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7화 ‘당신’ – 1
초대 마도왕은 세상의 뒤편에 숨어 암약하고 있고, ‘당신’은 반쯤 잠들어 있다.
강제로 이루어진 휴전 중에는 앞서 움직이는 측이 불리하다. 섣불리 손을 뻗으면 적에게 손등이 잡히는 구조인 것이다.
운명의 제6사도─옛 왕을 부활시키려고 과도하게 개입했다가 사회에 녹아들어 있는 운명의 추종자들이 다수 발각되어 저항자들에게 의문사를 당했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러한 살벌한 눈치싸움은 각 진영의 일원들 사이에서만 벌어졌다.
절대자들은 침묵했다.
그들은 휴전 중에 ‘준비’할 수 있을지언정 ‘행동’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다.
먼저 다가가면, 아주 가까이 다가가면 가장 위대한 존재들이 반응한다. 심지어는 실행할 수 있다. 그대가 한 걸음 다가왔다면, 그들 또한 한 걸음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관제 인드렌은 초위 마법 <오벨리스크>의 탑으로 시타델의 근원을 일부 봉쇄했다.
사도의 근간, 본원에 접촉함으로써.
조건이 갖춰졌다.
=……=
펠디안느는 심장이 순환시키는 피가 역류하는 것만 같았다. 시타델 중심에 간섭하면 ‘당신’의 표층의지가 강림할 줄 알고 있었다.
시타델을 고정시키는 계획은 다름 아닌 펠디안느가 입안했으니까. 철두철미하게 준비했다. 실제로 여태껏 의도한 대로 흘러갔다.
시타델에 나타난 표층의지와 대면하는 것도 설계된 흐름이었다.
다만, 문제는───시간.
“끅, 끄륵…….”
펠디안느의 계산으로는 아직 표층의지가 강림할 때가 아니었다. 왜지? 왜? 왜? 왜? 왜? 왜 오차가 생긴 거지? 뭐가 요인이지? 변수가 생겨 버렸다. 치명적인 변수가아아아아아아.
펠디안느가 제자리에 선 채로 경련했다.
인드렌은 후손이 고통받는 것을 보고도 움직일 수 없었다.
‘대체…… 누구인가.’
등 뒤에 있는 알 수 없는 존재감이 인드렌의 행동을 억제했다. 전신이 떨렸다. 격에 압도당했다. 이런 적은 평생 처음이었다.
일반적인 어휘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 그걸 최대한 일반적으로, 또한 알아듣기 쉽게 표현하자면…… 뒤에 괴물이 있었다.
인드렌은 굳어 버린 입술을 억지로 벌렸다.
“자네가…… ‘당신’. 인가?”
대답을 듣기도 전에 펠디안느가 왔던 어둠 속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언데드들이 오고 있었다. 시타델에 침입한 악성 종양─── 초월자───불순물을 없애기 위해서.
[카아아아아아악!]
“아, 안 돼! 정신 차려라, 펠디안느!!”
제자리에서 도망치지 못하는 펠디안느를 언데드가 덮친다. 인드렌이 지키려고 했지만 마력회로 재활성이 너무 늦었다.
그 순간에 인드렌의 머리 옆으로 빛으로 이루어진 팔이 천천히 뻗어 나왔다.
츳.
시타델 지하층으로 들어온 모든 언데드가 단말마의 비명조차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망자들의 절규가 감돌던 자리에 정적만 남았다.
펠디안느가 주저앉았다.
“끄윽, 끅, 끄흐으……!!”
경련은 말끔히 사라졌으나 그 잔향 때문에 호흡에 장애가 생겼다. 스스로를 교살할 것처럼 목을 부여잡고 필사적으로 진정시켰다.
눈물이 맺힌 얼굴로 고개를 들어 선조 뒤에 서 있는 존재를 바라봤다.
“어째서…… 표층의지가, 지금 이곳……?”
펠디안느가 움찔했다.
본래 절반쯤 눈을 뜨고 있어야 할 표층의지가 한쪽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대신……그 대신, 그 대신, 그 대신, 그 대신, 그 대신, 그 대신, 그 대신, 그 대신, 그 대신, 그 대신, 그 대신, 그 대신, 그 대신, 그 대신.
‘당신’이 오른쪽 눈을 떴다.
펠디안느는 그제야 현상의 원인을 이해했다.
모든 변수는 그녀의 의지였다. 그녀가 억지로 강림 시간을 앞당긴 것이다.
완전히 깨어나기 전에는, 자연스럽지 않은 행동을 취하지 않을 거라는 저항자들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가엾게도=
표층의지의 목소리가 파문이 되었다. 빛으로 덮여 인식할 수 없었던 얼굴의 이목구비 중 목(目)의 윤곽이 두드러졌다.
여전히 눈동자는 볼 수 없었다.
완전히 들어 올려진 눈꺼풀 아래에는 어떤 어둠보다 깊은 심연이 있었다.
거기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동시에 펠디안느와 인드렌의 오른쪽 눈동자에서도 피가 볼을 타고 떨어졌다.
또옥…….
세 명의 붉은 눈물이 시타델의 근원적 어둠에 닿아 스며든다.
그들은 어느새 신전에 있었다.
“읏……!”
“……!”
따스한 햇살이 안겨 왔다.
신전에는 아무도 없었으나 아티슨 마탑의 선조와 후손은 안락함을 느꼈다. 만약 주인이 나가라고 하면 기둥에 머리를 처박고 여기서 아주 죽어 버려도 좋을 정도였다.
그때 소름 돋는 바람이 불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이자 거대한 신전 곳곳에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시체는 온전하지 않았다. 대부분 토막 난 상태로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채였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새빨간 웅덩이에 떠 있는 선홍빛 장기들이 연신 맥동한다. 굴곡진 부분마다 고인 크고 작은 피의 연못들은 잔잔한 파도를 품는다.
신전의 중심부로 이어지는 길 양옆에는, 수학적인 단위를 벗어난 정십자가들이 서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늘어섰다.
각 정십자가에 어떤 존재들이 온전한, 혹은 참혹한 모습으로 걸려 있었다. 인드렌은 저들이 누군지 알지 못했지만 펠디안느는 들은 것이 있어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었다.
그들은 신이었다.
세간에서 말하곤 하는 신적 존재들이 어느 신전의 일부로 전락한 것이다. 평화로운 하늘에서 괴조들이 형용할 수 없는 울음소리를 내며 정십자가에 내려앉아 신들의 육신을 쪼았다.
[아아아아아─────!]
[으아아────!]
누군가는 고개를 숙인 채 한없이 흔들거렸고.
누군가는 떠나가라 비명을 질러댔다.
정십자가에 박힌 신들이 내는 소리가 불협화음을 이루었다.
그것 자체로 찬송가가 되었다.
대앵.
이 신전 전체에 영혼을 울리는 아름다운 종소리가 메아리쳤다. 사방 모든 소리가 꼬이고 얽히자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했다.
신이 못 박힌 정십자가들 사이에 두 명의 마법사가 놓여 있었다.
“펠디, 안느…….”
인드렌은 바닥을 기었다.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몸을 잡아끌었다. 그렇게 공포에 질린 펠디안느에게 다가가 작은 품으로 감쌌다.
“펠디안, 느.”
“아아…….”
“펠디안느!!”
인드렌이 초월자의 격을 담아 소리치면서 후손의 어깨를 세게 흔들었다. 그 자극에 펠디안느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저게, 무엇이냐.”
인드렌이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펠디안느…… 대답해 다오……! 대체, 도대체 저게 무엇이냐……!!”
“표층의지란…… 잠들어 버린, 본체를 대신해…… 운명, 운명의, 수레바퀴를 셀 수 없이…… 돌려…… 그 운명의 오차를, 조율하는, 의지…… 표층의지…… 말 그대로, ‘표층’의 의지…….”
펠디안느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신’이, 불완전하게라도…… 누, 눈을 완전히 뜬 순간…… 겉이, 아닌…… 속의 의지까지…… 잠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
보아라.
나도 널 보겠다.
“서, 선조님…… 선조님…….”
펠디안느는 웃을 수 없었다. 아이처럼 인드렌에게 매달렸다. 식은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어떻게든 그에게 답을 해 주었다.
“……‘당신’입니다.”
천국 같으면서도 지옥 같은 신전에 하나의 권좌가 있었다. 제물이 된 신들이 고통과 절규로써 찬양하는 성례(聖禮)의 길 끝에 유일하고도 무이한 신좌가 높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좌에 앉아 있는 여인은 오직 고개만을 비스듬히 기울인 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자세로 두 사람을 지그시 굽어보았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피눈물을 끊임없이 흘리면서.
운명의 창조주.
절대신.
=올다르크는=
‘당신’의 심층의지가 말했다.
펠디안느가 울부짖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크으으으윽……?!!!!”
고막에서 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인드렌도 그건 마찬가지였지만 초월자의 의지로 견디며 제유의 마도를 개방해 서둘러 펠디안느에게 보호막을 씌웠다.
=잘 지내나요=
소용없었다.
펠디안느가 고통이 몸부림치다가 스스로 두 눈을 파냈다. 인드렌이 뒤늦게 말렸지만 통제가 거의 되지 않았다.
펠디안느는 저항자이지만 인간이다. 평범한 인간은 절대적인 신격을 견디지 못했다. 그가 눈구멍을 통해 자신의 뇌를 꺼내려는 걸 어떻게든 막으면서 인드렌이 일단 입을 열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잘, 잘 지낸다고 한다! 잘 지내니까 펠디안느가,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가요=
펠디안느가 터져 버렸다.
뇌수가 튀었다.
피가 튀었다.
뇌는 곤죽이 되어 그 자리에 놓였으며, 펄떡거리는 심장은 굴러 무릎에 부딪쳤다.
“……어?”
인드렌은 후손의 죽음을 코앞에서 목격하고는 눈을 부릅떴다. 숨이 가빠졌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그의 눈동자에 가득 찼다.
“─────────!”
절대적인 신격에 저항한 끝에 일어나 고유 마법을 난사했다. 콰과과과광! 신좌가 마광(魔光)에 휩싸였다. 마법의 빛이 곧 가라앉았다.
‘당신’의 본심이면서 본질인 심층의지는 자세조차 변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대앵.
천상의 종소리가 다시금 들려오자 인드렌 뒤에서 숨소리가 들려왔다. 직전에 터져 죽은 펠디안느가 제 몸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펠디안느가 죽었던 흔적이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앉아있는 신전의 길은 깨끗했다.
“서, 선조님?”
“이건 무슨…….”
[그것이 죽음의 형태입니다.]
정십자가에 매달린 신이 말했다. 그는 심층의지의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당신’이 신을 통해 그들에게 대화를 권했다.
[펠디안느 피어시아 레이트는 제 신격을 견뎌 낼 수 없기에 이렇게 목소리를 빌리는 것을 인드렌 피어시아 레이트는 이해해 주시길.]
펠디안느를 통찰하니 절대로 속일 수 없는 생명이 느껴졌다.
감정이 순식간에 식었다.
인드렌은 더욱 머리가 복잡해졌다. ‘당신’의 반응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적대하는 것이라면 쉽게 납득하겠건만 그녀에게서 어떠한 적의도 일절 느낄 수 없었다.
‘펠디안느는 저항자의 일원이나 제대로 사고할 수 없는 상태…….’
인드렌은 후손을 대신해 물었다.
“우리를, 죽이지 않는 겐가?”
[어째서 죽여야 하나요?]
“그야…… 적이지 않나.”
[적.]
심층의지가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정십자가와 하나가 된 신들과 신전 주변에 널린 시체들이 웃어 댔다.
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
그리고, 뚝.
웃음은 한순간에 멈췄다.
[제 숙적은 올다르크입니다. 올다르크밖에 없지요. 올다르크를 따르는 펠디안느도 엄연히 적으로 분류할 수 있겠으나, 당신을 생각해서 그러지 않겠습니다. 이 자리는 그를 위한 게 아니기도 하고요.]
“나를 생각해서라고……?”
[초월자는 원치 않은 저항자…… 저와 올다르크와의 전쟁에 휘말린 피해자입니다. 이에 대해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상관없이 저의 잘못이기도 하죠.]
심층의지의 피눈물이 조금 더 굵어졌다.
[올다르크를 죽이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인드렌은 침을 삼키면서 억지로 주먹을 쥐어 손의 떨림을 억눌렀다.
‘뒤틀렸다.’
그녀에게서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광기가 느껴졌다. 사죄에 진심이 묻어났다는 점이 특히나. 이그나시아도 이에 비견될 수 없었다.
인드렌은 그럼에도 대화에 응했다.
“우리를 죽이지 않을 거라면, 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인가. 시타델을 지키기 위함인가? 더 나아가 전쟁의 판도를 바꾸기 위해?”
[나는 그 어떤 개입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오직 내게 주어진 운명이니.]
“……!”
옛 왕의 목소리였다.
[제 여섯 번째 사도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 저는 개입하지 않아요. 처음부터 개입할 생각도 하지 않았죠.]
“그럼 왜……?”
[저는…….]
심층의지의 음성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를 배웅하러 왔습니다.]
* * *
시타델의 도심에서 확산하는 충격파에 건물들이 차례대로 무너졌다.
거리를 질주하며 아칸드와 베르덴이 부딪쳤다.
검기와 마법이 어지럽게 얽혔다.
쿵.
베르덴의 심장에 절기를 먹였다. 그가 이를 깨물며 스스로를 중력으로 억눌렀다. 모든 척력을 감내하고는 제자리에서 [인테리스]를 휘둘렀다.
콰아앙! 쿠구구구구구웅……!
아칸드가 건물 잔해에 깔렸다.
“하아, 하아…….”
베르덴이 그대로 쇄도하여 용검을 짓눌렀다. 힘이 대립했다. 그 순간 건물을 뚫고 나온 벤디에가 극검을 찔러 넣었다.
복부를 꿰뚫린 아칸드가 피를 머금은 채 처절하게 웃었다.
“전부 오라.”
함성을 내지르며 베르덴과 벤디에를 날려버린 그가 시타델 안쪽으로 향했다.
옛 왕의 알현실로.
그가 흘린 피가 자취를 이루었다.
* * *
‘아칸드를 배웅한다?’
영문 모를 소리투성이.
인드렌은 뭐라고 말해야 할 지 몰라서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마법사가 자랑하는 이성이 이곳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게, 전부일, 리 없습니다.”
“펠디안느, 괜찮느냐!?”
그때 조금이나마 제정신을 차린 펠디안느가 입술을 달싹였다.
“심층의지를 드러냈다면, 분명, 이외에도, 다른 목적이…….”
[궁금한가요?]
심층의자가 손짓했다. 정십자가에 못 박힌 신들이 일제히 사선으로 팔을 뻗었다. 펠디안느와 인드렌 위로 수많은 핏방울이 떨어졌다.
[그렇다면 다가오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