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4화 정해진 수순 (1)
아서 타렌폴드.
제르마엘의 검술과 체술에서 인간계 최초의 왕이자 두 번째 사도의 흔적이 보였다. 아니, 그보다 정확히는 아서 타렌폴드를 보좌하고 있었던 그 존재들의 모습이 비쳤다.
‘세계의 틈새에서 악마들을 학살했던 12귀족.’
직접 상대해 봤고, 목을 꺾어도 보았기에 알 수 있다. 제르마엘은 두 번째 사도가 지배했던 국가와 관련이 깊다는 걸.
후욱, 콰지지직!
마르테스의 시민들이 창대에 꽂혀 거리를 장식했던 것처럼, [인테리스]에 꿰뚫린 제르마엘이 황폐한 땅에 내리꽂혔다.
몸 정중앙에 박힌 검붉은 창날에서 파멸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베르덴이 물었다.
“두 번째 사도와 무슨 관계지?”
두 번째 질문이었다.
영혼이 울부짖지도 못할 정도의 격통이 작렬했으나 제르마엘을 진정으로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그런 아픔 따위가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베르덴의 안광에서 이글거리던 충동심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분노, 증오, 혐오──당장이라도 제르마엘이라는 존재 자체를 말살할 것만 같았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고개를 숙였다.
파괴의 개념은 계속 폭주하고 있음에도 그 이성은 살아 있었다.
[적에게, 진실을 묻는가. 반역자여.]
그리 답하면서 제르마엘은 끝까지 스태프를 붙들고 있던 권능을 거두었다.
양팔을 잃어버린 탓일까.
크세리온 제국에서 세 번째로 강대하다는 존재감에 비해, 악착같이 베르덴에게 대적했던 것에 반해 그는 너무나도 작아 보였다.
[아발론(Avalon).]
“…….”
[통합된 인류의 제국이 비로소 황금기를 맞이했을 때 최초의 왕이 있었고, 또 12귀족이 있었으며…… 네 명의 사령관이 있었다…… 가장 찬란했던…… 우리가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던…….]
제르마엘은 더 이상 맞이할 수 없는 그리운 과거를 돌이켜 보았다.
[그때, 그 꿈만 같던 황홀한 시절에.]
세계의 틈새에서 베르덴은 운명의 도시 렌디바르를 거닐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렌디바르에서 나온 운명의 군세와 전쟁을 벌였다.
아발론이 국명이라면, 렌디바르는 필시 아발론의 수도일 터였다.
[내게서 그분의 편린을 보았으니…… 그분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다는 걸 테지.]
“배신자 말인가.”
아서 타렌폴드는 현왕(賢王)이라고 불렸지만 배신 이후 저항을 등진 자, 또는 마족 멸절자라는 이명으로 더 많이 칭해졌다.
“12귀족 외에도 네 명의 사령관이 있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는데.”
[12귀족은 고귀하기에 존속됐고, 사령관은 부품에 불과했으니. 전시엔 더 많은 인간이 사령관의 직함을 달았다. 그저…… 인류의 황금기가 끝난 그때 사령관이 네 명이었을 뿐…… 하물며 끝내 우리는 아발론에서도 고요히 망각되었지.]
망각되었다?
[그분께서 저항을 배신하고자 했던 그때…… 모두가 그 결정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나. 그렇지 않지. 그럴 수 없다. 우리는, 12귀족처럼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는 개돼지가 아니니까. 하나, 우리의 ‘반역’은 실행되기도 전에 끝났다.]
제르마엘이 허탈한 소회를 털어놓았다.
[아서 타렌폴드…… 저항을 등졌음에도 그분께서는 현명한 왕이셨으니.]
반역의 군사를 지휘할 전우들을 집결시킨 자리에 아서와 12귀족이 등장했다. 저항했으나, 그들의 뜻은 가볍게 꺾이고 말았다.
제1사령관, 제르마엘.
제2사령관, 라크디온.
제3사령관, 네크라논.
제4사령관, 사르카논.
아서 타렌폴드의 휘하에서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해 온 네 명의 사령관은 렌디바르의 광장에 목도, 시신도 걸리지 않았다.
그냥 자연스럽게 지워졌다.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반역은 애초에 논의된 적도 없다는 것처럼.
그들의 공식 사인은 전사(戰死)였다.
비공식적으로 처형당한 넷은 잊혔고, 그 빈자리는 새로운 사령관들이 채웠다.
아발론은 그렇게 운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류를 위해 내린 배신이…… 잿빛의 용을 분노케 해 아발론이 멸망하는 결과를 낳았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베르덴이 눈을 가늘게 떴다.
두 번째 사도의 선택에 반기를 든 인간이 있었다는 정보는 처음이다. 대악마의 군단장인 하드라스에게도 듣지 못했다.
그만큼 운명전에서 사령관들의 존재감은 미미했을 것이다.
“그런 것치고는 운명에 순응하는군.”
[거부할 수도 없지만, 받아들이기도 했으니. 나는, 우리는…… 아서 타렌폴드께서 내린 선택을 원망하지 않는다. 죽고 나서야…… 묵시록의 권능을 받고 나서야 그분을 이해하게 됐다.]
제르마엘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운명.]
“…….”
[그 외에 대안은 없다.]
두 번째 사도는 대안 없는 저항에는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생전에 두 번째 사도에게 반역한 이들은 그와 같은 의미의 깨달음을 되풀이했다.
그들은 대체 운명의 수레바퀴를 통해 어떤 희망과 절망의 미래를 보았단 말인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더 이상 이에 관련된 질문은 무의미한 듯했다.
베르덴은 주제를 바꿨다.
“다크워튼 마탑주는 어디에 있나.”
베르덴에 앞서 제르마엘을 처음 조우한 건 라인델 넥스레온이었다.
정황상 그는 살해된 듯했지만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는데, 무엇보다도 진심으로 서로 죽고 죽였다면 제르마엘이 이렇게 온전할 리 없었다.
제르마엘은 이번에도 답을 아끼지 않았다.
[라인델 넥스레온은 금기의 늪에 빠졌다.]
“금기의 늪?”
[이미 스스로 금기의 경계에 선 이상 언젠가 찾아올 숙명이었다. 난 그 시기를 앞당겼을 뿐.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는 모른다. 진즉 금기를 인지한 대가를 치르고 죽었어야 마땅하나……알다시피 작금의 세상에 운명은 존재하지 않으니.]
제르마엘의 전신은 어느새 균열로 덮였다. 마도의 빛이 안에서 흘러나왔다. 파멸의 개념이 깊게 스며든 것이다.
[의문을 해소해 주었으니, 나 또한 묻겠다. 어째서 우리를 멸하지 않는가.]
“…….”
[왜 영혼을 부수지 않는가.]
베르덴의 정신을 자극하기 위해서 도시 마르테스를 절멸시켰다. 베르덴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해당 지역을 몰살했다. 조금이라도 인연이 스친 존재들을 처형하여 보란 듯이 매달았다.
다른 전장에서도 베르덴과 관련된 인물들의 죽음이 이어지고 있다.
크세리온 제국을 응당 흔적도 남지 않게 갈기갈기 찢어 늘어놓고 싶을 터였다.
그런데…….
제10사령관은 파멸에 휩쓸려 소거되었어도 영혼은 손상되지 않았다.
제르마엘의 육신은 고통과 함께 무너지고 있었지만 영혼 자체는 온전했다.
만인의 죽음을 앞에 두고도 베르덴은 일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다.
“지성체의 존엄을 훼손하지 않겠다고, 내가 선택했으니까.”
[전쟁에서 존엄은 무가치하다. 가장 잃기 쉬운 것이 존엄이다. 똑같이 짓밟지 않으면 결국 짓밟히는 것이 세계의 이치다.]
“그런 나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있다. 끝내 상실을 견디지 못해 신념을 버린다면 그들을 볼 낯이 없지.”
[전부를 무자비하게 빼앗겨도 자비를 베풀겠다는 것인가. 어리석은 아집이로다.]
“어리석다고 너희가 버리겠다면.”
베르덴이 확언했다.
“나는 버려진 것들을 위하겠다.”
종말이 도래한 마르테스 영지에 신언(神言)이 울려 퍼졌다. 제르마엘은 먼 옛날에 멈춘 심장이 다시 뛰는 듯했다.
‘당신’은 남은 것이라도 지키기 위해서 지키지 못할 것을 외면했다.
올다르크는 불확실한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 지키지 못할 것을 버렸다.
그런데 베르덴은 지켜지지 못한 것들을 지키겠다고 단호히 선언했다.
앞선 절대자들과 상반된 선택이었다.
도중에 무너지거나 그들처럼 타협할 것이 뻔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렇게 말한 적은 없었다. 그 길은 아무도 걷지 않았다.
아름답다.
제르마엘은 그리 느꼈다.
‘이건…….’
문득 제10사령관 군체를 구성하고 있던 영혼들이, 제르마엘이 살해한 생명의 영혼들이 자리에 머무르고 있는 게 보였다. 벌써 세계의 틈새를 지나 다섯 번째 세계로 갔어야 했는데 말이다.
베르덴은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그것들은 곧 주춤하더니 하나둘씩 베르덴의 반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제르마엘은 아티팩트의 아공간 너머에서 한 권의 책을 보았다.
‘그링 아르카넘.’
‘시간의 히안테’가 운명의 계기가 됐다면, ‘지식의 호스트’는 운명의 수레바퀴를 창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존재.
세 번째 사도이면서, 그 공훈으로 자유를 허락받은 공해의 괴이. 그가 제작한 예의 신물(神物)이 베르덴의 손에 있었다.
[버려진 자들을 구원한다.]
제르마엘이 눈을 감았다.
[그야말로 이상이로군.]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뿌리내린 파멸에 의해 신체 붕괴가 가속화됐다. 제르마엘은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쩍.
[인테리스]가 꽂혀 있던 부위가 푹 꺼지면서 상체에 구멍이 뻥 뚫렸다.
그 탓에 고정됐던 몸이 자유로워졌다.
<기근: 비진(飛塵)>
메마른 티끌이 한데 모이더니 제르마엘의 결손된 양팔을 대신했고, 다시 집은 기근의 검으로 베르덴을 밀쳐냈다.
정해진 수순이었다.
제르마엘은 패배를 받아들였다.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진심은 결코 퇴색되지 않는다.
운명이 그렇게 정했으니까.
육체가 산산이 무너질지언정 영혼은 주어진 사명을 따라야 한다.
카가가가가가강!
제르마엘은 전력을 실은 검격을 쏟어내며 베르덴을 몰아붙였다. 정면에서 기근의 권능과 파멸의 개념이 연신 충돌했다.
투구가 파괴되면서 제르마엘의 안면이 드러났다. 일반적인 언데드와 다른, 단순히 창백할 뿐인 사내의 얼굴이었다.
베르덴의 반격을 막은 제르마엘의 눈, 코, 입에서 죽은 피가 분출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럴수록 제르마엘은 사력을 퍼부었다. 이미 재가 되고 있으나 권능은 남아 있다. 살의가 깃든 일격들이 사방으로 흩어진 그때였다.
제르마엘이 기근의 검으로 자신의 왼쪽 손바닥을 내리찍으니.
칼날이 권능을 관통했다.
<기근: 황아사(黃餓死)>
최대이자 최고의 권능이 발현되는 순간 땅 밑에서 거대한 이빨이 들이닥쳤다. 콰드드득! 아귀 같은 것이 베르덴이 있는 공간을 통째로 삼켰다.
모든 기, 마력, 신성력, 생명력을 빨아들여 척박한 안식을 선사하는 묵시록의 기적.
[운명도, 저항도 너처럼 집요하다.]
무수한 권능의 이빨 사이에서 검붉은 빛이 강하게 새어 나왔다.
[모두가 이상을 꿈꾸지.]
묵시록의 아귀가 폭발했다.
<대멸절: 녹스(Nox)>
주변으로부터 모든 빛을 앗아간 어둠이 제르마엘을 꿰뚫었다.
우반신 대부분이 날아갔다.
그와 함께 제르마엘이 품고 있던 기근의 묵시록이 파멸했다. 권능이 사라졌고, 부여받은 운명의 힘 또한 비산하며 증발했다.
[아칸드 폐하의, 전언이다.]
제르마엘은 유언을 남겼다.
[시타델로…… 오라.]
지면에 닿을 무렵 그의 육체는 이미 형태를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검고 검은 재가 바람에 실려 잠시 떠다니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제1사령관, 제르마엘.
제7사령관.
제10사령관, 군체.
크세리온 제국의 사령관들이 이 리비안트 공국에서 토벌됐다.
* * *
제르마엘의 존재감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육체가 멸한 것이다.
다만 그의 영혼은 아마도 [그링 아르카넘]에 실렸을 것이다. 확인하는 게 옳았지만 지금 베르덴에게 그럴 여력은 없었다.
탁.
베르덴은 초토화된 지면에 닿은 순간 바로 무릎이 무너졌다. 본래의 형상으로 돌아온 [인테리스]로 겨우 균형을 지탱했지만 동공은 쉴 새 없이 떨렸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격하게 뛰었다.
폴테인 평야에서의 개전 마법.
펜드렌 호수에서의 사도 창조.
사룡 네크바엘과의 전투.
제르마엘 토벌.
억지로 감내하며 미루어 두었던 반동이 마도 폭주를 기점으로 일제히 찾아왔다.
‘어서, 중앙 대륙으로 가야 하는데.’
아칸드가 주인 없는 땅을 노리고 있다. 어서 가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죽는다. 그런데 사지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쿨럭!
가까스로 아공간을 개방해 엘릭서를 마셨으나 결국 한 모금도 머금지 못했다.
마도가 거부했다.
파멸의 개념이 회복을 거부했다.
‘이런…….’
마도의 통제권을 되찾으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엘릭서가 손에서 떨어졌다. 마치 마도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대가 없이는 힘 또한 없다고.
쿠구구…… 쿠구구구…….
파멸에 영향력을 받은 주변 일대가 불규칙적으로 붕괴하고 있다.
베르덴이 의식을 채찍질했다. 엘릭서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엘릭서가 마도 폭주에 여파에 휘말리지 않도록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손끝에 부딪힌 투명한 용기는 점차 멀어질 뿐이었으니.
끝끝내 신체 균형이 무너져 베르덴이 쓰러지려던 찰나였다.
탁.
누군가가 베르덴을 부축했다.
“윽……!!”
베르덴이 반쯤 감긴 눈으로 고개를 움직였다. 마도 폭주에 일부 닿은 탓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녀는 기꺼이 베르덴을 받쳤다.
“아, 안녕하세요, 형부.”
여자는 이자벨라를 닮아 있었다.
* * *
“저게 옛 왕이구나. 생각보다 멀쩡하게 생겼네.”
격전이 이어지고 있는 스칼룸 단층협에 새로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우리 아드리안도 있고.”
초대 마도왕의 무구로 무장한 피의 여제───히스릴 델 로하룬이 입가를 비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