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7화 새벽의 별빛 (1)
시대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사람은 성 밖에서 밤을 지새우는 일을 기피한다. 암흑은 나그네보다 목적이 있는 사람을 더 사랑하기에.
먼 옛날에는 더욱이 그러했다.
태고의 시대에서 여유조차 없이 갑작스럽게 아침 식사회에 초청한다는 것은 손님들에게 음험한 밤길을 강요하는 것과 진배없으니.
브로흐나트 변경백은 이렇게 충성심을 시험하는 냉혹한 귀족이었다.
동그란 눈.
푸짐한 볼.
무표정한 얼굴.
와드득, 와드득!
식사회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단단한 다리 고기를 양손에 쥐고 뜯어먹는 변경백의 면상에는 감정 없는 탐욕만이 자리했다.
변경백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귀족들과 부호들은 긴장한 채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인간성이 희미한 사내군.’
바깥의 창턱을 디딘 베르덴이 창문으로 식사회의 내부를 주시한다.
그는 소음이 날 수밖에 없는 용병 갑옷을 버리고 빛을 반사하지 않은 어두운 로브와 천옷을 착용했고, 여러 단검과 아이젠폴로 무장했다.
루자크가 제공한 의복과 장비였다.
암살자 베르덴을 본 알파는 내재된 기억 골렘의 기능으로 그 모습을 틈틈이 기록했다. 알파의 개인 소장용이었다.
‘루자크를 제외하고 기사는 일곱. 안시르보다는 약해 보이나 성채에 집결한 사병들의 숫자는 백 명이 훌쩍 넘는다. 게다가 숨어 있을 지식인들을 고려하면 정면은 역시 좋지 않아.’
베르덴은 성의 도면을 떠올렸다.
‘비밀 통로에 손을 써 두었으니 혼란을 이용하는 것이 최선이다.’
이상 상태를 맞닥뜨리게 된 브로흐나트 변경백이 성채에 숨겨진 통로들로 신변을 보호하는 그 순간을 노린다.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곳곳에 설치한 ‘마법진’의 시침이 정각에 도달할 때까지.
마침 내부에서 움직임이 생겼다.
베르덴은 청각에 집중해 무슨 소리가 오가는지 엿들었다.
“각하. 라흐 남작과 휘슬록 자작, 그리고 교역회의 올투렐을 제외하고 전원 식사회에 참석했습니다.”
변경백은 고깃덩어리를 으적으적 씹어서 식도로 넘겼다.
먹다 남은 다리 고기가 그릇에 놓였다.
“라흐 남작의 여식이 제법 반반한 마법사라길래 정(精)을 주려고 했더니. 약속 시간도 지키지 못해선. 나중에 봐서 살아 있으면 데려오게. 귀족이 아닌 것은 처리하고.”
“그리하겠습니다, 각하.”
루자크 옆에 있던 기사가 예를 갖추며 호위로서 물러섰다.
“시간은 금이지, 금…… 감히 시간을 지키지 못한 종자는 괘씸한 것이야.”
변경백이 앞으로 나왔다.
“새벽길에 오르느라 모두들 고생이 많았네. 내가 너무 억지를 부린 것 아닌가 모르겠어.”
“억지라니요! 시간은 금이 아니겠습니까!”
“이리 중대한 사안에서 각하의 판단이 올바르지 않다면 무엇이 올바르겠습니까?”
쏟아지는 아부에 브로흐나트 변경백의 입가가 올라갔다. 눈은 웃지 않았다. 이윽고 소리가 잦아들 때쯤 그가 말했다.
“샛별의 종교는 교리대로 세상에 자선(慈善)을 베풀었네. 이러나저러나 도움받은 인간들이 상당히 많다고 하지. 덕분에 샛별의 잔당은 종교가 몰락한 이후로도 여태껏 살아남았네. 과거 은혜를 갚겠다는 이유로 숨겨 주는 자들이 계속 나타났으니. 새벽녘의 기사는 그걸 철저하게 이용했네.”
“…….”
“하지만 이제 끝물이네. 샛별의 종교에 조력하든 말든 우리와 같은 자들이 샛별이 스쳐 지나간 자들을 본보기로 모조리 처리했으니 말일세. 누가 보은으로 공포를 견디겠나? 샛별을 감추는 구름은 걷혔네.”
변경백의 눈가가 씰룩였다.
“새벽녘의 기사가 헤르사온 왕국 수도로 향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네.”
“수, 수도……?”
식사회장이 웅성거린다.
경악이 퍼졌다.
1급 수배범이 지휘하는 집단이 왕국의 심장부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은 누가 봐도 충돌, 그리고 전쟁을 의미했다.
“나의 충직한 안시르 경이 용병들을 고용해 미리 영지 경계를 차단하러 나섰네. 삼십 명이 넘는 인원인 만큼 샛별의 잔당이 집단으로 움직이는 이상 순찰에 걸리지 아니할 수가 없지……그렇지 않은가, 루자크 경?”
“예, 각하.”
단두의 기사, 안시르 칼로.
비정의 기사. 루자크 팔테인.
변경백이 자랑하는 기사들의 위명을 모르는 이는 여기에 없었다.
‘루자크에 대한 신임이 두텁군.’
안시르와 용병들이 전멸했다는 사실은 가공되어 변경백이 듣고 싶어 하는 소식이 됐다.
베르덴은 계속 상황을 지켜봤다.
“식사회를 마치는 대로 우리들은 샛별의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움직일 걸세. 새벽녘의 기사는 절대로 죽이면 안 되네. 팔다리를 끊을지언정 얼굴과 자궁엔 절대 지장이 없도록 하게. 새벽녘의 기사가 출산하는 아이들은 필시 값을 매길 수 없는 노예들이 될 테니.”
변경백이 그제야 진심으로 웃었다. 베르덴의 감정이 차갑게 식었다. 보다시피 세상은 잔혹하지 않은 적이 없다.
“마지막 샛별들. 하하, 이보다 아름다운 수식어도 없겠지.”
변경백이 잔을 들었다.
모두가 다급히 테이블에 올려 둔 잔을 쥐었다.
“달빛에 찬사를.”
헤르사온 왕국은 달의 종교를 국교로 삼았기에 달을 향한 믿음으로 축배사를 대신하는 경우가 제법 많았다.
“달빛에 찬사를!”
손님들이 함께 포도주를 들이켰다. 술을 마시는 척하며 식사회장을 둘러본 변경백이 이내 느긋하게 잔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내가 조금 이상한 이야기를 들어서 말이네.”
“어떤 이야기옵니까?”
“므크라후 후작에 관한 이야기지. 별거 아니나,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변경백이 턱을 쓸었다.
“그러니까 므크라후 후작에게 빌붙은 기생충들이 내 아래에 있다는 소문이 이 귀에 들렸네. 뭐, 단순한 교역일 수도 있다고 하지만. 하하하하하. 뭐들 무슨 상관이겠나?”
“네?”
“예전 영지전에서 내가 므크라후 후작의 동생을 우연히 죽이게 된 탓에,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관계가 회복되지 못한 걸 다들 알 걸세. 후작은 틈틈이 나를 견제하며 숨통을 노리고 있지. 그런데 그런 므크라후 후작과 거래, 라니.”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이는…… 명백한 배신행위가 아닌가?”
기침 소리가 들렸다.
“푸훗!”
목을 움켜쥔 손님 몇몇이 피를 토했다. 술을 마신 사람들이었다. 독살. 그러나 술을 마신 다른 손님들은 또 토혈의 낌새가 없었다.
“배신자는 8명. 방금 4명이 죽었군.”
“각하! 이, 이게 무슨……!”
“저희 귀족들 중에서 배신이라니?! 다, 당치도 않습니다!
“누군가의 모함입니다!”
“그렇게 결백한데 왜 내가 내린 술을 마시지 않은 건가?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닌가?”
술잔에 입술을 대는 척만 했던 세 명의 귀족과 한 명의 상인.
공기가 묘해졌다.
“……역시.”
그중 귀족들이 서로 시선을 마주하더니 결국에는 욕지거리를 하며 당장에 술잔을 내팽개치고 인상을 구겼다.
“변경백이 같잖은 이유로 우리를 숙청할 거라고 하더니……! 맹세코 므크라후 후작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거늘!”
“내, 내가 뭐라고 했소! 최근 변경백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이상하다고 하지 않았소!”
“우리에게 배신 누명을 씌워!”
배신자로 지목된 귀족들은 사전에 독살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듯 천천히 물러섰다.
손님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누명? 여기까지 와서도 발뺌을 하는가!”
변경백이 턱짓으로 기사들과 사병들에게 제압을 명령한다. 배신자 귀족들은 몰래 숨겨 둔 단검을 들며 이를 깨물었다.
‘배신과 누명…… 양측은 각각의 진실을 내세우며 대립하고 있다. 타협의 여지가 없군. 서로가 서로의 정보를 신뢰하고 있어.’
루자크도 당황한 기색이다.
‘누구지?’
베르덴은 주요 인물들의 면면을 살피며 현장을 관찰했다.
그리고 상황을 꿰뚫어 봤다.
‘누가 저들을 ‘선동’한 거냐.’
그때였다.
“후우.”
귀족들과 같이 배신자로 낙인찍힌 상인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지 몰라도 나까지 지목하다니. 운이 좋은지, 촉이 좋은지 모를 지식인이도다. 그러나 이 덕에 변경백에 지식인이 붙어 있음이 자명해졌구나.”
열두 번째 귀빈, 코릴라스.
루자크처럼, 심해의 괴물과 같은 모습이 아니라 그도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는 어느새 알 수 없는 책을 들고 있었다.
“이만 의식을 치르도록 하지.”
책이 명멸했다.
“아라네 코르.”
잡일을 맡은 하인들의 고개가 투두둑 꺾어지더니 눈이 뒤집혔다. 입에서 붉은 거미 다리가 튀어나와선 바닥을 짚었다.
그것들의 주변에 서 있던 손님들의 온몸이 붉은 실에 휘감기더니, 이내 압력이 가해져 살점이 갈가리 찢어졌다.
철퍽!
남편의 살점을 얼굴에 묻힌 귀부인의 입이 차츰 벌어졌다.
“꺄, 꺄아아아아아악!”
“괴물이다!!!”
“변경백 각하, 물러서십시오!!”
“변경백 배후에 있는 지식인이여! 이리 나와라! 암약에서는 내가 졌으나 나의 마법은 지고한 것! 내 그대의 지식을 탐미하겠도다!”
기사들과 사병들이 변경백을 지키면서 인간에서 거미가 된 괴물에 맞섰다. 피와 시체들로 한순간에 난장판이 된 식사회.
소란을 들은 성채의 병사들이 곳곳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역시나 지식인이 숨어 있었군. 귀빈인가? 인간 자체를 변형하는 마법. 즉석에서 발동한 것은 아니다. 진즉에 준비를 해 놓았…… 음?’
정체불명의 마법을 통찰하면서 언제 개입할지 고민하던 베르덴이 흠칫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
성채 꼭대기에서 줄을 감은 채 낙하하는 인영이 이제 쏟아지는 아침 햇살과 함께 성의 창문을 향해 들이닥쳤다.
와장창!!!
유리 파편이 비산했다.
그와 함께 식사회장으로 들어간 베르덴이 낙법을 취했다. 투척용 단검을 꺼내 들었다. 베르덴을 노리며 등장한 암살자가 코릴라스 근처에 착지했다.
암살자 복장을 입은 두 사람의 등장에 분위기는 한층 더 험악해졌다.
코릴라스가 묻는다.
“저자는?”
암살자───아르카디옴의 하객이 쌍검을 앞에 내세우며 답했다. 그는 이미 코릴라스와 협력을 맺은 지식인이었다.
“찰나에 벽안과 잿빛 머리카락을 보았습니다.”
“잿빛? 오오!”
코릴라스가 이를 드러냈다.
“네 번째 주빈이십니까? 아, 그렇지. 주빈 정도가 아니라면 이리 짧은 시간 동안 선동을 끝냄과 함께 내 정체를 간파하고 수를 쓸 수 없을 터.”
“…….”
“열두 번째 귀빈, 코릴라스. 이리 대결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아르카디옴의 하객입니다. 보잘것없는 제 이름으로 주빈의 귀를 더럽히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첫 번째 게임에서와 달리 코릴라스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제약이 지배하는 상황에선 승산이 있다는 확신을 내비쳤다.
그것은 명백히 스스로 강자라고 생각하는 자의 눈빛이었다.
‘이 상황을 내가 꾸몄다고 오해하고 있군.’
누가 이 판을 주도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렇게 된 이상 본래의 계획으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다.
베르덴이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 루자크가 돌벽으로 돌진했다. 콰아아앙! 기를 깨우친 루자크가 새로운 탈출구를 만들었다.
“각하, 이쪽입니다.”
“으음.”
“변경백 각하! 저희도……!”
브로흐나트 변경백이 침음하고는 기사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사병들이 눈치껏 퇴로를 지키는 척 괴물들과 멀어졌다.
중간에 낀 손님들은 이도 저도 못 하다가 결국에 식사회장의 입구로 탈출했다.
문이 열리자 병사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마법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십니까, 네 번째 주빈이시여?”
“바쁘다.”
베르덴이 앞꿈치에 힘을 실었다.
“금방 끝내지.”
배후에 있는 놈은 차치하고 코릴라스와 하객을 처리한 뒤 변경백을 처리한다. 그리고 도시를 떠나서 새벽녘의 기사를 찾는다.
방향은 정해졌다.
* * *
부여 마법으로 신체를 강화.
손가락에서 빠져나간 작은 단검들이 불식간에 쇄도한다.
<염동력>
마법에 지배당한 날붙이들의 궤적이 난잡하게 비틀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암살자 하객은 베르덴을 향해 질주했고, 코릴라스는 거미의 붉은 실로 사방에서 날아든 단검을 차단했다.
코릴라스는 천장과 바닥을 연결한 실들에 뒤덮여 마법사로서 자신을 보호했다.
베르덴이 아이젠폴을 발도했다.
쩌어어엉!
검과 검 사이에서 바쁘게 불꽃이 튄다. 베르덴은 아드리안과 대련하며 익힌 몸놀림으로 제법 완성도가 높은 검술과 체술을 구사했다.
옷깃을 스치는 칼날.
어깨를 강타하는 팔꿈치.
<비행>
베르덴이 체공한 상태로 검격을 휘두르며 전신을 뒤집었다. 회전력. 발차기에 가격당해 밀려난 하객이 복면 안쪽으로 입가를 당겼다.
“과연…… 주빈이십니다.”
“저 완강한 육체에 어떤 지식이 저장되었을지!”
인간 거미들의 다리가 늘어나면서 뾰족한 첨단을 빛낸다. 정확한 틈새를 파고들며 베르덴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실체를 희석하라, 아이젠폴.”
두근.
지정한 대상은 하객이 아니라 코릴라스. 기력이 빠르게 소모되는 감각을 받은 코릴라스가 흠칫하곤 책장을 넘겼다.
“모르툼 아페리.”
십수 구의 시체에서 수십 개의 다리가 뻗어 나와 정면을 뒤덮었다. 베르덴이 시전한 <화염구>와 금지 마법이 충돌했다.
콰아아아앙!
거미가 타며 생긴 심한 악취가 식사회장에 가득 찼다. 코릴라스의 마법으로 보호받는 하객이 곡예에 가까운 기술을 펼쳤다.
‘상당한 실력이다. 기의 경지가 극점이면 적수가 거의 없을 정도로. 아르카디옴의 지식인이 되기 전에 암살자로 활동한 자인가.’
<뇌격>
하객이 아슬아슬하게 몸을 젖히고, 번개 줄기가 인간 거미 하나를 파괴했다. 다른 거미들과 동시에 굽이치는 하객의 쌍검.
베르덴은 지금의 자신과 대등하게 싸우는 하객을 평가하며, 만약 혼자였다면 빠르게 이 둘을 처리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그렇다.
혼자라면 말이다.
‘고대 아티팩트…… 로군. 검의 효과가 생각보다 강력하도다. 서둘러 주빈을 죽이지 않으면 기력이 고갈되겠어.’
코릴라스는 책으로 영창을 대신하며 주변 마력을 이용해 마법을 계속 구현했다. 정신력이 깎여 나가곤 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 순간.
“어?”
코릴라스를 보호하는 실의 벽이 난데없이 좌우로 벌어졌다. 시선을 내렸다. 베타가 힘으로 실의 틈새를 만들고 있었다.
그 사이로 들어온 알파가 발돋움하곤 코릴라스를 향해 뛰어올랐다.
[알파. 돌격.]
네 번째 주빈은 셋이서 하나.
알파와 베타도 모험 게임의 제약으로 물리적으로 약해졌으나 당연하게도 일반 사람의 육신보다는 훨씬 단단하다.
뻐어억!
알파의 프레임에 강타당한 코릴라스의 아래턱에 금이 갔다. 코릴라스의 강함은 마법적 역량에 치중돼 있기에 물리적인 저항력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보다도 떨어진다.
“끅…… 필라 아라네, 클라우데!”
뒤로 넘어질 뻔한 그가 간신히 마법을 시전해서 실을 움직였다. 주변의 실들이 코릴라스를 지나치곤 그대로 알파와 베타를 결박했다.
[앗.]
[잡혔습니다.]
동시에 베르덴의 무릎차기의 충격을 감쇄하느라 몸을 뒤로 던진 하객이 코릴라스 바로 앞에서 다리에 제동을 걸었다.
“몰두해서…… 다른 주빈을 간과했도다…….”
턱의 통증 탓에 코릴라스의 입에서 침이 줄줄 흘러내린다. 기력이 약해졌다. 그가 쇠약해질수록 아이젠폴의 힘이 더 강해졌다.
“잠시. 물러설 테니, 나를, 데리고…….”
“알겠습니다.”
남은 세 마리의 인간 거미들이 뒤뚱거리며 앞에 나선다.
휘릭.
하객은 자세를 다시 잡으려는 듯 검을 현란하게 휘두르다가, 갑작스럽게 회전하며 역수로 잡은 검을 뒤로 내질렀다.
콰드드득!
코릴라스의 목이 관통됐다.
“아…… 아……?”
“지식은 잘 받겠습니다, 열두 번째 귀빈이시여.”
경추가 끊어진 코릴라스가 즉사했다. 쓰러지는 그의 몸을 어깨에 멘 하객이 자연스럽게 그의 책까지 챙겼다.
마법이 해제된다.
알파와 베타가 실의 구속에서 벗어났고, 인간의 거미는 허물어졌다.
[배신?]
“배신이 아닙니다, 제가 따르는 귀빈은 코릴라스 님이 아니기에. 단지 코릴라스 님의 거미줄을 혼자서 뚫어 낼 방법이 없어 이런 기회를 엿보려고 하수인이 되었던 겁니다.”
베르덴이 말했다.
“네가 따르는 귀빈이 누구지?”
“네 번째 귀빈입니다.”
하객이 공손히 인사했다.
“그리고 네 번째 귀빈께서 네 번째 주빈께 안부를 전하라 하셨습니다.”
“내게?”
“예.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하객은 코릴라스의 시체와 책을 갖고 능숙하게 벽을 올라 깨진 창밖으로 나갔다. 베르덴은 그런 그를 굳이 잡지 않았다.
‘네 번째 귀빈. 그자가 변경백을 비롯한 귀족들을 선동한 배후였군.’
정체는 뭐고, 목적은 또 뭔가.
‘아무튼.’
베르덴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며 알파와 베타를 품에 넣었다.
병사들의 기척이 아주 가깝다.
때마침 폭음이 터졌다.
콰아아아앙! 콰아아앙!
베르덴이 설치한 마법진들이 때가 되어 폭발하기 시작했다. 이 시대에도 마석은 존재했다. 성 구석에서 발생한 화염에 안 그래도 엉망이 된 식사회는 한층 더 혼란스러워졌다.
<비가시화>
베르덴이 모습이 사라졌다. <투명화>와 다르게 기척까지 은폐할 순 없지만, 그것은 육체의 기교로 가능했다.
“변경백을 처리하러 가지.”
[확인.]
* * *
쿠우우웅……! 쿠우웅……!
브로흐나트 변경백은 동그란 눈으로 기사들을 대동한 채 비밀 통로에 진입했다. 큰 진동에 성채가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자네들은 이곳에서 혹시 모를 추적자들을 막게. 루자크 경, 지휘를 맡기지.”
“……예, 각하.”
루자크는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변경백과의 거리가 멀다. 앞뒤로 총 기사 일곱을 상대하기에는 자리가 여의치 않다.
‘변경백은 네 번째 주빈의 계획에 맡긴다.’
루자크는 멀어지는 변경백의 등을 일별했다.
타다다다다닥.
변경백은 적당히 거리가 벌어질 때마다 기사들을 나누었다. 여덟 병이었던 기사는 여섯, 넷, 그리고 셋, 이내 한 명이 되었다.
숨겨진 공간에 가까워진 변경백이 무릎을 짚었다.
“허억, 허억.”
“후우…….”
혼자 남은 기사도 숨을 돌리며 뒤를 주시했다. 혹 추적자가 올까 봐 경계심을 높였다. 그러던 도중에 변경백의 호흡이 이상해졌다.
“로, 로타렌스 경. 숨이, 수, 숨이.”
“가, 각하!”
로타렌스가 황급히 변경백의 등을 짚고 얼굴을 가까이했다. 어둠 속 횃불에 금속이 반사됐다. 작은 칼날이 로타렌스의 목을 뚫었다.
“어, 커헉……?!”
“자네도, 나를 배신했다고 들었네. 내 하녀들과 놀아났다지? 여차하면 므크라후 후작에게 의탁할 생각이라고.”
“아악…….”
“다른 기사들을 선동해서!
푹! 푹! 푹! 푹!
변경백은 로타렌스의 목을 완전히 헤집고 나서야 손을 멈췄다. 피투성이가 된 그가 이제 후련한 얼굴로 입술을 적셨다.
“역시 그분이군. 다 꿰뚫어 보고 있어. 그분이 한 말만 믿어야 해, 후후.”
숨겨진 공간으로 도착하면 그분께서 변경백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변경백은 이미 그를 자신보다도 신뢰하고 있었다.
언제나 호위를 데리고 다니던 얼마 전과 다르게 혼자가 된 뒤에야 편해진 변경백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통로를 나아갔다.
후웅.
“……웁!”
통로의 벽에 자리한 마법진이 명멸하더니 마력의 사슬이 그를 옭아맸다.
구속 마법진, 디테인.
“웁! 웁웁!”
변경백이 발버둥 쳤지만 사슬이 풀릴 일은 없다. 입까지 막힌 그가 콧숨으로 소리쳤지만 누구도 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지형 조작>
돌과 흙으로 이루어진 성채를 조작한 베르덴이 벽 너머에서 등장했다. 단단히 구속된 변경백을 본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자크. 안 보임.]
[다른 기사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피가 묻은 걸 보니 습격이 있었나 본데. 이것도 네 번째 귀빈의 짓인가.”
“읍…… 읍읍…….”
베르덴은 지칠 대로 지친 브로흐나트 변경백에게 다가갔다. 그의 품에서 나온 베타가 변경백의 어깨로 뛰어들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맡기겠다, 베타.”
작은 베타가 프레임을 틀었다.
“읍읍…… 읍……! 읍!!!”
변경백은 뭐라고 말했지만 마력의 사슬은 여전히 그의 입을 막았다. 지성체의 존엄성 위반. 변경백은 에온의 처단 명단에 올랐다.
베타가 팔을 내리쳤다.
뻐거거걱!
브로흐나트 변경백의 두개골이 함몰했다.
* * *
변경백의 성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소음이 연신 들려왔다.
베르덴과 무사히 합류한 루자크. 그들은 어느새 도시를 빠져나와 혼란이 식지 않은 도시를 멀리서 바라봤다.
루자크가 말했다.
“브로흐나트 변경백은 확실히 죽었으니 이로써 우리의 거래는 끝났구려.”
베르덴이 물었다.
“네 과업이 끝났으니 이제 게임 밖으로 나가는 건가?”
“응? 아니오. 나는 변경백의 죽음이 내 과업이라 한 적이 없소. 반역의 기사. 그저 내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했을 뿐이지. 하하.”
베르덴은 생각해 보니 그렇다며 군마의 고삐를 당겼다.
“과업을 잘 완수하길 바라지.”
“그래서 말인데 같이 가도 되겠소?”
[같이?]
“솔직히 말하자면 내 과업은 샛별과 연관되어 있소. 결코 폐를 끼치지 않을 테니…… 부탁드려도 되겠소?”
베르덴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곤 루자크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방해가 되지 않을 거라는 판단과 그의 과업, 그리고 그가 어제 흘린 눈물에 대해서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마음대로 해라.”
“고맙소.”
그렇게 베르덴, 알파, 베타, 루자크 일행이 길을 떠나려던 그때였다.
“애셔어어어.”
멀리서 누군가가 손을 흔들며 천천히 달려오고 있었다. 햇빛이 구름에 가려지며 그녀의 얼굴이 훤히 보였다.
“같이 가아아아아.”
흑해 테아렐이 꽤나 엉망이 된 몰골로 베르덴을 불렀다.
“쟤는 어디서 나타난 거지?”
“그러게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