, 그럴 리가.’
마렌 왕국은 건국 이래로 지진이 발생한 적이 손에 꼽는다. 그마저도 진도는 낮았다. 이곳의 지반은 다른 국가보다 단단한 편이었다.
그때였다.
쿠웅───
엄청난 진동이 집무실을 덮쳤다.
쿠당탕!
의자에 앉아 있던 티에르 후작이 당장 중심을 잃고 바닥을 짚었다. 유리컵이 굴러 떨어져 산산조각 나고, 화분들이 엎어졌다.
아름답게 가꾸어 놓았던 책장에서는 이내 책들이 후두둑 쏟아졌다.
“이, 이게 무슨……?!”
흔들림은 멈추지 않았다.
점차 더 격해졌다.
집무실 바깥의 복도에서도 소란이 이는 듯했다.
도저히 두 다리만으로는 일어날 수 없어 간신히 책상과 책장 등을 잡고 창가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창밖에 시선을 던졌다.
“꺄아아아아악!”
“지진, 지진이다!!”
진동에 의한 거대한 소음 속에서 시민들의 비명이 들려온다.
갑작스러운 혼란에 정돈된 질서는 사라지고 통제는 약화됐다. 어떻게든 진상을 파악하려고 애쓰는 티에르 후작의 시야에 낯선 물체가 들어왔다.
그것은 작은 점이었다.
탁 트인 경관에 놓인 작은 점은 시시각각 그 크기를 키웠다. 어두운 그림자로 보였던 작은 점은 곧 특유의 색을 내비쳤다.
눈동자 같은 푸른 불꽃.
날개의 피막만이 존재하는 골격.
첫 번째로 인식하는 순간에는 그렇게 보였지만 다시 눈을 뜨자, 그 존재는 마치 옷을 입은 것처럼 암녹색의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누가 보아도 용의 형상이었다.
티에르 후작은 기록자로서 다른 이보다 그 실체에 근접해 있었다.
유골룡이 아닌 드래곤이 출현한 것은 대략 1세기 전이니, 소거법으로 자연 발생을 제외하면 답은 이미 나온 셈이었다.
“사…… 사룡.”
크세리온 제국을 수호한다는 드래곤이 마렌 왕국에 강림했다.
손이 벌벌 떨렸다.
지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룡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티에르 후작의 도시에 가까워지고 있다. 깨달았다. 사룡의 존재 자체가 바로 진원지였다.
거대한 날개를 한 차례 펄럭이자 주변 공기 압력이 급격하게 변화했으며, 그것은 충격파의 형태로 세상을 강타했다.
사룡이 가속했다.
그 경로를 따라서 숲의 나무가 뿌리 뽑혔다. 지면이 뒤집혀 황갈색의 토사가 간헐천처럼 솟구쳤으며, 근방 산맥의 정상이 무너졌다.
티에르 후작은 그저 난간에 서 있었다.
세계 연합이 구축한 도시의 마법적인 방위 체계는 여전히 작동 중이었지만…… 언데드의 침입을 막아 온 보호막은 오늘따라 유리처럼 얇아 보였다.
그리고.
사룡이 순식간에 도시 위를 지나쳤다.
후욱────콰과과과과광!
사룡에 닿은 보호막은 책상에서 떨어진 유리컵처럼 간단히 박살 났다. 바람막이가 사라졌다. 이내 항거할 수 없는 돌풍이 도시를 후려쳤다.
티에르 후작이 날아가 벽에 충돌했다.
모든 도시의 유리창이 깨졌다.
단순히 스쳐 지나간 것만으로도 내곽 성벽과 고층 건물이 일부 붕괴했다. 그 많은 잔해가 거리에 떨어져 혼란을 가중시켰다.
거리에 나와 있던 시민 상당수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설명할 것도 없었다.
성곽 파편에 깔린 비틀린 팔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붉은 피…….
도시의 기반 시설이 주저앉았다.
세계 연합의 대피령으로 인해 도시나 타운이 많은 사람을 수용하는 형국이었기에 사상자의 절규가 성벽 바깥까지 전해졌다.
“끅…….”
티에르 후작이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벽에 기대어 몸을 일으켰다. 사룡이 떠나면서 지진은 잦아들었지만 눈앞이 아찔했다.
그러고는 다시금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벌컥!
“각하, 괜찮으십니까?!”
그의 충직한 집사가 기사들과 함께 작은 지팡이를 쥔 채 집무실로 들어왔다. 몰골이 꽤나 엉망인 걸 보아 직전의 여파에 휩쓸린 모양이었다.
“괜찮, 네.”
티에르 후작이 손수건을 꺼내 눈에 들어온 핏물을 닦아 냈다.
“방위 마법진은 어떻게 되었나?”
“……마력이 감지되지 않는 걸 보아 모조리 파훼된 듯합니다.”
“이럴 때 마법계 언데드가 침공한다면 크게 낭패를 보게 되겠군. 최소한이라도 방위 체계를 수복하는 데 전념하라 이르게. 보고는 내가 직접 하지.”
티에르 후작이 옆으로 엎어진 책상 서랍에서 통신 팔찌를 찾았다. 당혹감에 젖지 않고 현황을 우선시해 대처하는 모습은 귀족의 귀감이었다.
그러나, 재앙은 끝나지 않았다.
툭…… 투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시선을 높였다.
어느새 불길한 암녹색으로 물든 구름에서 떨어진 빗물이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비에 젖은 사내가 괴성을 지르며 곧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피부가 무너지자 그 안에 있던 것들이 쏟아졌다.
비명이 멎고.
다른 비명이 공백을 채웠다.
죽음의 기운으로 형성된 소나기가 육신을 살아 있는 채로 부패시켰다. 한데 피해를 보는 것은 유기물만이 아니었다.
건물은 부패가 아닌 부식이 진행되어 그 안에 숨은 시민들을 집어삼켰다.
치이이익…….
후작이 있는 내곽 성채에 균열이 발생하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각하, 지금 당장 도시 밖으로 이어진 지하 통로로 안내하겠습니다. 가족분들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시민들이…….”
“티에르 후작 각하.”
집사가 눈을 질끈 감으며 단호히 말했다.
“가셔야 합니다.”
대피령을 내릴 것이지만 그걸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했다. 적어도 후작의 집무실에서 보이는 거리는 폐허가 된 건물들과 살점이 부패한 언데드로 차오르고 있었기에.
통신 장치는 먹통이었다.
에온에서 비밀리에 설치한, 통신 장치끼리 신호를 연결하는 근방의 중추 신호기가 이미 부식되어 파괴된 영향이었지만…… 티에르 후작은 그런 깊은 원리까지 알지 못했다.
전쟁.
어쩌면 세계 연합의 강대한 힘에 눈이 멀어 경시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륙 절반을 불태운 옛 제국의 잔혹함을.
“……대피 경고는 내가 직접 내리겠네.”
티에르 후작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전쟁 기록서를 조용히 움켜잡았다.
* * *
쿠르르릉…….
먹구름에서 짙푸른 번개가 연신 번쩍인다. 사람이 들어가면 금방 벼락에 맞아 죽을 것처럼 천둥 소리가 사나웠지만 반토레온에게는 봄날의 햇살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하, 80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공할 속도로군. 알아차리는 게 늦었으면 도시 몇 개쯤은 더 날아갔겠어. 뭐, 별 차이는 아닌가.”
[어마어마한 차이네. 도시가 보호하고 있는 사람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알지 않나. 한 명 한 명의 목숨은 무엇보다 무겁네.]
“무거우면서도 가벼운 것이 생명이지.”
[반토레온.]
“알겠네, 알았어.”
안데스 네크라일의 지적에 반토레온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깍지를 끼고, 양팔을 쭉 뻗었다.
“사룡을 뜻대로 유도하라는 건 무리한 주문이기는 하지만…… 가급적이면 옛날보다는 희생을 줄이도록 노력해 보지.”
거대한 마력이 요동쳤다.
다크워튼 마탑의 실험 덕분에 리치에서 유골룡으로 강화된 초대 네크로맨서가 급격하게 방향을 틀어 곧장 수직으로 낙하했다.
그의 두개골에 탑승한 광명의 대재해가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푸른 안광을 번뜩였다.
마도 <정뢰(頂雷)>
마도 <사령(死靈)>
8위계 초월자와 한때 초월자였던 언데드가 구름을 빠져나왔다. 동시에 지면과 가까운 거리에서 비행하는 사룡이 시야에 들어왔다.
반토레온의 손아귀에서 극대 번개가 뿜어져 나왔다.
“오랜만이구나, 네크바엘!!!!!!”
수평으로 날아가는 사룡.
수직으로 쇄도하는 안데스.
두 개의 좌표가 일순간 교차하는 지점에서 광대한 충돌이 발생했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
눈이 멀 듯한 푸른 섬광의 기둥이 지상과 하늘을 연결했다. 그 열기를 견뎌 내지 못한 모든 것이 찰나에 잿더미가 되었다.
반토레온과 안데스가 좌우로 나뉘어 미끄러지듯이 대륙에 착지했다.
“손맛이 영 별로인데.”
[경이로운 저항력이로군.]
빛이 가라앉았다.
사룡은 강제로 지면으로 내려왔지만 별다른 충격도 없는 것 같았다. 암녹색의 비늘에는 이렇다 할 흠집이 전무했기에.
유골룡과 같은 푸른 불꽃 형상의 눈동자가 비늘과 같은 색으로 물들었다.
[과거의……미물(微物)들.]
[우리를 알아본 것인가?]
“옛날에 비해 아주 달라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생각했던 것보다 유창하구먼, 기대했던 대로 고룡의 위상을 온전히 느껴 볼 수 있겠어.”
사룡이 가소롭다는 듯이 입꼬리를 비틀며 날개를 폈다. 그 그림자만 반토레온은 물론 안데스를 품고도 남을 정도였다.
[제 처지를 자각하지 못한 꼭두각시들이.]
기류가 원의 형태로 몰아쳤다.
[──────────────!]
사룡의 포효에서 번진 불가해한 존재감이 삽시간에 공간을 잠식했다.
드래곤 피어(Fear).
지표면을 덮은 초목이 공포에 질려 굴복했다. 마치 자살이라도 하는 것처럼 나무와 꽃이 스스로 가지와 머리를 잘라 떨어뜨렸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감각이 밀려왔다.
“음?”
반토레온은 준비 운동도 없이 즉각 전력을 드러낸 사룡의 힘을 통찰했다.
“옛날 아칸드보다 강하잖아?”
[무슨…….]
제1차 초월자 전쟁에서 다수의 초월자를 단신으로 몰살한 옛 왕보다 격이 높다. 반토레온의 전투 감각은 그렇게 판단했다.
둘이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쩍.
사룡의 발톱에 실린 부패한 물방울이 그대로 선이 되어 들이닥쳤다. 둘을 한 뼘 차이로 비껴 나간 그것에 멀리 있는 절벽이 비스듬히 절단됐다.
초고압으로 압축된 물의 칼날.
게다가 초월자에게도 맹독으로 작용할 정도로 짙은 사기까지.
‘급소를 내주면 항상성으로도 버틸 수 없다.’
반토레온은 오랜만에 느낀 짜릿함에 빠져들었다.
“죽이느냐, 죽느냐.”
[전위는 내가 맡겠네. 무리하지 말게.]
“비현실적인 요구는 거절하겠네.”
반토레온이 자세를 잡았다.
“무리하지 않고 저걸 감당할 방법은 없으니.”
반토레온과 안데스의 목적은 자연스럽게 함정으로 네크바엘을 유도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힘을 조절할 생각은 없었다.
전력으로 대항하지 않으면 시간조차 제대로 벌 수 없을 것이므로.
“오는군.”
[저항의 피조물들.]
네크바엘이 돌진했다.
[죽여 주마.]
* * *
멀리서 무지막지한 전투의 기척을 감지했다.
‘이걸 전투라고 할 수 있는가.’
거리가 무색하다.
군단과 군단이 맞붙고도 남을 면적의 전장이 아주 쑥대밭으로 변하고 있다. 초월자라고 해도 저 안에선 평등하게 목숨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을 터.
‘아무리 레프라기움 마탑주라고 해도 저걸 ‘저지’할 방법이 있다니…….’
아티슨 마탑의 번외 장로.
관제(觀制).
중앙 대륙 군단장.
인드렌 피어시아 레이트는 호흡을 가다듬고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믿을 수밖에.”
인드렌이 걸음을 옮겼다.
“펠디안느, 준비는?”
“막 끝났습니다, 선조님.”
아티슨 마탑주───펠디안느 피어시아 레이트가 마도를 닫았다. 급박한 작업으로 인해 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인드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수건으로 몸소 후손의 이마를 두드렸다.
“이제 저들이 사룡을 유도해 주기만 하면 되겠구나.”
아티슨 마탑의 영역에 이어 레프라기움 마탑주의 영역으로 사룡을 공략한다.
그것이 방어 계획의 골자였다.
* * *
서대륙 – 펜드렌 호수.
토벌군단과 하나가 되기 위해 한참 날뛰고 있어야 할 이형체들이 수면 위에 바로 서 있는 거대한 존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흘러간 시간.
마안의 즉발성을 반전시켜 시간으로 변질시킨 고유 마법이 완성됐다. 쩍 벌어진 흉흉한 외눈이 베르덴을 노려보았다.
베르덴마저 죽일 것처럼 살기가 짙었지만 그보다는 사문을 의식하고 있었다.
‘다행히 표적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군.’
적어도 표적을 죽이지 않는 한 연합군을 공격하는 일은 없을 터.
베르덴이 사문을 가리켰다.
“가라.”
[────────────!]
자신에게 1위계의 한계 위계를 부여한 하늘에 대한 원망, 베르덴이 역천에 이르기 전 품었던 가장 어두운 감정을 부여받은 마법적 산물.
외눈박이의 울음소리가 펜드렌 호수 전역에 울려 퍼졌다. 이형체를 저주한 [르비다의 독배]에서 비롯된 격정적인 괴성이었다.
그는 베르덴이 구사할 수 있는 저주 마법을 다룰 수 있었다.
수많은 이형체를 전염시킨 저주.
베르덴의 대리인은 테아렐이 진입한 거대한 사문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갔다. 곧이어 저주받은 이형체들이 줄지어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