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5화 정해진 수순 (2)
형부……?
생소한 단어다. 물론 일상 생활에서는 흔히 쓰이는 호칭이지만, 베르덴이 그렇게 불린 적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자벨라를 닮은 외모.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정체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어째서 여기에, 하필이면 지금 모습을 드러냈는지 그 이유까지도.
───[문답이 종료됐으니 협력 관계가 이루어졌고, 마경 토벌군단이 사문을 폐쇄하고 마경을 떠나는 순간 계약 이행으로 판정. 협력은 동맹으로 거듭나리. 또한, 이를 기념하여…….]
델하룬에서 가레스를 통해 조우한 기생의 대악마는 이렇게 말했었다.
───[적절한 시기에 선물을 보내겠도다.]
그제야 이해가 됐다.
어떻게 치명상을 입고도 보헤미른 마탑의 포위망을 뚫고 사라질 수 있었는지.
어째서 방주의 정보망을 동원해도 작은 단서 하나 찾을 수 없었는지.
어째서 놈이 선물이라고 칭했는지.
크로든 올렌티아에게 이자벨라를 제외한 데이로스 일가가 학살당하던 그날, 오랜 저택이 불타 없어지던 그 자리를 악마가 지켜보고 있었다.
“제니아, 데이로스.”
이페아카른이 죽음을 코앞에 둔 이자벨라의 동생을 크로든에게서 빼돌렸다. 신의 감각이 제니아가 가지고 있는 악마의 권능을 포착했다.
힘의 유무를 떠나서 본질적으로는 가레스와 다르지 않았으니.
제니아는 대악마의 계약자다.
‘날 한번에 알아봤어? 언니한테 들었어도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
가문의 비극으로부터 어언 십수 년이 지났다.
이자벨라가 그러했던 것처럼 제니아의 외견도 많이 달라졌다. 본판은 어디 가지 않았지만 이자벨라가 아는 앳된 얼굴은 성숙해진 지 오래였다.
‘나를, 알고 있어.’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 준 것이, 이페아카른이 아닌 타인의 입에서 이렇게 자신의 이름을 들은 것이 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그동안 계약을 맺은 대가로 이페아카른의 주구로 살아왔다.
평범하지 않은 인생에는 일상도 없었다.
제니아는 비로소 세상과 다시 연결된 듯한 느낌에 마음이 간질거렸다.
툭, 후두둑!
제르마엘이 남긴 여러 검흔에서 많은 출혈이 발생했다. 인간이었다면 몇 번이나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심각한 중상.
“일단 상처부터…… 읏!”
허공에서 현뢰가 갈라지며 번졌고, 그에 살짝 스친 제니아의 팔뚝이 검게 그을렸다.
살가죽뿐만이 아니라 뼈까지 뜯어지는 듯한 고통에 제니아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대악마의 힘으로 강화한 저항력이 간단히 뚫렸다.
쿠오오───
검붉은 하늘이 요란스럽게 뒤틀렸다.
낙뢰가 불규칙적으로 떨어졌다.
충격파와 함께 잔류 번개가 확산하면서 크레이터가 형성됐다.
아주 멀리서 전투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했는데, 현장에 직접 들어오니 식은땀이 멈추지 않았다.
‘정통으로 맞으면 즉사.’
하지만 그렇다고 베르덴을 내버려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페아카른의 명령? 지시?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언니에게 소중한 사람이란 것만으로도 목을 걸기에 충분했으니까.
“자리부터 옮길게요, 형부.”
제니아는 서둘러 지면에 굴러다니는 엘릭서를 줍고 눈을 번뜩였다.
<악마화>
암녹색 눈동자가 역안으로 바뀌었다.
쿠웅!
체격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여성의 굴곡이 훤히 드러난 인간형 악마가 된 그녀가 자리를 박차자 주변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특유의 기감을 통해 위에서 불길한 전조를 감지한 순간 급하게 방향을 틀었다.
연이어 내리치는 벽력.
제니아는 살아 있는 것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종말이 찾아온 세상을 가로질렀다. 그녀가 딛고 있는 이 땅엔 벌레 하나 살아 있지 못했다.
숲의 나무는 형태만 남아 있다. 산맥은 다른 종류의 죽음으로 물들었다.
마치 제니아와 베르덴만이 세계의 유일한 생존자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나 외로운 세상이라니.
흠칫.
갑작스럽게 등골을 타고 흐르는 오싹함에 제니아가 우뚝 섰다.
활로가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로 움직이든 위험하다고 악마의 감각이 경종을 울렸다.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 제니아를 위협적으로 노려보고 있는 불길한 광채.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어……?’
처음부터 제니아는 마도가 군림한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베르덴이 근원이니까. 베르덴과 함께 있는 이상 탈출은 불가능했다.
<인테리스 대광역: 광천(狂天)>
제멋대로 고유 마법이 시전돼 제니아가 있는 지역 전체에 현뢰의 폭우가 빗발쳤다. 해당 마법의 반경은 수 킬로미터에 육박했고, 제니아는 그 거리를 단숨에 주파할 능력이 없었다.
물론 몸을 지킬 수단도 말이다.
“숙여라.”
[엣.]
베르덴이 그녀의 어깨를 내리누르며 남은 한 팔을 하늘로 향했다. 다섯 손가락을 굽히며 손목을 비틀자 마법의 궤도가 뒤틀렸다.
콰과과과과과과과!
셀 수 없이 많은 벼락이 오직 베르덴과 제니아만을 비껴 나갔다.
‘내 마도의 제어권을 되찾지 않으면 영향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혼자라면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마도 폭주로 비정상적으로 끌어낸 경지를 감당하지 못하면 홀로 죽을 뿐이니.
그러나 이자벨라가 그렇게나 찾고 있는 여동생이자 유일한 가족이 옆에 있다.
제니아가 이곳에서 죽는 일은 단언컨대 없다.
“개벽하라…… 인테리스.”
질서의 종말 [인테리스]가 시동어에 반응하여 그의 마력회로의 출력 제한을 완전 해제.
<폐해령(閉海領)>
베르덴의 심장에서 흘러넘친 마력이 솟구쳐 올라 현뢰를 차단했다. 푸른색과 암적색이 충돌하며 세계가 둘로 갈라졌다.
무한의 마도와 파멸의 마도가 대립하는 것도 잠시 힘의 균형이 기울었다. 의지가 깃든 마력이 이성을 잃고 폭주한 마도를 제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힘의 충돌에 허공에 뜬 대지의 잔해.
경직된 대기.
기상의 급격한 변화.
────────────!
이윽고 마력이 번뜩이더니 마르테스 영지 전체를 삽시간에 뒤덮었다. 검붉은 색채가 희석돼 흩어지고, 일순간 잿빛이 덮치며 눈이 멀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제니아는 꼭 감고 있던 눈을 서서히 떴다.
‘……맑아졌어.’
역안에 푸른 하늘이 비쳤다. 하늘은 서서히 변하며 어둠이 자연스럽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현재 대륙의 시간은 저녁 노을이 사라질 무렵이었다.
쿵.
베르덴의 육체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인테리스]를 놓쳤다. 피와 땀을 쏟아내며 고개를 늘어뜨린 처량한 모습에 제니아가 눈을 크게 떴다.
[형부!]
“괜찮다…… 이 정도는.”
베르덴은 창백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마르테스 영지를 장악한 마도의 여파는 없애는 데 성공했지만, 마도 폭주는 억눌러 놓았을 뿐 현재진행중이다.
사실상 완전히 무력화된 상태.
체내에 가둬둔 마도를 진정시키지 않으면 엘릭서는 복용할 수 없다. 혼자 전력을 회복하려면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그럴 여유는 없다.
도움을 받아야 한다. 베르덴의 마력에 간섭할 수 있는 마법사들의…….
[아무리 초월자라고 해도 무리예요. 피를 공급받을 수 있으면 제가 치료할 수 있지만, 이 정도면 최소 수천 명분의 피가 필요할 텐데.]
이 세상의 어느 누가 그만한 양의 피를 자발적으로 주겠는가.
소도시 하나를 희생시켜야 한다.
그게 최선이다.
제니아는 거부감이 강하게 들었지만 이페아카른이 조언이랍시고 제시한 길이 아니면 베르덴을 회복시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생면부지의 인간들.
이자벨라 언니가 선택한 사람.
둘 중 뭐가 더 중요한지는 정해져 있었다.
[제가 어떻게든 피를 구해 올──]
“에스, 티리아.”
베르덴은 다시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에스티리아, 로.”
에스티리아 왕국.
탓!
베르덴의 말뜻을 이해한 제니아가 곧바로 스태프를 들고 동쪽으로 질주했다. 에스티리아 왕국에 베르덴을 치료할 방법이 있는 것이다.
그걸 듣자마자 작은 도시를 희생시키겠다는 참혹한 결정은 철회했다.
전력으로 움직여도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거리.
크세리온 제국의 사령관들을 압도한 베르덴에게서 힘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당장 멈출 것 같은 미약한 심장 박동.
‘초월자의 항상성이 대단하다고 하지만, 정말 버틸 수 있을까.’
제니아는 베르덴이 끝까지 의식을 붙잡고 있기를 바라며, 또 조금이라도 잃어버린 활기를 되찾게 하려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남동생과 가신들이 죽기 전, 천진난만하던 그때 그 행복한 시절처럼 말이다.
[언니가 그동안 보는 눈이 생겼나 봐요. 옛날에는 크로든 같은 놈을 친구랍시고 데려오더니. 이제 형부 같은 사람을 모셔 올 줄이야.]
“…….”
[못 본 지 너무 오래돼서, 나중에 이자벨라 언니가 마해에서 돌아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가족끼리 어색한 건 질색인데.]
그 순간 베르덴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마해?”
적룡의 출현으로 실종된 이자벨라의 생존 소식이 베르덴을 자극했다.
* * *
기예, 마법, 기적.
모든 방위에서 쇄도하는 공세를 향해 용검이 크게 몰아쳤다. 그에 닿은 모든 힘이 견디지 못하고 와해돼 박살 났다.
한 번의 검으로 갑옷을 으깨고.
두 번의 검으로 무기를 깨뜨리고.
세 번의 검으로 육신을 가르며.
네 번의 검으로 성벽을 쳐부수고.
다섯 번의 검으로 적장을 베어서, 여섯 번의 검으로 군세를 무너뜨리니.
절기: 제6형단 – 케온타스Qiontas
<성광: 승천>
에르세티아가 단신으로 절기에 대적하다가 일순간 무릎이 꺾였다.
푸확, 투구 아래로 피가 쏟아졌다.
“……?!”
“경지는 인정하마.”
곧바로 신성력으로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내상이 깊었다. 신성력을 두른 성창으로 막았는데도 엄청난 충격량이 전신을 부쉈다.
수왕 안티아스도 맨몸으로 견딜 수 없다고 판단해 아칸드의 절기를 회피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오만하군.”
두 번의 검격이 남았다.
쩌어엉!
에르세티아의 어깨를 가르기 직전에 광검과 성검이 교차. 용검에 닿지 않고, 아칸드의 건틀릿이 나아가지 못하도록 차단했다.
검압이 전신을 짓눌렀다.
초월자가 둘인데도 압도적으로 힘에서 밀려 무릎이 땅을 파고들었다.
반토레온이 섬광처럼 접근했다.
<뇌경: 내폭(內爆)>
아칸드의 갑옷에 닿은 손길에서 뇌격이 작렬해 그 체내를 불태웠다. 한데 집중되던 번개가 폭발하더니 일대를 삼켰고.
그사이에 내상을 수습한 에르세티아가 성창을 날려 아칸드의 상체에 명중시켰다.
폭력적인 빛무리가 가라앉기 시작한 그때였다.
아칸드의 신형이 흐려졌다.
그 존재감까지도.
“어디에……!”
“성자, 자리를 벗어나세요!”
에르세티아가 창끝을 높이 뻗어 성스러운 장막을 전개했다.
절기: 제2형단 – 빈쿨로스Vinculos
잔상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모두의 머리 위에서 용검이 들이닥쳤다. 남은 다섯 번째 검격과 여섯 번째 검격이 연속으로 같은 공간을 베었다.
대지가 갈라지며 융기했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흙먼지가 눈을 가렸다. 심지어 온몸을 저릿하게 만드는 충격파가 초월적인 감각마저 교란시키기까지.
격한 혼란 속에서 옛 왕의 기척을 찾기 위해 안력을 극도로 높였다.
에르세티아가 측면에서 존재감을 보았다.
“앞이다!”
“큿?!”
아드리안이 경고하자마자, 공허한 정면에서 그의 그림자가 떠오르더니 용검이 쇄도하여 에르세티아를 날려 버렸다.
콰아아아앙!
성검이 흙먼지 너머의 형체를 갈랐다.
하지만 베인 것은 그림자뿐.
바로 옆에서 날아온 권압이 레온하르트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절기: 제2형투 – 크리아크Xriak
저항력을 무색하게 만드는 패도적인 연격에 피가 튀며 성검이 허공을 날았다.
아드리안이 도중에 개입하여 난무亂舞로 공방을 주고받았으나 신경이 마모돼 몇 번 막아 내지 못한 채 빈틈을 허용했고.
두 초월자가 소리보다 먼저 좌우로 날아가 절벽에 처박혔다.
파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뇌(雷)의 파도를 동반한 반토레온이 마도로 신경을 강제로 자극─순발력을 육체 한계 이상으로 끌어올려 지근거리에서 아칸드의 권각술을 흘렸다.
과거에 경험한 기술인 터라 흐름을 이해하고 있어 가능한 파훼법이었다.
문제는 그 위력.
‘맞으면 뼈도 못 추린다. 생각했던 것보다 이 괴물이 성장할 여지가 컸나 보군.’
제1차 초월자 전쟁에서 초월자들을 홀로 학살했던 놈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반토레온은 그때보다 계위가 한 단계 올라 훨씬 더 강해졌고, 당대의 성녀는 과거 신인이 도달하지 못한 드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성자 레온하르트는 미숙하나 견고했고, 아드리안은 8세기 전을 기준으로 무투계 초월자 중 상위권이라고 해도 손색 없는 강자.
이런 네 명의 합격을 아칸드는 무지막지한 절기로 압도하고 있다.
과거의 경지를 명백히 초월했다.
‘저항력을 포함한 모든 신체 능력이 한 단계 격상의 영역으로 올라섰다. 특히 대인전에서는 사룡 네크바엘 이상……!’
부지불식간에 날아든 발차기를 온전히 흘려내지 못하여 몸이 주춤거렸다. 우직. 팔뼈에 얕은 금이 갔다. 이어서 뒷덜미에 서늘함이 스쳤다.
반토레온이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후웅!
등 뒤에서 회전하며 날아온 용검이 아칸드의 손에 쥐어졌다.
절기: 제1형단 – 글라로스Glaros
수 미터 두께의 죽음의 검기가 고작 세 발짝 앞에서 현현했다.
몸을 최대한 극단적으로 낮춰도 머리가 날아갈 터.
방어 불가능.
막지 못하면 죽는다.
상하체가 분리될 것이다.
스친다고 해도 균형이 깨져 다음의 일격을 막을 수 없다. 죽는다.
‘죽어도 호상.’
기분 좋은 흥분이 뇌를 저몄다.
‘하지만 나는 아직 베르덴과 싸워 보지 못했다!’
투확!
반토레온이 벼락처럼 뒤로 후퇴했다. 검기가 그를 쫓았다. 허나 반토레온의 순간 속도는 검기의 그것을 웃돌았다.
거리를 확보한 후 허리를 젖혀 사선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 반토레온 대신 아칸드의 절기를 마주한 절벽 지형이 수평으로 갈라졌다.
“크하하핫, 죽는 줄 알았잖은가!”
“훌륭하구나, 반토레온.”
“아직 더 남았으니 기대하게!”
반토레온이 양손을 모아 내질렀다.
<뇌경: 뇌룡(雷龍)>
드래곤이 포효하는 것과 같은 굉음을 내며 벼락의 광선이 아칸드를 강타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가 두 손을 반복해서 번갈아 뻗었다.
“으랴랴랴랴랴랴랴랴랴랴랴랴!”
연속적으로 사출되는 수많은 진한 벼락이 간격의 공백을 채웠다. 아칸드의 무식한 저항력을 뚫기 위해 준비한 한 수.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눈 깜짝할 사이에 수천, 수만이 넘는 번개 줄기가 한 점에 작렬했다. 푸른 폭발이 연쇄적으로 확산했다. 그의 마력과 마도가 협곡을 위압했다.
그렇게 생겨난 잔류 번개가 아칸드가 있던 공간을 중심으로 응축되며 일시적으로 <케라우스 대광역>을 형성했고, 그것은 즉시 반토레온의 손에 깃든 번개와 공명했다.
<케라우스 뇌관(雷貫)>
마도가 집약된 자그마한 뇌창이 자석처럼 쏘아져 영역을 꿰뚫었다.
일점 폭발.
모든 생명체에 치명적으로 작용할 장대한 번개의 기둥이 천지를 연결했다.
“하아, 하아…….”
반토레온이 호흡을 진정시키는 동안에 폭심지에서 아칸드가 걸어나왔다. 온몸에서 치솟는 연기. 금속에 균열이 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쩌적.
옛 왕의 투구가 깨졌다.
“8세기 전에는 나 혼자서는 흠집도 내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꽤 짜릿하지 않았나?”
“이명에 어울리는─”
아칸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세 방향에서 기와 신성력이 폭증했다.
<여신의 심판>, 계열界裂, <천상의 성흔>
신앙의 적을 자비 없이 멸하는 신성한 창과 세계를 가르는 참격, 수직선상을 가르는 광활한 성격이 모든 퇴로를 차단했다.
세 사람이 구현한 초월기와 신의 기적은 아칸드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야말로 구심점을 갖춘 세계.”
아칸드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용검 [마그라스]를 끌어당겼다.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검의(劍意).
“너희는 자격이 있다.”
설마 저 합공을 받아치려나 싶었으나 그의 행동은 예상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용검을 노려본 아드리안이 눈을 크게 떴다.
“초월기……!!”
“뭐? 그럴 리가.”
아칸드는 지난 전쟁에서도 초월기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일반적인 초월자와 다르기에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 연합의 추론이었다.
실제로 아칸드는 800년 전에는 초월기를 구사할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때는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칸드는 주검의 영광을 통해 부활함으로써 마침내 여섯 번째 사도로 완성됐다. 세간에서 초월을 타고났다고 일컬어지는 자의 초월기는 예의 무투계와 본질적으로 달랐다.
<안식의 권능>
아칸드가 전력으로 휘두른 용검이 물질계를 넘어서 개념을 뒤틀었다. 그것은 스스로의 희생을 대가로 한 무(無)의 검기였다.
그의 존재감이 깎이는 것과 동시에 ‘당신’으로부터 하사받은 기적이 현현했다.
“말도 안 돼.”
에르세티아는 해일처럼 들이닥치는 권능의 격랑을 보며 중얼거렸다.
“신성력……?”
<안식: 무립(無立)>
알 수 없는 신의 힘이 초월을 쳐부쉈다.
협곡이 소실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