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1화 전환점 (7)
셰로엘은 다양한 개념을 나열하면서 초월의 경지가 탄생한 천 년 역사 이래의 초월자들을 언급했다.
그는 궁극을 탐구하는 것을 사랑했기에 설명하는 것 또한 사랑했다.
개념을 다루는 것이 무엇인가.
청자 중에서 초월자와 접하지 않은 이가 없었기에 길지 않은 설명만으로도 개념에서 비롯된 현상이 무슨 느낌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프리발트처럼 초월자의 제자로서 파동의 개념을 배운 관계자도 있었으니, 집중도는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그런 와중에…….
‘창조와 파괴.’
이자벨라는 다른 무엇보다 셰로엘이 처음에 언급한 두 개의 개념에 주목했다.
‘가주는 육체를 재구성한 결과 남들과 달리 두 개의 마도를 개척했어. 무한의 마도는 가주 본래의 길이고, 파멸의 마도는…… 운명의 수레바퀴를 무너뜨림으로써 걷게 된 길.’
그래서 베르덴은 운명의 대척점에 서 있다.
본인의 성품과는 별개로 그것은 마법계가 인식하는 마도의 범주를 벗어났다.
오직 파괴(破壞)에 특화된 개념은 영혼을 말살시켜 존재를 완전히 말소할 수 있다. 단지 베르덴이 그렇게 하지 않을 뿐.
적의 입장을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왜 ‘당신’의 사도가, 운명의 추종자가 그를 경계하고, 위험시하고, 두려워하는지 이해하고 있다.
‘그런 가주가 파괴의 개념이라면, ‘당신’은 창조의 개념인 걸까?’
창조…… 와닿지 않는 개념이다.
아무래도 이자벨라가 이성을 논하는 마법사이기에 그런 경향이 있었다.
만물 창조나 천지 창조 등은 아이들 동화 속 신화에 나올 법한 이야기니까. 그런 정도의 개념은 너무나도 공상적인 무언가다.
설령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유에서 전혀 다른 유를 만드는 것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물리적으로도, 마법적으로도 구성 물질은 변화할 수 있는 한계가 있으므로.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먼 신화 시대에 발발한 대분기에서 ‘당신’, 초대 마도왕, 세계수는 포악한 신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세계수와 ‘당신’은 당시에도 신이었다. 악신들의 관점에서는 배신자인 셈이었다.
‘초대 마도왕과 세계수는 언제나 강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못했지. 대분기 전에는 확실히 약한 신이었다고 했어.’
정보를 정리했다.
베르덴이 들은 것과 이자벨라가 직접 들은 것.
아이샤에게 깃들어 있는 히안테와 아르카디옴의 호스트가 그 출처였다.
───머나먼 과거에서 ‘당신’은 감히 올다르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했어요. 약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며 자애롭고 순수한 ‘신’이었죠.
───{‘당신’은 올다르크처럼 압도적인 재능을 타고나지도 않았고, 잿빛의 용처럼 멸하지 않는 신체와 영혼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여러 강자 중에 하나에 불과했지. 심지어 순위를 매기자면 명백히 하위권이었고. 그러나 본디 존재란 선천과 후천을 통해 완성되는 것.}
처음부터 창조의 개념을 타고났다면 그들로부터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을까. 베르덴은 파멸을 개척한 지 불과 3년도 되지 않아서 현격하게 높은 경지에 올랐는데 말이다.
베르덴이 ‘당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반대로 ‘당신’이 베르덴에게 뒤떨어졌다고도 의심하지 않았다.
‘대분기는 의도적인 전쟁…….’
‘당신’은 대분기가 종식된 이후에 압도적인 권능을 갖게 됐다고 했다.
말인즉슨 전쟁으로 경지가 완성된 것.
그 힘으로 운명을 창조했다.
뭔가, 뭔가 잡힐 듯 말 듯 하다.
이자벨라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 문득 주변이 조용해진 걸 깨달았다. 앞을 바라보니 셰로엘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벽안과 금안이 손가락 두 마디 정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했다.
“현상과 사물에 깊이 고찰하는 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버릇이네. 하나 세상에는 감히 반추해서는 안 될 주제가 있지.”
“…….”
“사색에 주의하게.”
셰로엘은 아주 자연스럽게 멀어지며 아무도 모르게 의념으로 첨언했다.
───이 세계는 우리의 것이 아니니.
셰로엘의 진실이 묻어난 일침은 이자벨라의 폐부를 꿰뚫었다.
이자벨라가 시그릴, 알더니스, 케이먼이 있는 쪽을 힐끗했다. 케이먼과 시선이 교차했다. 이자벨라가 뭘 묻는지 아는 듯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르파니아 추기경에게 케이먼이 악마 계약자라는 걸 밝히지 않는 이유.
세상의 진실에 접할 수 있었던 이유.
마해에 기거할 수 있었던 이유.
‘파인더는 이페아카른의 관계자다.’
기생의 대악마의 계약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연관이 깊은 것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셰로엘은 그걸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셰로엘은 찰나에 미소를 짓고는 돌아서며 표정을 바로 했다.
“불량 학생의 잠도 깨웠으니, 다시 개념의 설명을 이어가도록 하겠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걸 정리하면, 이 개념의 궁극을 터득하는 건 결국 천부의 영역인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모두 살아가며 경험을 하지 않는가?”
그가 개념의 구조도 앞에 섰다.
“개념 그대로의 완벽함을 애초에 타고나는 존재는 없네. 완벽해 보여도 어디 하나는 부족하고, 미력하네. 나는 그래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살아가면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라고.”
“…….”
“무릇 존재란 선천과 후천으로 완성되는 것.”
셰로엘이 자신의 이상을 밝혔다.
“나는 그 완성을 보기 위해 이곳에 있네.”
마경은 사회에서 접하지 못하는 원초적인 개념을 접하기 용이한 장소다. 그곳에서 기거하며 셰로엘은 개념과 존재에 대해 깊게 파고들었다.
뿌리로 나무를 이해하듯.
그 결과 세상의 현상 대부분을 개념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됐지만 불충분했다. 창조와 파괴를 생각해도 그의 마음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대칭이 없는 유일(唯一).
유례없이 가장 완벽한 힘.
셰로엘 윌 로노스는 연구의 끝이자 현상의 궁극에 닿고 싶었다.
필요하다면 악마의 손도 마다하지 않으리.
“이제 내가 무엇을 위해서 마해에 머무르고 있는지 이해가 되었을 걸세. 결국 연구를 놓지 못한 마법사의 아집인 게지.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서.”
가장 마법사스러운 존재감에 엄숙해진 공간 속에서 셰로엘이 걸음을 옮겼다. 나지막한 소리는 세르파니아 추기경에게 향했다.
“방금 전 차를 마실 때 난 사문을 영혼의 통로라고 칭했네. 어째서일까? 답은 간단하네.”
얼굴이 가까워졌다.
“지금 대륙에 발호한 무수한 언데드는 죽은 자들의 영혼에서 비롯되었으니까.”
“영혼이라뇨, 그건 불가능하…….”
“인간에게만 영혼이 있다는 상식은 루아스 교국의 주장이지. 더러움을 씻어내면 빛의 여신의 곁으로 갈 수 있다는 믿음 또한. 아, 유쾌하군.”
셰로엘이 어깨를 들썩이더니 어리석은 자를 보는 듯한 눈빛을 지었다.
“어떤 마법도, 어떤 자연 현상도 저만한 언데드를 일으킬 수 없네.”
세르파니아 추기경은 진실에 압도돼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마치 햇빛을 가린 구름의 그늘처럼 속삭임이 그녀를 유혹했다.
“신의 권능이라면 모를까.”
* * *
서대륙───아르나크 제국.
제국의 국경선에서 불길과 비명이 솟구친다. 이웃 국가의 도시를 다수 파괴한 언데드 군단이 북상하면서 학살을 주도했다.
외부에서 들이닥친 게 아니라 다른 나라 내부에서 은밀하게 발호한 터라 선제 대응에 실패했다.
적들이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경로상에 있던 도시들은 함락되어 수십만 명이 또 사망했다. 사망자 일부는 피부가 벗겨진 채로 군단에 흡수되었다.
[아아아──────!]
세계 연합군이 제국 내부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대비했지만, 붉은 근육을 훤히 드러낸 기괴한 언데드 군단의 사기가 몹시 짙었다.
마법사들이 폭격을 퍼부었다.
다른 마탑만이 아니라 보헤미른 마탑도 화력의 한 축을 담당했다.
임시 마탑주인 로벨린은 장로들과 정예 마법사들과 대열을 이루고는 급강하하며 폭격으로 토벌되지 않은 고위 개체들을 정밀 타격했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지며 고위계 마법이 벼락같이 날아드니, 원소 마법에 정통으로 당한 놈들은 그대로 침묵했다.
그때 스피넬 장로가 흠칫했다.
“로벨린 님, 저기.”
“확인했어요.”
피부가 벗겨진 붉은 좀비들 사이로 조화롭지 않은 균열이 보였다.
그 안에는 빛이 닿지 않았다.
“다른 것들과는 차별화된 개체로군요. 특수 개체일까요?”
“단순한 특수 개체급 하나가 이 정도의 군세를 지휘한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은 사령관일지도 모르죠.”
크세리온 제국의 제5사령관.
세계 연합이 토벌하거나 목격하지 못한 사령관은 단 하나뿐이다.
“사령관이라면 저희만으로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제국의 본대를 기다…….”
“로벨린 님!”
장로들의 목소리와 갑자기 닥친 기척에 로벨린이 즉각 고개를 돌렸다. 지상에 있었던 균열이 어느샌가 그녀 앞으로 옮겨져 있었다.
균열에서 무수한 팔이 뻗어 나오더니 피할 수 없는 간격에서 로벨린을 덮쳤다.
고유 마법 체계: 엠버(Ember).
붉은 화염이 폭발했다.
뒤늦게 폭음이 대기를 밀어냈다. 보헤미른 마탑의 일원들이 여파에 휘말려 산개했고, 불길 속에서 나온 로벨린이 지상에 강하게 착지했다.
‘눈속임은 통했지만, 내 화력으로는 역부족이야.’
균열은 다시금 소리 없이 지상으로 내려와 로벨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고 오직 그녀만을 주목하고 있다는 듯이.
여러 팔이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로벨린의 화염에 당한 상처는 없었다.
까득.
로벨린은 최전선으로 출전하지 못했다. 베르덴의 보호가 아니었다. 보호가 아니더라도 순수하게 경지가 부족했다.
고작 5위계 하위, <엠버>를 유지하는 동안엔 5위계 중위, 한계의 한계를 넘어 봤자 5위계 상위.
특이형질을 타고났든, 고유 마법체계를 체득했든 체급이 미달이다. 그런 와중 임시 보헤미른 마탑주라 신분은 높다.
강해질 거라고 베르덴에게 선언했지만 결정적으로 시간이 부족했다. 원망스러운 세상은 로벨린의 경지가 높아질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나중에는 다를 거야.”
균열이 점멸하며 들이닥쳤다.
“다를 거라고.”
+그대는 달라질 것이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묵직한 울림에 대지가 들썩거렸다.
균열이 밀려났다.
로벨린 앞에 아르나크 제국을 수호하는 한 자루의 검이 서 있었다. 파동을 갈무리하는 그의 모습에 이내 균열이 반응했다.
[아르나크 검]
[대공.]
[로드릭 리반데일.]
리반데일 대공이 이에 대답하지 않고 [에테스]를 겨누었다.
그의 뒤로 제국군이 오고 있었다.
“누가 제국을 넘보는가.”
서대륙의 방어 전력으로 남아 있던 초월자가 전장에 섰다.
* * *
마렌 왕국과 가르간트 사이에 있는 중앙 대륙의 거대한 협곡───스칼룸 단층협.
세월에 의해 뒤틀린 단층은 중앙이 깊게 꺼져 있었더.
그 협곡 위로 짙은 인간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언뜻 혼자인 것 같아지만 상당히 많은 인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움직임을 읽혔나.’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연합에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책략가가 있는 듯했다.
아칸드가 용검을 어깨에 얹었다.
우회할 생각은 없다. 초대장을 주었으니 수락하는 게 도리일 테니. 베르덴이 제국의 전력을 상대하듯이, 처음부터 아칸드는 연합군의 전력을 정면으로 상대할 작정이었다.
“시험해 보마.”
아칸드가 돌진했다.
연합의 병기들이 기다렸다는 듯 은폐를 해제하고는 화력을 투사했다. 알파는 스칼룸 단층협을 아칸드의 무덤으로 지정했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
협곡 내부가 초토화됐다.
* * *
동대륙, 리비안트 공국.
이페아카른이 명령한 대로 대륙을 넘어온 제니아 데이로스가, 산 정상에 서서 도시 마르테스가 있다고 들은 영지를 바라보았다.
검붉은 색채로 물든 세상.
종말이 구현된 듯한 공간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더는 다가갈 수 없다. 제니아의 몸이 그걸 거부했다.
‘저게, 베르덴 형부의 힘…….’
그 이자벨라 언니가 어떻게 저런 사람을 잡았는지 모르겠지만, 이페아카른이 주는 공포마저도 압도하는 파괴의 현장은 낯선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시야의 끝자락에 여러 그림자가 걸쳐 있다.
초월자와 언데드 군단.
둘이 맞부딪칠 때마다 똑같이 생긴 언데드들의 수가 상당히 줄었다. 군단 사이에서 나온 검을 쥔 언데드가 베르덴에게 접근했다.
일격이 교차했다.
[────────────!]
동시에 리비안트 공국 전역에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사도의 권속이 지르는 절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