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6화 정해진 수순 (3)
스칼룸 단층협이 더 이상 압력을 버텨 내지 못하고 붕괴했다. 그 과정에서 쪼개지고 압착돼 지반이 크게 변형되었다.
수백 미터에 육박하는 절벽들이 가라앉아 만들어진 언덕 지형이 적막에 휩싸였다.
전투 규모가 알파가 상정했던 범위를 넘어섰다.
여유 넘치게 거리를 확보했다고 생각했었던 연합군 포격 진지가 손상됐다. 완전히 침강하지는 않았지만, 마력 입자포를 비롯한 병기 일부가 궤도가 뒤틀려 더 쓰지 못하게 되었다.
협곡을 차단한 1차 방어선과 2차 방어선은 흔적도 없이 파괴되거나 묻혔다. 아티팩트도, 매직 아이템도, 골렘도 당장 회수하긴 어려웠다.
이제 남은 것은 3차 방어선뿐이었다.
……쿠웅!
조각난 바위가 넘어졌다.
“허억, 헉…… 윽!!”
레온하르트가 한쪽 무릎을 짚고 일어서다가 늑골의 통증에 주저앉았다. 어두운 붉은색 핏물이 침과 섞여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육체 그 너머를 손상시킨 옛 왕의 절기.
최상위 기적의 힘을 빌려도 상처의 회복이 더디게 진행되었다.
심지어 그뿐만이 아니었다.
레온하르트가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격하게 떨리는 손을 내려다봤다.
힘이 제대로 모이지 않았다.
“신성력이, 왜.”
“안식이 도래한 세상에서는 오직 본연의 모습만이 존재하지.”
눈앞에 드리운 그림자에 레온하르트가 움찔 떨고는 시선을 높였다.
“나는 너의 무력(無力)함을 동정한다.”
“……무슨 소리야.”
“바라든 바라지 않든, 결국 희생으로 점철된 너의 길을.”
레온하르트의 호흡이 점차 가빠졌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아칸드가 마지막에 날린 검기에 비해 그의 몸 상태는 너무나도 멀쩡한 축에 속했다.
뒤늦게 시선을 돌렸다.
에르세티아는 성갑 [아르미넬]이 갈라진 채 쓰러져 있었다. 붉디붉은 피가 선명했다. 망가진 투구 사이로 보이는 눈은 감겨 있었다.
그녀는 찰나의 순간에 온몸을 던져 레온하르트를 보호했다. 레온하르트의 저항력으로는 즉사할 거라고 판단했기에.
“아…….”
“희생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존재를.”
아드리안은 어긋난 지각 사이에서 뻗어나온 손만 보였다.
반토레온은 허리가 잔해에 걸쳐 있었다.
레온하르트가 제 어금니를 부러뜨리면서까지 힘을 끌어냈다. 신성력이고 뭐고, 일어나서 디딤 발에 체중을 극단적으로 실으며 성검을 올려쳤다.
“가엾은 운명이다.”
용검이 수직을 가르자 레온하르트의 손목과 다리가 잘렸다. 왼팔과 왼다리. 성검 [루엔스]는 아칸드에게 닿았지만 흠집도 내지 못했다.
균형을 잃고 쓰러진 레온하르트가 흥분을 넘어선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무력감으로 가득한 절규였다.
절단 부위에서 쏟아진 생생한 피가 작은 웅덩이를 이뤘다. 그 위로 아칸드와 레온하르트의 모습이 함께 비쳤다.
“세계 연합의 분투로 대륙이 감당해야 했을 유혈은 예정보다 억제되었다. 허나 성자여, 절대자도 모두를 구원할 수는 없다.”
아칸드가 레온하르트를 짓밟았다.
“죽어야 했을 이들을 구한 대가는, 죽지 않았어야 했을 이들이 치를 것이다.”
용검이 드리워졌다.
“운명의 순환에 따라.”
* * *
마법도시 비렌테 곳곳에서 굉음이 퍼지며 불길한 연기가 치솟았다. 첨단 마법이 집약된 성벽은 굳건히 견디고 있으나, 처음 겪어보는 공성전에 마법사들은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밖에 수놓인 언데드 군단을 막아 내고 있지만 이미 내부 침입은 허용한 상황.
시끄러운 정적 속에서 땀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그리고 목젖까지 차오른 거친 호흡의 소음까지도.
“대체 어떻게 돼먹은 흑마법이란 말인가……!”
“자원을 그렇게나 쏟았는데 처리한 게 고작 언데드 하나라니요.”
마법도시 비렌테의 마법 협회장, 오더스 에벤드라.
마법 자주 연대의 리더, 마법주(魔法主), 셀레스터 레븐.
두 사람을 비롯해 고위 마법사들이 침입자를 앞에 두고 있었다.
주검의 영광.
최고위 마법계 언데드 네 마리를 대동한 옛 세 번째 하인이 턱을 치켜들었다.
격전 끝에 언데드는 셋으로 줄고 말았지만 덕분에 비렌테의 방어진을 충분히 소모시켰다. 그가 손짓하자 시체들 위로 고유 흑마법진이 떠올랐다.
“진정 마법의 길을 걷겠다면 투항하라.”
암리(暗理)의 주인, 나크텔.
“고통도, 죽음도 없는 불멸의 세상이야말로 마법의 끝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
서대륙에서는 고대 초월자에 의한 마법도시 침공이 진행되고 있었다.
* * *
대륙의 여러 도시에서 세계 연합에 속한 요인들의 암살 사태가 벌어졌다.
실패로 돌아간 암습이 많았지만, 요인의 방심이나 민간인 테러로 인해 혼란에 휩싸인 사이 호위 대책이 뚫리는 바람에 일부는 성공했다.
어딘가는 건물이 통째로 날아가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찾았다, 리엄 어레인.”
주검의 영광이 뒷세계의 혈맹을 조직해 암약할 때 부활한 나르비아의 육악 중 일악──나르비아 페린이 치아를 핥았다.
주인 없는 땅.
그곳에서 군사를 집결시킨, 에온에 속한 대영주의 기척을 감각에 새겼다.
전쟁 내내 어레인 성채에 숨어 있더니 테르네티아 연방에서 초대규모 언데드 군단이 북상한다는 소식에 마침내 밖으로 기어나왔다.
자기 목숨을 아까워하면서도 결국 상황에 떠밀려 성채를 벗어나다니, 우유부단한 것이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다.
하긴 통솔하려면 권위자가 있어야 하니까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에온은 배경일 뿐, 에온이 없을 때는 나약한 어린 영주였다고 하니 그냥 허수아비지. 뭐, 그래도 윗분의 심기를 건드리는 데는 충분하려나.”
나르비아가 살의를 내비쳤다.
“어설프게는 안 해. 시간이 걸려도 확실한 기회를 포착해 죽이고 도주할 거야. 동선 잘 짜둬.”
“에온의 간부는 우리가 맡겠소.”
“알겠슴다, 누님.”
성녀에게 패배해 빈사 상태에 놓인 대학살의 수인을 구출하기도 한 나르비아가 리엄의 죽음을 상상하면서 희열에 사로잡혔다.
신성은 리엄의 시체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임무에 실패한 에온의 위상은?
그녀는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비교적 하잘것없는 자신으로 인해 흔들린다는 것에 뇌가 마비될 것 같은 쾌감을 느꼈다.
“아흣, 초월자들의 일그러진 표정! 최고야……!”
주인 없는 땅의 수도, 어레인에서 나르비아 일행이 암살을 준비했다. 지하도에 박쥐가 자리 잡았는지 박쥐 소리가 가끔 들렸다.
* * *
콰과과과과광!
레온하르트의 목이 절단되기 직전에 용검의 궤적이 틀어졌다.
마력 입자포에 의한 정밀 포격이었다.
아칸드가 지면에 발을 붙인 채로 밀려났다. 시선을 높였다. 연합의 병기들을 지휘하는 미니 골렘 알파와 눈이 마주쳤다.
작은 음성이었지만 똑똑히 들렸다.
[뭘 봐.]
아칸드는 대답하려던 찰나 눈앞에서 신성 충격파가 터졌다.
알파에게서 고개를 돌린 그가 미소 지었다.
“과연, 태초 이래 회복력만으로 네게 견줄 신인은 없을 거다.”
“회복될 때까지 잠시 물러서십시오, 성자.”
에르세티아가 그를 막아섰다. 출혈이 아주 멎지는 않았지만 몸은 움직였다. 레온하르트와 달리 신성력도 원활하게 쓸 수 있었다.
“성녀, 제, 제 신성력이…….”
“믿으세요.”
에르세티아가 투구를 벗어던졌다. 투구는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그 아름다운 얼굴을 적셨다.
“신성력의 본질은 믿음입니다.”
에르세티아가 섬광을 폭발시키며 전진해 아칸드를 밀어붙였다. 콰앙! 용검의 검로를 미리 차단하며 이내 그를 바위 잔해 더미에 충돌시켰다.
찰나에 짧게 잡은 성창이 아칸드를 지나 용검의 날 아랫부분을 막았다.
“죽음을 극복했다고 했습니까.”
에르세티아가 단언했다.
“아뇨, 당신은 죽습니다.”
방금 성창이 지나친 자리에서 아주 적은 양의 피가 새어나왔다.
아칸드도 온전치 않았다.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초월기와 신의 기적을 순수하게 힘으로 짓이긴 일격은 아칸드의 힘을 명백히 소모시켰다.
“그 검기가 당신을 죽이는 것처럼.”
“대가 없는 힘은 없지.”
아칸드가 어깨로 들이받으며 근접거리에서 허리를 틀었다. 너무도 가까워서 보이지 않지만 검의 방향은 감각적으로 느껴졌다.
에르세티아는 멀어지는 대신 아칸드의 팔을 잡고 낮게 공중제비를 돌았다.
성갑을 스치는 검기.
화악!
여섯 장의 빛의 날개를 재생하여 균형을 제어했다. 상하가 뒤집힌 몸을 원래대로 되돌리며 창끝에 전력을 실었다.
용검이 올라오지 못하게 손잡이를 강타하고 그대로 힘껏 내리눌렀다.
카가가가가각……!
힘이 대립했다.
그 반동에 발밑에 금이 갔다.
“내게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닐 텐데.”
“……!”
아칸드가 보란 듯이 속삭이자 에르세티아의 기색이 돌변했다. 레온하르트는 본 적이 없는 극도의 광기로 물든 눈빛이었다.
‘당신’의 힘 중 하나인 <안식의 권능>은 침잠하는 죽음으로, 혼란스럽고 시끄러운 껍질 안쪽에서 본래의 모습을 끄집어낸다.
광신(狂信), 혹은 맹신(盲信).
그것이 성녀 에르세티아의 본질, 그 자체.
“숭배하는 신이 누굽니까.”
다른 사람은 감지하지 못한 듯했지만 에르세티아는 분명 느꼈다. 아칸드가 가진 사기(死氣) 너머 존재하는 정체불명의 신성력을…….
루아스 교국의 신인으로서 반드시 그 이단 신앙에 대해 알아내야만 했다.
이에 아칸드가 말하길.
“진실.”
* * *
붕괴된 거대 협곡에 지진이 연이어 발생했다.
단층이 점차 벌어졌다.
단층 사이에 끼어 있던 아드리안이 아래로 추락할 뻔한 순간 세련된 건틀릿이 그의 손을 잡아 지상으로 확 끌어당겼다.
“처음 봤을 때나 지금이나 매번 만신창이네.”
“…….”
히스릴이 의식을 되찾지 못한 아드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부상이 깊어 보였다. 하기야 옛 왕이 날린 그 검기는 확실히 단순히 8위계급 초월자라고 치부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
살아 있는 게 용했다.
다수였기에 즉사를 피한 것이지 혼자였다면 진즉에 죽었을 것이다.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히스릴? 왜 네가 여기에 있지?”
반토레온이 바위에 몸을 기댄 채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그리고 번개로 복부에 난 자상을 지져 출혈을 막았다.
“늙은이가 잘도 살아남았네. 몸통이 아예 날아간 줄 알았는데.”
“크흐흣, 두 치만 더 들어갔어도 반으로 갈라졌을 걸세. 그래서 용건이 무엇인가? 보아하니 옛 왕을 도울 생각은 아닌 듯한데. 음?”
반토레온이 미간을 좁혔다.
“그 무구는…….”
“새로 장만했어. 할 일이 생겼거든.”
히스릴이 예쁜 송곳니를 드러내고는 아드리안을 똑바로 바라봤다.
“언제까지 잘래?”
아드리안의 허리를 거침없이 끌어안으며 입술을 포갰다. 성녀와 옛 왕이 전투를 벌이고 있는 풍경을 배경으로 삼으며.
“헉.”
반토레온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기행에 말문이 막혀 입만 뻥긋거렸다.
아드리안이 곧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상황을 파악했다.
“익……!!!!!!!!!!!!”
“구해 줬더니 왜 이렇게 발버둥을 쳐? 저항할 힘도 없으면서.”
히스릴은 무력으로 압박해 몇 번이고 그의 입술을 탐했다. 아드리안은 정신이 나갈 것 같았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이보다 마음에 들 수가 없었다.
진즉 깨졌어야 했으나 흘러넘치긴커녕 되레 그릇이 가늠할 수 없이 커진, 역겨워야 하는데 조금도 역겹지 않은 신기한 존재감.
처음은 호기심이었는데 시간이 지난 지금은 호기심 그 이상이었다. 사랑인지는 모르겠다. 사랑이란 걸 해 본 적이 없으니까.
다만 알아가며 붙어 있고 싶을 뿐이다.
히스릴 델 로하룬이 추구하는 이상은 가식이 없는 순수한 야생의 세계.
본성을 감추지 않고 하고 싶은 걸 하되, 그 대가는 오직 스스로 짊어지는 논리야말로 그녀가 바라는 삶의 방향이었다.
“아드리안 첸버스. 말해 봐.”
그래서 히스릴은 초대 마도왕과 개인적으로 맺은 계약을 후회하지 않는다.
“도와줄까?”
아드리안은 기혈이 뒤집힐 듯했지만 이미 자존심을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승리. 히스릴의 무력은 승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도였다.
아드리안이 내적 고통을 받으며 대답하려던 순간 히스릴이 먼저 그의 입술을 핥았다.
“큭……!!”
“도와줄게.”
대검을 빼들며 기를 발산했다.
피의 여제가 옛 왕에게 살의를 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