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4화 한계를 넘어 (2)
레온하르트는 전염병에 의해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제외한 티르 마을 사람 전부를 잃었다.
이웃이자 은인이나 다름없는 롤랑 아저씨도 그를 구하다 죽었다. 피울음 역병은 성검이 성자를 선택한 계기가 되었다.
‘아드리안 씨…….’
트라우마가 있어 아군이 전염돼도 상관하지 말라는 지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선뜻 거부할 수 없었다.
아드리안이 선택한 판단이 얼마나 무겁고 진중한지 느껴졌기에.
[후회는 선택에서 비롯되지.]
날 선 기운이 퍼졌다.
[선택받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가르쳐 주마.]
라크디온이 존재감을 완전히 지우며 양측의 군단이 충돌하는 전장으로 질주했다. 에레스가 몸을 일으키는 동안 아드리안이 즉각 추격했다.
시야에서 놓치면 돌이킬 수 없다.
기척이 감지되지 않으니 순수한 시각에만 의존해야 한다. 하늘색 눈동자가 명멸한다. 보랏빛 잔상이 더욱 많은 수로 쪼개진다.
라크디온을 따라잡자마자 방향이 전환되며 공간을 가르는 한 줄기 검기.
검광이 교차했다.
라크디온의 움직임이 멈췄다. 둘은 그렇게 전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아드리안 근처에 있던 병사들이 입을 벌렸다.
“적의 사령관…… 컥!”
“억, 흐어억……!”
저항력이 나약한 이들은 냉기에 전염돼 금방 숨이 꺼졌다. 그들의 짧은 죽음을 뒤로한 채로 아드리안이 좌우를 박찼다.
흔들리는 검끝에서 무수한 찌르기가 라크디온에게 쇄도했다.
카가가가가가가가강!
정복의 검은 미세하게 움직이며 효율적으로 그의 공세를 막아냈다. 라크디온이 진각을 밟았다. 충격의 여파와 함께 사선을 베어 갈랐다.
이를 받아내며 흘려냈으나 땅이 흔들린 탓에 무게중심이 무너졌다.
목덜미에 살기가 꽂혔다.
아드리안의 근신경계가 팽창했다.
츠학─────!
정복의 칼날이 직선으로 스쳐 지나가면서 갑옷의 표면이 얼어붙었다. 상반신을 완전히 젖힌 상태에서 탄력을 극대화했다.
화살처럼 쏘아진 아드리안이 회전하며 라크디온의 몸을 타고 그 반대편으로 넘어갔고, 어느샌가 그는 검을 역으로 바꿔 잡았다.
사령관의 갑옷에 새로운 검흔이 생겼다.
라크디온이 이를 무시하고 권능을 발현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쩌엉!
[?!]
등 뒤에서, 그리고 아주 가까이에서 날아온 검격에 라크디온이 휘청거렸다. 시선을 뒤로 향하자, 허공에 새겨진 보랏빛의 균열이 서서히 닫히고 있는 장면이 포착됐다.
아드리안의 검기가 조금 더 섬세하게 정제됐다.
‘이제 조금…… 감이 잡힌다.’
가레스 시릴리아드와의 일전에서 반쯤 발을 들인 무투계의 새로운 경지. 속도에 몰입하면서 본능적으로 다루었던 기의 흐름이 본격적으로 그의 신체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광검이 마찰열을 받아 불그스름해졌다.
아드리안이 벼락처럼 내지른 검격은 허공 자체를 갈랐고, 그 검로에 고유한 기가 잠시 머물면서 검흔이 고정되었다.
그것은 아드리안의 의지에 따라 흔적에서 다시금 검기로 변모했으니, 공간계의 연이은 단절은 시야가 나누어지는 듯한 풍경을 자아냈다.
아드리안 단독으로 라크디온에게 직접적인 손상을 입혔다.
그러나 아직 무르익지 않은 기술.
새로운 기류를 일으켰어도 라크디온이 주도하는 흐름을 끊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경지의 완성도가 그에 미치지 못했다.
‘숨이.’
아드리안은 폐와 근육이 타들어가는 듯한 격통을 느꼈다. 처음 겪어 보는 신체의 과열이었다. 두 다리는 지면에서 떠 있는 상태.
그런 와중에도 직격을 피하기 위해 허공에서 몸을 뒤틀었다.
터어엉!
몸놀림이 경직되자마자 날아온 건틀릿이 옆구리를 강타했다. 악착같이 지면에 칼을 박아넣은 아드리안이 라크디온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선택에 동조하는 꼴이라니.]
라크디온이 하체를 노리는 성검을 쳐내고 그대로 휘어감아 내리찍었다. 레온하르트가 부들부들 떨며 정복의 검을 밀어냈다.
[저항. 가장 끔찍한 역병이 있다면 그것이겠지.]
“한(寒)을 머금어라, [니비스].”
에레스가 여러 시동어 중 하나를 외웠다.
서리 보검이 횡을 그었다.
라크디온을 둘러싼 공간이 찰나에 얼어붙었다.
“그랴아아아아!”
“하아아아압!”
그리즈월과 산왕이 돌진해 온몸으로 라크디온에게 부딪쳤다.
얼음 파편이 비산하며 놈의 뒤로 크게 밀려났다.
“루아스시여!”
레온하르트가 일어나 성검을 겨누었다. 성율성단의 벤하임 부단장도 전장으로 돌아오며 대검으로 기도를 올렸다.
번쩍!
샛노란 섬광이 폭발했다.
언데드에게는 정화를.
여신의 보호를 받는 인류에게는 치유를.
“루아스시여!!”
콰과과과과과과과과!
광채는 커다란 기둥이 되어 사문 세계의 하늘 끝에 닿았다.
초월적인 신성력이 라크디온을 압박했다.
라크디온을 토벌하기 위한 전장은 본래 군단들과 떨어져 있었지만, 보다시피 이제는 서로 완전히 섞여 버렸다.
전염 확산은 피할 수 없다.
숙주들이 넓게 움직일수록 연합군은 냉기의 역병에 크게 노출될 것이다.
“퉷.”
카란스, 트리톤, 카스티안이 충격을 회복하고 바로 합세했다. 하늘에서는 <비행>의 매직 아이템을 사용한 라테온과 레이라가 연이어 착지했다.
“후우…….”
“후, 용케도 요격을 피했군.”
라테온이 운이 꽤 좋았다면서 식은땀을 닦아내고는 아드리안에게 물었다.
“많이 죽을 거다. 하지만 그래야 가장 많이 살 수 있겠지.”
“…….”
“우리가 뭘 하면 되지?”
아드리안이 답했다.
“기회를 만들어라.”
라크디온을 상대로 티끌만 한 기회를 만들 방법은 하나뿐이다. 목숨을 던지는 것. 아드리안은 그들에게 사실상 죽음을 요구했다.
물론 불쾌하거나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이 중에서 아드리안만큼이나 위험을 자처한 존재는 없었으므로. 그러니까 이건 아드리안이 그들에게 하는 부탁의 표현이었다.
“답지 않게 괜한 소리를 하는군.”
라테온이 방패를 내세웠다.
다른 이들도 일제히 무기를 다잡았다.
“원래 그게 우리 역할이야.”
신성한 기둥이 사라지고 라크디온이 굽은 상반신을 폈다. 신체 곳곳에서 희멀건한 연기가 피어올랐지만 그 사기와 악의는 여전히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짙었다.
* * *
언데드 군단을 가로지르는 인기척이 있다. 사악한 존재감과 거대한 마력에 짓눌릴 것 같았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발을 옮겼다.
군단의 후열에 가까워지자 격이 다른 언데드들이 연합군을 향해 마법이나 이형의 능력을 날리는 것이 보였다.
무려 여섯 개의 팔이 달린 언데드가 좀비로 구성된 권좌에 앉아 있다. 그와 엇비슷한 음험함을 풍기는 언데드가 둘이나 더 있었다.
‘특수 개체……!’
여러 마법적 강자들을 목도한 레베카의 간담이 확 서늘해졌다.
눈을 마주칠 수조차 없어 시선을 내렸다.
엘레마르의 단장이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내게서 29.3m이상 멀어지지 않으면 발각당할 일은 없다.”
“네, 넵.”
대놓고 대화를 나누고 있음에도 언데드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모습이었다. 소리는 물론이거니와 모습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에단이 중얼거렸다.
“이것이 초대 마도왕의 아티팩트…….”
아케나드 마도국의 국보 [망각의 베일].
베일의 영역에 들어간 순간 모든 존재감이 완전히 은폐된다. 모습, 냄새, 소리, 온도, 기, 마력, 신성력 등 외부인은 어떤 기척도 감지할 수 없다.
현대의 마법으로도 전부 해석하지 못한 마도국의 전설적인 보구 중 하나다. 물론 이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제 와서 묻는 거지만 저희에게 이런…… 귀물을 공개해도 되는 겁니까?”
“마도왕 폐하께서 허락하셨다, 에온은 마도국과 한식구니까.”
“하, 한식구?”
에온의 마법사들이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7대 마도왕과 베르덴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아는 사람도 역시 거의 없었다.
그들과 다르게 엘레마르는 그 정보를, 또 8위계급 초월자 간의 마법전을 직관하는 것까지 허락을 받은 마도사들이었다.
“나중에 알게 될 거다, 폐하께서 어째서 마도국의 국보를 무려 ‘두 개’나 투입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리실 수 있었는지.”
엘레마르의 단장이 지고한 팔각성이 보석에 새겨진 지팡이를 꺼냈다. 별동대의 눈동자에 역원뿔의 수정이 반사됐다.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델하룬의 사문보다 훨씬 거대했다. 사문의 근원인 만큼 언어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불가해한 불길함이 피부를 스치는 듯했다.
“정교하되 신속해야 한다.”
레베카가 심호흡을 하고는 마력 분열 연쇄 장치를 꺼냈다.
“우리 손에 승패가 달렸다.”
* * *
굉음이 울려 퍼졌다.
콰아아앙──────!
전투의 여파는 세계 연합과 크세리온 제국 양측을 가리지 않았다. 북쪽으로 날아간 신성 검기가 폭발해 천 마리가 넘는 언데드가 소멸됐다.
“헉! 허억……!”
“데르, 안 돼! 안 돼애애! 아아아아악!”
“젠장, 역병이 급속히 퍼지고 있습니다!”
연합군은 점차 냉기의 전염 속도가 높아져 전방과 후방 중앙에서 사망자가 속출했다. 군단을 즉석에서 재편성했음에도 수백 명이 감염당해 괴로워하다 죽는 광경이 눈에 비쳤다.
아드리안의 단호한 결의를.
라크디온은 지독한 악의로 응했다.
정면에서 맞서지 않고 소극적으로 반격하며 전장을 넘나들었다. 자신을 쫓아온 숙주들이 자신의 아군들을 감염시키도록.
그럴수록 라크디온은 약화됐지만 그럼에도 전염을 퍼뜨리는 데 전력을 할애했다.
[방금으로 7,134명.]
칼날이 비틀린다.
[몇 명이 죽어야 선택을 후회할까.]
아드리안이 도약해 발뒤축으로 검면을 후려치고는 손잡이 끝을 잡아 넓게 휘둘렀다. 얼굴을 베어낼 뻔한 광검이 갑옷을 긁으며 불꽃을 튀겼다.
콰앙!
레온하르트가 달려들어 라크디온의 검격을 몸으로 끊어냈다.
합격(合擊)이 이어졌다.
토벌대가 몰아붙였으나 라크디온이 작정하고 회피 기동을 펼치니 붙잡을 수 없었다. 목숨을 건다고 한들 저런 식이면 기회를 만들지 못한다.
시간은 연합의 편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라크디온이 장검을 내던졌다. 정확한 궤적이 아닌 터라 피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은 토벌대를 노린 것이 아니었다.
투콱!
어느 가디언 엘프의 척추가 관통됐다.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그는 얼음 동상이 되더니 곧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카란스는 무언가가 끊기는 듯했다.
모든 엘프는 무엇보다 동족을 우선한다.
“아로스!!!!!!”
“카란스, 멈춰라!”
아드리안의 만류에도 카란스는 대자연의 기운을 퍼뜨리며 거리를 좁혔다. 궤적을 읽기 어려운 곡선의 검로가 굽이쳤다.
라크디온이 간격을 쟀다.
촤아아아악!
카란스의 한쪽 허벅지가 절반쯤 갈라지고 오른팔이 끊어졌다.
엘프의 피가 튀었다.
[패배자의 자식 따위가.]
콱.
카란스가 쓰러지지 않고 그대로 다리를 굽혀 놈의 팔목을 붙들었다. 그러곤 다른 한 손으로 칼날을 힘껏 꽂아 넣었다.
[……!!]
“엘프를, 얕보지 마라.”
광검이 카란스의 몸통을 꿰뚫었다. 그 너머에 있던 라크디온의 목이 갈라졌다. 광검의 칼날은 카란스의 급소를 정확히 비껴 나갔다.
아드리안은 찰나에 리산드로의 열매 포션을 깨뜨려 중상을 입은 카란스에게 쏟은 뒤 그를 즉시 후방으로 내던졌다.
계획된 한 수였다.
카란스가 주체하기 어려운 감정을 역이용해 기회를 만든 것이고.
라크디온은 본인이 던진 미끼를 덥썩 문 셈이다.
‘불가능하다. 엘프가 동족의 죽음에도 이성을 잃지 않다니. 하물며 가디언 엘프가.’
라크디온이 멈칫했다.
‘무엇이냐, 이 검에 실린…… 대자연이 아니라 운명 파괴자에 가까운 더러운 기운은?’
기절한 채로 멀리 날아가는 카란스를 통찰하던 그가 본래의 엘프라면 있어서는 안 되는 기현상의 원인을 이해하고 말았다.
[세계수와의 연결이 끊어져 있──]
아드리안이 광검을 90도로 틀어 단단히 목 중앙에 고정시켰다. 쩌억! 권격에 맞은 걸로 한쪽 눈의 핏줄이 모조리 터졌지만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레온하르트가 정복의 검을 든 팔을.
레이라가 대악마의 힘으로 어깨를.
에레스가 시동어를 외며 왼쪽 종아리를.
그리즈월과 카스티안이 완력으로 남은 팔을.
벤하임과 산왕이 오른 허벅지를.
냉기 전염으로 37,215명이 죽고 나서 라크디온을 한 번 억제했다.
트리톤이 <공진의 인>을 펼쳐 라크디온을 둘러싼 공간을 다시 약화했다. 라테온이 검을 버리고 방패를 양손으로 붙잡아 도약했다.
방패의 끝이 카란스가 꽂아 넣은 검의 손잡이 끝을 겨냥했다. 그것은 라크디온의 볼을 비스듬히 관통하고 있었다.
콰아아앙──────!
냉기 전염으로 40,103명이 죽은 뒤에 라크디온의 하관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