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mit Breaking Genius Mage Chapter Raws 1051

1051화 정상 회의: 정점 (1)

대악마의 피난처, 이면 세계, 리버레아스.

녹시아스의 절단된 거대한 손 위에 악마들의 도시가, 그 중심에는 소름 끼치는 어둠이 도사리는 대신전이 있다.

신전의 최하층에는 광채를 거부하는 가장 깊은 어둠이 존재했다.

암흑의 옥좌에 앉은 소년의 형상, 어둠의 대악마 – 녹시아스가 외부의 자극을 감지한 순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초월자?]

피부를 스치는 실가닥처럼 정신파가 리버레아스 경계면을 간지럽힌다. 정확히는 그것이 리버레아스의 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녹시아스의 정신계를 소리 없이 노크했다.
반응해 주지 않자, 노크 소리는 몇 번 더 이어지다 이내 잠잠해졌다.

극히 희미한 정신 접촉만으로도 불청객의 뿌리를 간파한 녹시아스는 곧 자문했다.

[여길 어떻게 찾았지?]

대륙과 리버레아스는 3차원의 벽으로 차단되어 있고, 서로 다른 3차원계에 존재하기에 물리적으로 이어질 수 없다.
리버레아스의 주인인 녹시아스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이곳은 ‘당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진정한 의미의 피난처였으므로.

다만, 예외가 한 가지 있다.

정신계(精神界).

정신은 육체와 다르게 3차원에 구애받지 않는다. 마음은 자유롭다. 괜히 예로부터 물질계와 정신계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녹시아스가 그러하듯이 정신 자체를 차원 밖으로 보내는 것도 가능하다…… 어디까지나 타고난 역량이 받쳐 준다면.

녹시아스는 생각에 잠겼다.

차원을 넘나들 정도로 정신계에 특화된 초월자가 있다고 가정했고, ‘우연’을 빌어 리버레아스를 찾아낼 경우의 수를 계산했다.

결론, 불가능.

그런 식으로 발각될 확률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진즉에 두 번째 사도, 그 광신적인 인간이 침입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럼, 답은 정해졌다.

밖의 누군가가 리버레아스를 정신계 초월자에게 알려 준 것이다. 해당하는 존재는 두 명. 바로 베르덴과 올다르크.

[……미쳐 버린 저항자가 이곳에 용건이 있었다면 직접 찾아왔겠지. 그렇다면 운명 파괴자가…….]

난데없는 불청객은 아군인가 적인가.

초월자의 본질은 저항.

운명전을 기준으로 하면 아군이나, 모든 악마는 배척받는다……. 운명도, 저항자도 운명의 부산물인 악마를 혐오한다.
언제나 그랬다. 운명 파괴자 본인이 아닌 이상 모든 걸 경계해야 옳다. 설령 운명 파괴자 본인이 보냈다고 하더라도.

[파르니움.]

[부르…… 셨나이까…….]

넘실거리는 어둠으로 전심을 감싼 최고위 악마, 파르니움이 부름에 응했다. 그는 대악마의 군단장 중 한 명이었다.

[계약자들을 써서 그간 미뤄 두었던 정보 수집을 시작해라. 그중에서도 특히 정신계 초월자에 대해서. ‘당신’의 여섯 번째 사도가 강림한 상황이니 한동안은 우리도 운신의 폭이 넓어질 거다.]

녹시아스는 섣불리 베르덴에게 연락책을 보내지 않았다. 만에 하나라도 악마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돌이킬 수 없다.

녹시아스는 그야말로 무수한 세월 속에서 단련된 인내력으로 버려진 자로서의 증오를 삼켰다.

[네 계약자의 상황은?]

[살아…… 있습니다…… 다만…… 그때 이후…… 다른…… 소식은…… 전송되지…… 않은…… 상태…… 입니다…….]

[기대 이상이군.]

리버레아스는 거의 완전하다고 할 정도로 대륙과 격리되어 있다. 그렇기에 최고위급 악마의 계약자가 아니라면 녹시아스는 바깥의 정보를 습득할 방법이 거의 없었다.

바로 그런 뜻에서 파르니움의 계약자, 케이먼의 활약은 인상적이었다.

파르니움의 힘을 빌렸다고 해도 마경에서 여전히 활동하고 있고.
마경에서 발생한 언데드 사태를 목격하고 임무를 잠정 중단한 뒤 마경의 경계까지 나와 파르니움에게 보고했으니.

덕분에 녹시아스는 여섯 번째 사도가 부활했음을 알 수 있었다.

베르덴의 요청으로 누군가의 얼굴에 깃든 악마의 저주, 즉, 기생의 대악마에 관련된 여러 정보를 얻기 위해 마경으로 보냈건만…….
그는 녹시아스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과감했고, 또 빠르게 강해지고 있다.

‘아직 때가 아니다.’

녹시아스는 변화를 실감했다.

‘하지만, 가깝다.’

종극에서 악마는 존재를 구원받을까 버려진 채로 멸종할까. 태어난 것이 죄가 아님을 인정해 줄 존재가 등장할까, 그것이 베르덴일까.

운명이 무너진 지금 녹시아스는 상상하던 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가련한 악마들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 스스로를 가두었기에 녹시아스는 아직 악마의 신이 탄생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 * *

블랙 아워의 최초의 구성원 8인 중 1인이자…… 공동 제자인 다히트 웨스로엘에 의해 치명상을 입은 채 탈출한 케이먼 베르몬트.
악마 계약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그는 현재 마경에서 활동 중이다.

정정하겠다.

정확히 말하자면 활동이 아니라 도주 중이다.

쿠웅! 쿠웅! 쿠웅!

케이먼이 힘으로 기생 나무들의 군집을 뚫으며 질주했다. 계약자의 능력인 악마화로 거대화되고 강화된 신체는 금속처럼 단단한 뿌리와 나뭇가지를 부수었다.

스르륵, 스르르륵.

줄기가 산산조각 났지만 그것들은 죽지도 않고 재생했다. 본래라면 죽어야 했다. 한데 어느 날을 기점으로 죽음이 사라졌다.
생명이 넘치는 마경에서 죽음이 사라진다는 것은 재앙 중의 재앙.

온갖 기생 및 기괴 생물들이 케이먼을 추적하고 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끔찍한 광경이 감각에 새겨졌다.

[누가 보면, 말세(末世)인 줄 알겠군요.]

케이먼이 전력으로 내달리면서 목을 덮고 있던 손을 치웠다. 관통상이 치유됐다. 만약 세상에 죽음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그도 어쩌면 즉사할 수도 있었던 상처였다.

[아무래도 나갈 길이 막힌 것 같습니다만, 당신의 본체에게 소식을 전할 방법은 없는 겁니까?]

파르니움의 분체가 대답했다.

[마경의…… 경계까지…… 이동하지…… 않는…… 한…… 본체에게…… 닿지…… 못한다…… 너도…… 잘 알 텐데…….]

[다른 방법! 큭!]

지면에서 솟아난 거대한 끈끈이주걱이 케이먼을 덮쳤다. 점액 촉수가 있어야 할 부분에 갯지렁이 같은 붉은 촉수들이 빠르게 꿈틀거리고 있다!
악마의 손톱으로 순식간에 이를 찢어발긴 그가 방향을 전환해 가속했다.

[새로운 방법이 없냐고 물은 겁니다!]

[지금은…… 없다…….]

파르니움의 분체는 절망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이페아카른…… 기생의 대악마가…… 우리를…… 인지했으니…….]

케이먼은 왜 쫓기고 있고, 마경의 중심 부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기생의 대악마에게 발각된 탓이다.

지역의 안팎이 차단됐다.

바깥에서는 들어올 수 있을지언정 안에서는 나갈 수 없게 됐다. 덫에 빠졌다. 기생의 대악마를 따르는 측근들은 하나하나가 케이먼과 엇비슷하거나 압도할 정도의 괴물이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죽음을 연상케 하는 문 말이군요.]

케이먼이 빠진 이 드넓은 함정 안에는 언데드가 쏟아져 나온 공간의 틈새가 있다. 그리고, 대륙이 이를 인지한 상태.
그러므로 아주 강력한 언데드 토벌대를 조직해서 마경으로 올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즉.

외부에서 밀고 들어온 강자들과 협력해 탈출구를 구축해야 한다. 판단은 섰다. 케이먼 이상의 강자가 둘 이상이면 기생의 대악마의 덫에 자그마한 균열을 낼 수 있으리라.

[확실히 그게 유일한 활로이긴 하겠지만…… 제가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잡히기 싫은데 죽지도 못하는 상황이니.]

[살아라…….]

[물론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설령 저희가 끝내 잡히더라도 바깥에…… 신성에게 저희가 얻은 정보를 전해야 합니다.]

케이먼은 무려 마경의 중심인 마해까지 들어가서 기생의 대악마의 흔적을 쫓았고, 마침내 그의 계획 중 하나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이는 베르덴이 요청했던, 어느 모험가의 얼굴에 부여된 저주에 관한 단서이기도 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아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기생의 대악마가 어째서 모험가에게 그런 저주를 남겼는지, 왜 그녀를 죽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는지 케이먼은 깨닫고 말았다.

‘신성…… 절대로, 절대로 그녀가 죽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핏빛검 레이라.

반드시 ‘그것’을 봉인해야 한다.

* * *

노르드발트 회의장은 이어진 데우스의 한마디에 경직됐다.

“수왕의 발언권을 박탈한다.”

……!

수왕은 전 수인의 대표다. 그의 발언 하나하나가 수인의 입장을 대변하며, 그의 모든 행동의 수인족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그런 종족의 정점을 모두가 보란 듯이 논의에서 배제하겠다니.
수왕이 의장을 무시했어도 과도한 처벌이었다.

자칫 수인족이 전쟁에 소극적으로 임하면 손해는 대륙이 떠안아야 할 텐데, 실리스는 일국의 왕으로서 내심 우려감이 커졌다.

“…….”
“…….”

데우스와 안티아스가 정적을 사이에 두고 시선을 교환했다.

무겁게 움직이는 시계의 초침.

안티아스는 이내 낮은 웃음을 흘리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질문이 주어졌을 때만 발언하면 되겠나? 의장의 허락 아래.”
“그렇다.”
“그렇게 하지.”

아주 다행스럽게도 안티아스는 제 처분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몸이 약한 노덴 공왕이 안도했다.

성녀는 신성과 큰 마찰을 벌인 끝에 잠잠해졌고, 계외는 참석하지 않았으니 이 이상 회의가 난장판이 될 이유는 사라진 셈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데우스가 시선을 옮겼다.

“성자, 레온하르트.”
“아, 네.”
“할 말이 있으면 지금 하도록.”

레온하르트는 그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자리에서 기립했다.
그가 참석자들을 향해서 크게 허리를 숙였다.

“결례를 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됐으니까 앉아라.”
“넵.”

아드리안이 귀찮다는 듯 직전의 사태를 더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갔다.
직접적인 피해자…… 인 아드리안이 그러자, 간접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군말 없이 사죄를 받아들이는 분위기에 일조했다.

맞아서 그런 걸까.
어려서 그런 걸까.

레온하르트는 바싹 군기가 들어 있었다. 방금처럼 갑자기 신성력을 일으키며 날뛰는 것보다 훨씬 좋은 모습이긴 했다.

“이것으로 정상 회의 내 질서 문란에 대한 조치를 마치겠다.”

쿵! 쿵! 쿵!

“정회를 종료하고 정상 회의를 속개하겠다.”

중단된 회의가 재개됐다.

“대의제는 전쟁.”

세계 회의와는 전혀 다른 공기에 로벨린이 침을 삼켰다.

“이번 긴급 정상 회의는 오로지 전쟁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세계는 골격을 이룰 방침과 전략, 그리고 체계를 완성해야 한다. 그러므로 불필요한 질문과 발언은 삼가라.”

데우스는 충분히 경고를 주고는 등받이에 상체를 기대었다.

“발언 희망자는 거수하도록.”

스윽.

이데라트 임시 연맹장이자 다종족 최고 외교관인 브라오닉 스트롬이 팔을 들었다.
그는 의장의 허락을 받고 일어나 테이블 중앙을 가리켰다.

“……알디시피 지금은 옛 왕이 가진 모종의 힘에 의해 죽음이 사라졌네. 몸을 말 그대로 갈아 버리거나, 생체 조직을 충분히 파괴하지 않는 한 머리만 있어도, 급소가 파헤쳐져도 움직이는 형국이지.”
“…….”
“한데 테리웬…… 연맹장은 저렇게 머리가 온전히 남아 있는데도 다른 이들과 다르게 어떤 생명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네.”

브라오닉이 질의했다.

“신성, 대체 어떻게 그를 죽였는가?”

브라오닉은 세계 회의를 기점으로 베르덴을 좋게 보기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지성이 기준이긴 하지만 인간종만이 아니라 이형종과 아인종까지 품으려는 행보는 다종족 외교관으로서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지금은…… 베르덴이 어려웠다.

배신자일지언정 오랜 친우였던 테리웬의 머리를 가져온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의 벽안에 감도는 결연함이 무거웠다.
브라오닉에게 베르덴의 머릿속은 헤아릴 수 없는 미지처럼 느껴졌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발언권을 얻은 베르덴이 몸을 일으킨다.

브라오닉은 마치 소명을 다하기라도 한 듯 힘없이 착석했다.

“죽음에 대해서는 다크워튼 마탑주가 가장 잘 알 테지만, 그럼에도 대답하자면 ‘인간’의 죽음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하지만, 개념적인 의미에서의 죽음의 초점은 바로 ‘영혼’에 있지.”

숨통이 끊어지면 육체가 정지하고, 그 몸에서는 영혼이 빠져나간다. 영혼이 물질계를 떠나 가야 할 곳으로 가는 것.
이것이 세간에서 알고 있는 영혼을 기반으로 한 죽음의 설명이다.

“옛 왕이 일시적으로 세상으로부터 죽음을 없앤 원리는 영혼에 있다. 영혼을 명이 다한 현실을 떠나지 않도록 붙잡는 것. 그게 현상의 정체다.”

테아렐은 이 점을 이용해서 운명의 추종자들을 처리했다. 육체는 영혼의 단말이니, 육체를 한 줌도 남기지 않고 흩어 버려 물질계에 더 이상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육신의 완전 파괴.
영혼만이 남은 상태.

이야말로 상식적인 죽음이 사라져 버린 대륙의 죽음 중 하나였다.

“자, 잠깐만요, 베르덴.”

성녀가 순간 멈칫하더니 데우스 쪽을 바라봤다. 데우스가 무언으로 발언을 허락하고 나서야 그녀가 말을 이었다.

“현재 죽음에서 벗어난 건 인간뿐만이 아닌데, 그 뜻은…… 인간 외에도 영혼이 존재한다는 말인가요? 짐승과 벌레까지도?”

불신의 눈빛.

루아스의 교리는 인간에게만 영혼이 존재하고, 그래서 인간만이 루아스 여신의 곁으로 갈 수 있다고 설명한다.

다른 종족에게도, 심지어 미물에게까지 영혼이 존재한다는 논리는 당연히 성녀로서 교리상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영혼에 관한 빛의 교리를 부술 수는 있다. 하나, 그래서는 득보다는 실이 압도적으로 크겠지.’

라인델 넥스레온은 영혼의 개념을 최소한 드라벤만큼은 이해하고 있을 터. 그런데도 교국의 교리를 단 한 번도 반박하지 않았다.
세상에 깊이 관심을 두지 않는 그의 특유의 성향도 있겠지만, 반론해 봤자 극심한 혼란만 낳기 때문이리라.

베르덴도 판단도 그와 같다.

공식적으로 루아스교의 교리를 파훼해도 약간의 이득도 없다. 반드시 루아스교를 적으로 삼아야 하는 경우라면 모를까.

그래서 설명에 약간의 여지를 두었다.

“아까 말하지 않았나? ‘인간’의 죽음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고. 내가 알아낸 것은 어디까지나 옛 왕이 인간의 죽음에 끼치는 영향이다. 그 외 다른 생물들이 어떻게 죽음에서 벗어났는지는 파악 중이고.”
“……아.”
“질문이 있으면 나중에 해라. 흐름 끊기니까.”

에르세티아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얌전히 수긍했다. 성녀의 광기 억제기. 벤디에와 로마누스는 베르덴의 또 다른 가치를 새삼 인지했다.

“계속하지. 어떻게 테리웬을 죽였냐고 물었나? 간단하게, 현실에 강제로 잡혀 있는 테리웬의 영혼을 해방했다.”

잿빛의 건틀릿에 검붉은 빛이 맺혔다.

“내 마도로.”

베르덴은 죽음이 없어진 세상에서 죽음을 선사할 수 있다. 그의 업적을 알고 있다면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것이다.
베르덴의 마도는 이상할 정도로 파괴의 개념에 특화돼 있다. 인드렌은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파멸을 몸으로 겪은 바 있다.

“답변이 되었나?”
“……설명 고맙네.”

브라오닉이 긍정의 뜻을 보였다.

하지만.

베르덴은 아직 기립해 있었다. 사방에서 의아한 시선이 쏟아졌다. 베르덴은 천천히 참석자들을 크게 둘러보곤 입을 열었다.

“아직 실감이 안 나나? 전쟁이.”

세계 회의에서 하원에 속했었던 왕들이, 일국의 대표들이 뜨끔했다. 일부 마탑주들도 그와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베르덴과 눈이 마주친 도시 연합, 카일리언스의 시장이 헛기침했다.

“아, 아무래도 조금은…….”
“이해한다. 너희는 옛 왕을 본 적도 없고 단순히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니까. 전조가 있었다고 해도 대륙 단위의 전쟁? 상식적으로는 실감이 나지 않을 수밖에.”
“…….”
“여러 강대국이 참여하고, 초월자들까지 전선에 나설 예정이니. 자신이 개입할 만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적의 주축은 언데드이니 루아스 교국에 맡기면 된다며, 안일하게.”

쿵. 쿵.

베르덴이 검지를 굽혀 테이블을 묵직하게 두드렸다.

“800년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옛 왕이 이끄는 크세리온 제국과 세계 연합이 대륙을 두고 전면전을 펼친 초월자 전쟁이.”

초월자 전쟁.

본래 초월자들이 다툰 결과 대륙 절반이 불타고, 피가 강을 이루며,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고 세간에 알려졌지만…….
세계 회의 이후로 정상들은 전쟁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초월자들이 패권을 두고 전쟁을 주도한 것은 맞지만, 끝끝내 대륙이 뒤집힌 것은 옛 왕이란 초월자 때문이란 걸 말이다.

“옛 제국의 황제가 대륙에 돌아왔다. 물론 전력을 비교하면 현대의 국제 사회가, 당시에 승리한 세계 연합군보다 막강하지. 그러나, 그 이상으로 적국의 규모 또한 달라졌다.”

베르덴이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옛 왕은 유일한 약점을 극복했다. 지난 800년 동안 루아스 교국이 처리했거나 세월 속에 스러진 주검의 영광을 모조리 되살렸고, 거대한 유골룡에 불과했던 사룡 네크바엘은 처음으로 전력과 지성을 되찾았으며, 아홉 개의 사문을 통해 크세리온 제국의 사령관들이 현현했지. ”

순수하게 전력과 전력을 부딪치면 어떻게 될까.
이겨도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여기 테리웬처럼 국제 분열을 유도하는 인류, 아니 세계의 배신자들이 숨어 있다. 서약자의 계약과 교국의 이단 심문에 걸리지 않을 방법까지 강구하면서.”
“……!!”
“온 사방이 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너희는 누굴 믿을 거지? 운명?”

베르덴의 눈길이 데우스에게 이르렀다.

“에온에서 구상한 전쟁 대책을 건의하겠다.”
“발언하라.”
“초월자 연합을 주축으로 하는 세계 연합군의 창설을 제안한다.”

초월자 연합의 머리는 베르덴이다. 다시 말해 베르덴 자신이 세계 연합군의 수뇌부가 되겠다는 의미였으니.

“결국 희생은 필연이다. 누군가는 전쟁에 휩쓸려 목숨을 빼앗기고, 가족을 잃겠지. 내게는 어떤 피해도 없이 전쟁에서 승리할 방법은 없다.”

전쟁에서 단 한 명도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베르덴은 숙고했고, 제힘으로 불가능함을 이해했다.

“하지만 지휘부에서 너희들의 목숨을 저울질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베르덴이 단언했다.

“가장 앞에 서겠다.”

그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호소였다.

“나를 앞세워라. ‘2차 초월자 전쟁’의 최전선에.”

최고 지휘자로서 위험한 전선에 뛰어드는 것은 모순이다. 지휘부가 사라지면 세계 연합은 흔들릴 것이고, 자칫 붕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르덴은 그냥 지휘자가 아니다.

8위계 초월자.

세계의 정점에 가장 가까운 존재 중 한 명.

‘신성과 함께, 전쟁에?’

전선전쟁이라고 불리는 헬리온 마탑주, 트리톤 마르투스는 베르덴을 필두로 해 치열한 전선에 서는 상상을 했다.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했고, 또 영광이었다.

베르덴의 단호한 선언에 회의 참석자들은 뭐라 할 말을 잃었다.

“크크크크크크큭.”

오직 한 명을 제외하고.

“그야말로, 그야말로 인간적이군.”

제라클 황제가 웃음을 참기 어렵다는 듯 소리를 내었다. 찬사라도 하는 것처럼 홀로 박수를 치던 그가 한 손을 들었다.

“기꺼이 뒤따르지.”

제라클 디안 세레아노르 아르나크 황제.

과거 다섯 선장이 방주의 일원으로 삼는 방안을 논의했으나…….
인류를 위하면서도 사상이 지나치게 위험하다고 판단해 접촉을 전면 철회했던 인물이 베르덴의 선택에 동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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