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1화 제물의 무게 (4)
아무리 팔을 길게 뻗어도 닿지 않는 거리가 있다.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
홀로 아우를 수 없기에 비로소 세계다.
소수의 초월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8위계의 위상은 압도적이나, 그 어떤 8위계 초월자도 세 개의 대륙과 지성체를 완전히 지배할 수 없다.
그것은 개인의 한계나 불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가 보란 듯이 멸망하는 광경에도 감히 꺾을 수 없는 마음이 있는 것처럼. 대륙을 구원해도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세상 만물과 물질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는 만상을 그저 힘으로 억압한다는 개념 자체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대륙이 옛 왕에게 굴복할 일은 없다. 사문만이 아닌 옛 왕의 하수인까지 여기서 침묵시킨다. 그래야 피의 대가로 충분하리라.
‘보검 [니비스]와는 다른 성질의 혹한. 하지만 그것 또한 한기(寒氣)다.’
쩌적…… 쩌저적…….
에레스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변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는 북부의 냉기에 닿아야 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제약이 있다.
이곳은 적합한 전장이 아니다.
그러니 환경부터 바꾸는 것이 선제.
“후우…….”
에레스의 호흡을 따라 대기 중의 수분도 결빙되고 있다. 마치 공간이 깨지는 것 같았다. 밖에서 끌어오지 못한 북부의 기운을 사령관의 것으로 대체했다.
영혼까지 빙결되는 듯한 감각이 몸을 파고들었지만 곧 적응했다. 열한(烈寒) [니비스]의 검신에서 한층 더 짙은 마력이 흘러내렸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흰 눈이었다.
보급용 보온(保溫) 매직 아이템을 둘렀으나 갑자기 낮아진 기온에 일부 연합군이 당황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받아들여라.
그들에게 환경 적응을 강제하는 대가로 손에 넣는 이점은 너무도 컸으니.
“놈을 제어할 수 있나?”
“어렵습니다. 그래도 영향력을 어느 정도 축소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검이 닿는 거리에서도 다른 사람이 동결되지 않게끔.”
아드리안을 지나친 에레스가 턱을 당겼다.
“하지만 주의하십시오. 결국 저 역병 같은 한기가 심장이나 뇌까지 파고들기라도 하면 저로서도 방법이 없습니다.”
[에레스 아인드겔 프로하스.]
라크디온이 느닷없이 에레스를 호명했다. 피골이 상접한 얼굴. 내용물이 없는 눈구멍이 그를 뚜렷하게 직시했다.
[참으로 기구한 혈통이구나.]
“무슨 말입니까?”
[죄악의 거인들을 봉인하기 위한 인격체.]
……!
에레스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북부의 감시자는 대대로 프로하스 왕가의 후계자가 [니비스]와 함께 계승했다. 감시자의 의무는 프로하스 최북단의 프로스티움에 잠들어 있는 거인을 감시하는 것이다.
얼음 속 거인들은 방주의 고위 관계자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기밀. 그런데 다름 아닌 옛 왕을 추종하는 언데드가 입에 담았다.
“거인……?”
“일종의 비유인가?”
“언데드 주제에 시답잖은 소리까지 지껄이는군.”
“…….”
당연하게도 아드리안을 제외한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크디온은 비웃으며 길게 입꼬리를 당겼다.
[저항을 표방하지만.]
귓불 가까이 찢어진 입은 외견만큼이나 징그럽기 그지없었다.
[그것이 운명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에레스는 심리전에 휘둘릴 정도로 심지가 약하지 않지만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거인들에 대한 비밀은 방주도 밝혀내지 못했다. 그래서 북부의 감시자라는 직책이 있는 것이다.
‘제2사령관이 거인을…… 그럼 옛 왕은 모든 내막을 알고 있다는 뜻?’
크세리온 제국과 프로스티움의 거인과 도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길래. [니비스]를 붙잡은 에레스의 손에 자연히 힘이 들어갔다.
이해할 수 없다.
운명과 저항에 무지한 에레스는 진실 앞의 장님에 불과했다. 그런 그의 옆에서 첨예한 존재감이 번지며 상념을 끊어냈다.
“이해하지 마라.”
아드리안은 라크디온이 내뿜는 한기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걸 관찰했다.
“세상은 원래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니까.”
“……그건 그렇죠.”
에레스는 그 무심한 격려에 피식 웃고는 한순간에 표정을 지웠다.
“왼쪽입니다.”
라크디온이 권능을 발현했다.
<정복: 창궐(猖獗)>
라크디온을 중심으로 기온이 급락하면서 허공에서 생성된 투명한 가시들이 확산했다.
전투가 개시됐다.
모두가 다급히 물러나는 한편 아드리안은 가속해서 왼쪽으로 크게 돌았다. 특유의 검광이 곡선을 그리던 도중 찰나에 직선으로 꽂혔다.
기다렸다는 듯이 광검을 쳐낸 라크디온이 옆으로 팔을 뻗었다. 마침 그쪽으로 움직이려던 아드리안이 움찔했다.
[속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면 신경계를 속이면 그만.]
라크디온의 건틀릿이 속삭임과 함께 잠깐의 경직을 파고들었다.
<성결: 인도>
신성한 빛줄기가 된 레온하르트가 중간에 개입해 성검을 내질렀다. 콰앙! 아드리안이 그대로 회전하며 그의 머리 옆으로 광검을 내리쳤다.
라크디온이 쪼개졌다.
아드리안과 레온하르트는 당황하지 않고 서로 반대 방향으로 눈동자를 움직였다. 간단히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다면 누가 이 고생을 하겠는가.
예상대로 갈라진 라크디온이 얼음으로 화했다.
<정복: 잠복(潛伏)>
기척이 잡히지 않았다.
라크디온이 그들의 뒤에서 검을 겨누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
아드리안이 포착하자마자 레온하르트를 밀쳐내며 검막을 형성. 동시에 그들을 에워싼 얼음 가시가 일부 무너지며 토벌대가 난입.
라크디온은 어떤 반동도 없이 그대로 검의 방향을 뒤틀었다.
쩌엉──────!
그리즈월의 쌍도끼, 라테온의 검, 레이라의 핏빛 검, 성율성단의 부단장인 ‘벤하임’의 대검이 차가운 불꽃을 터뜨리며 일제히 튕겨 나갔다.
라크디온이 허리를 틀었다.
검격 대신에 발차기가 아드리안과 레온하르트를 날려 버렸다. 막대한 충격파가 폭발하며 땅에 균열이 발생했다.
냉기의 폭풍이 몰아쳤다.
눈 깜짝할 새 생겨난 눈보라가 시야를 덮었다.
카아앙!
굉음이 일며 눈보라가 멈췄다.
눈앞이 탁 트였다.
그리즈월의 목젖 앞에서 [니비스]와 정복의 검이 대립했다. 서로의 기운이 상대방을 동결시키기 위해 지독한 냉기를 내뿜었다.
[네놈은 기껏해야 첫 번째 세계의 일부일 뿐.]
라크디온이 에레스를 압도했다.
[나는 다섯 번째 세계의 권속이다.]
“영문 모를 소리는 더 듣지 않겠습니다.”
에레스가 무게중심을 낮춰 힘겨루기를 피하고는 팔을 최대한 당겼다. 본능을 따른 그리즈월의 힘줄이 불거졌다.
북부인의 검과 도끼가 갑옷을 힘껏 후려쳤다.
성벽을 때린 듯한 손맛이었다.
라크디온이 밀려난 거리는 고작 2.3m.
스하아악!
카란스가 유려한 몸놀림으로 검의 궤도를 잇고, 또 이었다. 카스티안은 완벽한 모험가라는 이명에 걸맞게 즉석에서 그의 호흡에 맞췄다.
라크디온의 전신 갑주 곳곳에서 순간적으로 칼날에 의한 불꽃이 연이어 명멸했다.
그리고 트리톤의 마법이 발동했다.
마도 <명전(皿鐫)>
다양한 마법적 능력을 사물에 부여하는 트리톤의 고유한 길.
독특한 마법적 문양을 각인한 지팡이에서 마력이 번뜩이자 라크디온에게 문양이 생성됐다. 머리, 양팔, 명치, 다리. 직접 닿지 않고 살짝 떠오른 상태.
위로 쏘아진 마력의 광선들이 총 다섯 개의 그것을 순서대로 타격했다.
<공진의 인>
라크디온을 둘러싼 공간이 약화.
“으라아아아아아아아!”
산왕이 온 힘으로 날카로운 바위 기둥을 내던졌다. <압축의 인>이 새겨진 기둥의 무게와 저항력은 상위 금속 이상이었다.
불안정한 공간에 투사체가 도달하자 그 충격량은 몇 배가 되었다.
콰아아아아앙!
지면이 가라앉았다.
영하의 기온 탓에 흙먼지가 거의 일지 않아 놈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왼쪽과 오른쪽에서 밝은 광채와 보랏빛 잔상이 쇄도했다.
격화激化
<성검: 순례>
절기와 기적이 라크디온을 스쳐 지나가며 갑옷에 큰 흠집을 남겼다. 뒤늦게 레온하르트의 이동 경로를 따라 정화의 성염이 치솟았다.
신성한 불꽃은 곧 얼어붙어 사그라들었지만 효과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오직 초월자만이 비수를 꽂을 수 있다.’
그걸 핵심으로 삼아 전술을 구사하는 것은 당연한 본능이었다. 토벌자들이 공간을 세분화하고 저마다의 영역과 거리를 인식했다.
난무亂舞
사혈死血
진감震撼
만력滿力
산격山擊
<원초의 자연>
<성결: 개전>
<단죄의 은총>
<압축의 인>과 <연쇄의 인>
<상류(霜流)>
기예와 절기, 마법과 기적, 엘프의 마법과 수인의 기술이 라크디온에게 쏟아졌다. 그런 기술을 구사할 수 없는 카스티안만이 그를 존재하게 하는 아티팩트의 힘을 최대로 끌어내어 연격했다.
한 명으로 안 되면 두 명으로, 두 명으로도 안 되면 세 명으로…….
개개인의 실력은 상대에게 미치지 못해도 합세하면 맞설 수 있고, 더 나아가 상대가 가진 힘의 총량을 웃돌 수 있다.
난공불락의 성벽이 함락되듯이.
다만 라크디온은 성벽이 아니었다. 성벽처럼 그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의 전투 감각은 전방위를 손안에 두었다.
정복의 검을 등 뒤로 기울이자 세 사람의 무기가 막혔고, 옆으로 휘두르자 다섯 사람의 일격이 무위로 돌아갔으며, 반경 2m를 벗어나지 않은 선에서 발을 놀리자 마법이 빗나갔다.
물론 전부를 막아 낼 수 없었지만 직격타는 하나도 없었다.
‘말도 안 돼. 초월자가 두 명이나 되는데 사각까지 전부 반응한다고?’
라테온이 검과 방패를 번갈아 내지르면서도 눈을 부릅떴다.
‘아드리안보다는 확실히 느린데 어떻게……!’
라크디온의 검과 움직임은 분명 기민했다. 극점의 강자들도 대처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러나 아드리안의 검속을 아는 이들조차도 아주 반응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제대로 공격이 들어가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이 광기 어린 힘의 폭풍에서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할 텐데. 이건 경지의 차이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노련함.
경험의 격차가 수적 열세를 메우고 있다.
라크디온이 아래에서 위로 검을 쳐올리며 한 바퀴 회전했다. 갑옷에 더 새겨진 흠집들이 오히려 그들을 압도했다.
열 명의 검과 스태프가 밀려났다. 산왕이 무기 대신 들고 있던, <압축의 인>으로 구축된 바위 지팡이 또한 박살 났다.
<정복: 백화(白化)>
정복의 칼날에서 서리의 광채가 폭발함과 동시에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아니, 시간 자체가 느려지지는 않았다.
신경계의 감각은 그대로인데 몸의 반응만 일순간 현저히 느려졌을 뿐.
“……!”
“어딜!”
아드리안과 레온하르트가 놈의 검을 붙들었지만 위험한 것은 무기가 아니라 그를 다루는 라크디온이란 존재.
쩡.
레이라의 투구가 박살 났다. 그녀의 무릎이 곧바로 지면에 닿았다. 이마에서 출혈이 터졌다. 고작 손날에 맞은 것뿐인데.
콰드드득!
아드리안이 광검을 역수로 쥐어 라크디온의 어깨를 관통했다. 이전에 절기로 벤 상처였다. 그런데도 놈은 개의치 않았다.
대신 변칙을 추가했다.
정복의 검을 거꾸로 잡고 몽둥이처럼 휘두르면서 권능을 발현했다.
<정복: 창궐(猖獗)>
투명한 가시들이 만연하며 초월자를 압박하는 사이 검의 크로스가드가 레이라를 강타했다. 그녀의 모습이 멀찍이 사라졌다.
“하아압!”
“좀, 죽어……!”
에레스와 카스티안, 그리고 카란스가 초월자들이 낸 검흔을 비집었다.
라크디온도 온전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감수할 뿐이다.
제물을 바쳐서 원하는 결과를 내는 것은 섭리이자 운명의 이치이니.
라크디온은 갑옷 너머에 박히는 일격이 많아지자 전법을 바꾸었다.
마치 광전사와 같았다.
방패로 적극적으로 놈의 일격을 흘리면서 라테온이 전우들을 보호했다.
“당장 물러나!”
산왕에게 소리를 지르던 도중 라테온의 방패가 확 젖혀졌다.
검격을 견디다가 팔에 힘이 풀린 것이다.
쩍───!
라크디온의 앞차기가 상체를 강타했다.
* * *
훅─────────콰아아아아아아앙!
전장 한복판에 꽂힌 라테온이 잠시 후 늦게 의식을 되찾았다.
“여긴…… 아!”
전장임을 깨닫고 당장 얕은 구덩이에서 벗어나려고 가장자리를 잡은 순간 가슴에서 엄청난 고통이 신경을 찢었다.
전쟁 무구가 움푹 파였다.
숨이 턱 막혔다.
이대로 질식할 것 같아 구르듯이 위로 올라가서는 갑주를 벗어 던졌다. 슬쩍 시선을 내렸다. 가슴에 크게 멍이 들었다.
‘늙은 드워프의 갑옷이 없었다면 즉사.’
라테온은 간담이 서늘했지만 그럼에도 주저하지 않고 검을 들었다.
도망치지도 않을 것이고 죽을 생각도 없다.
에온의 세 번째 위상도 아니고 열 번째 위상으로는 억울해서라도 죽을 수 없다.
라테온이 험난한 전장으로 돌아가려다가 레이라를 발견했다.
“끅…… 끄윽.”
“어이, 어이! 괜찮나!”
레이라는 가슴 부근이 완전히 으깨진 상태였다.
이건 살릴 수 없다.
하나밖에 없는 리산드로의 열매 포션을 먹여야 하나 싶어 공간 가방에 막 손을 넣으려다가 변화가 일었다.
스르륵…….
레이라의 상처가 서서히 수복됐다.
불길한 존재감이 강해졌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공포와 불쾌감이 느껴졌다.
“이게 악마의 힘……! 젠장, 어쨌든 다 나았으면 일어나라!”
라테온은 시선을 다른 데로 향하고 레이라의 뺨을 계속 갈겼다. 한 명이라도 더 있어야 초월자들이 한 방 더 먹일 수 있을 테니까.
마침 언데드를 상대하던 세계 연합군이 그들에게 다급히 다가왔다.
“포션을 갖고 왔습……”
“포션은 됐으니까 군마! 군마 가져와!”
이대로 전력으로 달려가서 재참전하자니 체력이 아깝다.
이동 중에라도 최대한 회복해야 한다.
“알겠습, 컥.”
갑작스럽게 연합군들이 목이나 가슴을 부여잡더니 고꾸라졌다.
생명 반응이 끊겼다. 즉사였다.
“뭔…….”
그리고 연합군이 토혈한 피가 얼어붙었다. 익숙한 냉기였다.
방금까지 직접 경험했으니.
라테온이 그걸 목격하고는 라크디온이 있는 방향을 쳐다봤다.
“저 새끼가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