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8화 새벽의 별빛 (2)
[안녕.]
“안녕.”
격전의 흔적으로 얼룩진 테아렐이 군마의 안장에 안착했다.
베르덴의 뒷자리였다.
그녀는 베르덴의 로브를 고삐로 삼고는 아침부터 크나큰 소란에 덮인 도시 내 브로흐나트 변경백의 성채를 바라봤다.
“너희가 한 짓이야?”
“뭐, 반쯤은.”
베르덴은 테아렐의 옷차림을 관찰했다. 여기저기 해졌어도 일반인이 입을 만한 복장은 아니었다. 마치 귀족 같았다.
“변경백의 식사회에 참석하지 못한 라흐 남작의 여식이 너였나?”
“테린 라흐라고 해. 근데 의미 없어졌어. 가문이 망했으니까.”
“왜.”
“아빠가 오다가 죽었어.”
“…….”
[…….]
테아렐은 태고의 이형종에게 습격받아서 그녀를 제외한 가문의 일원이 한순간에 전멸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평범한 물리력으로는 죽지 않아서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그렇게 마차는 지켰는데 애초에 마차가 낡아서 도중에 바퀴가 망가졌지. 그래서 마기온 선생하고 <비행>과 도보로 이동했고. 그리고 또 이형종의 습격. 이 시대는 꽤 위험해.”
베르덴과 루자크의 눈이 커졌다.
“세 번째 주빈과 함께 있었단 말이오?”
“내 선생이었거든.”
“선생? 마기온은 어디에 있지?”
“개인적으로 볼일이 있다면서 갔어. 나중에 다시 만날 거라는데. 애셔, 혹시 널 만나면 마기온 선생이 이렇게 전해 달래.”
테아렐이 전언을 속삭였다.
“과도한 지식은 독이다.”
정도가 지나치면 넘친다…… 베르덴은 데우스가 보낸 문장의 의미를 헤아렸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적당히 하라는 말로 들렸다.
‘경고인가, 아니면 충고인가.’
레프라기움 마탑은 적은 아닐지언정 아군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데우스가 정보를 은폐하는 한은 이런 관계가 지속될 것이다.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려워도 마음 한편에 남기는 편이 올바른 대응이리라.
“…….”
베르덴이 시선을 옮겼다.
루자크는 대화에 참여하고 있으나 그 눈은 계속 북쪽을 주시했다. 북쪽에는 샛별의 잔당이 향하고 있는 왕국 수도가 있다.
그리움, 슬픔.
이를 아우른 결의.
루자크는 열여섯 번째 귀빈이었을 때와는 다르게 이런 인간적인 감정을 내비쳤다. 지식이 대한 욕망은 점차 희미해지는 게 보였다.
그런 루자크의 새로운 일면이 베르덴에게 새로운 가설을 안겨 주었다.
‘모험극에서 살아 움직이는 영혼들. 그리고 나를 비롯해 극소수를 제외한 아르카디옴의 지식인들은 아마도…….’
짧은 여정의 끝에서 루자크가 새로운 무언가를 깨달으면 추측은 사실이 되리라.
베르덴은 변경백의 군마를 움직였다.
프로하스에서의 정상 회의까지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으니, 두 번째 게임을 끝내는 걸 중심 목표로 고정해야 한다.
[테린의 과업은 무엇입니까?]
“대마법사 탈라칸에게서 청람(淸覽)을 획득하기. 마기온 선생이 그러는데 탈라칸은 지금쯤 헤르사온 왕국 수도에 있을 거래.”
[수도. 우리의 목적지.]
“그래? 도중에 내릴 필요 없겠네.”
테아렐은 베르덴과 루자크의 과업이 무엇인지도 묻지 않았다. 호기심의 절제는 아니었다. 그보다 다른 것에 흥미를 집중할 뿐이다.
그때, 테아렐이 루자크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근데 이쪽은 누구?”
“……그걸 이제야 물어보는 거요? 나요. 루자크 팔테인.”
“알아. 열여섯 번째 귀빈. 말투가 같았으니까. 그 바다코끼리 같은 코하고 외부로 드러난 회백색 뇌는 어디 갔어?”
“하하하, 이것이 진정한 나요.”
아침의 햇빛이 그들을 비춘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우리가 모여서 모험을 하게 되었구려. 옛날에…… 지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소. 우연과 우연이 겹친 끝에, 비로소 필연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 것이라고.”
대지에 드리우는 말의 그림자.
“우리가 모인 것은 필연일지도 모르오.”
“글쎄, 운명은 안 믿는 주의라.”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루자크가 기꺼이 앞장섰다.
“그저 필연만이 있다고 믿을 뿐이지. 우리가 내린 선택이 헛되지 않았다는…….”
* * *
도시의 변두리 건물의 옥상에서 난장판이 돼 버린 변경백의 성이 훤히 보인다.
“애셔 님, 알파 님, 베타 님에 관련된 소식은 잘 전달받으셨습니까? 변수투성이인 태고의 모험에서 이렇게 모두가 엮이다니. 호호호. 정말로 연은 연인가 봅니다.”
네 번째 귀빈은 앉아서 도시를 구경하며 자신을 찾아온 인물에게 말을 건넸다.
“아무튼 브로흐나트 변경백을 포함해서 다수의 귀족 사망. 피로 물든 식사회. 샛별을 추적할 전력의 부재까지…… 본래의 역사가 뒤틀리는 광경은 상당히 흥미롭네요.”
후웅.
<비가시화>를 해제한 섭리자, 데우스 위덴이 그 옆에 섰다.
“보기 좋게 날뛰었더군.”
“호호, 워낙 욕망에 솔직한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말이 잘 통하더군요. 사람들이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닌 이 게임의 무대에서 현실에서보다 적극적으로 떠들긴 했습니다만.”
네 번째 귀빈이 능글맞게 웃었다.
“전 마법적으로 애셔 님처럼 막강하지도, 마기온 님처럼 능숙하지도 않으니까요. 말주변이 그나마 제 자랑거리인데 이 정도도 못 해서는 감히 들 낯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가 머리에 쓴 가죽을 천천히 벗었다.
해협의 파광.
아르카디옴에 하나밖에 없는, 만찬회에서 현실의 얼굴을 감출 수 있는 가면이다. 호스트가 제작했으며, 과거 아르카디옴 게임에서 우승한 데우스에게 수여된 고대 아티팩트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본 역사는 비정의 기사가 브로흐나트 변경백을 살해, 그리고 샛별의 잔당을 지키기 위해서 변경백이 모은 추적대를 몇 날 며칠에 걸쳐서 처리한 뒤에 만신창이가 된 몰골로 헤르사온 왕국의 수도에 도착한다고 알고 있는데…… 역사가 개변된 게임에서는 어떻게 전개될까요?”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애셔 님이 있어도 말입니까?”
“의미 없다.”
데우스가 단언했다.
“헤르사온 왕국 수도는 멸망한다. 과거보다도 더 처참하게. 샛별은 떨어지고, 이를 시작으로 달마저 추락하겠지.”
“하긴 다른 지식인들이 있으니 부정적인 혼란만 가중될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부탁한 것은.”
“물론 알아냈습니다. 귀빈에게서 빼앗은 지식의 조각들을 모아서 퍼즐처럼 완성하는 게 아르카디옴의 묘미 아니겠습니까. 첫 번째 게임과 두 번째 게임에서 바쁘게 움직였지요.”
네 번째 귀빈이 건물 옥상의 끄트머리를 딛고 일어섰다. 가볍게 엉덩이를 털고서 뒷짐을 진 그가 데우스를 지나쳤다.
“아르카디옴의 마지막을 장식할 세 번째 게임은 ‘지적 충돌’입니다.”
“호스트는 두 명만 남을 거라고 예상하는 건가.”
“지적 충돌은 둘이서 하는 게임이지만, 호스트가 개량을 했다더군요. 세 명. 호스트는 마지막 게임까지 남을 참석자를 셋으로 정해 두고 있습니다.”
첫 번째 귀빈, 블러디아.
세 번째 주빈, 마기온.
네 번째 주빈, 애셔.
“그 셋이 누구일지 생각할 것도 없겠지요.”
네 번째 귀빈이 휘파람을 불었다.
“마지막으로 뚜벅이로 전락한 마기온 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이동 수단입니다. 변경백이 소중하게 키우고 있더군요.”
히히힝.
멀리서 날개가 달린 백마가 날아온다.
페가수스.
운명전에서 멸종당한 개체 중 하나였다. 상공을 배회하던 페가수스가 곧 네 번째 귀빈의 지시를 받고 그가 있는 옥상에 착륙했다.
“마기온 님은 이제 무엇을 하실 겁니까. 주어진 지식의 과업을 이룰 건가요?”
“그래, 다음 게임으로 넘어가야 하니.”
“애셔 님을 막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자칫하면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전언을 보냈으니 우려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거다.”
변경백의 식사회가 초토화된 이상 테아렐이 가진 라흐 남작가의 신분은 필요 없게 됐다. 선생 노릇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무의미한 시간은 아니었다.
테아렐을 통해 전달한 충고는 베르덴을 망설이게 할 테니까.
“그리고 페가수스의 속도라면 내 과업을 완수한 뒤에도 왕국 수도로 향할 여유가 있다. 아마 애셔랑 비슷하게 수도에 도착하겠지.”
“호호, 제 덕분이죠?”
“음.”
데우스가 페가수스에 탑승했다.
“너는 수도로 가지 않을 건가?”
“저는 한가롭게 과업을 이루면서 이 시대를 잠시 모험할 생각입니다. 태고의 시대에서 호스트가 가진 보물을 손에 넣을 기회가 있다? 이런 순간은 살면서 또 없지 않겠습니까?”
네 번째 귀빈이 어깨를 으쓱였다.
“현실에서나, 이곳에서나 저희가 여기 함께하는 것은 비밀이기도 하고요.”
“뜻대로.”
데우스의 손길을 따라 페가수스가 도약 준비를 갖추었다. 옥상의 끝에서 끝까지 질주한 녀석이 이내 밑으로 사라졌고.
새하얀 날갯짓으로 공기를 누르며 그들을 하늘로 솟게 했다.
“죽지는 말도록.”
“당연하지요. 우리의 지식은 빼앗겨서 안 되는 것이니. 호스트의 영역에서 다시 뵐 시간이 없으면, 프로하스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네 번째 귀빈은 빨리 멀어져 가는 데우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윽고 그들이 구름 사이로 모습을 감추고 나서야 작별 인사를 마쳤다.
“호호, 열심히 움직인 보람이 있군요. 뿌듯해라.”
“네 번째 귀빈이시여.”
데우스의 기척이 사라지고 모험극에서 활동하는 아르카디옴의 하객들이 건물 옥상으로 올라와 예를 갖추었다.
“하시던 일은 정리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덕분에.”
“그, 그럼…….”
네 번째 귀빈이 손을 까딱였다.
“마저 즐거운 식사 하시길.”
“감사합니다.”
하객들이 식기를 챙기고 일제히 건물의 중간층에 들어갔다. 거기엔 세 번째 귀빈, 일곱 번째 귀빈, 열두 번째 귀빈, 열다섯 번째 귀빈의 시체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운이 나쁘게도 네 번째 귀빈과 시작부터 과업이 겹친 지식인들의 결말이었다.
모험의 기본 규칙 5번: 다른 지식인을 먹으면 무작위 분량의 지식을 얻을 수 있다.
하객들이 귀빈들의 육신으로 즐겁게 요리하기 시작했다.
세 번째 귀빈과 일곱 번째 귀빈의 시체는 이미 반쯤 먹어서 머릿속 지식을 빼앗은 상태이나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지고한 귀빈들을 음미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기에.
“흐음, 저걸 무슨 정신으로 먹는지.”
네 번째 귀빈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남의 지식이 필요해도 지식인을 먹지 않는다. 그냥 남에게 먹이고, 남에게 들으면 되기 때문이다.
네 번째 귀빈 밑엔 남몰래 그의 식사를 대신하는 하객들이 있다. 하객들은 그렇게 지식을 쌓아 새로운 귀빈이 되는 것이다.
아르카디옴의 또 다른 실세.
데우스를 따라서 이제 세 번째로 아르카디옴에 참여한 네 번째 귀빈은 첫 번째 귀빈도 모르는 사이에 귀빈의 3할을 장악했다.
선동에 능한 그에게 지식의 만찬회는 하나의 놀이터였다.
“이 시대의 바람도 딱히 현대와 다르지 않군요.”
네 번째 귀빈은 창창하게 드높은, 진즉에 멸망한 시대를 보았다. 그는 마법계 총회의와 세계 회의를 차례대로 상기했다.
“애셔 님 덕분에 마기온 님의 인간적인 모습도 볼 수 있게 되고, 운명을 피해 여태껏 배후에서 움직여 온 ‘우리’도 서서히 전면에 나서게 되었으니. 호호, 다음은 또 어떻게 될지 심히 기대됩니다.”
햇살이 따스하게 네 번째 주빈의 진실된 얼굴을 비추었다.
아티슨 마탑주.
개혁의 선동가.
“정말로 마음에 들어요.”
펠디안느 피어시아 레이트.
“당신도 그런 심정이겠죠. 최후의 저항자시여.”
저항의 씨앗.
* * *
태고의 모험, 제1장: 여정, 그 두 번째.
누구나 ‘만약’을 상상한다.
과거를 지우고 싶으나 그럴수록 후회에 빠져드는 헛된 간절함.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역사를 알고 싶은 진실된 호기심.
모험의 게임은 만약의 게임이며, 여기서 악마의 신은 다시금 절망스러운 후회를 반복하게 될 기사와 일행이 되었다.
바다의 초월자는 자신의 목적만을 우선하며 그들 곁에 자리했다.
생명은 미래로 향하고.
죽음은 과거에 남는다.
거짓된 이름조차 산 자의 것.
과거를 벗어나지 못하는 망자이자 장난감에게는 가명도, 진명도 의미가 없다.
악마의 신과 샛별의 만남은 미래와 과거를 잇는 현실이 되리라.
* * *
테아렐이 말한 것과 다르게 여행길은 그렇게까지 위험하지 않았다.
밤길 또한 마찬가지였다.
베르덴 일행을 실질적으로 위협할 만한 괴물은 딱히 없었다.
그리고.
왕국의 지도를 참고해서 헤르사온 왕국 수도에 도착한 그들의 눈앞에는 전혀 평화롭지 않은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쿠웅…… 쿠구궁……!
유골룡보다 체구가 작은 드래곤.
두 개의 다리와 하나의 팔이 큰 머리에 달린 소름 끼치는, 진물이 잔뜩 흘러내리는 붕대를 두른 거대한 괴이(怪異).
인간을 학살하는 엘프.
무너진 성문을 비집고 들어가고 있는 아인종과 이형종들.
수도가 철저하게 파괴되고 있다.
[애셔 폐하. 대참사입니다.]
“이 참상은 뭐야?”
테아렐이 수도에서 풍겨 오는 짙은 피의 냄새를 맡았다. 지금도 도시에서는 수많은 비명이 들려오는 중이었다.
왕국 수도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응전하고 있는 듯하다 명백히 열세였다.
베르덴이 말했다.
“변경백이 고용한 용병들이 샛별의 발목을 잡지 못한 결과, 새벽녘의 기사가 일찍이 수도에 침입하게 돼서 벌어진 상황인 것 같군.”
성벽이 멀쩡한 걸 보아 수도의 참극은 내부에서 시작됐다. 달의 종교를 증오하는 샛별의 잔당이 일을 벌인 것이 자명하리라.
“게다가 지식인도 개입한 모양이야. 습격자들의 종류에 두서가 없는 걸 보면.”
“이제 저 지옥에 들어가야 한다는 거지?”
“그래.”
베르덴과 테아렐은 문득 침묵에 휩싸인 루자크를 곁눈질했다. 멸망하는 수도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이내 웃었다.
“하하하하…….”
그러고는 무대 바깥의 존재도 들으라는 것처럼 아주 크게 웃었다.
“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루자크가 한 줄기 눈물을 흘린다.
“하필이면 이 시대, 하필이면 이 비정의 기사의 몸에 들어오게 되었다니…… 이것 또한 필연일지, 혹은 호스트의 농간일지 모르나…….”
그가 깊게 숨을 흘렸다.
“무엇이 됐든, 호스트. 귀하께서는…… 너무도 잔인하구려.”
스윽.
루자크가 더러운 건틀릿으로 눈물을 닦은 다음 갑자기 고삐를 당겼다. 울음소리를 낸 군마가 앞발을 높이 들었다.
시시각각 감정이 변화하던 루자크가 목소리를 크게 했다.
“날 따라오시오. 새벽녘의 기사가 어디에 있는지 안내하겠소. 대마법사 탈라칸이 있는 왕성으로 가는 길도.”
루자크는 장검을 뽑아 들고는 너무도 인간적인 투지를 뿜어 댔다.
그건 목숨을 건 각오였으며, 지금 당장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의 단호함이었으니.
이로써 베르덴의 가설은 입증됐다.
‘역시, 이 시대 사람이었나.’
눈을 깜빡이는 테아렐.
베르덴과 똑같은 사실을 눈치챈 알파와 베타.
베르덴이 말했다.
“루자크.”
“…….”
“넌 이미 죽은 사람이었군.”
루자크가 한동안 블랙 아워 대전당에서 머무르게 되었을 때, 베르덴은 루자크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럼 일단, 네 기원은 뭐지?
───기원이라. 역시 나의 신비한 육체를 의미하는 것이겠구려. 과연 주빈이오. 아르카디옴의 가장 깊은 비밀 중 하나를 곧바로 지적하다니.
───나도 모르오. 애석하게도.
───모른다?
───아르카디옴의 배경이 무엇인지, 아르카디옴의 주민들은 또 어디에서 탄생했는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소. 오직 아르카디옴을 설립한 호스트만이 진실을 알고 있지.
하지만…… 이제 베르덴도 아르카디옴의 진실을 알고 있으며, 루자크도 자신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답을 알고 있다.
“그렇소.”
루자크가 힘없이 미소 짓는다.
“그것이 아르카디옴의 어두운 진실이오.”
아르카디옴의 지식인들도, 이 태고의 모험에서 움직이는 자들도 하나같이 먼 옛날에 목숨을 잃은 존재들이다.
드라벤 르마르크가 그러했듯이…… 그들은 가짜 육신을 받은 영혼들이다.
심해에 진정한 의미의 지식인은 거의 없었다.
죽은 뒤에도 안식을 찾지 못한 채로, 호스트에게 놀아나는 망자만 있었을 뿐이다.
장난감.
호스트가 지식인을 이르는 다른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