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3화 한계를 넘어 (1)
세상은 무수한 소리로 가득 차 있다.
고요는 무음(無音)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듣지 못하는 자의 귀에서 비롯된다.
정적은 여러 소리로 이루어진 침묵이다.
‘그런데 이 적막은…….’
베르덴이 청각에 집중했음에도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풀벌레의 기척도 찾을 수 없었다.
바람마저 멎었고, 여름의 향기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색이 희미한 창공.
하늘은 무채색에 가깝다.
구름이 한 치도 움직이지 않으니 시간이 정지한 공간을 마주한 것 같았다.
사룡 네크바엘을 상대해야 하는 만큼 난해하고 어려운 전장이 될 거라고 예상했지만, 마렌 왕국의 상황은 그 이상인 듯했다.
마치 죽어 버린 듯한 대륙의 일부.
존재감을 포착할 수 없으며 통신 장치의 신호는 완전히 단절됐다.
‘마렌 왕국의 면적은 벨디른 공화국에 필적한다.’
사룡과 데우스가 어디에 있는지 특정할 수 없으니 마렌 왕국 전역을 뒤져야 한다. 모든 감각 중에서 눈에 보이는 것만 명확히 인식된다.
오직 시각에만 의존해야 하기에 혹시 있을지 모를 사각에서의 기습에 노출되겠지만, 그런 위험은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이미 완벽할 수 없음에도 완벽에 가까운 승리를 쟁취하려면 움직여야 한다. 감당키 어려워도 끝까지 나아가기를 그만둬서는 안 된다.
책임감이란 그런 것이다.
‘일단 남서쪽으로.’
<비행>
마렌 왕국의 동쪽 끝자락에서 가속한 베르덴이 이윽고 최대 속도에 도달했다.
* * *
<정복: 창궐(猖獗)>, 그리고 <정복: 범람(氾濫)>
라크디온이 자신과 전투를 치르던 숙주들을 통해 냉기의 역병을 촉발시켰다.
“컥……!”
“아으, 아아아아악.”
전장에서 이탈당한 그들을 도우려고 했던 연합군의 몸속이 얼어붙었다. 저항력이 낮을수록 증상이 곧바로 악화돼 사망에 이르렀다.
“주교! 주교 어딨어!”
“어찌 이럴 수가…… 루아스 여신의 빛에 대적하는 사기라니……!!!”
여러 저주에 해박한 대주교와 상위 주교들이 당장 정화계의 기적을 발현했으나 도저히 냉기를 물리칠 수 없었다.
기껏해야 전염의 속도를 늦추는 게 고작.
게다가 저항력이 높다고 해서 극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끄륵, 끅.”
약 2천 명의 병사를 지휘하며 상위 언데드 다수를 토벌한 벨마이르 왕국의 기사단장 중 한 명이 기운을 뿜어 대다가 피거품을 물었다.
복부를 부여잡고 뒤로 쓰러진 그의 얼굴은 격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전장에서 활약하던 영웅적인 면모는 병사들과 다를 바 없는 그것으로 전락했으며.
“장로님?”
“……라비니아 마탑주께 미안하다고 전해 주게.”
콰드드득!
냉기 계열에 저항력이 높은 젠티르 마탑의 장로가 명상을 하다가 허리춤에 찬 세련된 단검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뚫었다.
그의 미소는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마력 운용에 문제가 생겼고,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저항력이 높은 만큼이나 차마 감당할 수 없는 역병의 고통이 길어질 걸 알기에 내린 선택이었다.
국제 사회는 피울음 역병을 겪은 지 얼마 안 됐기에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이 아직 만연해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사상자가 얼마나 많았는가.
사람들이 붉은 피를 토하며 울부짖는 광경, 그 후의 참상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 피울음 역병은 현대의 인류에 진한 흉터를 남겼다.
냉기 역병에 죽은 시체들에 접촉한 이들은 숙주에 직접 닿은 것보단 덜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체온이 낮아지거나 감각이 굼떠지는 등 감염 증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한기와 함께 두려움이 퍼져 나갔다.
자신도 저런 식으로 죽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존을 향한 갈망이었다. 그들이 대륙 전쟁에 임한 것은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니까.
“장막과 보호막을 최우선해서 두르고, 시체는 즉시 소각하도록. 군단장님을 포함한 적의 사령관에 접촉한 모든 것에 대한 접근을 불허한다.”
아르나크 제국에 소속 레기온(Region)의 마르센드 커맨더와 알퀴어 커맨더가 말했다. 커맨더란 레기온의 로드 바로 아래에 위치한 고위 계급이었다.
“통제를 잃지 마라!”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후발대와 뒤섞이면 진영이 무너질 걸세. 그리고 군단의 밀도를 지금보다 4할 정도 줄여야겠어.”
세계 연합에서 고위급 지휘관에 속한 권위자들은 평정을 잃지 않고 통솔에 집중했다. 그들은 역병보다 언데드 군단을 경계했다.
겨우 기세가 올라왔는데.
내부 혼란에 빠지면 언데드 정예들의 벽을 넘어갈 수 없다. 군단이 더 크게 동요하기 전에 그 맥을 끊어 낼 필요가 있다.
사문의 근원체를 파괴하거나 적의 사령관이 토벌될 때까지.
대륙에는 많은 인재가 있다. 오랜 평화가 끝난 뒤에 재능이 개화하는 인재도 있다.
전란의 시대였다면 명장(名將)으로 불렸을 뛰어난 자들이 각각 작은 기둥으로서 세계 연합이라는 건물을 떠받쳤다.
“어떤 식으로 밀도를 줄이면 되겠습니까.”
“잠시 계산을…… 오, 저건.”
때마침 어두운 보랏빛의 균열에서 인간도 언데드도 아닌 기척이 드리웠다.
사문 세계에 새로운 연합 전력이 도착했다.
경비 골렘 (섬멸형), 경비 골렘 (자폭형), 전위 골렘, 마법 골렘, 거대 골렘, 미스릴 거대 골렘 등으로 구성된 에온의 골렘 부대였다.
마도 축제에서 에온이 선보였던 마법적 병기!
개중에는 이번에 틸버 스팬기어가 작업한 특수 골렘도 있었다.
“비행정을 이용해 골렘을 운반……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진짜로 실행할 줄이야. 과연 폴테인 평야의 파괴자로군.”
“놈들의 두터운 대공 장막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 모양입니다. 골렘들이 사문까지 온 걸 보면 밖에 제법 여유가 있는 걸까요.”
“오히려 여유가 없어 무리해서라도 최대로 전력을 투입한 걸지도 모르네. 저 너머에 있는 언데드 군단을 당장 전멸시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니까. 사문을 역으로 장악한다면 우리는 몰살 확정이네.”
사문 안팎은 통신이 단절된다. 서로 어떤 상황인지 즉각 알기 어렵다. 어쨌든 안에서 밖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뭐가 됐든 온 힘을 다해 사문을 폐쇄하는 것이 목적이니.
“소대를 점(點)처럼 배치하는 게 좋겠네. 점과 점을 잇는 선은 에온의 골렘들로 구성하고.”
“각 지휘관에게 명령해 부대를 세분화하겠습니다.”
통신 장치에서 대규모 명령이 하달됐다.
“소대별로 산개하라!”
키이이잉!
군단이 새롭게 기동했다.
뇌에서 보낸 신호가 신경계를 지나 손을 움직이게 하는 듯한 광경.
소대 자체가 하나가 돼 개인전에 돌입하고 다양한 골렘이 그들 사이사이에서 전력을 보조했다. 녀석들은 어떤 역병에도 완전한 면역이므로 부대 진형을 이루는 연결고리로써 최적이었다.
지성이 높은 고위 언데드───시체 주관자가 삭은 이빨을 드러냈다.
[생(生)의 자격이 없는 존재 따위가─]
콰자자자작!
엄청난 질량이 살점과 골격을 단번에 으깼다.
쿠웅.
미스릴 거대 골렘은 6위계급 마법에도 잠깐 주춤할 뿐이었다.
미스릴은 마법적 수용력이 높은 상위 금속. 그걸 전신에 코팅했으니 그야말로 마법사 살해자나 다름이 없다.
게다가 본 프레임에 들어간 금속 재료를 생각하면 물리적 저항력도 압도적이다.
특유의 비취색 프레임이 위에서 아래로 대기를 확 가를 때마다 지축이 흔들리고, 십수 마리의 언데드가 압사당했다.
테르네티아 연방에 투입된 미스릴 골렘은 총 3대.
알파와 베타도 고작 7대밖에 만들지 못한, 베타를 제외한 에온의 최강 골렘이 시체들을 처부수며 언데드 군단의 전열을 무너뜨렸다.
거기에 다양한 골렘을 대동한 연합군이 그 틈새를 격하게 파고들었다.
“시체 놈들, 싸그리 쓸어버려!”
“연합의 깃발 아래!”
“무구한 광명으로!”
[증오스러운 것들!]
[나의 삶을 돌려 다오……!]
미리 복용한 여러 포션의 효과에 힘입어 공세가 더 거칠어졌다. 아군의 죽음에도 이제 익숙하다. 그들은 뒤가 없는 것처럼 억지로라도 분노와 복수심, 그리고 사명감을 떠올렸다.
아크 리치가 시전한 6위계 흑마법이 군단의 전선을 가로질렀다.
트리플 캐스팅: <부패의 광선>
녹색 빛줄기가 지나간 그 자리에는 썩어 문드러진 시체들만이 남았다.
주변 일대에 물질계 흑마법들이 착탄했다.
콰과과과광! 콰아앙!
테르네티아 연방의 귀족이 폭발의 여파에 노출되어 나뒹굴었다.
“각하, 백작 각하!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나는!”
그는 바나흐 백작이었다.
“최전선하고 너무 가깝습니다……!”
“책에서 접했던 전설적인 언데드들이 저기에…… 안 됩니다. 저희 능력으로 이 이상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에요!”
주검의 영광이 성소를 습격하고 테르네티아 연방에 사문이 열렸다. 언데드가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도시 브라델이 함락되기 직전 일시적인 휴전이 이뤄진 덕에 그들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살아남은 연방의 일원으로서 세계 연합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주저할 수는 없네.”
“각하……!”
“이곳은 내 조국이네. 이 땅은, 테르네티아 연방은 우리의 나라야. 응당 목숨을 던져야 한다면 다름 아닌 우리가 먼저여야 하네……!”
바나흐 백작은 죽어도 좋다는 것처럼 전진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연방의 고위 귀족이 이럴 때 나서지 않는다면 훗날 이 전쟁이 종식된 후 쑥대밭이 된 연방 국토는 공적을 논하면서 타국에 뜯어먹힐 테니까.
셰계 연합이 해산하면 새로운 정치가 열린다.
바나흐 백작은 국제 사회가 얼마나 이성적이고도 무자비한지 잘 이해하고 있다. 권력의 결정체는 국제 사회란 무대이자 괴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가장 큰 미련이 전쟁과 먼 안전한 장소에 있기에 귀족으로서 기꺼이 목을 내걸 수 있는 것이다.
‘하에넬, 널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이단 신앙의 힘으로 피울음 역병을 치료받은 딸은 이단 신앙자가 되고 싶다면서 본인의 의지로 호세를 따라 푸른 산맥으로 향했다.
끝내 만류하지 못해 후회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다행이었다.
언데드가 푸른 산맥을 오르지는 않을 테니.
‘호세 님, 부디 제 딸을 지켜 주십시오.’
바나흐 백작은 여신 루아스가 아닌 다른 신을 향해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그는 조각상을 보았기에 호세가 어떤 신을 신앙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베르덴 폐하, 부디 연방에 가호를 내려 주소서.’
“이야아아아아아!”
바나흐 백작이 함성을 지르며 돌진했다. 백작가의 가신들도 함께했다.
모험가들의 위세 또한 그들 못지않았다.
“겔톤! 너 팔에 화살!”
“무사합니다! 그보다 앞에!”
겔톤이 마법을 연산하면서 오염된 화살을 아무렇지 않게 뽑아냈다. 젠트라 폭발 사태. 그의 한쪽 팔은 의체 골렘으로 이미 대체됐다.
모험가 파티 만하에서는 버민을 제외하고 모두가 의체를 부착한 상태였다.
터어엉!
방패 전사 버민이 방패째로 밀려나며 진저리쳤다.
“바깥보다 훨씬 악질이잖아! 고위험 개체가 도대체 몇 마리야?! 셀 수가 없을 정도잖아!”
“수가 많으니 고위종들도 많을 수밖에요! 연합군도 그러지 않습니까!”
“우리랑 언데드랑 같아?! 그게 빛의 성직자가 할 소리야!”
“사실이 그런 걸요!”
“둘 다 옆이나 봐!”
데스 나이트가 하위 언데드들 사이에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다.
정확히 만하의 모험가들을 노려보며.
사냥감으로 찍은 것이다.
콰아아아앙!
그때 거구의 사내가 나타나 데스 나이트와 격돌한 뒤 힘으로 밀어 버렸다.
“시발, 뭘 쳐다봐? 야! 이 새끼까지 처리하고 갈 테니, 너희들은 따라오지 말고 그쪽에 있어!”
“알겠습니다, 갈리아크 씨!”
도살자 갈리아크는 [훼월]을 붕붕 휘두르면서 데스 나이트를 상대했다. 그 목에 걸린 미스릴 플레이트가 격하게 흔들렸다.
“다른 진영에 성격 나쁜 거구가 있더다니. 저 떡대, 그 도살자 맞지? 기사도 패고, 핏빛검한테 덤볐다가 징계당한 싸가지 없는 놈.”
“맞는 것 같습니다.”
“하하! 이런 위험천만한 모험이 또 있을까!”
리더 스칼드가 큼지막한 도끼를 당겼다.
“우리도 파티 단위가 아니라 각자 미스릴 플레이트 한번 얻어 보는 게 어떻소! 이참에!”
“살아남는 게 먼저 같은데!”
“당연히 살아남아야지!”
아인종보다도 끈질기고.
이형종보다도 집요하게.
“모험가답게.”
* * *
에온의 골렘 부대가 당도했다.
냉기 전염을 경고하는 라테온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연합군의 움직임이 바뀌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전장 속에서 지휘관들이 대규모 명령을 연신 토해 냈다.
소대 단위의 전진.
골렘의 전위 운용.
아무래도 넓은 전장을 이용해 라크디온이 퍼뜨린 역병이 이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려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아직 냉기 역병에 노출되지 않은 병사들은 후방의 혼란에 휘말리지 않고 오직 전방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 누구도 총량을 벗어나는 이적을 발휘할 수 없는 법이니. 아드리안 첸버스. 운명을 파괴한 자를 따라서 선택권을 되찾은 네놈에게 묻겠다.]
라크디온이 그런 연합군의 발버둥을 비웃었다.
[선택할 제물은 무엇인가.]
냉기에 전염되는 아군이 많아질수록 라크디온은 약화된다.
하여 놈은 묻고 있다.
아군을 제물로 바쳐서라도 승산을 높일 것이냐고.
아군에게 희생을 요구할 것이냐고.
‘별동대가 사문의 근원체에 접근할 때까지 저놈을 붙잡아 둬야 한다. 후방을 신경 쓸 겨를조차 없이 놈이 오직 우리에게만 초점을 맞추도록…….’
아드리안은 사문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빌어먹을 새끼.’
운명을 창조한 ‘당신’의 하수인답게 남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선택을 강요하며 망설이게 하고 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주군의 옆에서 배웠다.
휘둘리지 않는 것.
그리고.
책임을 짊어지는 것.
아드리안이 곧장 고개를 바로하고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 결연한 모습에 에레스가 눈을 크게 떴다.
“아드리안.”
“내가 책임지겠다.”
아드리안의 강렬한 의지가 이곳의 최고 전력들에게 전해졌다.
“역병 확산에 주저하지 말고 모든 여력을 사령관의 격멸에 쏟아부어라.”
[……!]
“우리가 여기서 패배하면 연합은 궤멸한다. 희생은 감수한다. 타인의 희생에 주저하지 마라. 내 선택이다. 아군의 피, 아군의 시체!”
주군이었다면 이런 희생 없이도 라크디온을 홀로 몰아넣었겠지.
그건 아드리안에게 불가능했다.
사문의 근원체를 부수든 라크디온을 끝내 토벌하든 일분일초라도 빨리 결과를 내 아군의 피해를 줄이는 것만이 아드리안의 최선이었다.
“전부 내 탓이다.”
예전의 아드리안 첸버스였다면 아군이 얼마나 죽든 간에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약하니 당연한 결과라며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각성은 과거로부터의 탈피를 이끌어 냈다.
주군의 검을 자처함에도 불구하고 주군이 이루고자 하는 이상향에 닿을 수 없다.
그럼에도 한없이 가까워지고자 할 뿐이다.
저 한계를 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