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4화 앞마당 전투 (1)
누구에게나 작별은 있다.
아무리 애원해도 이별은 필연이다. 생명이 있기에 죽음 또한 존재한다. 우리의 삶은 이처럼 무수한 별로 빛나기에 아름다우며 처량한 것이다.
떠나간 이를 추억하거나 망각하는 건 오직 남겨진 자의 몫이니, 그것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는 그리움의 온기이리라.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았다.
공허한 자리를 바라보며 감정을 토해 내고, 또 삼켜 회상이 편해지고, 자연스럽게 흔적에서 시선이 떨어질 무렵 우리는 비로소 서로에게 고별을 고한다.
그런데…… 그렇게 겨우 떠나보낸 이가 돌아온다면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하는가.
재회의 기쁨을 누려야 할까.
다시 한번의 이별을 준비해야 할까.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았다.
* * *
순간의 충격에 흙먼지가 아주 짧게 피어올랐을 뿐 대기는 고요했다. 화살처럼 쏘아지며 족적을 남기지 않는 움직임은 절제의 표상이었다.
분쟁 지대 위로 버려진 무기들이 무기술의 정점을 맞이했다.
‘퇴로부터 끊는다.’
롱소드를 역수로 고쳐 잡은 벤디에가 크게 도약하며 회전했다.
검기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절벽을 갈아 버렸다.
그렇게 무너지는 벼랑을 파헤치듯이 파고든 그녀가 허공에 흩어진 잔해들을 밟으며 롱소드를 역소환하고, 사슬 철퇴를 손에 들었다.
교열(咬裂)의 쇄구, [인툼(Intum)].
추력에 힘입어 날아가는 철퇴 머리가 낭떠러지를 구성하던 대지의 조각들을 파괴했다. 사슬이 계속해서 늘어났다.
바위를 부수고, 그에 따라 각도가 틀어지며 또 다른 바위를 박살 내며───마치 굶주린 짐승처럼 사방을 찢어발겼다.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불온한 존재감을 내비친 크세리온 제국의 사령관이 기민하게 회피했다. 자그마한 돌덩이를 발판으로 삼을 만큼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가죽 갑옷과 로브의 후드, 또 낡은 붕대로 전신을 꽁꽁 싸매고 있다. 소매가 특히 길어 어떤 식으로 활을 잡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외견은 불분명했지만, 관절이 역으로 움직이거나 하지 않는 걸 보면 인간처럼 피부가 있는 좀비 계열일 가능성이 높다.
‘어디선가…….’
벤디에는 난데없이 기시감을 느꼈으나 이는 찰나에 불과했다.
상념은 치워 버렸다.
[인툼]의 금속 사슬이 곧 넓게 똬리를 틀어 공간을 장악했다.
“물어 파열시켜라.”
벤디에의 시동어에 철퇴 머리가 멈칫하더니 엄청난 속도로 경로를 역행했다. 되감기는 사슬이 출렁거리며 해당 영역을 난자했다.
벤디에만을 피해 가는 금속의 폭풍이 공기를 사납게 물어뜯었다.
[……!]
사령관이 미처 피해 낼 틈새가 없어 질량의 폭거에 격타당했다. 아래로 곤두박질치다가 한 손으로 땅을 짚어 충격을 감쇄, 직후에 옆으로 미끄러져 벤디에의 후속타에서 벗어났다.
기의 파동에 의해 자욱하게 솟구친 흙먼지 속에서 벤디에가 활을 들었다.
주력(注力)의 [아르테(Arth)].
현존하는 모든 무기를 다루는 그녀는 엘프 이상의 명사수이기도 하다. 그녀가 시위를 놓자 홍금(紅金)의 광선이 사출됐다.
투확!
가슴이 꿰뚫린 사령관이 관성에 끌려가며 벤디에에 맞서 활을 겨누었다.
농밀한 사기가 집중돼 골격의 화살을 빚어냈다.
서로 다른 화살비가 수평을 가로지른다.
화살과 화살이 충돌하며 폭발을 일으켰다. 그렇지 않은 화살은 적의 급소를 노리거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직선, 또는 곡선을 그렸다.
접전을 이루는 것 같은 공세는 한순간에 한쪽으로 기울었다.
벤디에가 사령관을 압도했다.
가히 신기와 같은 궁술이 사령관이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을 명백히 웃돌았고.
빛살과 같은 기의 화살이 차츰 낡은 로브를 스치며 훼손하더니 가죽 갑옷 앞에서 폭발하여 부패한 육신을 날려 버렸다.
‘끝.’
벤디에가 안력을 높였다. 그녀는 기예와 절기를 구사하지 않는다. 몸짓 하나하나에 그 기교를 모조리 녹여 낸 경지를 이룩했기에.
쿠구구구구……!
막대한 기운이 [아르테]를 매개로 한 발의 강렬한 화살로 응축됐다.
그 순간───사령관이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사격 자세를 취했다. 몸의 상하가 반전된 상태로 날아가는 와중인데도 균형을 유지하는 몸놀림.
넝마가 된 사령관의 소매가 펄럭이다가 윗부분이 뜯겨 나갔다. 활시위를 극한까지 당기는 손의 형태가 훤히 보였다.
그리고, 기류가 바뀌었다.
“……그럴 리가.”
손아귀를 떠나간 활시위에서 짙은 홍금의 화살이 쏘아져 나갔다. 동시에 사령관 또한 사기를 분출하는 화살을 날려 보냈다.
슈화아아악───────!
벤디에의 일격이 눈을 깜짝하기도 전에 사령관의 머리 옆을 관통했다.
홍금의 기운이 남긴 경로선상에 대지가 밀릴 만큼 바람이 몰아쳤다. 그로 인해 사령관의 반격이 옆으로 비껴 나갔고, 벤디에의 관자놀이를 스칠 듯 그 화살이 지나갔다.
피차 표적을 맞히지 못한 그들이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마주 보았다.
천천히 활을 내리는 벤디에.
회색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으로 얼룩져 있다. 벤디에의 평정이 깨졌다. 부활한 옛 왕을 보았을 때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던 평정심이 초월자로 각성한 이후 처음으로 무너졌다.
거칠게 찢어진 로브의 후드가 젖혀지며 사령관의 얼굴이 드러났다.
“루에린.”
무투계 초월자는 육체가 전성기에 머무는 동안에 보통 경지를 각성한다.
마법계 초월자와는 육체의 의미가 다르기에, 가장 신체적으로 강건한 젊은 시절에 인간의 벽을 극복하는 것이다.
각성한 순간 노화는 멈춘다.
벤디에는 겉보기에 무척 젊지만 사실 1세기를 넘게 살아온 초월자다. 현 초월자 중에서 그렇게나 오래 산 초월자는 결코 많지 않다.
갓난아기가 노인이 돼 땅에 묻혀도 그녀는 여전히 존재했다.
세월의 깊이란 떠나간 인연의 깊이…….
벤디에는 그동안 많은 제자를 길렀고, 많은 제자를 떠나보냈다. 노환, 질병, 전쟁, 생사결, 사고 등 이별의 원인은 다양했다.
템플은 신념을 가진 자들을 위한 장소이며 그녀의 제자들은 저마다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수련자들이었기에.
벤디에는 자신이 길러 낸 제자들을 기억한다. 어떤 이유로든 신념이 꺾인 탓에 파문된 제자들 또한 잊은 적이 없다.
추억을 새겨 넣은 기억이 열리며 그리운 면면들이 뇌리를 스쳤다. 그중에서 추억의 앞장을 장식한 이의 미소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벤디에가 처음 들인 대제자, 무향(無向), 루에린.
활시위를 당기는 손버릇도.
전반적인 궁술의 기교도.
어떤 자세에서도 원하는 방향으로 화살을 쏘아 보낼 수 있는 유연함도.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가벼움도.
전부 벤디에의 기억 속 특징과 일치했다. 절벽에서 토벌군단을 노리고 초장거리 저격을 가한 순간 눈치챌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조차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탓에, 그것은 강한 기시감으로만 전해졌다.
템플의 대스승은 지금으로부터 88년 전에 사망한 대제자와 재회했다.
초월자와 언데드로서.
벤디에의 눈을 바라보는, 피부가 창백한 루에린이 천천히 활을 내렸다. 그러곤 생기 하나 없는 눈동자를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크세리온 제국의 제8사령관, 루에린.
[스승, 님.]
그 언데드의 한 마디가 어찌할 수 없는 비수가 되어 벤디에에게 꽂혔다.
동시에 루에린이 지면을 겨누었다.
콰아아아아아앙!
토사가 높게 치솟았다. 흙으로 뒤덮이는 시야 너머 루에린이 존재감을 은폐했다. 뒤늦게 방해물을 모조리 걷어 냈으나 루에린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놓쳤다.
벤디에가 저지를 만한 실수가 아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상황 자체가 부동심을 무너뜨렸다. 그녀는 그저 가만히 서서 루에린이 있던 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당혹감을 곱씹었다.
전투의 소음이 가라앉은 지 시간이 조금 지나자 곧 군단에서 마중을 나왔다.
“스승님, 괜찮으십니까?”
“……!”
벤디에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절벽의 잔해로 뒤덮인 땅.
동대륙 남부 토벌군단에 참전한 세 명의 대제자 중 한 명이 거기에 있었다. 갑자기 전장이 조용해져 상황 파악을 위해 나선 것이었다.
벤디에는 내심 작은 숨을 길게 내쉬고는 [아르테]를 무기고로 역소환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령관의 은폐 능력이 뛰어나 한 끗 차이로 놓쳤군요. 저격에 능한 개체이니 원거리 방어에 유의하는 게 좋겠습니다.”
“예, 그리 전하겠습니다.”
“추가 매복은 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진형을 해제하고 진군을 속행하겠습니다.”
벤디에를 필두로 하여 분쟁 지대 중심을 뚫고, 그 여력을 유리온의 쪽에 더한다. 전장을 계획대로, 또한 이상적으로 장악하려면 그녀의 군단이 선봉을 맡아야 한다.
벤디에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금 군단의 지휘를 맡았다. 모두가 고삐를 잡고 군마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전장에 녹아들기 시작했으나 벤디에는 혼자 섞이지 못한 채 사고를 거듭했다.
‘단순히 루에린을 모방한 언데드가 아니었다. 몸짓, 말투, 판단. 경지는 전보다 훨씬 더 높아졌지만 뿌리는 과거의 루에린 그 자체였다.’
루에린의 시체에서 탄생한 언데드 개체라면 그나마 이해할 수 있겠지만, 루에린은 이미 88년 전에 고인이 된 대제자다.
시신이 남아 있을 턱이 없다.
하물며 장례는 루아스 교국에서 직접 치러 성화로 화장(火葬)했다. 생전 루에린이 바랐던 대로. 세상에 흩어진 뼛가루를 한데 모은다고 한들 언데드의 탄생은 결단코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런 루에린이 언데드가 되어 돌아왔다.
심지어 크세리온 제국의 주구가 되어.
‘대체 어째서, 도대체 어떤 원리로.’
벤디에의 시선이 조용히 기울었다. 그녀의 차가운 눈은 많은 병사가 목에 걸고 있는 황금빛 정십자가로 향했다.
루에린은 여타 인간이 그러하듯이 루아스 교국의 신자였다.
신앙심이 투철한 제자였다.
매일같이 기도를 잊지 않고, 빛의 교리에 의거해서 사람을 돕는 마음. 그 자체가 루에린이 스스로 결정한 굳건한 신념이었다.
그렇게 루에린은 끝까지 사람들을 지키다 죽었다.
루에린의 시신에 새겨진 흔적 하나하나가 신념의 증명이었으니…….
벤디에는 자신의 대제자가 루아스의 곁으로 갔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신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여태까지 루아스 교국이 주장한 교리의 내세(來世)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
벤디에는 세상에 대한 신앙적 설명에 반박한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루에린, 왜 당신이 여기에 있는 겁니까.’
긴급 정상 회의에서 베르덴이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죽음에 대해서는 다크워튼 마탑주가 가장 잘 알 테지만, 그럼에도 대답하자면 ‘인간’의 죽음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하지만, 개념적인 의미에서의 죽음의 초점은 바로 ‘영혼’에 있지.
───옛 왕이 일시적으로 세상으로부터 죽음을 없앤 원리는 영혼에 있다. 영혼을 명이 다한 현실을 떠나지 않도록 붙잡는 것. 그게 현상의 정체지.
영혼(靈魂).
당연히 루아스 여신의 곁으로 갔어야 할 루에린의 영혼이 이곳에 있다. 언데드에 깃들어 죽음의 제왕을 떠받들고 있다.
벤디에는 결론을 내린 듯 눈을 감았다.
‘사문에서 발호하는 언데드는 지금까지의 것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루에린이 특별한 건지는 몰라도, 대제자의 존재가 마냥 시체 기반의 언데드가 아니라는 걸 입증하고 있어.’
과연 베르덴은 여기까지 알고 있었을까.
아마 몰랐으리라.
알았어도 회의에서는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인류에 번영을 안겨 준 빛의 교리와 충돌되는 논리의 파편이므로.
‘세상은 대체 무엇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가.’
벤디에 카에나르는 크세리온 제국의 정체에 대해 강렬한 의문을 품었다.
그녀가 진실을 찾기 시작했다.
* * *
동대륙 남부 분쟁 지대의 남서쪽에 거대한 균열이 일렁이고 있다.
그 안에는 풀 한 포기 자라나지 않은 삭막한 구릉이 펼쳐져 있었으며, 구릉 끝자락에는 견고한 고대 성채가 자리하고 있었다.
[템플의 마스터───벤디에 카에나르. 육사도께서 위협으로 분류하실 만하다. 그 죽음은 정복할 가치가 있으리.]
묵시록의 언데드가 권좌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내성 밖으로 나갔다.
복귀한 루에린을 비롯해 두 하위 사령관을 곁에 둔 그가 성벽 위에 섰다.
[운명과 양립할 수 없는 자에게는 마땅한 최후를.]
전쟁의 묵시록, 네크라논.
[산 자를 인도하라.]
여섯 번째 사도의 권속 중에서 가장 거대한 체구를 가진 그가 검을 높이 들었다. 크기만으로 인간 따위를 압살하고도 남을 거대한 검이었다.
그 명령은 분쟁 지대를 아우른 거대한 전장 전체에 전해졌다.
로니아 왕국과 하부 수인 부족의 무수한 인명을 제물로 바친 강대한 타락자들.
최고위 언데드의 아종들.
또 사문에서 발생한 언데드 대군.
크세리온 제국이 진격했다.
* * *
동대륙 남부 토벌군단 내에서 말을 다루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즉, 병사 한 명 한 명이 군마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연합의 막대한 재산.
베르덴과 죄인들의 합작품이었다.
‘부유한 전쟁이라.’
유리온은 황금빛 해골을 보았다. 자세한 내막까진 모르나, 초대 네크로맨서와 깊게 연관이 있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었다.
무려 800년 전부터 훗날 다시 벌어질 전쟁을 위해 재산을 축적해 놓았다는 비밀은 유리온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멋지지 않은가?
그들의 기나긴 인내와 안배는 결국 현재로 이어져 연합군의 전력을 보완했다. 단언컨대 천 년 동안의 모든 전쟁을 통틀어도 지금보다 풍족한 상태로 전쟁에 임한 적은 없으리라.
“이야, 생각보다 반응이 빠른데.”
유리온의 군단이 속도를 늦추었다.
갈기 구릉의 동쪽 끝.
분쟁 지대의 경계선 부근에서 크세리온 제국과 맞닥뜨렸다. 언덕, 그리고 언덕과 언덕 사이를 빼곡히 채운 시체의 향연.
“앞마당 빼앗길까 봐 다급히 튀어나온 모양이야. 많기도 하군.”
“아무리 못해도 저희 두 배 이상은 되어 보입니다.”
“요즘 누가 전쟁을 숫자로 하나?”
유리온이 투구 사이로 웃음을 흘리며 서약의 검을 뽑았다.
“모든 지휘관에게 전달한다. 진형은 섬멸3형. 고위 화력은 상위 개체들에게 집중시킨다. 뒤처지지 않게 잘 따라오도록.”
고삐를 당기자 유리온을 태운 명마가 앞발을 들며 울부짖었다.
최전선에 초월자가 섰다.
“중심부는 내가 돌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