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2화 정상 회의: 정점 (2)
제라클 황제는 왠지 모르게 희열이 감도는 듯한 옅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팔꿈치를 직각으로 굽혀 든 오른손 또한 거두지 않았다.
“……후.”
제라클 황제의 속내를 너무도 잘 아는 리반데일 대공은 대놓고 한숨을 쉬며 베르덴의 의지에 한 표를 던졌다.
제국의 또 다른 황제라고 불릴지언정 그는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황실의 뜻에 반대한 적이 없었다.
아르나크의 황제는 언제나 단 한 명이고, 대공은 아르나크 제국의 충신이자 검이며 신민이 아니었던 적이 없으므로.
낯선 분위기.
세계 연합의 정점이 되어 가장 위험한 최전선을 자처하겠다는 베르덴과 전 대륙에서 한 손에 꼽히는 대제국의 지지 선언은 이들 정상들로 하여금 판단의 절벽에 서게 했다.
받아들이든 거절하든 결정한 순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자기 파멸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베르덴, 그것이 너의 뜻이라면 가족으로서 빈틈없이 뒤를 받쳐 주마.’
반젤리스는 생각하느라 처음으로 나서지 못한 걸 못내 아쉬워하며 의사를 표명했다.
“아케나드 마도국이 함께하지.”
“보헤미른 마탑은 에온을 따르겠습니다.”
우연의 일치로 동시에 거수한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로벨린이 흠칫했다.
반젤리스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보헤미른 마탑은 에온에 종속되었다시피 하다는 걸 떠올리고는 그녀의 신속한 결정에 납득했다.
베르덴과 로벨린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렇게 선택이 계속됐다.
“대자연의 형제에게 위대한 어머니의 축복을.”
“흠, 제국이 동의한다면…….”
세렌디아와 아르쿨도 반대하지 않았다. 대수림의 엘프는 에온의, 그리고 화산 지대의 드워프는 제국과 협력 관계에 있다.
“담대한 포부로군.”
“이보다 적은 손실은 없을 것 같습니다.”
라인델 넥스레온이 참석자들에게 낯선 웃음기를 머금는다. 웬델 마그누스는 대륙 3대 은행 대표로서 입장을 밝혔다.
이들은 옛 왕에 대비해 8세기 동안 전쟁을 준비한 세 명의 죄인과 초대 네크로맨서와 얽혔으니 이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물론 라인델은 그런 사정과는 무관하게 베르덴을 무조건적으로 도와줄 심산이었다.
“……저 죽음의 물결을 막으려면 호미로는 턱도 없겠지요.”
“찬성.”
살베르는 테아렐의 눈치를 보며 베르덴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녀가 이미 초월자 연합에 가입했는데, 어떻게 그 연합의 수장격인 베르덴에게 보란 듯이 반대할 수 있단 말인가?
뭐, 사실 테아렐이 아니어도 세계 연합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초대규모 전쟁이다.
심지어 산 자를 증오하는 이형종과의…….
모험가 길드의 독자적이고 300년의 역사가 담긴 토벌 능력으로는 길드 창설 이래 유례없는 언데드의 발호를 종식시킬 수 없다.
지휘부가 필요하다.
모험가 길드는 머리가 될 수 없다. 존경해 마지않는 최초의 모험가께서 인간을 지키기 위해 조직한 집단이니까!
살베르는 길드 본부장으로서 세계 연합을 마다할 명분도, 그럴듯한 논리도 없었다. 되레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정점이 되겠다는 베르덴을 열렬히 응원해야 마땅했다.
방패가 있어야 모험가들은 제대로 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벤디에와 유리온은 초월자로서 베르덴의 의기에 화답했다.
가레스는 ‘저 미친, 미친놈…….’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초월자 연합의 일원답게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줄줄이 계속되던 상원들의 입장 발표가 잠시 멈추었다. 세상의 시선은 아직 판단을 내리지 않은 하원들에게 향했다.
“베르덴 님의 뜻이 곧 에스티리아의 뜻입니다.”
“리비안트 공국 또한!”
“저희 벨디른 공화국은 주검의 영광의 간악한 계략으로부터 도시와 시민을 구한 베르덴 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동대륙 중앙에 자리한 세 개의 국가가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국가는 어떨까.
역시나 그들 대부분의 고심은 살베르와 다르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몇 없었던 8위계의 마법계 초월자가 직접 최전선에 뛰어든다면…… 그만큼 우리가 흘려야 하는 피가 많이, 많이 줄어들 터!’
대륙에 평화가 돌아온다고 해도 자신이 누리지 못하면 무의미하다, 이것은 절대로 비난받을 수 없는 자연스러운 이기심이다.
로니아 왕국과 하부 수인 부족이, 두 개의 사문이 열려 무너졌다는 소식을 접한 지도자들은 무엇보다도 존속이 우선이었으니.
베르덴을 앞세워서 최대한의 생존을 꾀하는 길이 최선이었다.
전쟁의 향방은 중요하지만, 전쟁 후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오늘 살아도 내일 죽으면 무슨 소용인가!
국가를 그야말로 잿더미로 만들어 세계 평화의 초석이 되려는 마음가짐은 어떠한 위정자도 바라선 아니 된다.
다른 사람의 재를 밟고 군림하는 것이 지도자의 책임이다.
에온, 제국, 마도국의 영향력이 스며든 국가들은 조심스럽게 견해를 개진했다. 동의, 동의, 동의, 동의, 동의, 동의…….
이제 루아스 교국의 눈치를 보는 통치자들만이 남았다. 아직 루아스교는 찬성과 거부, 둘 중 하나를 택하지 않았다.
베르덴에게서 느껴지는 기이한 존재감에 완전히 적응한 덕분에 더 이상 기현상에 사로잡히지 않게 된 로마누스는 이마가 지끈거렸다.
‘가장 앞에 서겠다니요…… 개인으로서는 칭송할 만한 훌륭한 각오입니다. 그러나, 막중한 책임은 곧 막대한 권한과도 같을진대…….’
만약 찬성한다면 루아스교는 반드시 에온의 뒤를 쫓아야 한다.
에온이 그 힘으로 루아스교에게 무엇을 강요할지 모를 일이고, 옛 왕과의 전쟁을 루아스교가 지휘하지 못하는 것도 용납하기 어렵다. 죽은 자들을 정화하는 것은 빛의 숭고한 역할이므로.
전쟁이 승리로 끝나면 에온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세력으로 거듭날지 가늠키도 어렵다.
‘그런데…… 그렇다고 반대해야 합니까? 루아스 교국의 위엄이 퇴색될까 봐 두려워서? 에온이 교국에 해를 입힐까 봐 걱정돼서? 어쩌면…… 에온이 새로운 빛의 모범이 될까 우려돼서?’
로마누스가 자조했다.
보다시피 이 국제 사회가 베르덴의 세계 연합을 원하고 있다.
이러한 시류를 세계 종교가 반대하면 달아오른 도자기에 얼음물을 끼얹어 쓸데없는 균열을 만드는 것과 진배없다.
에르세티아와 레온하르트로부터 판단의 역할을 이미 일임받았다. 에르세티아의 광기가 서린 눈에도 망설임이 엿보였다.
“…….”
“…….”
정상 의장──데우스 위덴이 지그시 로마누스를 응시한다. 루아스교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이다. 세계 연합 창설은 막을 수 없지만, 연합에 참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각국의 의사에 달려 있다.
루아스교가 없는 미완성 세계 연합이 구축되느냐 마느냐는 로마누스의 결단이 가름하리라.
“여신의 빛은.”
로마누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항상 ‘모든 이’의 용기를 따스하게 비추십니다.”
결국 인간 종교의 필두 루아스 교국이 베르덴을 연합장으로 인정했다.
마지막 도미노 패가 넘어지자 논의는 종결됐다.
아세트로, 에레스, 10대 마탑, 마법 자주 연대, 비렌테 등 남은 상원들과 하원들이 물결 치듯 일제히 소신을 피력했다.
발언권이 박탈당해 입을 열지 못하는 안티아스는 거대한 팔뚝을 까딱거리며, ‘너는 어쩔 거냐?’란 식의 즐거운 눈빛으로 데우스를 지켜보았으니, 이에 그가 천명했다.
“세계의 의지를 확인했다.”
공식 표결은 없다.
긴급 회의에서는 발언과 의사 표명 하나하나가 절차다.
“이로써 국제 사회를 기반으로 한 세계 연합군이 창설됐음을 공표하는 바.”
데우스는 손끝으로 테이블을 세 번 두드림으로써 모두의 결정을 정리했다.
“에온의 베르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를 우리의 정점(頂點)으로 공인한다.”
메이아는 주도권을 빼앗겨 다소 불만스러웠으나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흐름은 형성됐다.
베르덴은 이 시간부로 국제 사회의 총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다.
“현 국제 사회의 대표가 정했으니 의장의 역할은 베르덴에게 이양하겠다.”
“이어서 진행하지.”
베르덴은 초월자 연합과 세계 연합의 수장이 된 소감 따위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무엇을 할 것인지는 이미 전달했으니 나머지는 사족이었다.
그는 이 결과가 당연하다는 듯이 단호했으며, 그 몸짓에는 거침이 없었다.
“첫 번째 소의제는 죽음의 문, 통칭 아홉 개의 사문(死門)이다.”
에온이 주도하는 전쟁 협의가 시작됐다.
* * *
사문을 목격하거나 그것이 불러일으킨 재앙을 경험한 자는 적지 않다.
마경의 생물에서 탄생한 언데드.
죽음으로 오염된 펜드렌호.
죽음을 받아들이기 싫은 배신자들.
…….
세간에 소문은 퍼졌으나, 그 실상은 소문 이상의 참상을 초래했다.
단순히 초대규모 언데드 군단이 목숨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피울음 역병과 질적으로 다른 공포가 사람들의 마음에 만연했다. 사문의 원인을 규명하지 못한 이 상황이 불안을 극대화한 탓이었다.
미지를 걷어 내는 것.
이는 중심 전략을 결정하기 이전에 해결해야 할 선과제다.
“나는 대륙에서 죽음이 사라지고 노르드발트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옛 왕의 현재 전력을 파악하는 데 모든 자원을 할애했다. 그리고, 제법 적잖은 성과를 얻었다.”
베르덴이 턱짓했다. 두 눈이 감기고 입술이 약간 벌어진 테리웬의 머리통이 행동의 증거이자 결실의 표본이었다.
“사문의 정체 또한.”
테이블을 밟고 올라선 베르덴이 중심부로 걸음을 옮겼다. 시선들이 그를 따라 움직인다.
일종의 증거품으로 용도를 다한 테리웬의 머리는 아공간에 저장하고, 거대한 직사각형으로 된 사물을 소환했다.
고대 아티팩트, [마테리아스].
모든 대륙이 기록된 3차원의 지도이자, 발로크의 10번째 컬렉션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로크가 베르덴의 지식을 아낌없이 쥐어짜 냈듯, 베르덴은 발로크가 일평생 수집한 물건들을 아낌없이 활용하고 있다.
“여태껏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문은 여섯 개지만, 프로하스에서 봉인된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진즉에 개방된 상태다.”
“전부……?”
“위치로는 서대륙에 둘, 중앙 대륙에 하나, 마경에 하나, 동대륙에 둘.”
후우우웅.
손짓으로 [마테리아스]를 넓혀 대륙 전도를 전개했다. 그리고, ‘여섯 개’의 지형을 비틀어 사문을 가리키는 균열을 형성했다.
“내가 가진 정보를 공유하기에 앞서, 사문에 대해 유의미한 조사 결과를 손에 넣은 참석자가 있나?”
죽음의 문에 접근하는 걸 넘어서 접촉한 사람은 베르덴만이 아니다.
“아세트로 올딘, 발언하도록.”
“마경의 사문은 기능이 완전히 정지된 유기체를 변질시키더군.”
키퍼──아세트로 올딘이 독자적으로 연구해서 얻은 자료를 공개했다.
마경의 이상 상태를 처음으로 알아챈 초월자가 마의 공포와 무모한 지식인과 함께 사문을 목격했던 순간을 상기했다.
“언데드에게 짓밟힌 생명체는 몇 분 지나지 않아 생전의 능력을 보유한 언데드로 변이했다. 각각 변이 시간은 다르나, 언데드의 자연 발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지.”
“인간종이 마경에 죽는다면?”
“시체를 불태우거나 신성력으로 정화하지 않으면 마찬가지로 언데드로 변화한다. 실증 없이도 단언할 수 있다. 마경에 들어서는 지점부터가 생명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의 시작이다.”
아세트로가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초월자도 예외는 아니겠지.”
토벌대원이 사망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언데드가 되어 토벌대에 증오를 겨눈다.
안 그래도 위험천만한 마경에서 시체의 변이까지 고려해야 한다니. 왕들은 이걸 어떻게 대처할지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강력한 마경의 생물들은 당장 언데드로 전락하진 않을 거다. 죽음이 사라진 세상은 마경에도 적용되고 있고, 그놈들은 누구보다 생존에 집착하는 존재들이니. 하지만, 마경의 사문을 방치하면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올 터.”
“그 시점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마경과 대륙 사이의 협곡에 웅크린 그가 계산을 마쳤다.
“가을 중순만 돼도 선택을 후회하게 될 거다.”
끝끝내 사문이 발산하는 죽음의 기운이 마경의 생명력을 집어삼키면 적어도 중앙 대륙의 반 이상은 포기해야 하리라.
“서둘러 대응하지 않으면 최악이 현실이 되어 국제 사회를 무너뜨린다.”라는 것이 아세트로의 결론이었다.
“사문을 없앨 방법은 찾았나?”
“마경에서는 불확실성이 크기에 사문에 접촉하진 않았다. 어쩌면 프로하스의 국왕이 봉인한 사문이 그 열쇠가 될지도 모르지.”
“그러려면 봉인을 해제해야 합니다. 직후 사문도 완전히 개방될 거고요. 조사를 하려면 만반의 준비가 필요할 겁니다.”
“그렇다는군.”
에레스의 첨언을 마지막으로 아세트로가 발언을 마쳤다. 다음으로 누군가가 손을 들었고, 베르덴에게 발언권을 얻었다.
죽음의 이해자 – 라인델 넥스레온.
루아스 교국과는 다른 의미로 이 분야에 있어서 그에게 견줄 권위자는 없다.
심지어 다크워튼 마탑은 주검의 영광에 정면으로 맞선, 진정한 마탑다운 흑마법사 집단이기도 하기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옆에 서도 되겠나?”
“그러시죠.”
베르덴에게서 진심으로 존경받는 인물은 절대로 많지 않다.
라인델은 그중 하나였다.
터벅, 터벅, 터벅.
라인델이 테이블 위를 가로질러 베르덴의 좌측에 섰다. [마테리아스]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직감만으로 조작법을 이해하고는 동대륙 상부…… 델하룬 북부와 남부 사이의 숲을 확대했다.
후웅.
무정한 손끝이 3차원의 숲속에 일곱 번째 사문을 만들어 냈다.
“이곳에 사문이 열렸다.”
라인델 또한 기꺼이 정보를 공유했다.
“내부는 제법 아늑하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