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8화 ‘당신’ – 2
대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죽여 온 것일까. 인드렌은 사룡 네크바엘을 상대했을 때보다 더한 위압감에 숨이 막혔다.
공기가 빠져나가며 폐가 찌그러진다.
자살 충동이 피어난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정신력이 마모된다.
언데드와는 본질적으로는 다른 사기(死氣), 그녀가 짊어지고 있는 죄업의 서사…….
알고 싶은가.
느껴라.
나도 느낄 터이니.
───찰박.
인드렌이 한 걸음을 나아갔다. 다리가 떨려 도저히 일어서지 못하는 펠디안느를 부축하며 그 심층의지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신들이 사선으로 뻗은 팔.
피와 육으로 이루어진 삼각형의 천장.
그 아래를 지나자 신들에게서 떨어진 핏방울이 두 사람을 적신다.
[히안테, 제게 미래를 보여주세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나요.]
‘당신’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다만 심층의지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본인이다. 단지 그보다 훨씬 더 앳되고 선한 목소리일 뿐.
‘과거……? 과거의 대화인가?’
인드렌은 눈꺼풀에 맺힌 피를 닦았다. 피비린내가 로브와 몸에 스며들었다. 핏빛의 웅덩이 위에 인간의 발자국들이 선명하게 남아 아른거렸다.
다시 들려오는 음성.
[신들이여!]
[더 이상 우리가 반목해서는 안 됩니다! 저희에게 찾아올 어두운 미래가…… 부디, 부디 한 번이라도 제 이야기를…….]
정십자가에 고정된 신들이 비웃는다. 한때 대륙을 폭정으로 지배했던 고대의 신들이 ‘당신’을 향해 한껏 무시하며 조소를 보낸다.
비교적 나약했고 한없이 친절했던 그녀가 간곡하게 부탁해도 듣는 척도 하지 않는다.
시간의 개념을 통해 우주의 미래를 알게 되었으나 너무나 먼 미래다.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을 정도로.
자신이 죽고 난 뒤에 세상이 어떻게 되든 간에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무리 이타적이어도 영겁 뒤에 올 결말을 누가 생각하겠는가.
[오직 나만이…….]
혈해(血海)에 파문이 인다.
찰박!
무심코 앞발에 힘이 실린 탓에 바지 밑단이 완전히 붉게 물든다.
하아…… 하아…… 하아…….
펠디안느는 선조가 지탱해준 덕분에 간신히 신전의 중심에 닿을 수 있었다. 덜덜덜. 본능을 거부하고 애써 턱끝을 쳐올렸다.
광활한 빛을 집어삼킨 신좌의 위세.
심층의지가 몸을 일으켰다. 빛을 등진, 아니 모든 빛으로부터 떠받들어지면서 생겨난 그녀의 그림자가 천천히 늘어지기 시작했다.
터벅.
인드렌과 펠디안느의 머리가 저도 모르게 바닥에 처박혔다. 육체에 끼치는 영향력이 아니었다. 영혼이 짓눌렸다.
기체처럼 아른거리고.
액체처럼 유연하며.
고체처럼 실체가 확실한.
그들은 지금까지 개념적으로만 알고 있던 영혼의 형태를 자기 자신을 통해 깨달았다.
아 하 하 하 하!
신전의 시체 대부분이 전보다 더 크게, 더 격렬하게 비웃음 소리를 사방에서 쏟아냈다. 그것들이 조롱하는 대상은 신전에 들어온 손님들인가, 신전의 주인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어떤 시체들은 신음하며 슬픔을 쏟아 냈다. 체념이 서린 얼굴로 살점 사이로 드러난 성대를 길게 울렸다. 절망과 회환이 가득했다.
더 이상 고통받기 싫다는 듯이 극히 일부의 시체는 몸부림쳤다.
기껏해야 다리만 흔들 뿐이었지만.
심장이 없는 신이 중얼거렸다.
[동력원.]
머리가 효수된 신이 낄낄거렸다.
[아크.]
피부가 벗겨진 신이 흐느꼈다.
[신인류.]
터벅.
심층의지가 멈춰 섰다. 그녀가 가볍게 손짓하자 두 사람이 강제로 일어섰다. 고작 두 걸음 앞에 ‘당신’이 있었다.
‘여전히……내게 보이는 것은, 저 눈물뿐이구나.’
‘당신’은 별빛이 존재하지 않는 우주와 같은 로브를 두르고 있었다. 어디가 머리이고, 어디가 팔인지 각 신체 부위의 위치는 인식할 수 있으나, 피부는 어떤 색인지, 이목구비는 어떠한지 식별되지 않았다.
유일하게 피눈물만이 뚜렷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는 감정의 파편…… 인드렌은 그제야 신전 곳곳을 채운 무수한 피 웅덩이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알았다.
그것은 시체들이 흘린 피가 아니라 ‘당신’이 쏟아 낸 눈물이 고인 흔적이었다.
[올다르크는 언제나 고고했지만 한편으로는 더없이 인간적이기도 합니다. 인간적이기에 그런 선택을 내릴 수 있는 거죠. 또한 마법사답게.]
“마법사답다…….”
[펠디안느 피어시아 레이트.]
펠디안느가 흠칫했다.
심층의지가 그야말로 신처럼 경건하게 손을 아래로 모은 채로 한 걸음을 더 다가왔다. 이제 그들은 한 걸음 간격에 놓여 있었다.
펠디안느는 심층의지가 강림한 목적을 듣기 위해서 다가왔다. 제6사도를 배웅하러 왔다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을 말이다.
그가 어떻게든 ‘순례길’을 걸어왔으니 심층의지는 곧 답을 주었다.
[제가 관여하지 않는 건 제6사도의 전쟁뿐입니다.]
전쟁이라는 조건부.
‘전쟁 이외에는 개입한다.’
펠디안느는 당연히 그럴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깊게 심호흡한 그는 ‘당신’의 허락하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표층의지와…… 심층의지가 분리된, 채로는…… 한계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올다르크처럼 은밀하게 대륙을 누빌 수는 없죠.]
심층의지가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하고, 옆에 있는 정십자가에 손등과 발등, 그리고 심장에 말뚝이 박힌 신이 그녀를 대변했다.
[하지만 직접 나서지 않고 국면을 임의로 설계하는 것은 올다르크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건 오히려 제 방법이죠. 그가 제게 패배하며 배운.]
“…….”
[올다르크에게 이렇게 전하세요.]
펠디안느의 심장이 펄떡거렸다. 이곳은 정신계가 아니다. 실재하는 장소다. 방금 그는 실제로 죽었으며, 다시 살아났다.
산산조각난 몸을 ‘창조’하고, 본 영혼을 불어넣어 부활시킨 것이다.
‘운명의 주인의…… 권능.’
그녀가 속삭였다.
=당신 뜻대로 될 것 같나요?=
* * *
[운명서].
발리온은 책장에서 누군가, 아니 뭔가가 떨어뜨린 책을 노려봤다.
섣불리 줍지 않았다.
‘……이건 무슨 언어지?’
방대한 역사 지식을 품기도 했고 자기 자신이 수백 년간의 기억을 가진 살아 있는 역사인데도 듣도 보도 못한 문자.
대륙 공용어가 생기기 전에는 부족별로, 인종별로, 국가별로, 대륙별로 많은 고유어가 존재했지만 이것과 비슷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의미를 헷갈릴 일도 없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주변을 재차 확인했다.
이렇다 할 기척이 없는 공허한 시타델의 도서관은 침묵으로 반응했다.
글러트니의 장기를 이식하면서 이질적으로 변모한 직감이 조언했다. 이 시타델에는, 옛 왕에게는 인지를 초월한 힘이 작용하고 있다고.
……슥.
발리온은 의심을 품으며 책을 집었다. 무시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책이 무엇이든 간에 무사할 거라는 확신이 있기도 했으므로.
먼지를 툭툭 털고, 운명서라는 제목이 적힌 책장을 가볍게 넘겼다.
[별빛은 거짓이다.]
“……거짓?”
마찬가지로 기이한 언어로 쓰인 문장이 페이지 한가운데에 떡하니 자리했다.
나머지는 보란 듯이 여백이었다.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우주는 영원하지 않다.]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다. 또 한 문장이다.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제작된 책은 처음이었다. 미간을 좁히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종말.]
발리온이 멈칫했다.
이상했다.
이 페이지를 넘기면 안 될 것 같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하나 발리온은 신체의 거부 반응을 억누르고 다시 운명을 탐독했다.
이번에는 여백이 없었다.
[마지막 온기에 기대어 선 (발리온 프레이아)에게 진실을 밝힙니다.]
발리온의 본명이 들어간 문장 다음에 이어 수많은 글자가 서로 최소한의 간격조차 두지 않고 빼곡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우리가경이롭게올려다보던밤하늘은수억년전사멸한별들이남긴거짓된환영일뿐이우주는이미창조의불꽃이꺼져버린암흑의세계입니다]
[우리는무한한빛들에둘러싸여있지않습니다찬란했던어제의하늘에서도그이전의밤에도우리는텅빈허공을맴도는잔상만을바라보며살아왔습니다]
[끝없는공허속에홀로남겨진우리세상은이미서서히온기를잃어가고있고종극에는영원한적막속에서우리를끝으로우주는누구에게도기억되지못한채종말을맞이하고말것입니다]
[더이상당신의존재자체가부질없으니신인류는지워버리고자살하세요당신의연인당신의흔적모두무가치할뿐이니미련가질필요없습니다괜찮습니다영원한순환으로제가구원하겠습니다]
[안심하고 죽으세요.]
글귀에 압도당한 발리온은 그 전부를 읽기도 전에 공포에 질려 도서관을 뛰쳐나갔다.
* * *
‘당신’의 속삭임을 들은 펠디안느의 존재가 갑자기 사라졌다.
“펠디안느……!”
[그저 바깥으로 돌아간 것뿐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거짓은 아닐 것이다. 굳이 거짓을 말할 정도로 대등한 관계가 아니니까. 그녀가 하고자 했다면 이미 둘 다 정십자가의 시체가 되었다.
심층의지는 방금까지 펠디안느가 서 있던 공간을 응시하다가 인드렌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시체들의 조롱 섞인 웃음소리가 배경음처럼 감돌았다.
[인드렌 피어시아 레이트.]
“……말씀하시게.”
[질문은 하나만 받을게요.]
궁금한 게 있으면 대답해 주겠다는 건가? 인드렌은 침을 삼켰다. 어째서 그녀가 이런 호의를 베푸는 건지 모르겠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인드렌은 이렇게 두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지만, 또 이렇게나 호기심이 자극된 적도 없었다. 그는 ‘당신’에 대해 알고 싶었다.
“어째서…… 그리도 슬피 우는 것인가?”
[…….]
심층의지는 빤히 인드렌을 바라보더니 살짝 머리를 기울였다. 역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소년의 외형으로 고정된 인드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인드렌도 1세기 넘게 살아온 존재지만 그녀에게는 언제나 어렸다.
[한때는 진심을 다해 모두에게 호소하고, 또 이해를 구했습니다. 설득하고, 부탁하고, 기도하고. 하지만 그 누구도 저와 같은 마음을 갖지 못했죠.]
“…….”
[저는 홀로 종말에 대비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친구인 올다르크에게 이해를 바랐어요. 물론 예상대로 그는 제 방식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
[그래서 제가 물었죠. 영원한 순환 이외에 대안이 있느냐고. 이에 올다르크가 답했습니다.]
“…….”
[적어도 그것은 아니다.]
심층의지가 낮게 웃었다. 작은 소리였지만 신들의 비웃음보다 훨씬 크게 느껴졌다. 그녀가 인드렌에게서 손을 떼고 약간 허리를 굽혔다.
[올다르크는 지금에 이르렀음에도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했어요. 그런데도 제가 택한 해답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세계수, 잿빛의 용 등 저와 함께 동등하게 살아왔던 모두가 제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올다르크는 과거, 현재, 미래의 끝없는 반복은 결국 죽은 세계라고 표현했죠.]
“…….”
[영영 소멸하는 것보다 영원히 존속하는 것이 옳은 게 당연한데. 운명이 반복될 때마다 과거를 망각하게 해주겠다고 했는데. 제가 모든 것을 기억하며 고통을 자처하겠다고 했는데.]
심층의지의 피눈물이 더 굵어졌다.
[결국 설득하려고 했음에도 이해를 받지 못한 것에 저는 크나큰 슬픔을 느꼈습니다. 하나 이제 아무렇지 않습니다. 이제는 괜찮습니다.]
“……무엇이 괜찮은가.”
그녀의 말을 대신하던 신, 그것의 머리가 한순간에 꺾였다.
우드드드득!
정십자가에 매달린 신들의 목이 뒤틀렸다. 비웃음 소리가 뚝 멎었다. 정적 속에서 심층의지의 눈동자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완전히 떠진 오른쪽 눈동자가 인드렌을 코앞에서 직시했다.
=저는 더 이상 이해를 바라지 않습니다=
“……!!!!”
=내가 옳으니까=
‘당신’이 그렇게 단언하면서도 잠시 멈칫하곤 말을 이었다.
=다만 베르덴에게만은 이해를 구하려고 합니다=
베르덴?
어째서인가?
=그럴 자격이 충분하기에=
‘당신’이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하더니 허리를 곧게 세웠다.
=제6사도의 전쟁이 끝나 가는군요=
“……!!!!”
=보고 싶은가요?=
인드렌은 신격이 몸이 으깨질 듯했지만…… 정신을 잃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금 더, 조금 더 알고 싶었다.
=확인하시길=
‘당신’의 가느다란 손끝이 인드렌의 눈동자를 깊게 파고들었다.
인드렌은 그녀가 보는 시야를 공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