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0화 개편 (6)
악마는 기본적으로 정해진 천명(天命)이 없다.
이형종의 특징이 대개 그렇다.
악마는 죽지 않는 한 계속 존재하니, 루아스 교국은 이를 극도로 경계해 악마 토벌에 대한 강도를 늦추는 법이 없었다.
대륙 위 악마와 악마 숭배자는 세월을 거듭할수록 세(勢)가 약해져 멸망을 향해 나아갔다.
빛이 어둠을 물리치리라!
루아스교가 굳건한 이상 이 땅에서 악마가 발호할 일은 없으리라.
머지않은 시대에 악마라는 종은 기록으로 전해지는 전설로 치부될 터였다.
이는 과거부터 시작된 이야기의 결말…….
루아스교가 창시되기 이전에도 모든 종교가 악마를 적대했다.
악마들은 인간을 현혹하고 타락시켜 온갖 잔혹사를 써냈으니, 본질적인 위험성은 모든 산 자를 증오하는 언데드보다도 컸다.
악마는 인간의 체제 자체를 내부에서부터 붕괴시킬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옛 시대.
대륙에 악마(魔)사냥꾼이 활보했다.
도시와 마을에서 마(魔)녀사냥이 벌어졌다.
악마와 연관됐다는 증언만으로 사람을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람이 소유한 것을 빼앗을 수 있는 명분이 되었다.
───악마! 저자는 악마와 계약을 맺었다!
어느 지방 귀족이 약자들을 돌보며 상당한 민심을 얻자, 이를 질투한 변경백이 거짓된 악마의 죄를 씌워 그가 가진 걸 모조리 앗아 갔다.
귀족은 자신이 돕던 약자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악마 숭배자로서 살해당했다.
일가가 몰살당하는 와중에 간신히 살아남은 귀족의 아들은 진짜로 고위 악마와 계약을 맺고는 복수심으로 변경을 역병으로 쓸어버렸다.
───악마! 저년은 악마와 동침했소! 내가 봤소!
시골의 금슬 좋은 미남미녀 부부는 못생긴 촌장의 아들에게 고발당해 가정이 파탄났다.
끌려간 아내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문을 받은 뒤 꼬챙이에 꽂혀 불탔고, 뱃속의 아이는 돼지의 먹이가 되었으며, 남편은 마녀와 한패라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성기와 양 손목이 잘린 채 장대에 매달렸다.
남편은 죽기 직전 피의 악마와 계약을 맺고 촌장의 아들을 포함한 마을 전체와 함께 폭사했다.
───악마는 전부 불태워라!
오늘날 현대에선 루아스교가 공식적으로 연좌제를 허용치 않고, 또 검증법이 고도로 발달돼 무차별적인 마녀사냥은 사장됐지만…….
멀거나, 혹은 가까운 과거에서는 자세한 죄목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권력자에게 악마 지목은 마치 신의 계시처럼 무적의 수단이었으니까.
그리고, 억울하게 누명 쓴 이들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악마의 힘을 빌려 복수하면 종교들은 과정을 왜곡하고 결과를 부풀려, 악마족을 더욱더 경멸하고 혐오할 수 있는 세계를 조성했다.
───속삭임의 악마와 계약해 영지민들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귀족가를 심판하고, 그중 죄 없는 귀족의 어린 아들은 풀어 줬으나, 결국 아들마저 다른 악마에 영혼을 바쳐 변방의 역귀가 되었다.
───몽마와 간통하고 소악마를 잉태한 부인을 벌하자, 진즉 음욕에 잠식당한 남편은 악마와 계약해 마을을 몰살했다.
죄악과 고발, 그리고 신벌의 시간.
도시에서, 마을에서, 바깥에서 목매달린 시체가 흔히 보였다. 화형당한 인간의 비명 소리가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인간을 현혹하는 악마들을 죽이고 있지만, 사회는 아이러니하게도 어느 때보다 음습하고 더러운 욕망과 타락이 들끓고 있었다.
그렇게 벌레를 잡으려고 집을 불태우기라도 하듯이 무고한 인간들의 시체 속에서 발견된 악마들은 줄줄이 처단되었다.
대륙은 지옥이 되었다.
지옥이 된 대륙을 대악마들이 지켜보았다.
누가 원흉인가.
군단의 대악마는 운명의 지배자들만이 아니라 그에 이용당하는 무지한 군중까지도 전부 쳐죽여야 한다며 격렬히 분노했고.
기생의 대악마는 불쾌함에 촉수를 꿈틀거리면서도 그 지배 방식을 눈여겨보았으며.
어둠의 대악마는 증오를 품에 안은 채 어떻게 하면 악마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궁리했다.
그러나 이미 운명전에서 패배해 숨죽이며 연명하고 있을 뿐인 그들은 악마들이 무참하게 참살당하는 것을 감히 막을 수 없었다.
이윽고 마녀사냥이 잦아들었을 때도 악마는 잡혀 죽었고.
지금으로부터 6~7세기 전 군단의 대악마가 더 이상 인내하지 못하고 전쟁을 벌였다가 몰락하며 잔당들이 대거 사망했다.
그렇게 오랜 학살과 핍박에 악마족도 세대 교체가 이루어졌다.
이제 운명전의 풍경을 기억하는 악마는 거의 남지 않았다. 현존하는 모든 대악마의 세력을 합쳐도 열을 채우지 못할 정도로…….
그렇다.
서서히 목이 죄어 가며 죽는 것이다.
그러니 무력하게 당하기 전에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에 군단의 대악마는 휘하의 전군을 모조리 끌고 세상에 들이받았고, 기생의 대악마는 대륙에서 떠나지 않은 채 모종의 암계를 꾸몄다.
반면에 어둠의 대악마는 군단의 대악마의 죽음을 본 뒤에 도주했다. 피난처를 만들어 생존을 도모했다. 비겁자라고 해도 좋았다.
언젠가는 구세주가 올 테니까.
어둠의 대악마는 심연 속에서 기도하며 언제나처럼 계속 기다렸다…….
…….
…….
…….
…….
…….
…….
…….
…….
…….
…….
…….
[베리엘, 고르고.]
등 뒤에 세 쌍의 날개가 달린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여성형 악마와, 전신에서 음울한 오라를 내뿜고 있는 거구의 악마가 몸을 떨었다.
[때가 되었다.]
* * *
빛이 들지 않는 암흑.
첫 번째 세계(대륙)와 다른 3차원에 있는 대악마의 피난처───리버레아스.
이곳은 어둠의 대악마가 자신의 한쪽 손을 절단해 창조한 세계이며, 그를 따르는 악마들이 평화롭게 쉴 수 있는 안식처…….
대악마의 손바닥 위에 건설된 도시에서 악마들은 사회를 이루었고, 피난자들의 공동체는 수백 년 동안 유지되며 역사를 쌓았다.
하지만, 어둠의 대악마가 존재해 온 시간에 비해선 찰나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리버레아스의 악마는 그저 안락한 어둠에 안겨 있는 아이와 다름없었다.
운명전을 겪어 보지 못한 세대.
그들은 근원적인 감정과 리버레아스에 공통적으로 퍼진 과거의 지식만으로 어둠의 대악마의 고통을 일부 이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빛?]
[회색. 빛. 회색.]
[뭐지? 뭐지? 뭐지? 뭐지? 뭐지? 뭐지?]
언제나처럼 일상을 구가하고 있던 악마들은 도심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존재감을 느끼고 홀린 듯이 빠르게 몰려들었다.
리버레아스에서 홀연히 빛나는 은은한 광채.
본래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던 파르니움은 어느새 베르덴 바로 뒤에서 걷고 있었다. 침묵의 사막에서 탄생한 그림자 악마는 그 옆에 있었다.
사방에 울려 퍼지는 그들의 나직한 발소리.
무수한 악마가 달빛을 좇는 나방처럼 조심스럽게 베르덴을 응시하며 따라붙었다.
케이먼은 곁에서 함께 걸으면서도 동공이 흔들릴 정도로 크게 동요했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리버레아스에 여러 번 방문했지만 악마들이 이렇게 집결한 것은 처음 보았다. 더군다나 그들 모두가 단 한 명을 주시하고 있다니.
파르니움의 언급으로, 베르덴이 악마들에게 아주 중요한 인물임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그의 예상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숨죽이며 행렬에 끼어드는 악마들.
충성의 태도를 보인 파르니움.
‘숫제 자신들의 지배자를 대하는 태도가 아닌가.’
대체 마경에 다녀온 사이 베르덴에게 무슨 변화가 있었던 걸까. 단순히 그 암월 다히트와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경지가 높아진 것 외에도 다른 뭔가가 또 있을 것이다.
‘좀 더, 좀 더 근본적인…….’
케이먼은 아까부터 마음이 술렁이는 듯했다.
왜 그런지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이 행로의 끝에서 조금이나마 내막을 알게 되리라.
쿠구구구구구구───!
리버레아스 중심에 자리한 어둠의 대악마의 신전이 개방되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안개 같은 어둠이 소리 없이 쏟아져 나왔다.
케이먼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설마.”
[오, 가장 깊은 어둠이시여…….]
다른 악마들도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대악마께서는 오직 최측근들을 통해서만 뜻을 전할 뿐, 신전 바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무려 180년 전이 마지막이었으므로.
신전으로 입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에 붉은 로브를 두른 얼굴 없는 악마들이 좌우로 도열했다.
[거짓된 죄악의 사생아여.]
[요람을 증오하는 부산물이여.]
[고독을 알기에 자애로운 심연이여.]
대악마의 본신은 ‘당신’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봉인되어 있다.
모든 대악마가 그러했다.
대륙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는 발각당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어둠의 대악마는 리버레아스에서도 봉인을 유지해왔다.
복잡한 이유는 아니었다.
리버레아스 방문이 허락된 몇 안 되는, 케이먼 같은 외부의 계약자들은 그의 존재감에 무력하게 압도당할 터였으니까.
대악마의 봉인을 해제하는 방법은 하나였다.
대악마의 영역에서, 각기 다른 이름으로 대악마를 네 번 호명하는 것.
[종야(終夜)의 거악을 배알하나이다.]
일순간 침묵이 감도는 듯하다가 리버레아스 전역에 이상 기류가 발생했다.
널리 확산한 무형의 힘이 위로 솟구치더니 다시금 중심으로 집결해, 그 아래에 있는 모든 존재와 사물을 강하게 짓눌렀다.
쿵!
도시가 격동했다.
파르니움을 제외한 악마들이 무릎 꿇었다.
케이먼 역시 자유를 박탈당했다.
“……?!”
불가해한 존재감이 굴복을 강요했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악마의 계약자는 결코 이 지배력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루아스교가 그렇게나 경계하던……3대 대악마.’
이자벨라는 잠깐 주춤한 게 전부였다. [아인베르]의 소매를 잡았다. 악마와 계약하지 않았고, 또 베르덴의 보호를 받아 영향을 덜 받은 것이었다.
알파와 베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녹시아스에게서 비롯된 위압감은 체감하고 있었다. 이자벨라는 적룡 사르칸드라를 눈앞에 두었을 때의 공포를 떠올렸다.
오직 베르덴만이 미동도 없이 신전 내부에 자리한 어둠을 마주하면서, 경험에 비추어 녹시아스가 가진 힘을 가늠해 보았다.
‘과연 의도하지 않았어도 ‘당신’의 운명에서 탄생한 존재인가.’
운명의 사도에 필적하는 격.
지금의 에온에서는 베르덴을 제외하고선 대적할 수 없다. 이유를 듣지 않고, 존재감만으로도 어떻게 그 긴 시간 동안 ‘당신’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납득이 갈 것 같았다.
신전에서 새로운 기척이 느껴졌다.
또각, 또각, 또각.
세 쌍의 날개를 가진 역안의 여성형 악마가 밖으로 나와 좌측에 섰다.
쿵, 쿵, 쿵.
알파와 베타마저도 우울하다고 느낄 정도의 기운을 뿜어대는 거구의 악마가 일그러진 모습을 드러내고는 우측에 자리했다.
정적과 침묵이 이어졌다.
도저히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이를 바라보는 상위의 악마들도 극도의 두려움에 떨었다.
그때 베르덴이 말했다.
“나를 시험하라.”
[세 번의 질문, 세 번의 답.]
신전에서 들려온 대악마의 음성이 모두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내면이 울렸다. 마치 영혼에 직접적으로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당신은 우리를 혐오하지 않는가.]
“내게는 다름이 없다.”
첫 번째 질문과 첫 번째 답.
[……우리는 죄인인가.]
“운명은 없다.”
두 번째 질문과 두 번째 답.
[…………당신은 누구인가.]
“너의 기다림이다.”
세 번째 질문과 세 번째 답.
베르덴과 대악마와 나눈 대화는 하나같이 간단한 문답이었다. 아이가 어른에게 질문한 듯했다. 또다시 리버레아스가 적막에 잠기더니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대악마가 물었다.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약속하지 않는 네 번째 질문이었다.
그의 언변에는 어느샌가 존칭이 배어 있었다.
“지난번에 네가 그랬었지.”
───[놈에 대해 알아내고, 저주를 해주할 방법을 찾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얼마나 시간이 소모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가 되면 저희가 먼저 당신을 찾아가겠습니다. 부디 기다려 주시길.]
녹시아스는 고위 악마인 게르아스를 통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대체 ‘그때’란 언제인가.
베르덴은 그저 녹시아스가 준비되길 기다렸지만 진의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란 녹시아스가 아니라 베르덴이 정하는 것이었다.
베르덴이 리버레아스와 녹시아스 세력을 필요로 하는 그 순간을.
“내가 너희를 구원하겠다.”
지금이야말로 ‘그때’였다.
|녹시아스|
신언(神言).
베르덴의 벽안이 회안으로 물들었다. 마안이 있는 오른쪽 눈동자에서 잿빛의 눈물이 흘렀다. 악마들이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었다.
절대자에 가까운 신격이 대악마의 존재감을 완전히 벗겨냈다.
최상위 악마들을 포함한 모든 악마가 무릎을 아예 접고 고개를 조아렸다.
본능이었다.
케이먼도 저항할 여지조차 없이 진심으로 굴종하고 말았다. 육신만이 아니라 영혼까지도 사실상 사로잡힌 상태였다.
이자벨라와 알파, 그리고 베타는 베르덴의 경지에 대해 알고 있긴 했지만, 베르덴의 진정한 신위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게 오라|
바닥에 내리깔린 어둠이 한데 모여 형체를 갖추자 소년이 현현했다.
깊고 방대한 그림자를 등 뒤에 드리운 채로 그가 무릎을 꿇으며, 베르덴이 내민 손을 하나 남은 손으로 천천히 붙잡았다.
[부디 거두어 주소서.]
어둠의 대악마 – 녹시아스.
공허의 군단장 – 파르니움.
타락의 군단장 – 베리엘.
절망의 군단장 – 고르고.
운명전에서 살아남은 악마의 지배자들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의 신이시여.]
기다림은 끝났다.
* * *
세계의 틈새───악마의 땅.
폐쇄된 사문에 갇히고 무저갱으로 추락한 유리온 일행은 뜻하지 않게 악마들과 조우했으며, 또 뜻하지 않게 환대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 또 전혀, 전혀 뜻하지 않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니…… 그러니까, 뭐야.”
유리온이 머릿속으로 의문을 굴리다가 억지로 말을 이었다.
“베르덴이 신이라고? 신이시여 할 때 그 신?”
그가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심지어 악마의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