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7화 세계 회의: 베르덴 (3)
침묵의 사막 한가운데 피어난 대자연은 순환하며 그 영역을 조금씩 넓힌다.
생명의 거목이 보살피는 새로운 투하르의 수도 누하라는, 사막 역사상 유례없는 번영기의 도입부를 경험하고 있었다.
최근까지 치열한 교전을 벌였던 투하르 신조와 배교자의 케케묵은 감정이 해소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그럼에도 하루하루 부대끼며 살아갔다.
메마른 태양이 저무니 그들의 신앙심도 반항심도 힘을 잃었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새로운 신앙심으로 채워졌다.
“주변에 사람 많으니까 조심히 옮겨!”
“길을 터라!”
타딤과 자르미나가 목청을 높이며 마차 행렬을 이끌었다. 각각 골렘 의수를 착용한 모습이 투하르 시민들의 눈엔 신비로워 보였다.
해방 노예들의 리더인 타르비는 솔선수범해서 공사를 진행했다.
순수하게 <지형 조작>으로 구현된 누하라의 사회 기반 시설 건축이 한창이다. 참고로 설계도는 대륙의 것을 모방했다.
고립된 사막과 황금 마법 시대를 맞이한 대륙의 기술력은 비교가 안 되었다.
배교자를 통솔했던 파잔과 오라핫, 전직 투하르 신조 서열 2위였던 아침의 볕, 라스탄 바르슬란을 비롯한 여러 일족의 어르신들이 한데 모여 회의를 이어 갔다.
에온에서 파견된 마법사들은 그들의 전반적인 도시 운영을 지원 및 감독했다.
“평화롭구나.”
[평화.]
생명의 거목이 그에 공감하듯 느릿하게 가지들을 움직였다. 푸른 나뭇잎들과 새하얀 꽃잎들이 바람에 흩날렸다.
베르덴과 이자벨라 덕분에 미궁의 관리자실을 벗어날 수 있게 된 관리자는 거목에 기대어 앉은 채 오늘도 자유를 만끽했다.
이후 관리자의 조치로 미궁 바깥으로 나올 수 있게 된 오메가가 그의 곁을 지켰다.
“베르덴이 없는 투하르의 수문장을 자처하기는 했지만, 딱히 도시가 위협받을 일이 없으니 영 마음이 편치 않구나.”
스르르르르륵.
누하라 바깥에서 커다란 뱀이 모래찜질하며 이곳저곳을 기어다녔다. 그 옆에는 거대한 바위산이 굳건하게 자리했다.
이전에 제압당한 사막의 고대 재해, 그늘의 눈과 아르탄이었다.
아득히 먼 과거 신적 존재의 부산물에서 태어난 두 괴물은 관리자에 지배력 아래에서 애완동물처럼 통제되고 있었다.
사실상 침묵의 사막에서 누하라를 습격할 만한 적수는 없었다.
[관리자. 노력. 휴식. 권고.]
오메가는 관리자가 오랫동안 노력했다며 지금은 쉬어도 된다고 주장했다. 이내 녀석이 외눈을 빛내며 동그란 몸체를 돌렸다.
[미련. 영웅. 등장.]
“마법사───!”
배교자 세력의 최고 실력자였던 대사막의 영웅, 아탈란이 완전 무장을 갖춘 채 언덕을 올랐다.
사막의 신이 몰락하는 날, 투하르 신조 서열 3위, 검은뱀과의 사투에서 입었던 부상은 포션으로 회복한 지 오래였다.
쿵.
아탈란이 창끝으로 강하게 땅을 짚었다.
“이번에는 저번처럼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는 않을 거요. 장담하지.”
“그런가.”
둘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투하르 신조와의 전쟁이 끝나고 아탈란은 한동안 누하라 주변을 겉돌았다.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임을 깨닫자 그냥 모든 게 싫증이 났다. 가식적인 영웅적 태도도 이참에 집어치웠다.
그러던 도중 관리자와 조우했고…… 어쩌다 보니 가벼운 대련이 성사되었다. 물론 압도적이란 말로도 부족한 참패로 끝났지만.
이후로 아탈란은 심심할 때면 관리자에게 도전을 해 댔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벽을 들이받으니, 머리가 조금씩 맑아지는 기분이었기에.
“기대하지.”
“이야아아아아아아아아!”
관리자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도발하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동시에 아탈란이 힘껏 지면을 박차며 창을 내질렀다.
뻐억───!
그대로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진 아탈란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마법을 일절 사용하지 않아도 당연한 결과였다.
관리자는 베르덴에게 <아케인>과 무기술 기반을 가르친 스승이었으니까.
“혈기라.”
관리자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체내의 마력을 관조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오메가에게 말했다.
“그래…… 난생처음으로 혈기에 젖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설명.]
“기왕 분신의 한계를 벗어났으니, 그 영역을 조금 더 확장해 보는 건 어떨까 싶다. 내가 진정 ‘성장’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성공만 한다면 베르덴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겠지.”
관리자는 일개 분신이었기에 지금껏 단련이란 걸 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방법만 본체의 기억을 통해서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과연 마법적 경지를 높일 수 있을까.
관리자에게도 그건 미지의 영역이기에 도전하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뭐, 일단 제대로 해 보고 안 되면 그만이었다.
관리자는 시선을 옮겨, 누하라의 중심에 세워진 최초의 마탑을 바라보았다. 다른 곳에 있었던 그것을 그가 직접 옮겨 놓은 것이다.
“지금쯤이면 세계 회의가 한창이겠군.”
[걱정?]
“그럴 리가.”
관리자는 뒷짐을 졌다.
“오히려 걱정해야 할 건, 베르덴의 뜻에 휘둘릴 자들이겠지.”
마도조차 개척하지 않은 채로 자신에게 도전했던 미숙한 마법사는 더 이상 없다.
사막의 신을 처단하고, 키론다르로부터 권위를 찬탈하듯 계승받은 지배자───베르덴은 사막의 정복자이며, 최초의 마탑의 주인이다.
* * *
최초의 마탑은 현대 위계 마법 체계를 처음으로 구축한 하나의 기점이자, 모든 마탑의 원조가 되는 기원이다.
그리고 별다른 기록조차 없이 실종된 마법계의 전설이기도 했다.
현 마법계가 보유한 최초의 마탑에 대한 지식은 고작 그것뿐이다. 무려 천 년하고도 수백 년이라는 간극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종족 전쟁, 초대 마도왕, 1차 성전, 초월자 전쟁 등 이렇게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보다 훨씬 더 이전의 시대였으니까.
최초의 마탑의 마지막 행적은 여전히 밝혀진 바 없다. 앞으로도 그렇겠지. 고대 위계 마법사들은 결국 이야기로만 남을 것이다.
그러니까 최초의 마탑주라는 호칭을 들었을 때의 심정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믿을 수 없다.
“거짓말…….”
“사,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최초의 마탑주라니. 신성께서 초월자라고 하셔도 그 연배가 전혀 맞지 않는데, 어찌.”
디아문 마탑의 반타룬 타레시온이 목소리를 떨며 조심스럽게 말을 얹었다. 마울러의 휘하에 있으니 뭐라도 하려던 것이었다.
솔직히 너무나 터무니없는 정보를 듣고 정신이 반쯤 나간 것이기도 했다.
아드리안이 혀를 찼다.
“당연히 승계지. 주군께서 나이가 그리도 많아 보이나? 주군께 토를 달 거면 생각하는 시늉이라도 하고 지껄여라.”
“……!”
상식적이고 당연한 지적을 들은 반타룬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 차분하지 못한 태도는 세계의 눈과 귀에 고스란히 담겼다.
섭리자의 답변과 베르덴의 대답에 세계 회의장이 한없이 고요해졌다. 다만 이전의 정적과는 종류가 달랐다.
베르덴과 최초의 마탑의 연관성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제외하고, 이그나시아를 포함한 초월자들도 크게 충격을 받은 듯 말문이 막혔다.
최초의 마탑이라는 건 마경에 대악마가 있다는 거나 초월적 존재를 다섯이나 죽인 것보다 중대한 사안이었다.
마법사들에게는 그러했다.
위계 마법의 시초니까.
역사는 거의 훼손되었을지언정 최초의 마탑의 영향력은 강하게 남아 있다.
“아, 설마. 골렘 기술이……!”
“최초의 마탑이라면 에온의 알 수 없는 마법적 기술이 이해가 가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최초의 마탑주라니? 말이 안 되는데.”
마탑주들이 매우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머리만 굴리며 중얼거렸다.
소사이어티를 향한 격노는 최초의 마탑에 뒤덮여 멀리 쓸려 나갔다.
그때, 젠티르 마탑주가 매섭게 눈을 뜨며 목에 힘을 줬다.
“믿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레프라기움 마탑주의 증언이라고 해도……! 신성, 당신이 최초의 마탑주인 건 허무맹랑해요. 적어도 승계 과정은, 아니 확실한 물증이 없으면──”
“진실의 서약은 어떻습니까? 물론 서약자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말이지요.”
아티슨 마탑주, 펠디안느의 묘안에 그녀가 눈을 빛냈다. 그렇다. 서약자의 권능을 빌린다면 진실과 거짓을 판별할 수 있으리라.
이에 서약자는 그 정도 힘은 빌려줄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덴이 뒷짐을 졌다.
“진실의 서약? 그래, 필요하다면 다시 한번 더 서약할 수 있다.”
“그럼…….”
“그런데 설마 가벼운 마음으로 진실을 요구하는 건 아닐 테지.”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게서 진실을 청하고 싶다면, 그 이상의 대가를 치르겠다는 각오를 보여라, 시그릴 라비니아.”
초월자에게 대놓고 불신감을 드러내며 진실을 강요하는 것은, 목숨을 아깝게 여기지 않는 자만 저지를 법한 일이었다.
베르덴은 <겁화>의 봉인을 푼 상태라서 존재감이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다른 초월자들이 그 힘을 어느 정도 상쇄하고 있었지만 베르덴과 얼굴을 맞댄 하원의 참석자들은 일정 부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냉수를 뒤집어 쓴 듯 정신을 차린 젠티르 마탑주는 긴장한 기색을 내비치고는, 진실의 서약을 언급한 펠디안느에게 시선을 던졌다.
펠디안느가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베르덴 님을 믿습니다만?”
“이……!”
젠티르 마탑주가 입술을 짓씹었다.
다른 참석자들을 둘러봤다.
모두가 그녀를 지켜봤다. 직전까지 소사이어티 운운하며 언성을 높였던 마탑주들도 모른 척 한 발짝 물러나 있었다.
‘이, 이런 식으로 내게 책임을 떠넘겨?!’
두근, 두근, 두근.
젠티르 마탑주는 망망대해에 홀로 서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분명 소사이어티가 문제였는데 어느샌가 초점이 최초의 마탑에 맞춰졌다. 뭐지? 알 수 없는 급류에 휩쓸린 것 같다.
당장 최초의 마탑이 중요한 걸까, 소사이어티가 중요한 걸까. 아니, 잠깐만. 결과적으로 둘 다 비슷한 맥락인가?
머리가 어지럽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젠티르 마탑주라는 체면이 거부했다.
조금 전까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으면서 지레 겁을 먹고 물러나면 마탑의 주인으로서 세계적인 망신이었다.
압도적인 초월자를 상대로 마땅한 기개를 보여야 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궁금증을 하나도 해소할 수 없다.
꼴깍.
젠티르 마탑주가 침을 삼키고는 자기가 마탑들의 대표라는 양 입술을 떼었다.
“신성을 상대로 진실을 억지로 들추는 방식은 합당하지 않을 것 같군요. 그러니 그 대신 물증을 보여 주십시오.”
“대가를 치르겠다면 보여 주지.”
“……약속하죠.”
젠티르 마탑주는 제 살을 깎아 가면서까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녀의 거래는 세계가 기억할 것이었다.
화악.
베르덴이 보란 듯이 손을 들고는 [레인디아]를 기동했다. 아공간에서 소환된 하나의 ‘포션’이 수많은 눈동자에 반사됐다.
젠티르 마탑주가 묻는다.
“그게, 무엇이죠?”
“모든 상처와 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마법계의 전설.”
베르덴이 흔들림 없이 말했다.
“엘릭서(Elixir)다.”
제라클 황제를 호위하고 있는 레그리트가 투구 안쪽에서 입꼬리를 슬며시 끌어 올렸다.
‘이미 당초의 문제는 완전히 묻혔군.’
세계 회의의 관심사가 온전히 베르덴의 것이 되었다. 본능을 따라 피부가 달아올랐다. 아직 용인이 된 여파를 극복하는 건 요원했다.
* * *
실리스, 로벨린, 칼리아 등은 사전에 들은 적 없는 정보를 접하고 얼어붙었다. 그들 옆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쿠당탕.
마법 협회장이 몸에 힘을 주는 순간 팔꿈치가 미끄러져 자세가 흐트러졌다. 코가 하원 테이블이 닿았지만 부끄러움은 없었다.
“에, 엘릭, 엘릭, 서?!”
특수 가공된 유리 너머에서 옅은 붉은빛 액체가 넘실거렸다. 저 말이 맞다면, 연금술 학계가 추구하는 궁극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호오, 어마어마한 생명력이 응축되어 있군.”
수왕이 진심으르 흥미롭다는 듯 엘릭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과연 마법적인 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루아스교의 신인들도 눈을 크게 떴다. 마법계 초월자들은 특히 더 그러했다.
젠티르 마탑주가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흔들며 뒤늦게 말을 이었다.
“에, 엘릭서라뇨. 그게 실존할 리가, 아니, 진품이란 증거를…….”
“원한다면 레논 버나드를 호출해라. 세계적인 감정사라면 못 알아보진 않을 테니까. 아니면, 믿을 만한 사람한테 검증을 맡기거나.”
베르덴이 <염동력>으로 엘릭서가 담긴 용기를 상원에 보냈다.
“확인을 부탁하지, 인드렌.”
“……나에게 말인가?”
“현 아티슨 마탑의 번외 장로이자, 선대 아티슨 마탑주라면 레논 버나드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못 하진 않을 테니까. 안 그런가?”
인드렌은 성향이 전혀 맞지 않는 사람에게 인정받자 기분이 묘해졌다.
“크흠, 뭐.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내가 한번 살펴보겠네.”
베르덴에게서 조심스럽게 엘릭서를 받아 천천히 마개를 열었다. 생전 느껴 본 적 없는 향기가 후각을 자극했다.
동시에 초월자로서의 고유한 통찰력이 마법적인 요소를 관찰했다.
헉!
인드렌이 즉시 마개를 닫았다. 그것도 모자라 일시적인 봉인까지 더했다.
촉각이 곤두섰다.
어울리지 않게 식은땀까지 날 것 같았다. 만에 하나라도 용기가 깨지면 마법계 역사에 길이 남을 대참사였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진품이구나.”
“내가 최초의 마탑을 승계받으면서 얻은 보물 중 하나다.”
관제하는 인드렌이 증언한 이상 엘릭서의 실체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최초의 마탑에 이어서 엘릭서 공개…… 그리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보물들. 마법계의 전설이 세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터벅, 터벅.
인드렌이 직접 내려와서 베르덴에게 엘릭서를 돌려주었다. 그러고는 상원 쪽을 슬쩍 바라보며, 개인적인 질문을 던졌다.
“레프라기움 마탑주, 그러니까 데우스 위덴과는 무슨 관계인가?”
“최초의 마탑의 관계자라는 것만 말해 두지.”
베르덴의 대답은 진실되었다. 실제로 한 치의 거짓도 없었기에 그러했다. 이제는 아무도 그를 의심할 수가 없었다.
‘허 참. 도저히 정신을 못 차리겠구나.’
할 말이 없는 인드렌은 그저 헛웃음을 지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엘릭서는 다시 [레인디아]의 아공간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베르덴이 말했다.
“이 정도면 입증이 되었나, 시그릴.”
입증이 되었다고 수긍하면 젠티르 마탑주의 패배고, 입증이 되지 않았다고 거부하면 인드렌까지 불신하게 된다.
막다른 길이다.
“증명의 대가로 젠티르 마탑으로부터 무엇을 받을지는, 나중에 따로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지.”
“아…….”
털썩.
젠티르 마탑주가 비틀거리다가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 허탈한 모습을 본 화산섬의 마탑주가 내심 깊이 안도했다.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군.’
따악───!
베르덴이 손가락을 튕겨 어수선한 분위기를 곧장 환기했다.
“다시 말하지만 ‘내’ 소사이어티는 최초의 마탑의 이념을 추구한다. 그리고 나는 2대 최초의 마탑주지. 현 마법계가 소사이어티의 행동을 반마탑 행위라고 여긴 건 오해에 가깝다. 그건 오히려 뿌리를 잊어버린 마탑들의 정상화였지. 대부분의 마탑주는 그간 마탑이 이타심을 잊고 이기심을 따랐다는 것에 반박하지 못할 거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 더 정정하자면, 내겐 마탑 체제를 붕괴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
“물론 변화는 있겠지만 결과는 너희가 걱정하는 것과는 크게 다를 거다. 그 변화를 굳이 말하자면 ‘개편’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겠지. 마탑은 계속해서 존재할 테니까.”
베르덴이 하원과 상원의 마탑주들과 차례대로 시선을 교환했다.
“잊지 마라. 나 또한 마탑주다.”
“…….”
“소사이어티에 대해 질문할 게 남은 마탑주는 거수하도록.”
당연하다는 듯이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다.
묘한 울림이 내면을 파고들었다.
마탑주들의 적의는 사라졌다. 오히려 강력한 편이 생긴 것 같은 느낌에 그들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본래 내부자였던 메드란트와 로벨린조차 베르덴의 언변에 완벽하게 감화되었다.
“아무도 없나? 그럼 소사이어티와 오스테아 마탑 문제는 전부 해결된 거라고 믿겠다.”
베르덴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다 짖었나? 가레스.”
“…….”
마울러가 팔짱을 낀 채 표정으로 복잡한 감정을 드러냈다. 최초의 마탑주라니? 그건 분명 ‘사전에 받은 정보’에 없는 내용이었는데.
마울러가 입을 열었다.
“베르덴, 넌 대체 뭐 하는 놈이냐.”
“그걸 묻는 건 아직 너에게 이르다.”
“……미친 건 확실하군.”
“여기 그런 초월자가 한둘인가.”
“새끼.”
역정을 낼 줄 알았던 마울러의 투기가 오히려 줄어들었다. 더 이상 파고들 틈을 찾지 못한 것이라고 해석해도 좋으리라.
그렇게 작은 승리를 거머쥔 베르덴이 천천히 반 바퀴 돌았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서 밝힐 게 더 없는 건 아니지.”
제라클 황제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무슨 의미인가?”
“선대로부터 최초의 마탑을 계승받으면서 얻은 정보가 있다. 세계 회의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중대한.”
“선대라면, 최초의 마탑을 세운 인물로부터?”
최초의 마탑의 최초의 마탑주를 언급하자 세계가 크게 격동했다.
이그나시아가 들고 일어섰다.
“그게 뭔데?!”
“그건…….”
베르덴이 <전이>를 시전해 제자리에 앉았다.
“일단 투표부터 하고 결정하도록 하지. 섭리자, 내 발언은 끝났다.”
“어?”
다시 말하자면 그 말은, 마치 투표 결과가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으면 입을 닫아 버리겠다는 협박처럼 들렸다.
마스터가 눈을 깜빡거렸다.
“저래도 되는 겁니까?”
“……일단 직접적인 투표 조장은 없었다. 선택은 오롯이 본인의 책임이다.”
섭리자는 잠시 침묵했다가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지금부터 세계 회의의 두 번째 대의제 표결을 시작하겠다. 주인 없는 땅에 대한 에온의 권역 정당성을 인정하고, 주인 없는 땅에 관한 대의제 폐지에 동의한다면 찬성 의사를, 그렇지 않다면 반대 의사를 표하라.”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것인지 순식간에 각자의 입장이 드러났다. 마울러의 눈치를 살피던 몇몇 이들도 이내 움직였다.
섭리자가 공식적으로 결과를 전달했다.
“찬성 49표, 반대 0표. 만장일치로, 주인 없는 땅이 에온의 권역이 되었음을 선포한다.”
세계가 베르덴의 손을 들어 주었고.
아직도 베르덴의 차례였다.