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0화 전환점 (6)
지네가 555쌍의 다리로 대지를 기어다니며 하늘을 가렸다.
빛을 반사하지 않고도 번들거리는 괴이한 광택.
적갈색과 검은색이 섞인 갑각은 가공된 흑요석으로 이루어진 갑옷을 연상케 했고. 절지동물 특유의 정교한 다리 하나하나는 가르간트의 고층 건물에 필적했다.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독니는 짐승의 턱처럼 육중하게 굽어 있었다.
쿠구구구구구구…….
지네가 미동할 때마다 그 일대에서 지진이 끊이질 않았다. 거대한 그림자 아래에는 마해에서 볼 수 없는 인간종들이 있었다.
“말도 안 돼…… 이형종이라고 해도 이거는 말이 안 되는 크기야.”
“마경의 왕들은 진정 문자 그대로의 괴물인 건가.”
“저런 게 몇 마리나 더 있다고……?”
사문에서 전이된 후 대행자의 실을 따라 합류하는 데 성공한 일부 마경 토벌대원들이 입 벌린 채 지네의 편평한 배를 올려다보았다.
침도 삼켜지지 않았다.
순수하게 크기에 압도당했다, 그들의 심정은 그저 그뿐이었다.
흑요 등급 모험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체고가 수십 미터에 달하는 이형종을 토벌한 자도 있었지만, 그런 경험 따위 무의미했다. 체급이 달라도 너무 달랐으니까.
그런데도 그중 단 한 명조차 무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위압당했을지언정 아까운 삶을 포기할 정도로 유약하지 않았으므로.
‘생물이 저렇게 커도 되는 건가.’
아르나크 제국 당대의 워 로드────레그리트가 내심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침묵의 사막에서 보았던, 그 세계수에게 처단당한 신의 잔해에서 비롯된 사막의 재해들보다도 더 거대한 존재는 그 자체로 감동을 주었다.
침묵의 사막에는 현대 인류가 알지 못하는 태초의 역사가 있었다.
그렇다면 마경에는 무슨 비밀이 있을까.
이곳에 무엇이 있는가!!
‘내가 밝혀 내야 할 미지는 이렇게나 많다.’
레그리트는 인생에서 경험하지 못한 가장 원초적인 세계의 일면을 보고 피가 끓었다.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용인이 되며 강해진 충동성이 그녀의 뇌와 신경을 기분 좋게 자극했다.
그때 지네의 더듬이가 움찔거리더니 굉대한 육신이 뒤틀렸다.
적갈색을 띠는 한 쌍의 눈.
그리고 그 안을 채운 16쌍의 홑눈.
지네의 복안(複眼)이자 겹눈이 지상을 비추곤 이내 레그리트를 포착했다.
[작은, 드래곤.]
작게 속삭이는 듯한 대륙 공용어가 십수 킬로미터 밖까지 울려 퍼졌다.
그의 자랑스러운 갑각엔 불에 그을린 듯한 흉터가 여럿 새겨져 있었다. 영역 다툼을 벌이던 도중에 다름 아닌 적룡 사르칸드라가 만든 작품이었다.
몇 번이고 탈피를 했는데도 존재에 깊게 남은 탓에 지워지지 않는 흉참한 흔적…….
무려 수천 년이 지났는데도 불에 타오르는 고통이 생생하게 지네의 뇌리에 박혀 있었다. 그리고, 적룡의 그 잔학한 웃음소리까지도.
[사르칸드라가, 아니군. 순수한 드래곤도 아니군.]
지네 머리가 거의 90도로 꺾였다.
[무엇인가. 자네는.]
고도의 지성이 느껴지는 울림이었다.
토벌대원들은 아연실색하면서 슬쩍 레그리트에게 눈길을 향했다. 태천의 거공은 의심의 여지 없이 바로 그녀에게 묻고 있었다.
“하.”
레그리트는 짧게 탄성을 지르며 [황금의 광채]를 조작했다. 투구를 해제했다. 오른쪽 이마 윗부분에 결합된 드래곤의 부러진 뿔은 예전보다 조금 더 자라 있었다.
“용인이다.”
[용인.]
급격하게 기울었던 지네의 머리가 천천히 완만하게 조정되었다.
태천의 거공이 말했다.
[마족의 개념은 절멸했을 텐데.]
* * *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오두막 저택에 인기척이 가득했다.
인류의 눈이 전혀 닿지 않는 마해에 무려 8명이나 되는 손님이 착석했다. 인간 이외에도 토끼 한 마리가 더 있었다.
탁.
“마해에서만 구할 수 있는 찻잎으로 만든 것일세. 향이 독특하면서도 제법 맛이 나니 느긋하게 음미하며 드는 게 좋을 걸세.”
오두막 저택의 주인이 먼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그들에게도 들 것을 권했다.
“물론 성분 특성을 확인한 뒤 마셔도 좋고, 마시지 않아도 좋네. 그쪽 둘은 솜씨가 뛰어난 연금술사이니 이 차가 어떤 건지는 금방 알 수 있을 테지.”
아무런 정보를 발설하지 않았는데도 이자벨라와 알더니스가 연금술사임을 간파당했다.
둘은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선뜻 대답하지도 못했다.
“듣지 않아도 보고 느낄 수 있다면 많은 것을 알 수 있네. 하물며 나는 남들과 비교해 관찰하는 재주가 꽤 우수한 편이지.”
저택 주인은 상석에 앉아 보란 듯이 차를 한 잔 다 마시고, 다시 잔을 채웠다.
참극 토끼도 앙증맞은 손으로 찻잔을 들었다.
그런 응접실의 어색하고도 미묘한 침묵을 깬 것은 이자벨라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58년 전에 마경에서 초월자가 한 명 실종됐다고 들었습니다. 실종 장소가 장소인 만큼 수색은 실시할 수 없었고, 그대로 수십 년이 흐르면서 실종은 자연스레 사망으로 기록되었죠.”
“으흠.”
“설마 살아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파인더(Finder), 셰로엘 윌 로노스 님.”
셰로엘 윌 로노스.
7위계의 마법계 초월자로서 과감한 연구자, 무모한 탐구자, 진리를 찾는 자 등 그를 수식하는 이명은 여럿 존재했으니.
홀로 마해에 진입한 적이 있는 무모한 지식인, 퀘론 렉클로스를 가르친 스승의 스승으로서 세간에 알려져 있기도 했다.
“지극히 간단한 추론이나, 그럼에도 상대에게 묻지 않고 스스로 관찰하여 확신이 서린 판단을 내리는 건 좋은 자세지. 특징이 분명한 내 정체를 밝히는 것보다 더 간단한 도출이라고 해도.”
차분하지만, 잘 정리되지 않은 백발은 가슴 부근에 닿을 정도로 길었다. 일반적인 드워프처럼 덥수룩한 수염도 그러했다.
나이가 들어 초월했기에 그는 젊어 보이지 않았다.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연륜이 느껴지는 주름이 더 깊어졌다.
“좋은 눈이로군.”
셰로엘은 눈웃음을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묻고 싶은 것이 많겠지.”
선명한 벽안이 좌중을 훑었다. 그 눈동자는 방대한 마력의 증명. 이는 베르덴이 천공룡 아에로돈에게서 들은 정보였다.
그의 눈길은 남들보다 세르파니아 추기경에게 3초, 케이먼에게 5초 더 머물렀다.
마지막으로는 이자벨라에게 시선이 고정됐다.
이자벨라는 직감했다.
‘들켰구나.’
이자벨라가 마족인 것까지 발각됐는진 모르겠지만 케이먼이 악마와 계약한 인간이라는 것은 이미 간파된 듯했다.
그녀는 어째서 케이먼, 알더니스, 시그릴이 여기에 있는지 듣지 못했다. 재회의 인사만 나눴을 뿐 정황을 파악할 시간이 없었다.
세르파니아는 조심스럽게 차를 홀짝이며 케이먼을 은근히 훔쳐보고 있었다. 추기경으로서 묘한 기운이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케이먼은 철저히 감정을 숨겼다.
알더니스와 시그릴은 긴장한 기색이었다.
이대로 넘어간다면 좋으련만 셰로엘이 입을 뻥긋한 순간 분열은 필연이었다.
삼정의 추기경은 악마 계약자를 당장 토벌하려고 할 테고, 더 나아가 에온과의 연관성을 파고들어 훗날 거대한 파문을 일으킬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답은 입막음밖에 없어.’
이자벨라의 언변으로 루아스교의 추기경을 설득할 수 없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세계 종교는 악마들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으므로.
‘하지만…….’
제압 여부와 별개로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이자벨라의 방식도 아니고, 베르덴이 원하지도 않는 일이며, 에온에서 추구하는 이념 또한 아니었다.
가주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자벨라는 자신이 짐작할 수 있는 최악을 감당키 어려웠다. 그런데 셰로엘은 악마에 관한 단어를 전혀 입에 담지 않았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기탄없이 물어봐도 좋네.”
셰로엘은 오직 호기심만 내비칠 뿐이었다.
자일론이 참극 토끼를 흘끗거리며 마음에 품어둔 의문을 꺼냈다.
“토끼가 대륙 공용어를 구사하더군요. 파인더께서 가르치신 겁니까?”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하나를 가르쳤을 뿐이네. 그걸 단 며칠 만에 열로 부풀린 건 어디까지나 본인이지.”
셰로엘이 참극 토끼의 잔에 차를 더 따라 주었다.
“이 토끼는 적응의 개념을 갖고 있거든.”
“적응의, 개념이라 함은……?”
“말 그대로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힘이지. 힘이자 궁극적인 성질이지.”
[다른 애들은 나보다 훨씬 오래 걸렸어.]
적응의 개념.
개념.
참극 토끼가 언급했던 단어였다.
셰로엘이 미소 지었다.
“언어는 전염되는 법이네.”
참극 토끼를 통해 전해진 인류의 언어는 지성 깊은 개체들에게도 전해졌다. 순환하는 군상이 말을 할 줄 아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다시 말해 다른 마경의 왕이나 생물 또한 공용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마경의 생물이 인류처럼 체계적인 사회를 갖게 된다면…….’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재해였기에 자일론은 말문이 막혔다. 인류가 마경을 정복하는 게 아니라 마경에서 대륙을 침공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프리발트가 말했다.
“언어는 그렇다 치고. 대륙이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 알고 있나?”
“언데드와 전쟁이 일어났다고 들었네. 마경에 생긴 영혼의 통로에도 가 봤지. 마경에서 볼 수 없는 종류의 소란이더군.”
“영혼의 통로? 사문을 말하는 건가?”
“대륙에서는 사문이라고 하나? 직관적이군. 과연 그 용어가 더 어울리겠어. 나도 이제부터 사문이라고 부르도록 하겠네.”
셰로엘은 세간의 소식을 알지 못했지만 연합군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듯했다.
생존자를 찾고 있는 이상 계속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필요한 의문을 해소하고.
셰로엘의 조력을 받아 생존자들의 탐색에 박차를 가한다.
이자벨라는 그렇게 결정을 내리며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다.
“왜 대륙으로 복귀하지 않고 이곳에 머무르고 계신 거죠?”
“나는 지식인이자 마법사로서 본분을 다하고 있을 뿐이네. 연구. 오직 연구뿐이지. 예전에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아.”
“마경 생물을 연구하는 것입니까?”
“그 이상이네. 마경뿐만이 아니라 이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연구지. 아직 완성하지 못했지만 난 공개할 준비가 되어 있네.”
브라오닉에게 답변한 셰로엘이 테이블을 짚고서 몸을 일으켰다.
“현인은 머무르지 않네. 머무르지 않고 나아가려고 하지. 그래야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거머쥘 수 있으니까.”
손가락을 튕겼다.
응접실 바닥에 틈이 생겼다.
쿵.
지하실로 이어진 문이 활짝 열리며 어둠에 휩싸인 계단이 드러났다.
“원한다면 발을 내딛게.”
셰로엘이 뒷짐을 지며 앞장섰다.
“나의 연구실은 열려 있네.”
* * *
셰로엘의 지하 연구실은 방대하고 깔끔하면서도 지저분했다.
먼지는 전혀 없었다.
그 대신 수많은 연구 자료가 공간을 전부 장악하고 있었다. 신체 제어력이 좋지 않은 사람은 종이 뭉치에 진즉 발이 걸려 넘어졌으리라.
셰로엘을 따라서 연구실 중심으로 향했다.
이자벨라 일행은 그곳에서 피라미드 구조로 구축된 어떤 체계를 보았다. 계층에 자리 잡은 수많은 용어는 익숙한 단어였다.
빛, 어둠, 화염, 바람, 파동, 환상…… 죄다 세간에서 흔히 쓰이는 말들이었다.
“개념이란 무엇인가?”
셰로엘이 그 체계 앞에 바로 섰다.
“우리가 항상 접하는 일반적인 지식, 혹 보편적인 관념을 뜻하지만. 그보다 더 깊이 들어가면 개념은 곧 현상의 총체라고 할 수 있네. 그리고────이러한 개념 자체를 다루는 존재들이 있지.”
경건한 목소리가 잔잔히 퍼졌다.
“개중에서 초월자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지. 암월은 소멸을, 계외는 환상을, 리반데일 대공은 파동의 개념을 다루는 것처럼.”
“……!”
“다시, 개념은 무엇인가?”
깜짝 놀란 프리발트의 반응을 즐기며 셰로엘이 말을 이었다.
“세상의 모든 현상과 힘은 그런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네. 마경은 생존에 관한 개념을 가장 밀접하게 연구할 수 있는 장소고. 그래서 나는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걸세.”
“그럼…….”
“생존을 넘어 욕망, 욕망을 토대로 그 이상의 개념. 나는 관찰하여 통찰했네. 그렇게 차츰 탑을 쌓아가며 개념의 궁극을 논하기 시작했고, 조금이나마 가늠하는 데 성공했지.”
셰로엘은 질문을 받지 않고 계속 설명했다.
특유의 광기가 느껴졌다.
“개념은 대칭적이기도 하네. 여신 루아스는 빛의 개념을 다루는 존재. 반면에 어둠의 대악마는 어둠의 개념을 구사하지. 개념이 아우르는 범위가 클수록 그 힘도 거대하네. 빛과 어둠. 이 정도의 개념이라면 신의 것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야.”
하지만.
“빛과 어둠보다 더 높은 개념이 있네. 바로 창조. 그리고───”
셰로엘은 가장 높은 곳을 가리켰다.
“창조가 있으면 파괴가 있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